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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회 / 박영선 목사 / 성경에 대한 이해 (3) / 2023.11.23.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제일 처음에 경험하는 것이 예수를 만난 감동, 구원에 관한 확신 그런 것들로 모두 출발을 해서 원하든 원치 않든 다 실존적 신앙관을 가진다 그렇게 말씀드린 것 같다.
성경은 읽으면 구약 내내 역사 얘기를 한다. 우리가 시작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종말이 있다고 약속하신 중간 어디쯤에서 우리는 모두 출발을 해서 믿고 나서 우리가 가지는, 주를 만나서 깨우치게 된,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 같은 감동은 있지만, 현실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구원을 받았고 감동도 있으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인데, 현실을 바꿔주시든가, 그게 아니면 내가 믿음이 좋아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되는데, 둘 다 안 해 주신다.
안 해준다는 말은 굉장히 아이러니컬한 말인데, 해 주시지만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달라서, 우리는 마치 '내가 잘못 믿었나? 내가 믿음이 너무 없나?' 하는 생각과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일을 이렇게 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모두가 걸린다.
그래서 구약은 내내 신약 성도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확정을 - 실체가 그 아들이신 예수인데 - 구약에서는 내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을 함으로써, 역사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의 생애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해하는 최고의 증거로
범례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등장은 처음 시간에 말한 것처럼 굉장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불순종함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는데 그래서 그 후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나 바벨탑 사건 얘기나 다 '인간들이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를 증명하고, 느닷없이 아브라함이 등장한다고 그랬다.
아브라함의 등장이 느닷없는 것은 인류가 죽을 수밖에 없게 돼서, 창세기를 읽으면 5장에 아담 이후에 족보가 나오는데 다 900년 이상 살지만 죽고, 죽고, 죽고 있다. 누군가는 재미있게 그래서 이걸 죽음의 족보라 그러고, 마태복음 1장은 생명의 족보라고 그런다. 낳고, 낳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제 낳고, 낳고, 낳고 해서 예수까지 오는 생명의 족보라, 그게 대조를 시키고 재미있게 기억을 시키는데, 그런 몇 가지 어떤 퍼즐 조각 같은 거 몇 개로 재미 있으면 신앙생활이 형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이제 구약 성경을 읽는 법 - 그러니까 여기서 읽는 법이란 기술이 아니라 성경이 뭘 의도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 - 그것을 지금 1차 목표로 아브라함을 했고 이제 오늘 이삭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애를 낳지 못했다가 백살에 얻은 자식이 이삭다. 이삭을 낳을 때부터 성경은 이삭의 출생을 아주 많은 어떤 내용을 담고 - 예를 들면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 그런 책이 있는데 그 책의 한 챕터가 <성경은 마치 추리 소설 같으다> 그렇게 소개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앞에 나온 사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이제 경찰이 와서 범인을 잡아내고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가 그들의 증거들 증언들을 다 종합한 결과 A라는 사람이 범인이다 했는데, 당사자가 난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이제 주인공인 명탐정이 와서 얘기들을 듣고, 진범은 이 B씨입니다 그러니까, 왜 A가 아니고 B냐? 여러분들이 가진 증거를 조합하는 것을 잘못했다. 이게 이제 추리 소설의 재미이다.
그래서 뭐 셜록 홈스나 또 아가사 크리스티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살인 사건이나 뭐 유난한 사건이 벌어지고 살인 사건이어야 되는 이유는, 피해자가 증언을 안 해야 재미가 있다. 그래야 범인을 잡아내는 일이 어렵고 재미있다.
그런 식으로 아브라함이 등장할 때에 소개됐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운명을 제시하고, 그건 현재까지도 진실이다. 모든 생명은 죽는다. 죽지 않는 자가 에녹이 한 번 등장한 것 외에는 다른 힌트가 없다가 아브라함에게 느닷없이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그랬고,
끝에 가면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렇게 소개를 했다.
그런데 이제 이삭은 -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그러거든 - 그런데 이삭은 대부분 그 성경에서조차도 이삭은 별 특징이 없는, 별 특별한 사건이 없는 사람으로 등장을 하는데. 이삭의 특징은 뭐냐 하면, 뭔가 다 불합리함 - 그는 태어날 수 없는 자인데 태어난다.
아브라함이 아흔아홉일 때 하나님이 '내가 네게 자식을 주겠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지 않는다. '내 나이 아흔아홉인데 무슨 애를 낳는단 말입니까? 내 아내는 구십인데 무슨 애를 낳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너 웃었다. 너 내 말 비웃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그러니까 '너 애를 낳거든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어라' 그래서 이삭은 '웃음'이라 말이다. 말하자면 안 믿은 웃음인데 일종의 우리 인간적인 표현으로 비웃음인데 정말 웃음이 되게 했다 하는 이중적인 의미로 이삭이 있다.
그러니까 그는 태어날 수 없는데 태어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창세기 22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 보고 '네 자식을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잡아라'가 되잖은가? 그래서 죽이러 간다. 죽일 참이었는데 하나님이 칼을 빼들고 내려치는 아브라함을 막아서시고 '내가 내 믿음의 행위를 보았다' 그리고 수양을 대신 제물로 잡게 하고 이삭을 살려준다.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그는 자식을,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돌려받았다, 그 우리 잘 아는 표현대로 하면, '부활의 예시였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부활의 예시였다' 이렇게 외워버리면, 이야기가 재미가 끊긴다.
이삭은 스스로 뭘 한 건 하나도 없고 수동태로 그리고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으로 존재를 한다. 그에게 자식을 약속할 때는 아브라함이 뭘 했냐 하면, 이스마엘을 낳았단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자식으로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고 또 다른 표현으로는 동서남북에 편만하게 하겠다 그렇게 약속을 하신다. 네 몸에서 날 자, 너와 네 아내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내가 네 후손을 편만하게 하겠다, 모든 족속을 이루겠다 그런 약속인데, 갈라디아에서는 그때 '네 자손들이 동서남북에 편만 할 것이다'라고 복수로 지칭하지 않고, 단수로 '네 자손들'이 아니라 '네 자식'이라고 하나라고 표기해서 마지막에 오실 예수를 예표했다 그거는 신약에 와서야 이제 돌아볼 수 있는 얘기이고,
구약 자체의 사건에서는 이삭이 아브라함이 낳을 수 없는 자식으로, 그 전에는 '아브람'이었던 이름은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자식을 얻게 되는 거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족장' 그런 정도의 이름인데 '아브라함'은 '모든 족속의 장'입니다. 그러니까 범위가 확 커진다. 한 가문의 장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장이 되는 것이 '아브라함'인데, 왜냐하면 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두에게 복을 주겠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위인이 자기의 유전자를 계속 후손에게 물려주어서 인류가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전자가 끊긴, 자기가 낳을 수 없는 자식으로, 이게 예수님이 동정녀에서 태어나시고 인간이 아닌 신이 땅에 오신 것 같이, 앞에 인류가 스스로 이은 후손이 아니라, 대가 끊긴 그러나 하나님이 그 대를 잇는, 이런 개념이 이제 이삭인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심지어 어떤 일까지 생기느냐 하면, 이삭도 부인이 애를 낳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를 해서 에서와 야곱을 낳죠. 쌍둥이. 하나님이 뭐라고 예언을 하시느냐 하면, 예언이기보다 약속을, '두 애를 낳을 텐데, 둘째가 첫째보다 낫고 첫째는 둘째를 섬길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한다.
그래서 그 태에서 싸우다가 애서가 먼저 나오고 뒤따라 발뒤꿈치를 잡고 이제 야곱이 나와서 야곱은 장자권이 없게 되는 거다.
장자권이 없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유산, 재산적 개념 이상의 '가업을 잇는 상속자'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을 택함으로써 하나님이 '야곱은 네 DNA나 네가 한 무슨 일을 잇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아브라함이 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등장이, 앞에 노아 홍수로 인류가 멸망한 것 같이, 한 번 자르고 새로 시작한 것 같이, 이삭에게 와서도 한 번 자르고 새로 시작하는, 그런 인물로 이삭을 그린다.
그래서 이삭은 마지막에 나이 많아서 자식들에게 죽기 전에 축복을 하겠다 할 때도 에서를 축복하려고 그랬는데 야곱이 들어온 것이고 나중에 에서가 들어와서 '아버지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야, 방금 해줬잖아?' '나 이제 왔는데요?' '그럼 그건 누구냐?' 이렇게 이삭이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삭은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지, ★'이삭이 뛰어나서 인류라는 존재를 흥왕케 하고 운명을 바꾼 것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이렇게 묻어놓은 거다.
그런데 이걸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시대에 와야, 이게 거꾸로 해설하는 주인공이 나타나야 이게 풀렸기 때문에, 구약 내내 이 문제는 늘 혼란 속에 있게 되고, 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 있었던 사건들에서 어떻게 그 일이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고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그거와는 전혀 같이 섞일 수 없는, 신적 어떤 방법과 능력들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이라는 종족과 존재와 정체성과 가치를 만들어냈는가 하는 것들을 긴 역사에 걸쳐서 구약이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작할 때와 같이, 실존적 신앙관을 가지고 '난 예수를 믿는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것을 믿는다' 이렇게 얘기한 것은 실존적 고백으로 얼마든지 좋지만,
★당장, '그런 각오가 있는데도 하나도 형통하지 않은 현실은 뭐란 말인가?' 여기에는 답을 못하고 있는 거다.
그냥 이제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그래서 그저 세상에 끌려가는 게 전부이고, 이 인생이 뭔지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어쩌다가 한 번씩 사건적으로 한 번씩 신통한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인생 자체를 통틀어서 내다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런 식의 이해력은 한국 교회에 부족하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고 그래서 이 설명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구약 내내, 이제 구약 전체를 보면 결국은 무슨 싸움이 되냐 하면, 율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의 싸움이 되거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꾸짖을 때마다 '너희는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 율법에 1조에서 4조까지는 다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는 요구인데 그걸 다 어기고 그다음에 5조부터 10조까지 있는 '이웃 사랑'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 문제들이 왜 구약 내내 이렇게 반복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아담을 만들었을 때도 하나님이 하시는 명령은 '너는 저건 따먹지 마라' 라고 한 선악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의 싸움이 아니라, ●'너를 만든 하나님은 너를 뭘 만들고 싶어 하는가?'로 와야 되는 것을 못하고, '맞다 틀리다'로 갔는데 이것은 종교라는 모든 것이 가지는 공통점이다.
어느 종교나 종교가 종교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도덕과 정성이 있어야 된다. 어떤 것도 종교라고 할 때는 '도덕성'이 있고 '열심'이 있어야 되는데 둘 다 대상이 없다.
도덕성도 하나의 규칙이고, 본인의 정성도 자신의 정성이지 인간의 최선이지, 신이 주권을 가지거나 신의 능력이 간섭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뜻밖에 예수를 믿을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기도할 때 제일 많이 하는 거, 제가 하도 그래서 이제 다들 좀 고치셨는데, 회개가 많은 이유가 뭐냐 하면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 없으니까, 회개를 해서 다 못 지킨 도덕성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잘하겠다고 그러고,
★'뭘 잘하겠다'고 그랬는지, '하나님이 뭘 하라 그랬는지'는 모르고 '잘하겠다'가 '정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목적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내용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방법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종교하고 차이가 안 나서,
이제 우리 예수 믿으면서도 하는 얘기가 '그 사람은 예수 안 믿었어도 천국 갈 거야' 라는 말이 성립이 된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을 몰랐는데도 천국을 간다는 얼토당토하는 이야기가 우리를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놨단 말이다.
하나님이 착한 일을 하라고 그런다고 생각을 한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거 하라' 그런다. '나 닮아라' 그런다.
부모가 자식 보고 <나 닮아라> 그러는 거다. '넌 짐승이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는 건데, 그건 매우 소극적인 차원이고, ★적극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성을 충만히 가지라"는 거다.
★인간성이라는 건, 보통 얘기하는 우리가 인문학이나 상식이나 지식에서 말하는 인간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되라》, 《하나님과 교제가 되는 인간이 되라》, 《신성에 참여해라》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예수가 오시는 거다. ★예수가 왜 육신을 입고 오며, 인간하고 동일한 현장에서 생애를 살며 우리 손에 죽임도 당하는, 그렇지만 철저히 인간이 된, 어떤 특권이나 면제를 받는 것 없는,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까지 함께한 자리로 신이 찾아온다는 것은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요구한 그런 지위, 그런 신분, 그런 관계 ,그런 차원으로 우리를 데려가겠다는 찾아오심이다.
'이게 감동을 안 하는 이유는 뭔가?' 하니까, 이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얘기이다.
★'인간이 그저 남한테 부끄럽지 않고 누구한테 도움을 줄 만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그저 인정받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하는 여기가 죄라는 거다.
그건 하나님 없는, 하나님 없는 가치, 세상질서를 만들어 놓고, 만든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않고, 그리로는 한 발자국도 안 오고,
지들끼리 '뭐 잘한다'는 둥,, 뭐 '뭐 그 사람은 뭐' 그렇게 얘기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게 기독교이고, 이제 구약 내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는 이유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했듯이 '이삭의 하나님' 그럴 때는 정신이 번쩍 나는 거다. 신약에 오면 이제 구원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잘 아다시피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베푸신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그런 구원을 베푸신다 라고 할 때,
★왜 '믿음'을 동원하시는가? 법이 아니다 그런 뜻이다. 1차적으로 법이 아니다. 법이라는 조건을 우리가가져야 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붙잡혀야 된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 만들 때 의도했던 창조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게 구원이다. 우리가 도망갔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다.
★찾아오신 이유는 우리 보고 착하게 살라고 찾아온 게 아니라, 《집에 가자, 넌 내 자식이다》 그렇게 찾아오신 것이 구원이다.
그러니까 이제 탕자의 비유에 나오듯이 집 나갔던 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는 것은 돌아와서 기뻐하는 것이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거다. 이제 형이 와서 '저놈은 재산 지꺼 달래서 가서 다 허랑방탕하고 돌아왔는데 어떻게 잔치를 열어줍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냐?' 그게 구원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이 하려던 것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시작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거기에 형의 얘기가 나온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나와 내 친구들한테는 염소새끼도 한 번 안 잡아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것한테는 송아지를 잡았다고요'
'얘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지 않냐?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는 데를 이제 모르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감동해서 천국 가는 것이 전부이고, 그 사이 - 그 사이가 현재인데, 현실인데 - 지금은 뭐야? 지금은 뭐야 그래서, 이걸 뭘로 때웠냐 하면, 아 이거 좀 애매한데, 성경 많이 보고 기도 많이 하고 특별한 선생님 모시고 성경 공부하고 그래 갖고 확인을 하는 거다. '내가 진심을 갖고 있다. 내가 이렇게 열정을 갖고 있다.'
성경 공부를 해도 무슨 말인지, 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르는 성경 공부가 대단히 많다. 그냥 읽고 좋아한다. 이거 또 예를 마음대로 들 수 없는 이유가 이게 방송을 타더라고. ㅎㅎ 이거 무수히 걸린다. 이거 무수히 걸려.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다' 그러면, 당장 이렇게 물어 온다. '그럼 우리는 지옥 가냐?'
그것밖에는 잣대가 없는거다.
그 제가 공부 시키고 있는 그룹도 하나 있는데, 늘 저한테 꾸중을 듣는다. 왜냐면 성경을 읽고, 이게 문맥이 없다. 거기서 단어를 뽑아서 감동을 한다. '진실하게 살자, 정직하게 살자, 긴장을 늦추지 말자' 이런 것들을 한다.
그래서 '이 앞에서 지금 여기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는데, 너 뭐 하고 있냐?' '아 나 착하게 살고 매일 기도도 하고 성경적인데 그럼 내가 잘못됐다는 거냐?' 그렇게 물어 온다. ㅎㅎ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야, 커야지.
'너는 나이를 안 먹냐, 왜?'
'시작을 해서, 하나님이 시간을 가지고 있고, 시작과 과정과 끝을 갖고 있다고, 성경 내내 창조부터 그다음에 경륜, 섭리가 있고 종말이 있다고 역사를 얘기하고, 우리 개개인의 현실이, 태어나고 자라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데, 철이 안 들잖냐?' 그러면,
제가 답답해하는 것보다 더 답답해 한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예수를 잘 믿냐?' 그런 표정으로.
그런데 왜 나보고 성경 공부를 하자 그랬는지, 나 그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커야지.
우리 애들 이쁘다. 다섯 살짜리, 일곱 살짜리 이쁘다. 정말 보면 막 이렇게 웃음이 나오고 반갑다. 그 애하고 결혼하나? 그럴 수 없다. 결혼을 할려면 나이가 있어야 된다.순진하고 순수하고 해맑으면 안 된다. 그때는 철이 들고 실력이 있어야 될 거 아닌가? 나이가 들면 자식을 가지고 손주를 가진 지혜와 안목과 이런, 여기서 몇 단계를 올라간 안목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나를 아버지라 불러라, 너희는 내 자식들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무언지 좀 알아들어야 될 거 아닌가?
성경을 읽으면 알아듣는 게 아니라 그냥 한심하다. 그래서 철 들고 안목 있는 신앙이 한국 교회에 제일 지금 필요하다.
교회가 부흥해야 되고 다시 열심히 불 붙어야 되고 이런 게 아니다. 그건 하나의 현상들이고 하나의 자세이지, 그것은 진정한 내용도 그리고 대상인 하나님의 요구에 따르는 수준과 지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게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도덕성이나 치성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면 굉장히 당황을 한다. 《우리 안에 없는 걸 만들겠다는 거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 - 사도 바울 식 표현에는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니라 그런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길러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고 그냥 승천을 하시듯이,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가 분부한 것들을 가르쳐서 제자를 삼아라' 라는 이야기는, 오고오는 세대 어떤 특수층에게 부탁한 유언이 아니라, 인류가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세상 죄로 파괴된 세상 속에서, 빛과 생명과 진리로,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의 결과물들을, 이제 나누는, 그걸 발휘하는 그런 지위로, 인생으로, 현존으로 부른다 그거다.
★그래서 한 신앙의 어떤 깊이와 높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지게 되는 거다》.
성령의 열매도 나타난다. 사랑, 희락, 화평, 절제, 충성, 온유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도덕성으로서의 규범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고 이런 윤리들을 지키게 되면 그것은 자기 의가 된다. 자기의 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을 섬기기 위하여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확보하기 위해서 발휘를 한다.
그러니까 겸손도, 겸손한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스스로를 겸손했다고 할 때에도, 하나님이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낸 자리로 가는 겸손이 아닌 경우에는, 보상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비난을 한다.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지적, '저 사람은 교만해' 라는 말은 '난 안 그래'가 포함돼 있다. 내가 안 그러면 되는데, 내가 그냥 겸손하면 되는데, 교만한 사람을 지적을 해야 자기의 겸손이 증명이 된단 말이다. 그러니까 굉장히 무섭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야 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리 부름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는 어둠이 물리쳐지고 그래서 뭐가 참인지, '진리란 영원한 것 생명에 속한 것 그리고 영원하고 생명이다'라는 얘기들은, 이런 개념이 아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께만 속한 것이다.
★그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이런 것들은 다 그냥 단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불러 우리의 생애를 어느 순간도 어떤 경우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 본문을 담을 수 있다, 이게 십자가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그냥 가장 치열하게 자신을 내주는 이런 거 하고 다르다.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목숨까지 주셨어 이렇게 흙흙 대지 마시고 ●어느 경우에나 담아야 된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기적도 일어나고 눈물도 있고 통곡도 있고, 그러나 거기에 우리는 답을 낼 수 없는 답을 늘 내시는 인간의 진정한 지위와 신분과 내용과
증거들을 가지는 그런 존재 그런 문매 안에 있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문맥이란 일상이다. 신앙의 최고의 요구가 순종인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라》 이거다.
그 일은
일차적으로 《내가 크는 것》이지, 어떤 임무가 아니다.
●내가 크고, 내가 만나는, 내 옆에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 안에, 내가 진리이고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서기 위해서 각각의 일상에 들어가야 된다. 순종은 각각의 문맥에 들어가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금 조건들, 건강, 친인척, 동료, 우리가 속한 세상, 지금의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현장 속에 들어가서, 그걸 다 어떻게 정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증거들과 영향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
우리가 크고,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생명과 진리를 보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요, 우리에게 주신최고의 하나님의 특권이다. 인간에게 허락한,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운명에 대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와 인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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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 보통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꼭 분노에 찬 반론이 있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태껏 확신했던 이 자기의 이해가 깨지는 거죠. 이걸 안 깼으면 싶은 거죠.
그,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뭘 요구하냐면, '내가 아는 거가 맞지?'를 요구하고 앉아 있으면, '그게 아니다' 해서, 그냥 그 다음은 못 쫓아오고 이제 화만 내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니란 말입니까?'
아닌 건 아닌데, 긴 것도 아닌, 우리는 어쩌면 출발선상에서 맴돌고 있을 수 있는..
한국 교회의 기독교 교육의 현실은 그래서 이걸 한꺼번에 뒤집어야 되는 게 아니라, 순교시대와 부흥시대를 지나서 이제 교육의 시대에 들어와야 되지 않느냐하고 보고 있습니다.
예, 질문있으면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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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잉그리드 버그만은 기억하시고 게리 쿠퍼는 기억 못하십니까? ㅎㅎㅎ
여러분은 그래도 가끔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참 놀라운 일이에요. 사실 굉장히 놀랍습니다. 한국의 교회가 여기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건 한국 교회의 잘못이 아니고 한국 교회사적 길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각오도 했고, 그리고 우리가 심지 않은 열매도 거둘 수 있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커야 되는 데(지점에) 와서, 이걸 열심히 전하려니까 자꾸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거죠.
사실은 뭐 그 대상은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낳고 잘 길러주셨는데,
이제 우리가 가르쳐서 더 귀한 자리까지 함께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면 알수록 현실이 새삼스러워집니다.
나라는 존재와 내가 서있는 조건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깊게, 놀랍게, 엄청나게 준비하신 저 십자가에 대한 표현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 그 말씀이 내 것이 됩니다.
주께서 그리하셨듯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그 믿음을 가진 후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존재로,
우리의 삶 속에 이 생명과 진리를 힘써서 증언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커가는 이 기적을 경험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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