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국 목사
한번은 한 아이가 바닷가에서 아버지에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바다가 가요! 아버지, 바다가 가요!” 바다물이 빠져 나가는 썰물을 보고서 외친 아이의 음성이었습니다. 기독교회의 역사에도 그러했지요.
진리의 투쟁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있는 교리의 가르침의 방향들도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는 역사를 되풀이 하여 왔습니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특히 더 그러하지요. 요즈음 우리 현대 기독교회는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기초인 복음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과 구원에 대한 교리에 대한 타협이 초대 교회를 좀먹고 타락시켰듯이 현대 교회의 타락의 가장 큰 이유도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와 또한 믿은 후에 생기는 결과에 대한 이해가 비뚤어 지면서부터 구원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교회 안에 생기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면 교회는 성결하게 변화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것이지요. 교회의 뜻은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어 따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차이를 별로 느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들 중 가장 큰 이유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의 뜻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법을 지키므로 구원 얻으려고 애쓰면서 모름지기 인간의 공로를 쌓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 자신에게 계속 실망하면서도 피곤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 말입니다. 또한 자유 주의자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성경의 원칙과 순종이 없이도 이미 구원 받아 놓았다고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가 만든 거짓 안정 속에서 살아 가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믿음의 의에 대하여 밝히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사실에 대한 감사는 물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말입니다. 이번호에서 그 줄거리를 찾게되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3.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치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 받도록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이미 다 하셨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할 일을 다 하지 않으면 완벽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마저도 속수무책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구속의 경륜에 동참하고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바로 두뇌에서 활동하는 세 가지 기능들의 투쟁 끝에 얻어지는 결실이다.
두뇌 - 치열한 전쟁터
일단 뇌 속에 어떤 정보가 들어가면 세 가지 기능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 세 가지는 지성, 감성, 그리고 의지이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할 때, 바로 이 세 가지들이 그 결심을 만들어 내는 주역들인 것이다. 앞이마에 자리한 이 세 가지 중요한 기능들은 입력된 정보에 재빨리 반응한다. 그리하여 분석하고 판단하여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한다.
이 이마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소유로서 표하고 인치시는 곳이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forehead, 앞이마)에 인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7:2,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forehead, 앞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4:1. 왜 하나님께서 다른 신체 부위가 아닌 앞이마에 인을 치라고 하셨을까? 왜냐하면 바로 앞이마의 두뇌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선택할지 아니면 마귀를 따르기로 선택할지를 결정하는 세 가지 기능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란 이해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며, 분별하는 기능이다. 또한 감성이란 소원하며, 느끼며, 충동하는 감수성의 기능을 말한다.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 지성과 감성은 각각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이 느끼고 말하는 것을 판단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바로 “의지”이다. 우리 뇌에 있는 이 세 가지 기능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선택이 없이는 한 인간의 인생 방향이 결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음성을 선택하면 그는 의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지만, 그것이 육체의 음성을 붙잡고 그것에 복종하여 살면 악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앞이마에 당신의 소유임을 확증하는 “인” (seal)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A라는 사람은 이제 막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초신자이다. 그런데 그는 그가 포기해야 할, 그러나 하지 못하고 있는 한가지 문제 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있다. 그의 지성은 그에게 그것은 죄니 반드시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반면에 그의 감성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의 마음 속의 소원과 감정은 이제까지의 습관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얘기한다. 그의 느낌과 충동은 그 죄의 재미와 쾌감을 버릴 마음이 없다고 끝까지 사투하고 있다. 그 재미를 버리면 세상살이에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 변론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지성은 계속 말하고 있다. 그 잘못된 습관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장애물이라고, 그 죄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서는 결단코 거듭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그 죄를 버리지 않고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감성도 지지 않고 계속 반박한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포기하면 생활의 만족이 없어지게 될 것이요, 결국에는 재미있고 좋은 것들은 모두 포기해야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을 사는 의미와 행복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
자 이렇게 뇌 속에서 지성과 감성이 전쟁을 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싸움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해결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이다. 의지가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든지 일상적인 생활의 결정이든지 간에 관계없이 단 하루를 살아도 우리는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런 과정은 너무도 간단하다 못해 자동적이기까지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쉽게 지나친다. 하지만 이 의지의 결정은 너무나 중요하다. 조그만 의지의 선택들이 모여져 큰 결정을 만들고 결국에는 우리의 영생도 결정짓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사용할 자유 의지가 죄로 인하여 몹시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후서 2:26에서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킹 제임스 성경 번역)라고 말씀하였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은 그들의 의지가 마귀의 뜻에 사로잡힌 바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인간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에 내어 맡겨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롬 7:18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거듭난 의지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의지의 힘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너무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내 자신을 굴복하여 의심과 마귀의 올무인 죄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라고. 과거의 실수들과 작심삼일이었던 결심들을 기억하면서 인간들은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10:27.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것이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선택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에 놀라운 힘을 주시게 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결심하고 행하려 하면 곧 피곤해지고 의로운 삶을 살기에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육중한 고철들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의 끝에는 강력한 지남철이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지남철에 전류가 흐르지 않으면 원하는 고철들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아무리 기중기의 끝을 무거운 쇠들에 갖다 대어도 전혀 끌어 올려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전기의 전류를 보내면 그 지남철이 힘을 발휘하여 그 무거운 고철들을 번쩍 들어 옮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의 힘도 꼭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의 전류를 받아야 우리의 의지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롬 8:2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에서,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하지 않는데 있다. 죄의 습관들과 세력에서 헤어나오기를 온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원하거나 희망 사항일지는 모르나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지를 강제로 꺽으시거나 억지로 힘을 주실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우리가 협력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며 협력하지 아니하면 그 크신 구원의 역사와 능력도 속수 무책이 되는 것이다. 자녀들이 자기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부모들이 아무리 도와 주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여기에 내 의지가 있습니다. 죄의 힘으로 연약하여지고 비뚤어진 나의 의지를 주님께 드립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힘이 없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의지를 굴복하오니 주께서 고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의 힘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항상 재충전되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바라는가?
사례연구 Case Study
메리는 사십대 초반의 중년여성으로서 정상 체중을 초과한 자신의 몸무게 때문에 항상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우연히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건강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녀는 이제까지 그녀가 듣도 보도 못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게 되었다. 또한 비만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정제되지 않은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섭취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이제부터 다시는 인스턴트 식품을 입에 대지도 않으리라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유혹이 다가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쵸코렛 전문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 있었다. 이제까지 항상 집으로 돌아올 때면 꼭 그곳에 들려 초콜렛을 사가는 것이 그녀의 소중한 습관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곳을 향하여 운전대를 돌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언제나 그렇게 해왔듯이 건강 세미나를 참석하고 돌아오는 지금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차를 쵸코렛 전문점 앞에 주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 두 음성을 들었다. 지성이 말했다. “메리, 넌 오늘 오후에 아주 좋은 강의를 들었어. 왜 당분이 농축되어 있는 식품을 먹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지. 네가 여기서 초콜렛을 사 가면, 너의 결심을 깨뜨리는 것이 될거야. 너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과 네 건강을 해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잖아!” 그러자 감성이 지지 않고 말했다. “왜 그렇게 혼자 튈려고 그러니. 요새 세상에 초콜렛 안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니? 그것 먹어서 살이 좀 쪄 봤자 얼마나 찌겠어. 오늘 하루만 먹고 다시는 안 먹으면 되지, 안 그래?”
몇 초 동안 메리는 이 두 음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등하였다. 이제 그녀의 의지가 두 음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였다. 결국 그녀의 의지는 지성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 곳에 내려서 전처럼 초콜렛을 사가는 대신 그녀는 곧바로 집으로 향하였다. 그날 저녁 내내 그녀의 마음은 가볍고 기뻤다. 왜냐하면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였기 때문이었다.
4.두뇌의 면류관
앞 뇌의 기능
1848년 9월 13일, 25살의 로버트 게이지는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산간지역에 철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거대한 바위들을 폭파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숙련되지 못한 조수의 실수로 인하여 폭약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로 인하여 두께 1인치, 길이 3피트, 무게 13파운드가 되는 폭파용 쇠막대기가 그를 향하여 날아갔다. 미사일과 같은 힘으로 발사되어 나온 그 쇠막대기는 그의 왼쪽 턱 위를 뚫고, 왼쪽 눈 뒤를 지나서 뇌를 뚫고 나왔다. 놀랍게도, 아직 항생제가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그는 치명적인 감염을 피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육체적인 건강은 거의 완벽하게 회복되어 단지 그의 왼쪽 눈이 시력을 잃었고, 왼쪽 볼에 상처가 남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로버트 게이즈가 아니었다.
앞 이마와 성격의 관계
사고 전, 로버트는 자상한 남편이었고 책임감 있으며 유능한 직업인이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일하고 있었던 루트랜드 버링턴 철도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장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직공”으로서 높게 인정 받고 있었다. 이 사고 이후에도 그는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 유능함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큰 다른 점이 나타났다. 도덕적 낙후 증상이 사고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매우 감정적인 사람으로 변하였고, 쉽게 화를 내었다. 사고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교회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흥미를 잃고 안 좋은 일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맡은 책임을 행할 수 없었으므로, 직장으로부터 해고당하였다. 그는 결국 부인과 가족을 버리고 서커스에 들어갔다. 그가 앞이마에 받은 치명적인 사고는 그의 개성과 도덕적 기준과 가족과 교회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만들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연구는 유명한 과학지인, Science 가 이 사건을 표제기사로 다루었던 199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과학지는 일단의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쓴 한 기사를 실었다. 이 연구자들은 컴퓨터와 X-레이를 이용하여 로버트의 뇌의 어느 부분이 상처를 받았는지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로버트 게이지는 그의 앞이마에 위치한 뇌의 양쪽부위(전두엽의 왼쪽과 오른쪽 부위)를 모두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습관과 앞 뇌
오늘날 전두엽(앞 뇌)에 관한 연구가 더욱 중요시 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개성과 정신적 수행능력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둘째로 현대인들에 있어서 사회규범과 도덕적 기준이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습관은 우리의 성격과 감정,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두뇌의 앞부분은 생활 습관의 선택으로 인해서 강하게도, 약하게도 될 수도 있다. 앞이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이해함으로서 우리는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능률을 올릴 수 있고, 더 좋은 사회관계를 이룰 수 있으며, 더욱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앞 뇌의 기능
뇌는 특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이마의 뒷부분에 있는 뇌를 전두엽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뇌의 가장 큰 돌기로서 판단과 논리, 지능과 의지를 통제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 우리의 존재, 즉 자아를 제어하는 기능이 이루어진다. 이런 연유로 일부 과학자들은 이 부분을 두뇌의 면류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3가지 중요한 기능들은 영성, 도덕성, 그리고 의지이다. 영성, 성격, 도덕성, 또한 의지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전두엽이 손상을 입은 사람은, 비록 그 모습은 전과 같을지라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행동을 하게 된다. 책 중의 책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앞이마(전두엽)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참으로 흥미로운 언급을 하고 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4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의미한다(출애굽기 33:18~23).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 이 성경절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앞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두엽으로 예증되는) 안에 재생된다고 말하고 있다.
전두엽에 관한 다른 연구사례들
1800년도 후반, 정신병 전문가들은 뇌 전두엽 절제술이라는 것을 시행하였다. 대부분 전두엽을 연결하는 신경을 끊음으로 그 기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인해 이 수술은 오늘날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전두엽 절제술에 관한 도덕적, 사회적 문제의 한 예로서 다음의 이야기를 숙고하기 바란다. 한 여인이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빌린 시계를 잃어버렸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시계 값을 지불하던지 아니면 다른 시계를 사서 주겠습니다.” 그 여인의 전두엽이 제거되고 회복이 된 후에 같은 질문을 물었다.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른 시계를 빌려야겠지요!”
손상된 전두엽에 나타나는 문제들
사고로 인한 전두엽 손상과, 전두엽 절제수술과 약물복용으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들에 관한 연구에 의하여 과학자들은 전두엽 손상으로 일어나는 공통적인 결과들을 발견하였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손상된 전두엽의 영향
도덕적 원칙의 결여
개인관계의 장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어짐)
앞날을 예상하지 못함
이론적인 논증을 할 수 없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함 (자만, 잔혹, 공격적임)
기억력 손상(특별히 최근 사건들에 관하여)
주의가 산만하고 불안함
무관심(자발성이 부족함)
전두엽에 관련된 중요한 연구
\전두엽에 관한 연구들은 전두엽이 우리의 성격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상처난 전두엽은 손상된 성격을 형성한다. 자제, 신뢰, 신용, 정독, 추론, 개인관계 등은 모두 건강한 전두엽이 행하는 복잡한 기능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전두엽 상해문제가 산업재해나 수술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는 올바르지 못한 생활습관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활습관 때문에 사고를 당하여 받는 뇌 손상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많은 습관들이 우리에게 짧은 만족감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나를 만드는 자아를 갉아먹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건강한 전두엽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상태를 최상에 있게 한다. 곧, 내가 건강한 선택을 할 때 나의 전두엽의 기능이 개선되고, 개선된 전두엽은 우리의 다른 나쁜 습관을 통제함으로 건강한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전두엽의 가장 큰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의지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는 많은 환자들이 의지가 연약하여 죽어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환자들이 살고 싶은 욕망이 없어서 죽어갔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의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의지의 힘이 없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담배를 완전히 끊을 수 있는 의지를 가지지 못한 흡연가들은 암으로 죽어간다. 또한 혈압을 조절하는 의지가 결여됨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생활습관이 전두엽에 영향을 주는가?
전두엽이 건강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두엽의 기능에 좋은 것들과 좋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건강한 전두엽을 유지하기 위하여 피해야 할 약품들은 다음과 같다 ; 불법약품들(마약), 다른 사교적 약품들, 알코올, 카페인, 니코틴 등.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필요이상으로 처방되는 약품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의사를 만난 후 약을 타가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약품들은 중심신경계를 둔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부분이 바로 전두엽이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제조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약물 남용이 그들의 성격과 개성을 바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몇 년 전, 과학자들은 탄수화물이 뇌의 기능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탕이 뇌 음식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능을 위해서 정제된 설탕은 뇌를 위한 음식이 아니며, 도리어 뇌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6명의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적은 양의 설탕을 섭취한 아이들이 더 높은 집중력과 정확한 응답 능력을 나타냈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우리의 몸은 과일들과 곡물들을 자연적인 상태에서 섭취하여 언제나 적당한 혈당을 유지한다. 그러나 자연음식에 비하여 정제된 설탕이 많은 음식은 빨리 흡수되어 혈당이 급히 올라가지만, 곧 혈당은 급히 떨어진다. 인슐린이 나와있는 상태에서 혈당은 기준치 이하로 갑자기 떨어지게 되며, 혈당의 부족은 전두엽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그러므로 충분한 양의 과일과, 야채, 곡물을 섭취하는 것은 뇌의 기능향상에 필수적이다.
최면술과 전두엽
오늘날, 여러 종류의 정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중매체, 집단 금연운동 프로그램 등의 순수한 목적으로 쓰이는 최면술은 심각한 후유증을 나타낸다. 이러한 문제점들 중 하나가 바로 전두엽 낙후 현상이다.
최면술에 걸린 사람을 EEG로 검사해보면 뇌 속의 베타 웨이브가 없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베타 웨이브가 바로 전두엽으로 하여금 건강한 생각을 하도록 하는 활동의 하나이다. 최면 상태에서는 알파 형태의 상태가 유지되며, 알파 상태에서는 새로 들어오는 정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정 최면술사
만약 당신의 가정이 미국의 보통 사람들과 비슷하다면, 당신의 눈을 집중시키는 깜박이는 무엇을 집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이 쓰이는 것, 바로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방식은 최면을 거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어두운 방, 깜박이는 불빛, 단순한 목적, 외부 소음으로부터의 격리된 상태는 최면상태에 빠지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다.
토마스 물하란드 박사는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의 EEG를 연구하였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여주기 시작한지 몇 분 후, 그들의 뇌에는 오직 알파 패턴만이 나타났다.
또 다른 뇌파 연구가인 에릭 페퍼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텔레비전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문제는 바로 정보가 들어갈 때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뇌가 들어오는 정보를 여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매번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바뀌어가고 있다.
텔레비전 시청에 관련된 17가지 문제점들
1. 전두엽의 여과작용을 거치지 않은 최면술적인 결과
2. 독서능력과 학습능력을 저하시킴
3. 뇌 능력을 약화시킴
4. 좋지못한 생활습관을 조장함
5. 비만을 조장함
6. 공상이 늘어남
7. 창조성을 떨어뜨림
8. 식별력을 약화시킴
9. 무감각적으로 만듬
10. 폭력에 무감하게 됨
11. 아이들이 과민증을 갖게 됨
12. 공격적으로 됨
13. 올바른 성관념이 없어짐
14. 텔레비전에 중독됨
15.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함
16. 가족만의 시간이 없어짐
17. 영적으로 낙후됨
어떻게 하면 좋은 머리를 가질 수 있을까?
1. 머리에 타박상을 입지 않도록 주의하라. 복싱, 미식축구, 오토바이 타기 등은 머리에 큰 타박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러므로 운동을 할 때는 머리에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운동을 택해야 한다.
2. 전두엽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병들을 미리 예방하라: 뇌의 기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고혈압이다. 고혈압은 뇌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전두엽에 있는 흰 요소(뇌 신경 작용을 돕는)를 손상시킨다.
3. 뇌의 혈액 공급 상태를 개선시키라: 좋은 공기를 충분히 마셔라. 많은 사람들이 짧은 숨만을 쉬고 있다. 깊은 숨을 쉼으로 뇌의 피 공급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4. 좋은 영양
5. 충분한 햇빛
6. 전두엽을 운동시키라: 생각하고, 문제를 풀고, 논증하고 연구하는 것은 전두엽의 기능을 향상시킨다.
7. 보고 듣는 일에 조심하라: 앞 뇌는 영적, 도덕적, 지능적인 능력을 통제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것을 향하여 열려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뇌의 건강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 성경과 같이 영적인 감동을 주고, 도덕적 이상을 심으며, 과학적 증거와 논리를 제시하는 주제에 마음을 여는 것은 올바른 뇌를 갖기 위하여 참으로 중요하다.
(다음 호에서 제2부가 계속됩니다.)
5.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이유
서론-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이유
강병국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율법은 필요없는 것인가? 아니다. 율법이 없이는 구원을 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 때문에 구원의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성경 어떤 곳에서는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제부터 깊이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율법의 목적
바울의 신학의 정수인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바울의 일문일답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3:19 상단.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가 율법을 범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19 하단. 즉, 약속의 자손이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만 율법이 필요하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율법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 이상한 말씀 아닌가?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0, 21. 여기서 바울이 참으로 흥미로운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안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2-24.
몽학 선생은 학생을 도와주는 가정 교사이다. 몽학 선생의 할 일은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가기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우침을 줄 뿐이지 우리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 3:7. 율법의 직분은 죽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3.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방황하다가 그 반대의 극단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을 가득 가진 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참담한 경험 속에서 정반대의 극단적 가르침을 붙잡게 되는데, 그것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 예수님만 믿자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이 종말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죄는 무엇인가? 죄는 불법이다 (요일3:4). 우리가 법을 어겼으므로 죄가 우리를 죽인다. 그래서 율법과 선악과는 비슷한 것이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그 취지와 목적에 있어서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를 먹음으로서 생명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이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율법의 순종과 그 행위를 통하여 구원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 것인가? 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한번은 중국에 갔을 때 어느 호텔에 일주일을 머물렀다. 칠층에 묵었는데 그다지 좋은 호텔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책이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하루에도 서너번씩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한번만 올라갔다 내려와도 땀이 쭉 빠졌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살고 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그 다음 일주일이 지나서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호텔로 갔다. 일층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칠층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아,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절로 감사가 나왔다. 칠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고역을 치루어 보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내 힘으로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율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 있기 때문에 남들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고 주위를 살필 뿐이다. 그래서 주위에 나보다 좀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험담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 성일을 지키려고 교회에 와도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율법의 정신에서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자신을 보니 한심해서 눈물만 날 뿐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본 자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진 나를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19절. 율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자꾸 실패하고 넘어짐으로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 방향을 바꿔서 예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죄된 본성을 가진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근본이시며,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애를 사셨던, 의로우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실제 생활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생애 자체이기 때문에 믿음은 율법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율법을 폐할 수는 없다. 믿음으로도 폐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도 폐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므로 하나님 그분과 마찬가지로 불변하다. 그러므로 성서적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율법을 폐지시키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서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애쓰던 것을 이제는 그만 두고 하나님의 방식, 즉 믿음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이다.
믿음 = 성령받은 증거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게 아니라면,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또한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갖는다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면서 앞으로 네 자손이 이렇게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면서 자신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이루실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저 많은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늙은이에게 자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넉넉히 지키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예수를 알고 또한 그분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수박을 겉만 핥고 그 속은 먹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3:1-2. 초대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 기적의 은사들을 주장하지만, 기적은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적은 마귀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 승리하는 능력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성령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3:14.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믿음이 없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믿을 때 우리 속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계신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도 고린도후서에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확인해 봐라. 너희 속에 성령이 없으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성령의 능력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공언해도 우리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산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라. 거기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다윗의 존중심과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은 죄의 노예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2-4절.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되 그것을 자신의 노력과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요약이다. 여기에 그 공식이 나온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5:4-6. 예수님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게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도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10. 우리에게는 이기적인 사랑은 있으나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5.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율법을 지키는 근본 정신인데, 성령께서 이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셔야만 우리가 드디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인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5:13.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성령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로운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6절.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이 나를 지배하면 성령이 우리를 떠나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8:6,7.
아가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인침 받는 것을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사랑은 원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두 남녀의 마음이 맞아야 생긴다. 보고 반해서 마음이 맞아야 이런 사랑이 생기지, 그냥 돈 주고 산다고 해서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진짜 사랑이 없으면 어려울 경우 도망가 버리고 만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랑과 하나님의 인을 연결지어서 말씀하셨다. 홍수나 많은 물로 끄지 못하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인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 자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의 후반부에는 믿음으로 말미음는 의에 대한 결론이 기록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요약과 결론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모두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6-39. 그래서 성경의 사상은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 주면 그 사랑이 드디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여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한가지 문제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힘에 의해서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힘을 잃어버리고 주관됨으로서 새 생활을 시작한 후 구원받고 그 순간 우리의 생애가 끝나든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성령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마귀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온갖 수단, 즉, 몸의 고통, 직장, 자녀문제, 경제문제 등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이런 상황에서 죄를 이기는 것이 가능한가? 성경의 대답은 물론 “YES”이다. 요한일서 2장과 3장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범죄할 수가 없다는 놀라운 말씀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귀와의 실전에 약하기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비가 올 경우 가끔 정전이 발생된다. 천둥번개가 쳐서 3초만 전기가 나가도 아주 귀찮은 일들이 생기곤 한다. FAX에 있는 시간, 디지탈 전화에 있는 시간, 주방의 오븐에 있는 시간들을 모두 올바로 교정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걸어가다 가끔 원치않는 천둥번개에 맞는다. 그러면 잠시 정전이 되어 믿음이 나가고 성령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쓰러지면 우리 힘으로 발버둥을 치다가 다시 주님께 나가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죄는 반드시 이길 수 있으며,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고 있다. 성경이 약속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끔 넘어진다고 해서 죄와 유혹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받아야 한다. 오늘의 구원은 내일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날마다 주님께 굴복하고 날마다 믿음을 새롭게 하고 날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음으로서 성령을 받고, 또 그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또한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성경은 우리가 실수하여 범죄하였을 경우에도 하늘에 중보자가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보증의 말씀을 주고 있다(고후5:5). 보증이란 무엇인가? 보증이란 앞으로 더 크고 좋은 것이 온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매일 보증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이다. 영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자들, 그리고 성령을 받고 예수를 마음에 모신 자들은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그들의 정신이 다른 것에 분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집중된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엄습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과 핍박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 넣으셔서 정결케 하신 후에 그들을 완전한 자로 인치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 마지막 핍박과 환난 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계14:1-5를 보면 계13의 짐승의 표의 환난을 통과한 이후에, 드디어 인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흠없이 서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러한 인침받은 자들,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환난에서 보호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때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단12:1. 성경은 최후의 승리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매일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1부-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이에 대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는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이다.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알아야 죄를 버릴 수 있다. 그 전에는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다. 회개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이 고통을 가져 올까 두려워 그들이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또 잘못을 고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다. 그들은 죄 그 자체보다도 죄가 가져올 고통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회개와 후회의 차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이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판 후에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부르짖었다. 그에게 임할 결과와 심판이 공포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배반한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다. 바로는 애굽에 재앙이 내리자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려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러나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 했을 뿐, 죄 자체를 슬퍼하지는 않았다.
다윗의 회개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감동에 굴복할 때 양심이 각성된다. 그 때 우리는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그 분의 거룩한 율법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요 1:9)신 예수님이 심령 구석구석을 비출 때 암흑 가운데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한 기도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것이 뭔지 보여 준다. 그의 회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죄를 변명하려거나 그 결과를 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윗은 그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의 마음이 불결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죄를 미워하였다. 그는 용서 뿐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를 읽어보라. 이러한 회개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고정관념을 깨어야
많은 사람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여 예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가 용서 받기 위해서 먼저 회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용서받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진정으로 느끼는 자만이 구주의 필요를 느낀다. 그럼,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기 위해 회개를 경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회개는 죄인과 구주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야 하는가?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려면 먼저 회개해야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5:31).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다.
모든 옳은 동기는 예수님께로부터 온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다. 진리와 순결을 갈망하는 마음, 죄된 형편에 대한 자각은 성령이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고 계시는 증거이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구주로죄인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바라볼 때에 심령은 부드러워 지고 마음은 감명을 받고 죄를 슬퍼하게 된다.
사람이 때때로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죄된 행실을 부끄러워하여 어떤 악습들을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모르는 한 감화력이 심령에 작용하여 양심이 각성되고 죄된 생애가 개선된다.
성령께서 그들을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자신들의 악함과 마음 깊숙히 뿌리 박힌 죄의 진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의를 조금씩 이해한다. 그들은 부르짖는다. “죄가 무엇이길래 죄인을 구속하기에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죄인이 이 사랑을 거절할 수도 있고그리스도께 이끌려가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만일 죄인이 저항하지만 않으면그는 예수님께로이끌려가게 될 것이다. 구원의 계획을 깨달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고난을 준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이다. 이 깨달음이 그를 십자가로 인도한다.
채울 수 없는 갈망
천연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속삭여 사람에게 없는 무엇을 찾고자 하는 갈망을 불어 넣으신다. 이 세상 사물이 그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그들이 평화와 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결의 기쁨을 찾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무 만족을 주지 못하는 죄악적 쾌락에서부터 당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만방으로 일하신다. 이 세상의 터진 웅덩이에서 마시려고 헛되이 애쓰는 자들이여, 이 기별을 들으라.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그대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그대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대들은 하나님께 회개할 마음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보여 주시기를 구하라.
구세주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인 이타적인 사랑이 흘러 나왔다. 우리가 구주를 쳐다볼 때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된다. 니고데모처럼 우리는 정직하고 우리의 도덕적 품성은 흠잡을 데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통 죄인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출 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 같아서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이 씻어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하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그리스도의 순결의 빛은 심령을 꿰뚫어 모든 오점을 밝히 드러내고 사람의 품성의 결함과 결점을 폭로한다. 하나님의 영이 율법을 범한 죄를 드러낼 때 찔림을 받고 통회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흠없는 품성을 볼 때에 자신의 죄악이 미워 보인다.
자기에게 온 하늘 사자를 두른 그 영광을 보았을 때에 다니엘은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압도당했다.그는“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하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의 이기심과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증오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갖게 되기를 간구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율법의 의로는(외부적 행위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라고 하였다. 사람들처럼 겉모습만 보았을 땐 자신이 의로워 보였다. 그러나 율법이 얼마나 거룩한지 보았았을 때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겸비하여져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하였다. 그가 율법의 깊은 의미를 바라보았을 때 죄는 무서운 것으로 보였고 그의 자존심은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안목으로는 작은 죄가 아니다. 사람의 판단은 불공평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실상 그대로 헤아리신다. 사람들은 술주정뱅이를 멸시하며 그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은 오히려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이런 죄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거슬린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나님의 품성과 우주의 법칙인 이타적 사랑에 정반대되기 때문이다. 큰 죄를 지은 자는 자기의 수치와 부족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아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만은 그리스도와 그의 무한한 축복에 대하여 마음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두 기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하고 기도한 가련한 세리는 자신을 심히 큰 죄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죄와 수치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의 자비를 구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죄에서 해방시켜주시도록 마음문을 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를 받지 못한 것을 나타냈다. 그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비교하여 자신이 얼마나 죄된 사람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못 느꼈으므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마세요
그대가 자신의 악함을 깨달으면 자신이 더 나아지기까지 기다리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에수님께 나가기 위해 자신들이 충분히 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자신의 노력으로써 선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는 누가 좀 더 힘있게 권고해 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좀 더 좋은 기회나 좀 더 좋은 기분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께 있는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크시므로 그의 은혜를 저버린 자라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지 말라. 죄가 얼마나 악한지는 십자가를 볼 때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무 자비하셔서 죄인을 죽게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갈바리를 쳐다봐야 한다.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사망은 모두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람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기 전에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바라보며“나도 그들만큼 선하다. 그들은 나보다 더 착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도 나처럼 쾌락을 좋아한다.”는 말로써 자신들을 변명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지고 자신들의 의무를 등한히 한 것에 대한 핑계를 삼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결점으로 핑계를 댈 수 없다. 주께서는 허물 많은 인간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지 않으셨다.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죄를 비평하는 자들은 더욱 착한 생애로 고상한 모본을 보여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처럼 고상한 개념을 가졌다면 그만큼 죄가 더 크지 아니한가?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실수, 지체
지체하지 말라.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님에 의해 마음의 순결을 얻기를 지체하지 말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실패해서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 지상에서의 생명은 짧을 수도 있고 확실성이 없다. 하나님의 성령의 호소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의 생애를 살기로 택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죄가 아무리 작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우리 마음에 품으면 크게 손해 본다. 만일 우리가 죄를 정복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정복하고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과실을 먹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그러한 무서운 결과가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은 죄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 이 불순종은 사람을 하나님과 분리시켰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길을 터 주었다. 여러 시대를 내려오면서 이 땅에서는 고통의 부르짖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만물이 인류의 불순종의 결과로 인하여 함께 탄식하며 괴로움을 받고 있다. 하늘도 죄의 영향을 느낀다. 죄를 결코 작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할 때마다그대의 마음은 더 굳어진다. 또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더 이상 하나님의 성령의 간절한 호소에 응할 마음도 그럴 능력도 없어지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때나 원하는 때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소홀히 여길지라도 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한 양심을 진정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죄악의 생애를 한 후 예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그릇된 것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린다. 대담하게 불신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 진리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자는 뿌린 것의 수확을 거둘 것이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니”(잠 5:22)라는 솔로몬의 말은 악을 사소한 것으로 보는 데 대한 무서운 경고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죄짓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으며 그의 은혜를 받고자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 하실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때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 8).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동기와 의사와 목적을 아신다. 그대는 죄로 더러워진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가라.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자 앞에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하고 부르짖으라.
많은 사람들이 마음은 깨끗이 씻지 않고 형식적 경건만을 받아들인다. 우리는“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기도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라. 마치 생명이 위기에 처한 것처럼 진지하라.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들 개인 사이에 영원히 결정하여야 할 문제이다. 그저 원하기만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거룩함의 큰 원칙을 밝히 보여 준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실망한다. 그러나 소망을 잃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도록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하셨다. 그는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으로써 죄에 빠진 당신의 자녀의 마음을 사려고 하신다. 세상의 어떤 부모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을 순 없다. 아무도 죄인에게 그보다 더 간절하게 애원할 수 없다. 사람의 입술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더 인정 있는 간청이 새어 나온 적이 없다. 그의 모든 허락과 경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표시이다.
사단이 그대에게 와서 큰 죄인라고 공격할 때 그대는 그대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의 공로에 대하여 말하라. 구세주를 바라볼 때 도움의 빛이 이르러 올 것이다. 그대의 죄를 자복하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고 담대히 말하라. 그대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하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 빚진 자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한 사람은 그 주인에게 적게 빚을 지고 다른 사람은 매우 많이 빚을 졌는데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어느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다. 시몬은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눅 7:43)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큰 죄인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의 희생의 공로는 우리 죄를 씻기에 충분하다. 많이 용서받은 자는 그를 더 많이 사랑하고 그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희생에 대하여 그의 보좌 곁에 가장 가까이 서서 그를 찬송할 것이다. 우리가 죄의 악함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이다.
(이 글은 Peace Above The Storm 에서 발췌했습니다.)
회개에 관한 성경절 모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3:1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2:38,39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7:10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죄의 결과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몰인정함이 어쩌면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죄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던지는 우리의 거칠고 냉랭한 말투는 그들을 깊은 낙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미묘한 것이다. 오직 마음을 아시는 분만이 사람들을 어떻게 회개하도록 인도할 것인지 아신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해야만 잃어버린바 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다. 그대는 엄격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이론이 아무리 정확하고, 그대의 말이 아무리 진실할지라도, 그와 같은 자세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교훈과 논쟁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할 때, 말과 행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러한 동정심은,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짓고 괴로워하거나, 시험을 받아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드러운 친절과 동정으로 당신께 나오라고 초청하신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즉 세리들과 죄인들이었다. 그분께서 결코 호의를 보이실 수 없었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존심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멸망시키고자 애쓰는 영혼들을 위하여 확고한 목적과 끊임없는 관심과 불굴의 인내로 일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가장 깊은 타락에 빠진 사람에게 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존경심으로 대하셨다. 우리는 실수한 자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아야 하며, 낙담과 실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고, 동정과 도움을 갈망하는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거에 범했던 유사한 실수와 잘못들을 생각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다.
2부-새로운 탄생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할 때, 그대는 죄의 악함과 그 세력과 쓰라림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다. 죄가 미워 보인다. 죄가 어떻게 그대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죄가 그대를 노예로 만든 것을 알게 된다. 그 세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속수무책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대의 동기는 불순하고 마음은 깨끗치 않다. 그대의 생애가 죄로 차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대는 용서받아 깨끗하여지고 죄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고 그분처럼 변화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평안 곧 하늘의 용서와 평화와 사랑이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고 지혜로도 구할 수 없다.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기를 결코 희망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돈 없이 값없이”(사 55:1) 선물로 제공하신다. 만일 그대가 손을 내밀어 붙잡기만 하면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주께서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겔 36:26)이라고 하셨다.
그대는 그대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마음에서 버렸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인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대의 죄를 씻어 버리고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라. 그리고 그가 약속하셨으므로 이루실 것을 믿으라.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치신 교훈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받은 줄로 믿어야 우리의 것이 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권능을 믿을 때에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 그가 눈에 보이는 질병을 고치시자 사람들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죄도 사하실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 이 사실은 그가 병자를 고치실 때에 명백히 밝히셨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6). 이처럼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의 이적에 대하여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병을 어떻게 고치셨는지에 대한 간단한 성경 기사로써 우리는 어떻게 그 분을 믿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운다. 베데스다의 연못에 있던 환자를 생각해 보자. 이 불쌍한 사람은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38년간이나 수족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셨다. 그는 “주여 당신이 만일 나를 낫게 하여 주시면 내가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겠나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 나은 줄로 인정하고 즉시 힘을 써서 걸으려고 했을 때 걷게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다. 그는 고침을 받았다.
오직 믿음으로
이와 같이 그대도 죄인이다. 스스로는 과거의 죄를 속할 수도 없고 자기의 마음을 고칠 수도 없고 깨끗케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 모든 것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허락을 믿고 자복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를 섬기기로 결심하라. 이렇게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당신의 말씀을 이행하실 것이다. 이 약속을 믿을 때에 -용서함을 받고 깨끗이 씻음을 받은 줄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마치 병자가 고침을 받은 줄로 믿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걸을 능력을 주신 것처럼 그대도 나음을 입을 것이다. 믿을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대들이 고침을 받은 것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것은 내가 느끼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말씀하셨다. 이 허락에는 조건이 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이 씻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구할 수 있으며 또한 받은 줄로 믿고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께 나가 깨끗이 씻음을 받고 부끄러움이나 후회 없이 율법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롬 8:1, 4)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 18, 19). 하나님을 믿는 이 단순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그대의 마음에 새 생명을 창조해 주신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태어난 어린 아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대를 사랑하실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 그대를 바쳤으니 다시 돌아서지도 말고 그에게서 떠나지도 말고 오직 날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그에게 바쳤다”고 말하라. 그리고 성령의 은혜로 그대를 보존해 주시기를 청하라.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그의 안에서 사는 것도 역시 똑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골 2:6)라고 하였다.
내 모습 이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려면 먼저 그들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주께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할 수 있다. 그들은 연약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의 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악을 능히 대적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많고 무력하고 도움이 요구되는 그러한 상태 그대로 당신께 나오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죄가 많은 그대로 나가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의 발아래 엎드릴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의 팔로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에게서 모든 누추한 것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일을 그의 영광으로 생각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패한다. 그들은 주께서 자신들을 직접 개인적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조건대로 응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죄가 관대히 용서함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허락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버리라. 그 허락은 모든 회개하는 죄인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힘과 은혜를 주시려고 봉사하는 천사들을 두고 계신다. 아무리 죄가 많은 자라도 그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 힘과 순결과 의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죄로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의의 흰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는 그들에게 살고 죽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피차 대우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신다. 그대를 향한 그 분의 생각은 자비와 사랑과 지극한 긍휼이다. 그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55:7, 44:22)고 하신다.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사단은 하나님의 복된 보증을 빼앗으려고 노리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한줄기의 희망이나 한줄기의 빛이라도 빼앗으려 하나 그대는 이렇게 하도록 놔두지 말아야 한다. 유혹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께서 나를 살리시려고 죽으셨다. 그는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내게는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니 내가 비록 그의 사랑을 저버리고 내게 주신 축복을 낭비하였을지라도 나는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가서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이 비유는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어떻게 영접하시는지 말해 준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눅 15: 18-20)었다.
아버지 마음
그러나 그처럼 인정깊고 감동적인 비유라도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라고 하셨다. 탕자가 타지에서 자기 재산을 낭비하는 동안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심히 사모하였다. 그대가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탄원과 호소이다.
성경의 귀한 약속들을 두고 어떻게 의심을 품을 수 있는가? 그 불쌍한 죄인이 집에 돌아와 죄를 버리기 원하는데 주께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발 앞에 나오는 자를 물리치시리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은 단연 버리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이런 생각보다 더 그대에게 손해되는 게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어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가 택한 다음의 말씀보다 더 강하고 간곡한 것이 어디 있으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의심과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여, 위를 쳐다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가 그대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도하라. 성령께서 오늘 그대를 부르신다. 전심으로 예수께로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의 축복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허락들을 읽을 때에 그것들이 말로 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의 표시임을 기억하라.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을 결코 다함이 없는 긍휼로 생각하신다. “우리가…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님께서 그대를 돕는 자이심을 믿으라. 그는 당신의 도덕적 형상을 사람들에게서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대가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그 분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는 자비와 용서로써 그대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
이 글은 Peace Above The Storm 에서 발췌했습니다.
3부-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품성이 변화된다. 성경은 이 변화를 새로남이라고 한다. 이것은 또한 농부가 심은 좋은 씨앗의 성장에도 비유된다. 이와 같이 회개하고 새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간 자들은 “갓난 아이”(벧전 2:2)와 같이 “점점 자라”(엡 4: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되는 것이다.
땅에 심은 좋은 씨앗처럼 그들도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이사야는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사 61:3)고 하였다. 이렇게 천연계의 사물에서 우리는 신비한 진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온갖 지혜를 갖고서라도 작은 생명체조차 만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생명으로만 동식물이 산다. 영적 생명 역시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온다.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요 3:3-영어 성경 난외주 참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없다. 자라남도 태어남과 마찬가지이다. 꽃봉오리를 피게 하고 꽃이 열매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씨가 발육되어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막 4:28)을 이루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모든 초목과 꽃들은 염려나 걱정이나 노력으로 인해 자라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무슨 염려나 자기 힘으로 키를 늘일 수 없다. 그대들 역시 그대들의 염려나 노력으로 영적으로 자라날 수 없다. 초목이나 어린 아이는 생명을 위하여 공급되는 공기, 햇빛, 음식으로 자라난다. 이 천연계의 선물들이 동식물들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오신다. 그는“영원한 빛”(사 60:19)이시요 “해요 방패”(시 84:11)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호 14:5)고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임하리니”(시 72:6) 그는 생수이시며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요 6:33) 하나님의 떡이시다.
예수님 안에 거함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무한한 선물로 주심으로 온 세상을 은혜의 공기로 감쌌다. 누구든지 이 생기를 주는 공기를 호흡하기로 선택하면 살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되기까지 자라날 것이다.
꽃이 태양을 향할 때 밝은 햇빛이 꽃에 아름다움을 준다. 그처럼 우리도 “의로운 해”이신 예수님께로 향할 때에 하늘의 광선이 우리에게 비치게 되고 우리의 품성은 계발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진리를 다음 말씀으로도 표현하셨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 5).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시험을 대항하고 은혜 가운데 자라날 힘이 없다. 그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자란다. 그대가 그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스스로 무슨 일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다가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옳은 생애를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것이나 기쁨이나 유용성, 이 모두 날마다 시간마다 그와 더불어 교통함으로, 그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되는것이다. 그는 믿음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이요 항상 계시는 자시다. 그는 우리의 가는 길에 처음과 나중에만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가는 길의 발자국마다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고 하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까”하고 묻는가? 처음에 그를 받아들인 똑같은 방법으로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 그대는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그를 봉사하며 순종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쳤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다. 그대는 자신의 죄를 속할 수도 없고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해 행하실 줄을 믿는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난다. 그대는 모든 것-마음과 의지와 봉사-을 바쳐 그의 모든 요구에 응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그대의 마음 안에 계셔서 그대의 힘과 의와 영원한 돕는 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순종할 힘을 얻을 것이다.
아침기도
아침마다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그대의 첫째 일로 삼으라. 이렇게 기도하라. “오 주여! 나를 받으사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나는 나의 모든 계획을 당신의 발앞에 놓나이다. 오늘 나를 당신의 일에 써 주시옵소서. 나와 같이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일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날마다 행할 일과이다. 아침마다 그 날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맡겨 그의 섭리에 따라 행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날마다 그 생애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되고 그대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닮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애는 안식의 생애이다. 들뜬 흥분은 없지만 활기차고 평화로운 신뢰가 있다. 그대의 소망은 그대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다. 그대의 연약함을 그의 힘에 그대의 어리석음을 그의 지혜에 그대의 연약한 의지를 그의 견인불발에 연합하라.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을 생각지 말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하심에 대하여 생각하라. 극기의 그리스도, 굴욕을 받으신 그리스도, 순결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 무한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이것이 심령의 명상할 제목이다. 그대가 그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를 모방함으로, 그를 온전히 의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는 안식과 확고함과 신뢰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다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초청하신다. 다윗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 37:7)고 하였다. 또한 이사야도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사 30:15)이라는 보증을 주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모든 일을 중지하라는 뜻이 아니다. 안식에 대한 구주의 약속은 일을 하라는 부르심과 병행한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마 11:29)라.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많이 쉬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서만 생각할 때에 힘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된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를 꾀어 우리의 생각을 구주에게서 떠나게 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통하는 일을 방해하려 한다.
사단의 수단
세상의 오락, 생활의 염려와 고민과 비통, 다른 사람의 결점, 또는 자신의 결점과 불완전함, 이런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돌리도록 사단은 애쓸 것이다. 그의 간계에 빠지지 말라. 사단은 참으로 양심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의 결점과 약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고 사단이 승리한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의 중심으로 삼지 말고 또는 구원을 얻을까 못 얻을까에 대하여 걱정과 염려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을 우리 힘의 근원인 분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기고 그를 신뢰하라.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하자. 그를 생각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잊어버리라. 모든 의혹과 공포심을 버리라. 사도 바울처럼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고 말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그대가 맡긴 것을 능히 보호하실 수 있다. 그대가 자신을 그의 손에 맡기면 그는 그대를 이기고도 남게 하실 것이다.
눈을 예수께 돌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셨을 때에 그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 말고는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다. 사단은 항상 이 줄을 끊도록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우리로 다른 주인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
우리의 눈을 언제나 예수님께 고정시킬 때 그는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를 바라볼 때 우리는 안전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그를 항상 바라보는 가운데서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 18).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구주를 닮게 되었다.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분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를 찾고 만나서 따라갔다. 그들은 집에서나 식탁에서나 골방에서나 밭에서나 그와 함께 있었다. 마치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다니면서 날마다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거룩한 진리를 배웠다. 마치 종이 상전을 주목하는 것처럼 그를 주목하면서 그들의 의무를 배웠다. 이 제자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 5:17)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죄와 더불어 싸웠고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 우리처럼 은혜를 받아야 했다.
구주의 형상을 가장 완전히 반사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본래 그러한 아름다운 품성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명예욕이 많았을 뿐 아니라 조급하고 쉽게 화를 냈다. 그러나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하여졌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일상 생애 가운데 나타난 능력과 인내, 권능과 애정, 위엄과 겸손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찬탄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날마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렸고 마침내 그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 그의 품성을 변화시켰다.
이것이 예수님과연합할 때 생기는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시면 온 성격이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이 새 사람을 만든다.
약속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고 약속하셨다. 제자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보혜사 성령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약속을 주장했다. 오순절에 보혜사가 그들에게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하셨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 마음 속에 항상 거하실 것이었다. 예수님과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보다 더 친하게 되었다. 내재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사랑과 권능이 그들을 통하여 비쳤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행 4:13)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기 원하신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 가운데도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기를 구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구주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들이…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면 그는 우리 속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처럼 일하고 그분과 같은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며 그 안에 거할 때“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이 글은 Peace Above The Storm 에서 발췌했습니다.
4부-초청은 받으셨는데 예복은 입지 않으셨군요!
예복에 대한 비유는 가장 중요한 공과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혼인으로써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표상되었으며 예복은 혼인 잔치에 참석할 자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합당한 품성을 표상한다.
큰 거리에 나간 임금의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왔다. 이 무리는 섞인 무리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초청을 거절한 자들 못지 않게 잔치에 초대한 분에게 참된 존경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잔치의 푸짐한 음식을 먹기 위해 왔지 임금을 존경할 마음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노출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왔을 때에 각 사람의 본성이 드러났다. 그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손님을 위하여 임금이 마련하신 선물로서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들은 이 예복을 입음으로써 잔치를 베푼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이 평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비싼 값을 주고 마련한 그 예복을 입는 일을 창피스럽게 여겼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그의 주인을 모독하였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는 임금의 질문에 대하여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임금은 종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명했다.
잔치 자리에서 임금이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한다.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며, 생명책에 저희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참된 제자는 아니다. 최후의 상급을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가 줄 상이 그에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실”(계 22: 12)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각 사람의 행위가 결정될 것이며 그것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의 상벌이 결정될 것이다.
하늘 궁정에서 진행되는 조사 심판은 사람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행해진다. 예수님을따른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다 심사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늘 책에 기록된 대로 심사를 받게 되고 그의 행위에 따라 각 사람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된다.
비유 가운데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교회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계 19:8)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엡 5:27)는 품성을 얻게하기 위하여 교회에게 이것이 주어졌다. 성경에는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홈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순결한 흰 두루마기는 본래 우리의 시조가 거룩한 에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 생애를 살았고 모든 애정을 천부께 바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빛이 그 거룩한 부부를 둘러쌌다. 이 빛의 두루마기는 하늘의 순결한 영적 옷의 상징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충실했더라면 그 빛의 두루마기가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그들을 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고 그들을 둘렀던 빛은 사라지게 되었다. 벌거벗게 되자 부끄러워서 그들은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림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 했다.
분장
이 일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모든 사람들이 늘 해온 일이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벌거벗게 된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옷을 입었다. 그들 자신의 행위로써 그들의 죄를 가리우려 했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순결한 두루마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함께 앉을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이나 세상 나라 백성들이 입는 옷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신 옷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옷 곧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 주신다. 그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계 3:18) 하라고 하신다. 하늘 베틀로 짠 이 두루마기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인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셨고 이 품성을 우리에게 나눠 주신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죄로 더럽혀졌다.
예수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죄는 “불법”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키셨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요 15:10)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이나 죄로 인해 벌거벗고 뒤틀린 우리의 몸은 보지 아니하시고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당신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를 보게 된다.
심판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임금의 심사를 받았다. 임금의 요구대로 예복을 입은 자들만이 잔치 자리에 앉도록 용납되었다. 복음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도 그러하다. 모든 사람들이 크신 임금의 정밀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만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은 우리의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지 여부를 보여 준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만으로 넉넉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어떤 공언을 하든간에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진리가 마음을 지배하고 애정을 통제해야 한다. 우리의 온 품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쳐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 일획까지도 매일 실천해야 한다. 신의 성품을 나눠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의의 표준 곧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 율법이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헤아릴 때 사용하실 표준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율법이 폐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마 5:17, 18)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는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은 율법을 범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율법을 변경하거나 폐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확실하게 하셨다. 그분이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거나 율법의 표준을 낮추려 하심이 아니요 공의를 보존하기 위함이며 율법은 변할 수 없고 영원히 굳게 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사단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형상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될 때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율법은 그분의 품성의 사본인 동시에 모든 품성의 표준이 된다. 이 귀한 표준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구성할 백성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께서는 그들이 하늘 가족을 구성할 만한 자들이 될 수 있다고 믿으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임금님의 잔치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피로 씻은 옷을 입은 무리들과 연합할 권세를 갖게 될 것이다.
오늘 나의 상태는?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복음의 축복과 특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품성의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그분에 대한 믿음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악을 행하고자 하는 선천적, 또는 후천적 성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들로써 잔치에는 왔으나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는 입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인간 도덕가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나타냄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을 그들은 거절했다.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자들이 더 이상 세상과 구별된 특별한 백성이 아니다. 경계선은 희미해졌다. 세상이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터인데 오히려 교회가 세상으로 기울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다. 교회는 매일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찬양하면서 품성의 결점을 가리기 위하여 외적으로 의로운 척한다. 그러나 이같은 그들의 노력이 심판의 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도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수 있다. 사람이 겉으로 나타나는 범법 행위만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속의 비밀을 저울질한다. 모든 행동은 그 행동을 조장한 동기에 의하여 판단된다.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에 부합되는 것만 심판 날에 능히 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는 이 사랑을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요 3:16)하셨을 때에 그분은 값으로 사신 당신의 소유물 곧 당신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셨다. 그분은 온 하늘을 주셨는 데 우리는 거기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어 우리의 대적 마귀에게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죄를 묵인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단의 죄를 묵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담과 가인의 죄를 묵인하지 않으셨고 또한 어떤 다른 사람들의 죄도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죄를 못 본 체하시거나 우리의 품성 가운데 어떤 결점을 묵과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유구무언
값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거절하는 자들은 혼인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을 거절하고 있다. 비유 중에서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큰 심판 날에도 이와같이 될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그들의 품성의 결점을 핑계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 날에는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시대에 소위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에게 가장 고상한 특권이 위탁되어 있다. 우리가 누리는 특권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졌던 특권보다 훨씬 더 크다. 풍부한 영적 만찬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무한한 대가를 치르고 마련된 예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와 성령의 안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생에 대한 확실한 보증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늘 잔치를 준비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지 않으신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최후의 결정의 날은 엄숙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계시 가운데 본 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 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1, 12).
그 날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업신여겼던 의가 가장 가치있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의 품성이 사단의 기만적인 유혹의 지배를 받아 형성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옷은 최초의 배도자 사단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표지(標識)가 된다. 그 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일의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은혜의 시기가 다시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어야 할 때는 오직 이 세상에 사는 동안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늘 집에 들어가기 위하여 품성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뿐이다.
우리를 위한 은혜의 시기는 빨리 끝나려 하고 있다. 끝은 가깝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 34). 그 날에 그대가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임금의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이 글은 He Taught Love 에서 발췌했습니다.
[출처] 제53호-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이유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