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하림유사>입니다.
오늘은 감찰공 조민도의 외아들이자 지운리 묘사의 주인공인 주부공(主簿公) 할배의 족보를 번역해 올립니다. 그 이전의 선조들과 산소의 소재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대 전서공 열(悅) 정2품, 산소 원북
11대 안(安), 벼슬하지 않고 일찍 별세함, 산소 하림 부상등
12대 어계 려(旅) 정2품, 산소 매바위(법수면)
13대 금호(金虎) 종2품, 산소 원북 전서공 조열 묘역의 맨 윗자리
14대 남계공 수만(壽萬), 급제 후 관청에 한번도 출근하지 않았음, 종9품, 산소 하림 가남골
15대 하구정 응경(應卿) 종6품, 산소 하림 남계공 재실 뒷산
16대 성(城) 종2품, 산소 하림 남계공 재실 뒷산
17대 감찰공 민도(敏道) 사과(司果,종5품무관직), 증 사헌부감찰 암행어사 정6품, 산소 하림 남계공 재실 뒷산
18대 주부공 영기(英沂) 종6품, 산소 지운리(진양군 이반성초등학교 안 쪽)
19대 징원(徵遠), 영기의 장남, 산소 진양군 이반성면 지운리(池雲里)
19대 징구(徵久), 영기의 차남, 산소 하림 새터, 이 산소는 원래 새짓골에 있던 것을 2000년대 초에 하림 새터로 이장한 것이다
(족보 번역)
○ 함안조씨 감찰공파 18대 영기(英沂, 1583-1648, 인조26년 3월 29일 66세 亡), 주부공(종6품) 할배
영기는 감찰공 민도(敏道)의 외아들이다. 큰 아버지인 판서공 신도(信道)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1980년대에 판서공의 친자손이 나타남으로써 감찰공으로 되돌아왔다. 그 때 영기의 장남인 징원(徵遠) 이하의 선조들도 모두 돌아왔다. 영기 선조님 슬하에는 징원과 징구, 이 두 명의 아들만 있다.
영기英沂 자는 성여(聖與)이다. 1583년(선조16년)에 태어나서 1648년 3월 29일에 66세로 별세했다. 계급은 종6품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였지만 정6품직인 승훈랑(承訓郎,정6품)을 맡아 일했다. 병자호란(1636년 12월 발생, 1637년 1월 종결) 때 의병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자세한 것은 <언행록>을 보기 바란다. 언행록에는 그는 무술에 뛰어났고, 800명의 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公)은 7세에 임진왜란을 당했다. 그 전란에서 큰 아버지인 판서공 신도(信道)가 왕의 가마를 호위하다가 순절했고, 부친인 민도(敏道)는 상주전투에서 순절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라서 유해를 수습해오지 못 했던 것을 평생 마음 아파했고,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로 불타 올랐다. 그는 무술을 연마하는 책과 병법서(兵法書)를 구해 무술을 연마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칼을 뽑아 나무를 내리쳐 베면서 "내가 어찌 왜적을 이와 같이 베지 않으리오"라고 했다. 그가 54세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즉각 80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한양으로 달려가서 적을 격퇴했다. 인조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특별히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종6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숭명배청(崇明排淸)의 태도를 고집하며, 청을 군(君)의 나라로 떠받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청나라가 시작된 뒤 8년 후에 일으킨 전쟁이다. 이 때 청 태종은 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 부인은 상주김씨이고, 기일(忌日,제삿날)은 4월 6일이다. 장인은 참판(종2품)에 증직(贈職)된 김양지(金養之)이고, 처조부는 한림원(翰林院, 국왕의 연설문 작성을 맡은 관청, 정3~4품)직에 있었던 김렴(金廉)이다.
○ 영기의 묘는 진주(진양군 이반성초등학교 부근) 지운리(池雲里)에 있고, 건좌(乾坐) 방향이고, 부인과 합장하여 쌍분이다. 묘비명은 진성(眞城) 이만도(李晩燾)가 지었다.
○ 후실(後室)은 김해김씨이고, 8월 3일에 별세했다. 장인은 김현한(金賢漢)이다.
○ 후실의 묘는 죽산의 여봉 아래에 있고, 신좌(申坐) 방향이다. 묘비명이 있다. 뒤에 제방을 쌓음으로써 가덕촌 후실 안곡마을로 이장했다. 간좌(艮坐) 방향이다.
(한문 원문)
○ 英沂(영기)
字聖與 宣祖萬曆癸未生行承訓郞軍資監主簿丙子胡亂爲義兵長有功戊子三月二十九日卒見言行錄○配尙州金氏父 贈參判養之祖翰林廉忌四月六日○墓晋州池運洞乾坐雙墳碣銘眞城李晩燾撰○后配金海金氏父賢漢忌八月三日○墓竹山礪峰下申坐有碣銘後以堤坊移葬于加德村后室安谷艮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