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겨울, 감사의 차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겨울은 성큼 다가온다. 아직도 가을인 듯한 어느 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놀라 두꺼운 옷을 꺼내 입게 된다. 만물은 휴면의 시기로 들어가고 쓸쓸해진 가로수 한끝에서 봄을 기다리기엔 너무나 멀어 보인다.
물장사가 귓속으로 들어와 내 눈을 열었다
보아라!
까치가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울음을 운다
왜 이래?
서리가 덩달아 추녀 끝으로 눈물을 흘리는가
내야 반가웁기만 하다 오늘은 따스겠구나
이상화(1901~1943)님의 1926년 작품인 「겨울 마음」이다. 혹독한 추위는 미안한 듯 슬쩍 따스한 기운을 흘리기도 한다. 겨울은 꼭 춥지만은 않다.
고려의 선비들에게 차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속세의 풍진을 삭이며 자신을 연마하는 소재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걱정하는 매체로, 때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을 주는 인생의 벗으로 쓰였다.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수록된 <상당군 한수의 초청으로 함께 집정대신을 뵙고 광암사비에 대한 이야기 후 두 수를 짓다(韓上黨邀 同謁執政 言光岩碑事 因賦 二首)>에는 말없이 노쇠해지는 자신을 위로해주는 차가 그려지고 있다.
末路精神耗 말년이라 기억력도 줄어들고
中年齒髮衰 나이 먹으니 이도 머리털도 빠져버리네
趨時疑滿腹 때를 좇자니 의구심은 마음에 가득하고
變志涕交頤 뜻을 바꾸자니 눈물만 줄줄 흐르네
楊柳纔藏寺 버들은 자라 절집을 숨길만 하고
莓苔欲澁碑 이끼는 비석을 가득 덮었구나
六年眞石火 육 년이 참으로 전광석화 같은데
國務政如絲 나랏일은 어지럽게 얽히기만 하누나
國恩閑更重 나라의 은혜로 보잘것없는 내가 중책을 맡았건만
家學病來衰 좁은 학문이나마 병든 이후로 더욱 쇠퇴해졌네
自愧文無體 문장에 격식 없음이 나 자신도 부끄러우니
人皆笑脫頤 남들은 모두 턱 빠지게 웃어대겠군
政堂工作篆 정당은 전액(篆額)을 잘 썼거니와
簽院謹書碑 첨원은 비문을 신중히 잘도 썼구먼
墨本披禪榻 붓으로 모사하여 선탑 위에 펴놓으니
茶煙繞鬢絲 찻물 끓이는 연기가 허연 귀밑털을 감도네
이색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과 함께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14세(1341)에 성균관에 합격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고, 공민왕 4년(1354) 원나라 과거에 제이갑(第二甲)으로 뽑혔다. 공민왕 10년(1360)에는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에 봉해졌다.
각 지방의 우수한 인재를 추천받아 고시(考試)를 통해 등용하는 제도인 공거(貢擧)를 여러 차례 맡으면서 당시의 명사들이 거의 그의 손에 의하여 발탁되었다. 이런 여러 사정으로 고려 말 새로이 일어난 성리학이 이색에게서 크게 확장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가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여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이해하였고 광암사비(光巖寺碑)를 세울 때에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 시의 배경이 된 광암사는 개성의 광암동에 있던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다. 공민왕 때 이 절에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는 사액(賜額)을 내렸었고, 또 공민왕이 생전에 일찍이 이 절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 미리 중국에서 구해 온 빗돌이 있었던 바, 공민왕이 승하하자 이 절에 장사를 지내고, 우왕(禑王) 3년(1377)에 마침내 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색이 짓고 한수(韓修)가 쓴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어 고려말의 조각기술을 엿볼 수 있다.
한수(韓脩)는 고려후기 밀직제학, 동지밀직, 판후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우왕 때에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생각해 보면 지난 육 년이 참으로 전광석화 같다. 덧없이 버들은 어느새 자라서 절집을 가리고 이끼는 빗돌 가득 덮였다. 공민왕은 현릉(玄陵)의 주인이 되고 자신은 건망증이 오고 치아와 머리도 빠져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길다면 긴 세월에 정작 더 좋아져야 할 국사(國事)는 실타래처럼 얽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나라가 바뀌어도 같은 백성과 관리이건만 때를 좇자니 의구심은 가득하고 뜻을 바꾸자니 눈물이 절로 줄줄 흐르니 뭇 백성들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정당은 전액을 잘 썼고 첨원의 비문도 가히 명필이나 내 문장만은 몸 따라 쇠해져 격식이 없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것은 전액(篆額)은 당시 정당문학(政堂文學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종이품 벼슬)으로 있던 권중화(權仲和)가 썼고, 비문은 당시 첨서원사(簽書院事 고려시대 중추원의 정삼품 벼슬)였던, 이색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던 한수(韓脩)가 썼으므로 한 말이다.
한수가 쓴 비문을 모사하여 참선 의자인 선탑(禪榻)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노라니 감회가 새롭다. 국가의 은혜를 입어 바른 정치로 백성을 살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국가는 기울고 나이도 많아져 쇠약해지니 모든 일이 활기가 없다. 당당해야 나랏일도 바로잡고 백성들을 돌볼 수 있으련만. 나라를 다스림에 가장 먼저인 것이 백성의 안위이건만 정치적 상황은 뒤엉켜 풀리지 않는다.
찻물을 끓여야 차를 마시듯 순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차 한 잔에 담아본다. 그 추운 겨울에도 어느 날은 따사로운 날이 있건만…. 차향이 은근히 밀려온다. 고요하고 편안한 일상을 준다. 그 일상에 감사하며 차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