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재위 737-793)은 발해의 제3대 국왕으로, 휘는 대흠무(大欽茂), 연호는 대흥(大興)이며, 발해를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임금이다. 그는 재위기간 동안 발해의 외적 팽창과 함께 내적 정치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왕이다.
문왕은 당에 대해 우호적인 반면 필요이상의 요구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으며, 대내적으로는 우선 경京과 부府, 그리고 주州와 현縣으로 편성해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했다. '부'는 '주'의 상위 행정단위이고, 중요한 부에는 '경'을 설치해 전국을 5경제로 운영했다. 또 주에는 부를 거치지 않고 중앙에 직할된 독주주 가 세 군데에 별도로 존재했다. 주 아래에는 현이 설치되었는데, 주현은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건설된 중심적인 성읍과 말갈 부락으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중심 성읍이 말갈 부락을 통제했다. 수렵 채집 단계의 말갈 부락은 자치적인 성격이 강하므로 수령을 통해 간접적 지배하게 하고, 이런 부락을 통제하고자 당이나 일본과의 대외 교류를 중앙에서 독점하면서 수령을 보호하고, 간접적으로 통합, 재편하였다.
문왕은 지방행정 조직과 함께 중앙 관서도 정비했다. 우선 3성(정당성,선조성,중대성)과 6부(충.인.의.지.예.부.신)조직이 완비 되었다.발해의 3성6부제는 당의 영향을 받아 정비되었지만, 필요에 따라 변형해 운영해 나갔다. 특히 귀족 관료들의 합의 기구인 정당성에서 결정한 사항을 중대성과 선조성에서 이원적으로 집행했다. 문서와 서적을 관할하는 문적원, 외교 의례를 담당하는 사빈시 같은 관서도 설치했다. 이러한 중앙정치 조직의 정비는 왕권의 강화를 상징한다.
문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유교에 입각한 국가 의례인 五禮를 정리한 [대당개원례]를 요청했다. 유교적 도덕규범과 사회규범을 토대로 발해를 이끌어 가려는 문왕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문왕은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해 절대 왕권을 추구하고자 했다. 국립대학인 주자감을 설치해 유교경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인재를 양성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문왕의 시호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인데, 대흥과 보력은 문왕의연호이고, 효감은 유교정치 이념을 금륜. 성법은 불교적인 이상 군주를 지향했던 그의 치세를 상징한다. 또한 당이 기존에 '발해군왕'이라 부르던 것을 '발해국왕'으로 승격한 것도 문왕의 대내외적인 안정을 반영한 실질적인 조치였다. 발해는 당의 책봉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했다. 정효공주의 묘지에 문왕을 황상(皇上)이라 표현하고 있어 대내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문왕은 왕권의 위상을 더욱 높이기 위해 수도를 새롭게 건설해 5경을 완비했다. 발해 건국 후 첫 도읍지는 구국의 영승 (현 지린성 둔화시)지역이었다. 이후 중경현덕부(현 지린성 화룡현)일대로 천도했고, 755년에는 상경용천부(현 헤이룽장성)다시 785년에는 동경용원부(현 지린성 훈춘시)로 옮겼다. 문왕이 죽고 난 뒤 다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여 926년 멸망 때까지 상경을 수도로 삼았다. 문왕이 이렇게 자주 천도한 까닭은 국내의 연계망을 실현해 중앙 집권력을 강화시키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면서 각 지방의 경제와 문화를 고르게 발전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왕 때는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신라와의 긴장관계도 완화되었으며 신라도를 통해 지속적인 교역도 이루어졌다. 문왕 때 발해와 당나라의 외교 구도는 기본적으로 평화적 기조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양측의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또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천손으로 표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이를 항의하기도 했다. 천손이란 의미는 곧 천하의 주인 즉, 제국의 지배자인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발해가 일본을 화나게 할 정도로 낮추어 보는 문서를 보낸 것은, 발해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