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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코프는 디드로, 루소, 볼테르, 빅토르 위고, 벤자민 프랭클린 등 유명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도 자리 잡았다. (사진제공 : 이원식님(oncomed) 블로그) |
이탈리아의 커피하우스에서 일하던 프란치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라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개명해 프로코프란 이름으로 카페를 차렸다. 카페 프로코프는 거울, 촛대, 대리석 등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졌으며, 이후 생겨난 카페들도 이 분위기를 본따 카페를 열곤 했다.
커피가 유행하기 전의 프랑스는 와인의 나라로 일컬어질 만큼 와인문화가 활성화돼 있었는데 술 문화에서 대안을 찾던 엘리트들에게 카페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또 프로코프는 디드로, 루소, 볼테르, 빅토르 위고, 벤자민 프랭클린 등 유명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볼테르는 '커피가 독약이라면, 그것은 천천히 퍼지는 독약이다'라고 할 만큼 굉장한 커피애호가였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의 카페 플로리안과 마찬가지로 프로코프도 정치적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훗날 프로코프와 주변 카페들은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됐다. 프랑스의 지성인들은 학문과 정치를 논하기 위해 카페를 찾았고, 카페 주인들은 손님들과 소통하기 위해 금서와 희귀본을 읽고 토론할 정도로 교양을 쌓았다. 또 가난하고 재능있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카페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프랑스 문화유산이 축적되기까지 초기 카페 주인들의 공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낙타배설물로 버려질 뻔한 원두 500자루
전쟁은 비극이지만, 때때로 후세에 남길 선물을 남기기도 한다. 유럽의 커피가 그 선물이다. 유럽을 노린 터키, 당시의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의 빈(Wien, 비엔나)의 전투가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오스만제국이 물러간 뒤 남은 막사에 잘 말려진 검은 알갱이 500포대가 발견됐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이것을 낙타배설물로 알고 버리려 했는데, 한 장사꾼이 그것이 커피원두임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했다. 이 장사꾼은 폴란드 출신인 콜시츠키(Kolschitzky)라는 사람인데, 아랍인 행세를 하며 전투 당시 오스트리아인들을 도왔다. 그의 도움을 받았던 오스트리아인들은 흔쾌히 요청에 수락했고, 콜시츠키는 그 원두를 가지고 1683년 푸른 병 아래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이라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카페를 열었다. 커피 가루를 걸러내고 우유를 더하는 카푸치노가 처음 발명된 곳이 이곳이다.
콜시츠키는 터키 옷을 입고 작은 절구로 커피원두를 빻아 가루로 만들었는데 오스트리아인들은 이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커피하우스로 몰려들었고 커피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빈의 콜시츠키 거리에는 콜시츠키 기념상이 있다. 매해 10월에는 콜시츠키 축제를 열고 커피하우스마다 그의 초상화를 걸곤 한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에서 흔히 비엔나커피라고 말하는 메뉴는 사실 아인슈패너(Einspanner)라는 커피로 긴 유리잔에 커피를 담아 휘핑 크림을 얹고 초콜릿 가루를 뿌리는 메뉴다. 아인슈패너 커피는 카푸치노와 비슷한 시기에 빈에서 탄생한 메뉴인데 마부들이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한 손에 고삐를 잡고 한 손에 생크림과 설탕을 듬뿍 얹은 커피를 마신 것에서 유행이 됐다. 그러니 비엔나에 가서 '비엔나커피 주세요'라고 말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부디 느긋한 표정으로 '아인슈패너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하길 바란다.
● 백진성 대표는?
이 글을 쓴 ㈜사과나무 백진성 대표는 2010년 커피와 베이커리의 복합형태인 커피전문 브랜드, 커피베이(www.coffee-bay.co.kr)를 론칭했다. 창업비용의 거품을 뺀 실속있는 소자본 창업시스템을 선보이며 바람을 일으켰다. 론칭 1년 만에 100개를 돌파하고, 현재 전국에 150여개의 매장을 전개하고 있다
'창업닷컴'은 커피베이 백진성 대표에게 청하여 <백진성의 커피로드>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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