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교육의 파행을 불러올 "독서능력검정시험"을 거부한다
예전에 국어 시간에 밑줄 치고 비유법을 외우게 하며 시를 가르친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문학을 배웠기에, 학생들은 시와 소설에서 더 멀어져버리곤 했다. 우리 국어 교육이 걸어온 시행착오이다. 그러나 오늘 그 시절의 낡은 시행착오를 책읽기 분야에서 되풀이하려는 시도가 있다.
(사)독서새물결모임은 "한국독서능력검정시험"이란 독서인증제를 시행하려 한다. 대학입시에 인증서가 도움이 된다고 광고하면서 자격 인증을 하는 제도를 만들면, 학생들이 자극을 받아 책을 더 많이 읽어서 좋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시험은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한자 시험에 워드 시험에 그밖에 또 무슨 경시 대회에, 온갖 인증제가 난립해서 어지럽다. 우리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너무 시달린다. 생활기록부에 적을 수 있어서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 말을 편하게 들지 못하는 학부모들은 자녀를 등 떠밀기 십상이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시험 문제를 풀어서 높은 등급을 받으려고 책을 읽어야 한다면 학생들은 단편 정보를 외우고 또 외우는 책읽기를 하게 된다. 도서목록을 내 주고, 그에 대해 객관식 문제 90%와 단답형 주관식 10%로 평가한다는 발상 자체가 크게 잘못되었다. 한국에서 예능 교육은 열풍인데, 뛰어난 예술가가 적게 나오는 이유가 "경시대회용"으로 학생들을 심하게 훈련시켰기에 그들의 창의성이 길러지지 못한 데 있다는 진단을 기억하자.
자기 안에 내면화하지 못한 지식을 내세워 세상을 그르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여럿 보았다. 책 한 권이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인증시험에 나오는 객관식 문제를 풀려고 하는 책읽기는 학생에게 어떤 흔적을 남길까. 객관식 시험문제를 풀려고 학생들이 눈에 힘을 주거나 지친 얼굴로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책은 자신의 기질에 맞게 섬세하게 가르침을 받으며 읽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권장 도서를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시험에 나오니까 읽으라고 하면, 더 많은 학생들이 책읽기 교육을 받아서 오히려 책과 더 멀어지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이 시험은 특정 사교육 업체에서 후원을 받고 있어 몹시 위험하다. 공교육 교사가 사교육 업체와 손을 잡으면 학생들이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 사교육은 오로지 이윤을 내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이 상업적 욕망에 끌려가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사교육 업체 홈페이지를 보면, (사)독서새물결교사모임 회장이 직접 쓴 추천사가 나와 있다. 심지어 이 모임 관계자이면서 이 사교육 업체의 교재를 집필한 교육청 소속 연구사가 업체 홈페이지에 이 업체를 추켜세우는 글을 실었다. 우리는 이 일이, 사교육 업체와 손을 잡은 일부 공교육 교사의 위험한 "불장난"이라고 판단한다.
전국 7000여명의 국어교사들이 한데 모여 국어교육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전국국어교사모임은 "독서능력검정시험"이 책읽기 문화를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사)독서새물결모임이 독서인증제를 무리하게 추진하는 일을 그만 멈추고 스스로 백지화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국의 독서관련단체들과 학생들 앞에 진지한 마음으로 사과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만일 이런 요청마저 거부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독서관련단체들과 힘을 모아 (사)독서새물결모임이 추진하는 "독서능력검정시험"이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싸울 것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 회원들은 "독서능력검정시험"에 어떤 식으로든 협조하지 않고 단호하게 반대한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학생들을 짓누르고 사교육을 부추기는 "독서능력검정시험"의 즉각 폐지를 요구한다."
2004년 3월 30일
전국국어교사모임(http://naramal.njoyschool.net, 02-744-3426)
이사장: 이명주 사무총장: 박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