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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랑”(예레미야 9:23-24) 2012.12.30.
어느 커피숍에서 절대로 지기 싫어하는 네 명의 할머니들이 자식자랑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할머니가 말합니다.“우리 아들은 천주교 신부라우. 남들은 우리 아들보고,‘오 귀하신 분!’이라고 부른다우” 그러자 두 번째 할머니가 입을 삐죽이며 나섭니다.“그래요? 우리 아들은 추기경인데. 남들은 우리 아들더러‘오, 거룩한 분!’이라 불러요” 그러자 세 번째 할머니가 질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합니다.“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요. 우리 아들은 교황이지요. 남들은 우리 아들보고,‘아이고 고결하신 분!’이라 그러던데요.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은 없죠? 푸하하하” 그런데 이제 교황까지 나왔으니 자랑은 일단 멈춰야 할법한데 남은 마지막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말합니다.“다 집어치워요. 우리 아들은 뚱보에 곰보 거기다 숏다리이지요. 그래도 남들은 우리 아들을 보면 한결같이‘오 마이 갓(God!)이라고들 한답니다”
남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은 어른들이고 애들이고 간에 누구나 지니고 있는 인간의 욕망인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디만 어떤 사람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표시나게 자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은근히 자랑합니다. 자랑하는 내용이나 방법에 따라 듣는 상대방이 일시 함께 즐거워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시답지 않게 생각되거나 혹은 비웃음을 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적 상실감을 야기시켜 묘한 불쾌감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오늘이 금년 마지막 주일이고보니 지나간 한 해동안 우리가 한 모든 말로 야기된 실수와 잘못을 되돌아보고 부끄러워하며 돌이키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는 타락한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지만, 저들 유다 백성들은 자신만만하였던 것입니다. 북방 바벨론의 침공이 예견된다해도 자신들에게는 문제해결을 위한 충분한 외교적인 지혜와 나름대로의 전술전략이 있으니 크게 염려할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여 지혜롭지 못한 대처로 혹 전쟁이 발발한다 하여도 자신들에겐 한없이 용맹스러운 용사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또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된다 해도 전쟁수행에 따른 필요한 군비를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는 든든한 재력이 있으니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는 식으로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국력에 나름대로 긍지와 자랑을 하고 있었던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오늘의 본문 말씀을 주신 줄 믿습니다.“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이 말씀은 당시의 유다백성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세 가지의 자랑을 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 대선을 앞두고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 외 수많은 교수 언론인 및 관련 전문가들이 TV 앞에 나와서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나름대로의 지혜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만 지나고보면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던가요? 이같은 세상의 일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인 구원에 관련된 일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서 무슨 지혜를 논하느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9말씀에“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동안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교만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얻게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약 고린도전서에서도“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였으며(고전1:20-21),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란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마11:25).
둘째로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힘자랑하지 말라시는 말씀입니다. 힘에도 여러 종류의 힘이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힘 곧 체력이 있습니다. 또 체력은 국력이라고도 합니다만 국력을 좌지우지하는 권력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도 툭하면 성경에 나오는 골리앗과 소년 다윗의 싸움을 예로 드는 것을 봅니다만 이는 단순히 약자가 이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이야기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소년 다윗을 말함일 뿐이지요. 아무리 블레셋의 골리앗 장수의 용맹이 출중하다 해도 하나님을 도외시한 한낱 인간의 용맹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자생존이라며 강한 것을 주장하나 하나님께서는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들 가운데 고요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고전 1:27하).
셋째로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나‘어리석은 부자 농부’의 비유에서 부를 자랑함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혹 우리 생각에 나는 부자가 아니니 이 문제는 내게 해당될 것 없다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함을 자랑한다는 말은, 돈을 사랑한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에 열중하는 심리는 부자라고 더하고 가난한 자라고 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하였고, 이는 곧 우상숭배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골3:5).
이같이 인간의 지혜와 용맹과 부를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자랑 자체의 헛됨에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적극적으로 자랑하지 못하게까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라고 하셨고, 이어서 그 이유도 밝히셨습니다.“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고린도전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고전1:29,31). 오늘 본문말씀 그대로입니다.“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안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24절)”
즉 하나님을 알되 어떠한 하나님이냐?“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체험하며, 정의로 판단하시며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체험하며 이를 삶으로 증거하며 자랑하는 것이 가장 귀하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마음에 하나님으로 충만하며 배부르면 세상의 지혜나 힘이나 재물 기타 등등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니 뭔가 대체할 것을 찾게되니 세상의 것에서 만족하고 자랑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적나나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깨닫는 자가 곧 마음에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이며 성령으로 충만한 자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정죄와 피할 수 없으며 엄위한 심판을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기록되기를“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롬3:23-26).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이며, 동시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나타내심 그 자체인 것입니다. 로마서는 계속해서,“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5:8). 요한일서에도 이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8하-10)”라고요.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노라면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그대로 가차없는 형벌을 받고 심지어 죽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전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상한 성경학자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 아니냐고 까지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대한 심한 오해의 소치입니다. 구약에서도 사랑의 하나님되심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나서를 보아도 이방 니느웨를 멸하시려 했으나 저들이 회개하자 돌이켜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선지자 요나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목하고 헷갈릴 정도였지요.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만, 이는 우리 죄인된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율법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음도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율법 때문인 것입니다. 즉 율법의 엄한 잣대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시어 이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를 통해서 우리 죄인된 인간들의 죄를 속량하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며, 이를 마음에 영접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드러내신 행위의 극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십자가 외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서도“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상)”고 기록하였고, 고린도후서에서도“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고 기록된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의 일상사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당신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나타내시는 줄 믿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생의 여러 문제로 고난을 당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케 됩니다. 그 고난이 가난이든, 병이든, 학업이든 결혼이든 일의 실패든, 늙어 처량한 신세가 되었든, 또는 마지맋 죽음에 이르든, 그 어떤 고난이든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에 직면하게 하여, 겸손히 낮아져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며 결국은 이로써 우리를 당신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공의이시며 또한 깊은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확장되어 나타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우스개소리로, 요즘은 PR 시대이기 때문에‘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려야 하는 시대’라고 하던데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이듯 세상적인 지혜나 용맹이나 부를 피하고, 오직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또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임을 널리 알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새해에는 저와 여러분이 세상적인 지혜나 권세나 재물을 갖고서 자랑하다가 사람들에게 불쾌감이나 비웃음이나 조롱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