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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유고 제22권 / 시장(諡狀)
영의정 완평부원군 이공 시장(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공은 휘가 원익(元翼)이며 자가 공려(公勵), 호가 오리(梧里)이다. 우리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열한 번째 아들 휘 치(示+多)는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소강(昭剛)인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정은(貞恩)은 수천군(秀泉君)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행실로 한 시대에 이름났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는 친한 벗이었는데 〈사우록(師友錄)〉에 보인다.
조부 휘 표(彪)는 청기군(靑杞君)에 봉해졌다. 부친 휘 억재(億載)는 함천군(咸川君)에 봉해졌는데,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 정통하고 음률(音律)에 뛰어나 사람들이 수천군의 풍운을 이었다고 하였다. 먼저 혼인한 우씨(禹氏)는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뒤에 혼인한 동래 정씨(東萊鄭氏) 감찰 치(錙)의 딸은 군부인(郡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부인은 어질고 부녀자의 교훈을 익혀 시부모를 받드는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남편을 섬기는 데 지극히 온화하고 순종하였다.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 10월 24일 한성(漢城) 유동리(楡洞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3세에 조모의 품속에 있다가 배가 고파 젖을 찾던 중, 잘못하여 조모의 귀밑머리 몇 가닥을 뽑았다.
조모가 아픈 기색이 있자 공이 갑자기 놀라 울었는데, 이때부터 감히 모친의 귀밑머리 근처에 손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조모를 잃은 뒤 이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슬피 오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서할 줄 알면서부터는 부지런히 책을 읽느라 먹고 자는 것도 잊었는데, 부모는 그가 병에 걸릴까 걱정하여 때때로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으나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당시 나라의 제도는 중국 사신을 중요하게 대우하여 나이가 젊은 문관을 따로 뽑아 중국어를 익히게 하였다. 하지만 뽑힌 사람들은 으레 제대로 배우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는데, 공만은 조소를 피하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여 배우고 익혔기에 시험을 보면 반드시 수석을 차지하여 누차 포상을 받았다. 저작과 박사를 거쳐 봉상시 직장을 역임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 성균관 전적에 올라 성절사의 질정관에 충원되어 연경에 갔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 7), 조정에서 군적(軍籍)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는데, 황해도사 겸 경차관에 선발되어 군적을 정리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사무가 많고 문서가 쌓였으나 메아리처럼 응수하면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다.
관찰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공을 재주 있다 여겨 긴요한 문서가 있으면 공에게 묻고 재결(裁決)하였다.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힘써 높이 천거하여 마침내 현달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공은 한 번도 이공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자년(1576, 선조 9), 내직으로 들어와 사간원 정원이 되었다. 무인년(1578, 선조 11),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 15), 응교를 거쳐 특별히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승진하여 좌승지에 이르렀다. 계유년(1573, 선조 6) 전적에 오른 뒤로 이때까지 십년 동안 호조, 공조, 형조, 예조 등 네 조의 좌랑과 정랑, 군기시 판관을 역임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승진하여 직강, 사성에 이르렀고, 간원에서는 승진하여 헌납, 사간에 이르렀으며, 사헌부에서는 지평에서 승진하여 장령, 집의에 이르렀다. 홍문관에서는 승진하여 교리, 부응교, 응교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근면하고 민첩하다고 알려졌다.
경연의 직임을 5, 6년 동안 맡았다. 홍문관 학사들은 으레 입직하기를 싫어하여 서로 버티면서 대신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공은 한 번도 남에게 미룬 적이 없었으므로 입시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강론하는 말이 정밀하고 분명하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으므로 선조(宣祖)가 귀 기울여 들으며 몹시 즐거워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시켜 발탁하였으니 군신 간의 만남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해 연위사(延慰使)로 정주(定州)에서 중국 사신 황홍헌(黃洪憲)을 맞이하였다. 황공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는데, 역관을 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편안하니, 흑두재상(黑頭宰相)이 될 것이다.”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 16), 다시 승지가 되었다. 당시 동서 분당이 점차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은 성품이 자못 거칠어 자기와 다른 논의를 배척하였기에 왕자 사부 하락(河洛)이 상소하여 정원이 성상을 격노하게 했다고 논죄하였다. 하루는 정원의 계사로 인하여 붓을 잡고 초고를 지은 자가 누구냐고 힐문하는 하교가 있었다.
박근원이 공에게 눈짓하여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였으나 공은 안 된다고 주장하며 복계(覆啓)하기를, “이것은 신이 재직하는 승정원에서 함께 한 일입니다. 붓을 잡은 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고 혼자 모면하기를 바란다면 신들은 의리상 감히 나갈 수 없습니다.”하고, 두 번 세 번 소리 높여 말했다.
주상께서는 마침내 승지 4원을 모두 체직하였는데, 그 뒤 박근원은 논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강계(江界)에 유배되었고, 공은 수년 간 산반(散班)에 있었다. 갑신년(1584, 선조 17), 함천공의 상을 당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 20) 봄, 안주 목사(安州牧使)의 자리가 비자 조정에서 안주는 평안도의 중요한 진(鎭)인데 근래 목사가 된 사람이 불량하였기 때문에 피폐하여 거의 구제할 수 없는 지경이니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내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제목(除目)이 세 번 나왔는데 모두 논박을 받자 이조 참의 권극례(權克禮)가 폐고(廢錮)된 공을 기용하도록 청하여 임명한 다음날 수레 한 대를 타고 길에 올랐다. 안주에 도착하니 백성들이 몹시 굶주려 흩어진 자가 태반이었다. 공은 즉시 조운선을 준비하여 풍저창(豐儲倉) 해변의 고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직접 관찰사를 만나 환곡 수만여 섬을 요청하였다.
또 즉시 환곡이 있는 고을로 달려가서 창고에 있는 것을 꺼내 배에 싣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운반해 와서 경내의 굶주린 백성을 두루 진휼하고 종자를 지급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조치가 하루라도 늦었다면 우리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하였다.
안주에는 예로부터 도둑이 많았는데 흉년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이 때문에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자 도적이 즉시 자취를 감추었다. 공이 법령을 밝히고 경작을 권장하니 이듬해부터 연달아 큰 풍년이 들어 공사(公私)가 모두 풍족해졌다. 평안도에는 잠업을 하지 않는 고을이 없었는데, 유독 안주만은 뽕나무가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토질이 뽕나무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저 내 명령만 따르라.”하고, 집집마다 정해주어 오디를 파종하게 하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싹이 무성해졌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이공(李公)의 뽕나무라고 한다. 안주는 변방을 지키는 군액(軍額)이 누락된 경우가 많았는데 친족과 이웃을 침탈하여 고포(雇布)를 징수하고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공이 한 해 동안 거두는 고포의 수를 계산하니 3, 4천 필 남짓이었다. 이에 관가의 곡식을 내어 봄과 여름에 곡가가 높으면 낮은 가격으로 포를 사다가 각 진의 누락된 고군(雇軍)을 충당하였다.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평소의 세금에 약간의 수량을 보태어 고포의 값을 치르니, 백성들이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여러 해 누락된 군졸로 인해 친족과 이웃에게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마침내 없어졌다.
또 안주의 세금은 으레 변방의 고을에 납부하였는데, 교활한 아전이 그 틈을 이용하여 여분을 갑절로 징수하여 백성의 큰 폐단이 되고 있었다. 공은 여분을 약정하고 스스로 가져다 납부하여 간사한 자들의 손을 묶었다. 강계(江界), 의주(義州), 창성(昌城)은 가장 외지고 먼 고을이었는데, 공이 직접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다투어 술과 기생을 준비해 맞이하였으나 공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 이익을 일으키기를 마치 욕심처럼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몇 해 사이에 교화가 널리 퍼져 집집마다 노래를 부르자 감사 윤두수(尹斗壽) 공이 누차 그 치적을 아뢰니, 선조가 비지를 내려 칭찬하고 특별히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리고는 형조 참판에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라 사람들이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연루된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고 원망하며 모두들 옥사를 주관한 대신(大臣)을 지목하였는데, 공이 즉시 대신의 죄를 따지니 주상께서 윤허하셨다. 이해 또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라 호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치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공명정대하고 전형이 편파적이지 않아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왜구가 침입하여 여러 진(鎭)이 와해되자 상하가 동요하며 너도나도 두려워하고 숨기만 일삼았다. 공은 분개하여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주상에게 청하기를, “신은 종실의 신하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전진(戰陣) 앞에 시체를 놓아 국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하니, 선조가 장하게 여기고는 묘당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대신이 ‘이 아무개는 한낱 나약한 서생인데 굶주린 범에게 던져준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주상에게 서쪽으로 피난하도록 청하였는데, 주상은 공을 본도 도순찰사로 삼아 먼저 가게 하였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길에 올라 한편으로는 군사와 백성에게 윗사람을 가까이 하는 의리로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수령에게 대응하는 일을 신칙하였다. 원임 대신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계획하고 힘을 합쳐 온 도민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어가가 평양에 머무르자 적이 대동강(大同江)까지 박두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지키는 것과 피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 논의하였다.
정승 유성룡, 좌상 윤두수는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하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은 나가서 피난해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하였다. 잠시 후 어가가 평양을 나가 영변(寧邊)으로 향하면서 공과 좌상 윤두수, 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남아서 평양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한 방면을 맡고 정예병을 뽑아 고언백(高彥伯)과 함께 밤에 능라도(綾羅島)의 적진을 습격하였다. 적이 깜짝 놀라 소란해지니 우리 군사가 사살한 적이 매우 많았다. 그 뒤로 적의 대군이 점차 불어나자 형세상 대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안도 군사가 적을 경험한 일은 공에게서 시작되었다. 선조는 공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감발시킨 일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명하여 정헌대부로 승진시켰다.
선조가 의주로 가서 머무르자 공은 안주와 숙천(肅川) 사이에 있으면서 적의 예봉을 담당하였다. 당시 도원수 김명원 및 한응인(韓應寅), 권징(權徵)이 모두 도순찰사라 칭하며 공과 동등한 위치로 여기며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았다. 공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공이 먼저 스스로 예를 낮추어 군복을 입고 원수를 찾아뵈니 호령이 비로소 통일되었다.
공은 위급한 때를 만나 평안도를 총괄하였는데, 다스리는 법도와 정벌하는 계책을 내는 일, 행조(行朝)에 물건을 바치는 일, 중국 군사를 먹이는 일을 모두 공에게 요구하였다. 공은 정성을 다하여 모두 온당하게 조처하여 번거롭지 않게 일을 처리하였다. 논자들은 이백기(李伯紀)의 재능과 장덕원(張德遠)의 충성을 겸비하였다고 하였다.
이듬해 9월, 적이 물러나자 어가를 돌리고 공에게 뒤에 남으라고 명하고 본도 관찰사를 겸하게 하였는데, 또 명하여 숭정대부로 품계를 올렸다. 공이 더욱 국궁진췌하여 피폐해진 백성을 돌보고 군사를 조련하니 민심이 몹시 기뻐하며 방금 전란을 겪은 줄도 잊게 되었다.
을미년(1595, 선조 28), 선조가 사신을 보내 평안도 군사를 살펴보았는데, 병사가 거의 만여 명이고 정예로웠다. 특별히 명하여 공을 숭록대부의 품계로 올렸다. 얼마 후 우의정에 임명하여 조정에 들어오게 하고, 사도 도체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영남의 산성과 험준한 요해처를 두루 살피고는 왜적을 이길 방법은 산성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여겨 두루 공사를 벌이고 백성을 거두어 들어와 지키도록 하였다.
당시 원수 이하 장수들은 적을 구경만 한 지 오래되어 맛있는 음식을 버리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뜻이 없었는데, 공이 권율(權慄)을 심하게 책망하여 간략히 하도록 권면하였다. 또 법을 따르지 않은 안신(按臣)과 수신(帥臣)을 다스렸기에 아무리 사나운 사람이라도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영남은 땅이 넓어 성세(聲勢)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우 감사를 두어 대적하기 편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정승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이었는데, 충성스럽고 지혜로워 옛 장수의 풍도가 있었다. 일단 한산도(閑山島)에 주둔하자 적이 감히 서해로 들어오지 못하여 그 덕택에 호남을 보전하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중산(中山)의 광주리처럼 중상을 당하자, 조정에서는 전라 병사(全羅兵使) 원균(元均)으로 이순신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원균은 실로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재주가 없었는데, 공은 안 된다고 강력히 아뢰어 두 번 세 번 글을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였다가 과연 대패하여 수군이 전멸하니, 적이 마침내 양호(兩湖) 지방을 유린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은 벽견산성(碧堅山城)이 영남의 요충지라는 이유로 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격문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김응서는 원수의 명령을 받는다는 핑계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공이 군관을 보내어 즉시 그 자리에서 참수하려 하니, 원수가 일부러 김응서를 숨겼다. 조정에서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이를 계기로 소문을 지어내는 바람에 공이 군법을 시행하지 못했는데, 실제로는 김응서의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영남 관문의 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명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당시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한창 대군을 모아 남쪽으로 정벌을 나섰는데, 군량을 마련하는 일을 모두 공에게 맡겼다. 하루는 경리가 공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출동 명령을 내렸으니 그대는 속히 군량을 이어서 대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양남에서 양식을 외진 고을에 쌓아 두었으니, 반드시 출사(出師)하는 기일을 미리 알아야 싸움터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지금 노야(老爺)께서는 우리나라에 알리지 않고 먼저 출동 명령을 내리셨는데, 지금 비록 독촉하여 운반하더라도 기일에 미칠 수 없습니다. 출사하는 기일을 조금 늦추어 주십시오.”하였다. 경리가 몹시 화를 내며, “그대는 적을 토벌하고 싶지 않아서 이런 한가한 말을 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군량이 군사보다 앞서 가면 반드시 적이 얻을 것이요,
군사가 군량보다 앞서 가면 하루 굶주리더라도 패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군량과 군사가 나란히 가야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며 쟁변(爭辯)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경리가 더욱 화를 내며, “출사하는 기일에 대해 그대가 어찌 감히 관여하는가.” 하고, 지키는 군사에게 공을 끌어내게 하였다. 공이 돌아보며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렇게 하시면 노야의 일은 끝입니다!” 하니, 경리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다시 공을 앞에 불러 몰래 묻기를, “그대는 기일을 며칠이나 물리고자 하는가?” “대엿새가 아니면 안 됩니다.”하니, 경리가 마침내 공의 말대로 하였다. 이 당시 공이 중국어를 잘 하여 적시에 응대하지 않았다면 경리의 강경한 태도를 바꿀 수 있었겠는가.
이해 겨울, 경리가 울산(蔚山)에 주둔한 왜적이 두른 바깥 목책을 격파하고 나아가 내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바야흐로 다시 공격하기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주사 정응태(丁應泰)가 경리를 탄핵하여 함부로 나아가고 패배를 숨긴다고 하였다. 정응태는 평소 우리나라에 출병한 일에 불만을 품고 남이 공을 세우는 것을 질투한 자이다.
선조는 양공이 정유년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홀로 급히 왔고, 또 마귀(麻貴) 등을 지휘하여 직산(稷山)에서 적을 무찔렀으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한 것은 모두 그의 힘으로 그 공로가 몹시 크니 그가 받은 무고를 어찌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대신들에게 누가 사신가 는 일을 맡을지 물었다.
수상 유성룡(柳成龍)은 여든이 된 노모가 있어 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았고, 좌상 김응남(金應南)은 마침 병이 있었으며 공도 중병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선조는 피곤한 모습을 보고 차마 억지로 시키지 못하였는데, 공이 물러나 유성룡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제 병은 이미 나았으니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 사신 가는 일은 중대합니다.
저는 글로 변론하는 재주가 부족하므로 감히 자청하지 못했을 뿐입니다.”하였다. 유 정승이 즉시 공의 말을 성상께 아뢰어 보내게 하였다. 가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멀리 정응태가 서쪽에서 오는 것을 보자 공은 숲속으로 피해 숨었다. 정응태는 의주에 이르러서야 공이 필시 경리를 위해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빠른 기병을 보내 공의 일행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문서를 찾으니 사행에 참여한 이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공이 중국말로 천천히 말하여 정응태의 심부름꾼을 방으로 데려와 물으니, 정응태의 심부름꾼이 정응태가 시킨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우리 왕명(王命)을 받들어 천자에게 상주하러 이미 상국(上國)의 국경에 들어갔는데, 지금 주사 때문에 지레 돌아간다면 이는 우리 임금의 명을 초개처럼 버리는 것이다.”하였다.
정응태의 심부름꾼이 그래도 수긍하지 않고 급하게 다그치자 공이 말하기를, “그만둘 수 없다면 한 가지 계책이 있다. 그대들은 우리들을 모두 묶어 수레에 싣고 가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들은 우리 임금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하니, 정응태의 심부름꾼이 기가 꺾여 가버렸다.
정응태는 마침내 사람을 뽑아 곧장 중국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양 경리의 일은 전혀 거론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나라가 참람한 예를 사용하였다고 무고하고, 심지어 왜구를 불러 중국을 침범하려 하였다는 말까지 하였다. 공은 옥하관(玉河館)에 있으면서 날마다 부사 허성(許筬), 서장관 조정립(趙正立)과 함께 여러 부(部)의 과관(科官)을 찾아가 나라의 원통함을 씻어달라고 청하며 간절히 변론하였다.
또 스스로 주본(奏本)을 지어 백성이 올리는 주본의 규례대로 천자에게 아뢰어 달라고 애걸하며 머리를 조아리느라 피를 흘렸다. 통정사(通政司)에서는 그 지성에 감동하여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였다. 또 각로(閣老)의 말을 붙잡고 그 주본을 올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주본은 비록 저지당했으나 중국 조정에서는 이로 인해 정응태의 탄핵이 무고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돌아오자 선조는 면대하여 몹시 후하게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였다.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얼마 후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유 정승은 이미 탄핵을 받고 떠났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유성룡이 연행하기를 자청하지 않은 것은 과연 잘못이지만 몸가짐을 청렴하게 지키며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위태로운 난리를 당한 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참소하는 자들이 틈을 타서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는 바람에 어진 이를 끝까지 쓰지 못하여 조정이 장차 어지러워지게 되었으니 신은 삼가 애통하게 생각합니다.”하였다. 그러나 유 정승은 끝내 쫓겨났고, 공도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했다. 얼마 있지 않아 조정 관원들이 갈라서서 당파를 짓고 색목이 더욱 많아져 논의가 어지러워 성상을 현혹시켰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조정이 존귀하지 못하고 군주의 위엄이 서지 못하여 시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조처에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 등이 서로 호응하여 초야의 선비를 사칭하며 번갈아 사특한 상소를 올려 대각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나라에 화를 끼칠 것입니다.”하고 또 어전에 나아가기를 청하여 당파를 나눈 사람의 성명을 곧장 아뢰며 아무개는 아무 당이고 아무 당은 아무개의 논의를 위주로 하며, 아무개는 이러하고 아무개는 저러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러나게 하여 뜬금없는 논의를 진정시키도록 청하였다. 더욱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준엄하게 배척한 자들은 바로 홍여순(洪汝諄), 임국로(任國老) 등 전횡이 심한 자들이었다. 성상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는 공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누구를 등용하려는 것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유성룡은 시대를 구할 만한 정승이라 하겠으니, 지금의 인재로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이어서 공은 관직을 그만두겠다고 하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조가 면유(面諭)하기를, “경은 종친의 대신으로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는가? 초(楚)나라로 가려는가, 제(齊)나라로 가려는가?”하니, 공의 말이 더욱 격렬해져 당시의 기휘(忌諱)를 크게 저촉하였으나 성상의 말씀은 더욱 평온하였다.
선조는 공의 충성이 천성에서 나와 국가를 위해 이러한 논의를 하였을 뿐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간곡하게 남아있기를 권면하신 것이다. 그러자 이이첨(李爾瞻) 등이 독기를 품고 눈을 흘기며 온갖 방법으로 공을 해치고 공을 비방하였다. 하지만 공의 무거운 명망 때문에 끝내 감히 탄핵하지는 못하고, 그저 피혐하는 계사에 대해 강경하고 고집스럽다는 말 정도로 배척할 뿐이었다. 공은 마침내 정승직에서 물러났다.
기해년(1599) 가을, 동호(東湖)로 물러나 살았는데 다시 정승에 임명되자 힘껏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선조는 공에 대한 염려를 놓지 못하여 공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자 내의(內醫)를 보내 곁을 떠나지 말고 간호하게 하였다. 또 점쟁이를 침전으로 불러 공의 수명의 길고 짧음을 물어보았다. 게다가 강가가 춥다는 이유로 어실(御室)의 융단을 걷어 하사하기까지 하여 위문하고 물건을 보내는 사람들이 길에서 만날 정도였다.
경자년(1600, 선조 33),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자 공은 금천(衿川)에 있다가 조정에 들어와 통곡하였다. 9월, 공을 삼도 도체찰사로 삼고 성주(星州)에 체찰부를 열라는 명이 있었다. 신축년(1601), 병 때문에 돌아왔다.
임인년(1602, 선조 35), 주상께서 청백리를 뽑으라고 명하자 공과 유 정승이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정승 이항복(李恒福)이 정한 것이었다. 갑진년(1604, 선조 37),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또 공이 오랫동안 군에 있었다는 이유로 선무 공신(宣武功臣)의 등급을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사양하였다.
임인년부터 무신년(1608, 선조 41)까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낸 지가 거의 5, 6년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니,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대하며 서로 축하하였다. 하지만 소인들이 이미 정권을 장악하여 공이 추천한 청렴하고 근실하며 오랜 명망을 지닌 사람들을 광해군이 모두 등용하지 않았다.
상하가 서로 부채질하여 화망(禍網) 만들기를 즐거워하니, 하루아침에 삼사가 임해군(臨海君)이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큰 옥사가 일어났다. 대신들은 조정에서 국문을 하게 되자 좌우를 보며 감히 먼저 발언하지 못했는데, 공이 홀로 말하기를, “역모는 큰 변고입니다. 반드시 고발한 자와 고발당한 자가 함께 나와 모두 갖추어져야 단서를 찾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삼사가 실로 고변하였는데, 삼사는 비록 불러다 심문할 수 없으나 계사에 ‘돗자리에 철퇴와 대검을 싸서 몰래 궐문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궐문을 지키던 장졸 중에 본 자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장졸에게 물어야 합니다.”하니, 공들이 모두 옳다고 여겼다. 즉시 장졸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철퇴와 대검은 작은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눈이 있는데 궐문에 들어올 때 어찌 못 보았겠습니까.”하고 소리 높여 외치자, 대청(臺廳)이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곧이어 그 장졸을 끝까지 심문하기를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고 따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이 옥사는 외간 사람에게 물을 필요 없다. 철퇴와 대검은 궁중에서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하였다.
공이 즉시 병을 핑계대고 들어가자 광해군은 그 사이에 죄를 저지른 궁노에게 죽음을 모면하게 해주겠다고 꼬여 역모를 증명하게 하였다. 두 궁노가 아무렇게나 말하자 옥사가 성립되었다. 광해군이 누차 공에게 나와서 정사를 보라고 타일렀으나 공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차자를 올려 대궐을 엄숙히 하고 여알(女謁)을 막으며 모후를 공경히 섬기고 동기를 아끼고 보호하며 간사한 참소를 듣지 말라고 극진히 아뢰었다. 또 조사를 대접하고 백성의 일을 돌보는 몇 가지 조항을 말하였다. 그러자 광해군이 육경을 자택으로 보내어 백성의 일 가운데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공이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청하였다.
그 방법은 매년 봄가을에 백성의 전지 1결마다 여덟 말의 쌀을 거두어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고, 때때로 각 관사의 사주인(私主人)에게 나누어 주어 공상하는 물건을 알아서 사다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 시장 가격의 높고 낮음을 보아 그 수를 넉넉히 하여 사주인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밖에는 한 자의 베나 한 되의 쌀도 백성에게 추가로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열 배로 방납하는 폐단을 혁파하려는 것이었다. 조목이 정밀하여 오랫동안 시행할 만하였다.
광해군이 먼저 경기에 시험하라고 명하자 거가대족(巨家大族)과 세력있고 재물이 넉넉한 백성 및 사주인들이 방납의 큰 이익을 잃게 되었기에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광해군이 누차 혁파하려 하였으나 경기 백성이 다투어 편하다고 말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공이 처음 대동법을 설행하라고 한 것은 온 나라에 공통적으로 시행하라는 말이었으니 어찌 경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중국에서 광해군이 서열대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은 사실에 의심을 품고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을 보내어 임해군이 폐질에 걸린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은 임해군의 머리를 베어 조사하는 관원에게 보여주도록 청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황명은 하늘과 같습니다.
하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순종하면 결코 다른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하고, 이덕형(李德馨) 공과 이항복(李恒福) 공도 모두 공의 논의를 주장하여 마침내 무사히 책봉을 승인받았다. 정인홍은 몹시 화가 나서 또 이이첨 등과 임해군을 주살하자는 논의를 주장하였다.
삼사가 합문(閤門)에 엎드려 나란히 청하고, 대신들에게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도록 재촉하였으나 공은 도리어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라는 차자를 올렸다. 대신 이항복 공과 심희수(沈喜壽) 공, 대사헌 정구(鄭逑) 공이 모두 공에게 동의하였다. 정인홍 등이 이 때문에 더욱 공을 미워하여 역적을 비호한다고 지목하였다. 공이 다시 병을 핑계로 들어가니, 이듬해 비로소 체직되었다.
신해년(1611, 광해 3), 다시 조정에 들어와 정승이 되었다. 또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누차 사직하여 몇 달 만에 임명되었는데, 입대(入對)하여 임금의 덕이 기울어 위태롭고 조정이 문란한 실상을 극언하였다. 말투가 몹시 강직하여 말과 눈물이 함께 떨어졌다.
광해군이 갑자기 일어나 대궐로 들어가더니 분노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이 아무개가 하루에 조밥 한 숟가락만 먹는다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오늘 그에게 심한 욕을 먹었는데 몹시 불길한 내용이었다. 너희들은 조만간 반드시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하였다.
공은 즉시 사면하고 더욱 두문불출하며 세상일을 멀리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 4), 무옥(誣獄)이 크게 일어났다. 계축년(1613), 옥사의 화가 널리 퍼져 삼사와 백관이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화근(禍根)으로 지목하고 주살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흉악한 논의를 거스르는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역당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옛적의 이름난 선비들은 대부분 삭직과 유배를 당했다. 공은 병을 핑계로 영창대군을 주살하라는 정청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기세등등한 논의가 있었는데, 영창대군은 신하이니 대신이 일개 신하를 위해 죽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이항복과 심희수 같은 어진 재상들도 정청에 참여하였다. 정승 심희수가 광해군에게 아뢰기를, “이 같은 큰일은 대신들에게 두루 의논해야 합니다.”하였다.
광해군이 이르기를, “대신 중에 불참한 자가 있는가?”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이 아무개가 시종일관 불참하고 있습니다.”하였다. 광해군은 끝내 성내는 말없이 다만, “이 아무개는 병이 심하니 그가 불참한 것은 형편상 그런 것이다.” 하였으니, 공이 오면 이 논의에 방해가 될까 그런 것이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장난삼아 심 정승에게 말하기를, “공이 반드시 허물없는 벗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허물을 나누기 위해서인가? 그대가 과연 허물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영창대군이 죽자 정온(鄭蘊) 공이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의 원통함을 극언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의 묘정(廟廷)에 들어가시겠습니까.”하였다.
광해군이 몹시 성을 내며 죽이려고 대신들을 모두 불러 정온의 옥사를 논의하게 하였다. 공은 병을 핑계로 차자를 올려 정온에게 심한 죄를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광해군은 비록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마음이 조금 풀려 정온을 용서하고 제주로 유배하였다.
을묘년(1615, 광해 7) 봄, 공이 반교문(頒敎文)의 말이 몹시 부도(不道)한 것을 보고, 또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양궁(兩宮 광해군과 인목대비)이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해야 한다며 올린 글을 보고 탄식하기를, “이것은 인륜과 강상에 관계된 일이다.
나 같은 종친의 늙은 신하가 감히 한 번 죽음을 아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즉시 자제들을 물리치고 짧은 차자를 지어 간절히 간언하였는데, 대의는 부모가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자식이 불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광해군이 몹시 화를 내며 주서 남명우(南溟羽)를 보내 핍박하며 묻기를, “경은 내가 불효하다고 하였는데, 불효는 지극한 죄이다.
경은 나를 어디에 두려고 하는가. 그리고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가. 숨기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라.”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이처럼 지성으로 받드시는데 신이 망언을 아뢰었습니다. 신은 법대로 주벌을 받겠으나 감히 다른 사람까지 물들일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두 번 세 번 힐문하였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으니, 흉인들이 더욱 분개하여 중률로 처치하도록 청하였다. 광해군은 단지 중도부처(中道付處)하여 홍천현(洪川縣)에 유배하였는데, 유생 김효성(金孝誠), 정택뢰(鄭澤雷), 홍무적(洪茂績) 등이 상소하여 신구(伸救)하자 모두 원찬(遠竄)하였다.
또 남이공(南以恭)을 예전의 막료로서 공을 사주하였다고 무고하여 역시 중도에 유배하였는데, 공의 죄를 사실로 만들고자 해서였다. 이해 관동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공이 홍천의 배소에 도착하자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관동 사람들은 상공의 비라고 하였다.
경신년(1620),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공은 금천(衿川)의 선영이 도성에 가깝다는 이유로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여강(驪江)에 우거하였다. 초가 몇 칸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했는데, 가솔들은 이틀 걸러 밥을 먹었기에 얼굴에 굶주린 기색이 있었으나 공은 태평하였다.
이때 대비가 이미 서궁에 유폐되어 나라가 장차 뒤집히려 하였다. 공을 찾아온 손님이 시사를 전하면 그때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지 않으니, 손님은 감히 그 말을 마치지 못하고 갔다. 이보다 앞서 광해군이 유배한 자에게 속전(贖錢)을 받고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당시 정승 중에 자기가 돈을 내어 대신 속죄해 주려는 자가 있었다. 정승 심희수가 말하기를, “이는 완평(完平 이원익)의 뜻이 아니다.”하고 중지시켰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여 가장 먼저 공을 영의정으로 기용하고 승지를 보내어 불렀다. 공이 들어오자 조정이 대단히 안정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믿고서 편안히 여겼다. 광해군 당시 폐모론을 주장한 우두머리는 공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처형되었는데, 그 밖에도 죄를 논의할 만한 자가 많았다.
공이 등급을 나누어 형벌을 정하고, 차율(次律)에 해당하면 적몰하고 연좌하는 벌을 면하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협박에 못 이겨 잘못을 저지른 부류도 평반(平反)하기를 청한 경우가 많았는데, 주상께서 모두 따르셨다.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광해군에게 원한이 쌓이고 몹시 분노하여 누차 주상에게 청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공이 눈물을 흘리며 나아가 아뢰기를, “광해군은 스스로 천륜을 끊었으니 폐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주살하는 것은 한때 임금으로 섬긴 늙은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신은 이제 물러가겠습니다.”하고,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주상께서 이르기를, “과인도 그런 뜻이 있었는데 경의 말도 그러하니, 감히 보전하도록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공이 또 재생청(裁省廳)을 설치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도록 청하고, 또 팔도에 선혜법(宣惠法)을 시행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으뜸가는 정사였다. 하지만 거가대족과 세력 있는 아전들의 비난이 여전히 지난날과 같아, 단지 관동 지방만 경기를 모방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식자들이 전국에 시행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가을,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주상께서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내관을 보내어 선온(宣醞)하고 잔치를 열도록 하였다. 또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에 나아오게 하였으며 전각에 올라 부축하도록 하였으니 모두 성대한 의례였다.
갑자년(1624),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을 도체찰사로 삼았다. 공이 직접 나가서 싸우기를 청하자 주상께서 이르기를,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 원로가 멀리 가서는 안 된다.”하고, 부사만 가도록 하였다. 이괄이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 기자헌(奇自獻) 또한 연루되어 하옥되었는데,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기자헌의 죄상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모후를 폐위할 때 헌의(獻議)하여 힘껏 간쟁하다가 마침내 원찬(遠竄)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10대를 사면할 만한 자입니다.”하였다. 그 뒤 항상 탄식하며 곁에서 모시는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음덕을 쌓은 이들을 이처럼 많이 주살하였는데, 도체찰사를 맡고 있으면서 논의에 참여하지 못한 지 오래이니 나도 늙었구나.”하였다.
공은 어가를 모시고 공주(公州)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는 바람에 걸음이 편치 않았기에 힘껏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을축년(1625, 인조 3), 다시 임명되었으나 폐질에 걸려 직분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병인년(1626, 인조 4)에 체직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 5), 오랑캐의 변란이 일어나자 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갔다. 공은 세자의 분조가 본디 남쪽 지방을 안무해야 한다고 여겨 따르는 사람들을 간략히 하여 고을에서 대접하는 것을 줄이도록 청하였다.
당시 산반(散班) 관원들은 대부분 분조를 따랐는데, 일행이 많았기에 공은 이들을 진(陣) 뒤에서 따라오게 하고, 10리 밖에 머물러 묵도록 하였다. 또 종사관을 먼저 숙소로 보내어 쓸데없는 비용을 금지하고, 경계한대로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해당 수령을 장형(杖刑)으로 다스리니, 가는 곳마다 숙연하였다.
하지만 일행들은 엄하게 단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비방하는 논의가 비등하였는데, 체찰사가 외적을 토벌하러 가지 않고 도리어 행차를 점검한다 여겼다. 이에 군막의 정예병들이 모두 분개하여 공에게 군사를 거두어 행렬의 뒤에 있으면서 스스로 변명하기를 청하자 공이 울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성상께서 어린 후사를 늙은 신하에게 맡겼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일각이라도 곁을 떠날 수 있겠는가. 일행이 나를 몰아 떠나게 하더라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일행 중에 다른 논의를 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지성으로 타이르니 공들이 모두 기뻐 복종하였다. 지금까지도 양호 지방의 백성들이 분조 때의 일을 말하면 반드시 재물을 허비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니, 대개 공이 경계하고 신칙하였기 때문이다. 4월,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9월, 공이 말미를 청해 금천(衿川)에 성묘하러 갔다가 상소하기를, “신의 본뜻은 시사가 평정되면 물러나기를 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태평성대의 기상이 없으나 신이 늙고 병들어 죽을 지경이므로 부득이 물러나 돌아왔습니다. 만약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죽기 전에는 감히 뒤처지지 않고 달려가겠습니다.”하였다. 성상께서 비로소 공이 떠나기를 결단하였다는 것을 알고 부르는 명을 잇달아 내렸으나 공은 끝내 일어나지 않고 누차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성상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공이 녹봉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기 감사에게 쌀과 반찬을 대주라고 하였다. 급한 일이 생길 적마다 공은 병든 몸을 이끌고 와서 뵈니, 성상께서 몹시 의지하고 공경하였다. 그리고 공의 시골집이 낮고 좁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곁에 집을 지어주라고 명하였는데, 공은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장식없는 요와 이불을 하사하고 하교하기를, “경의 검소함은 공경할 만하니, 이것을 하사하여 경의 덕을 이루어주고자 한다.”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 12) 1월 29일,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은 88세였다. 성상께서 애도하며 사흘간 조회를 중지하고 근시(近侍)를 보내 조문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정해진 등급보다 후하게 부조하고 관청에서 도와주도록 하였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으며 어려서나 자라서나 부지런히 실천하였다. 함천공은 중년 이후로 누차 위독한 병으로 고생하였는데, 공은 항상 어의 안덕수(安德壽)를 찾아가 약을 물었다. 안덕수가 늙고 병들어 손님을 만나지 못하자 여종 하나가 말을 전하였는데, 공은 갈 적마다 반드시 예물을 들고 가서 여종에게 주었다.
안덕수는 그의 뜻에 감동하여 힘을 다하니, 약이 번번이 효험이 있었다. 공이 함천공의 곁을 모실 적에 한창 집의 또는 승지를 지내고 있었는데, 함천공의 안부를 물으러 오는 사람이나 안부를 묻는 심부름꾼이 오면 공은 노비에게 시키지 않고 반드시 직접 안팎을 오가며 함천공의 말을 전하니, 사람들은 관직이 높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묘에서 상을 치를 적에는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하고 스스로 묘표를 짓고 손수 비석을 새겨 세웠다. 맏형 현령 아무개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그가 죽자 장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우는 데 모두 힘을 다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족하게 하지 않았다.
현령의 아들 성전(性傳)은 호서에서 객사하였는데, 당시 공은 이미 관직이 높았고 다른 자손들도 있었는데 몸소 가서 관을 가져와 반장(返葬)하였다. 또 성전의 아들 수함(守諴)이 함천공의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려 하였으나 힘이 넉넉하지 않아 지은 집을 넘겨주었다.
그 집은 본디 공의 아들 의전(義傳)이 직접 자재를 모아 지은 것이었다. 어진 마음을 미루어 친족을 돌보아 녹봉을 나누어 궁핍한 이들을 도왔는데 그저 미치지 못할까 걱정할 뿐이었다. 관청에서 퇴근하고 여가가 있으면 오직 친척을 방문하는 것만 일삼았다. 하지만 관직에 천거하거나 청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나는 일찍 장상(將相)이 되었으니 몹시 귀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속과 어긋나 이 몸도 스스로 도모하지 못하거늘 어찌 감히 친지를 천거하겠는가. 뜻밖에 만년에 밝으신 성상을 만나 관직에 오른 질손(姪孫)들이 많지만 나는 몹시 부끄럽고 두렵다.
내가 양전(兩銓)에서 인재를 천거한 적이 없지 않으나 양전에서는 대부분 등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묻지 않고 내 자제에게 관직을 주었으니 어찌 내가 사사로이 사랑해서이겠는가.”하였다. 윗사람을 섬길 적에는 오직 성실과 신의로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여 말해야 할 때는 반드시 말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뜻을 다하였으니, 말이 비록 만 가지라도 요점에 맞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귀 기울여 들었다. 유익할 것 없는 논변과 겉치레에 힘쓰는 말은 한 번도 입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이유 없이 정사(呈辭)한 적이 없었으며,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인책하고 들어가는 경우는 반드시 말한 것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차하게 떠나고자 하지 않고 임금이 깨닫기를 바랐으니, 혼조 때 역적의 옥사를 국문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던 일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낮은 관직으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직책을 맡으면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비록 아침저녁 으레 사진(仕進)하는 것조차 한 번도 남보다 늦은 적이 없었다. 선조께서 한번은 곤신(閫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오직 평안 감사 이 아무개 한 명뿐이다.”하니, 듣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교유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올라서는 더욱 자취를 감추는 데 힘썼기에 사람들이 처녀 같은 정자(正字)라고 일컬었다. 조정에 있을 적의 논의는 치우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이름난 선비를 아까워하고 공론을 부지하는 것을 일삼고 급하게 여겼기에, 비록 치우친 마음을 가진 자라도 감히 편당으로 공을 엿보지 못했다.
공은 지나칠 정도로 청렴함을 지켜 비단 뇌물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방에서 세시에 으레 보내는 물건이라도 수량이 조금 많으면 문을 지키는 동자가 미리 물리쳤다.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검소하여 외진 시골의 포의보다 심하였다. 껍질만 벗긴 곡식으로 지은 밥과 쌀가루를 섞지 않은 국을 먹고 마시며 평생을 보냈기에 사람들도 감히 베이불을 덮은 공손홍(公孫弘)과 같다며 비난하지 못했다.
성천(成川)에 막부를 열었을 적에는 나라가 난리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전(帳殿)이 진흙과 이슬 속에 있다는 이유로 크고 사치한 건물에 살지 않고 스스로 누추한 집을 골라 살았다. 또 강선루(降仙樓) 위에 말이 먹을 꼴을 쌓아두었는데, 군관의 자제라도 한 번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곤경에 처하여 자신을 단속한 것이 어떠하였는가.
아랫사람을 이롭게 할 적에는 인자하면서도 장중하여 사람들이 공의 사랑을 느끼면서도 감히 친압하지 못하게 하였다. 형벌과 옥사는 관대히 처리하는 데 뜻을 두었으나 고식적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처음 승문원에 근무할 때 창릉(昌陵)의 제사를 맡았는데, 봉상시의 아이종이 제물을 훔쳐 먹자 공은 그날 밤으로 급히 돌아와 다시 받아서 제사를 지냈다.
종이 법대로 처벌을 받게 되자 공은 그가 어리석어 잘못을 저지른 것을 불쌍히 여겨 복계하는 재신들에게 힘써 말해 가볍게 처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였다. 한번은 체찰부에서 밥을 먹는데 밥에 모래가 있었다. 즉시 몰래 뱉고 소매로 감추니, 앉아 있던 손님들도 알지 못했다. 정사를 할 적에는 기강을 잡고 전고를 따르기에 힘써, 비록 사변이 무궁하였으나 처리가 몹시 지당하였다.
정사를 행할 적에는 사방의 인명, 지명, 품목, 도수를 한 번 보면 잊지 않았으므로 이서(吏胥)가 감히 속이지 못했다. 여든이 넘자 탄식하기를, “나는 문서를 살피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는데, 젊어서 공무를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서이다. 지금은 늙어서 지난 일은 잊어버리니, 이래서야 벼슬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저는 성품이 둔하니 정사를 볼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념하지 않은 잘못이다. 전념하면 생각이 정밀해지고 능히 기억할 수 있다. 나는 평소에 책 보기를 좋아하는데, 관직을 맡으면 책을 묶어 시렁에 놓고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공무뿐이다.
지금 사람은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책을 읽으니, 이것은 내 재주로 미칠 수 없다.”하였다. 사람을 취할 적에는 반드시 심술이 공평한지 편파적인지 먼저 따졌으며, 바르지 못하고 꾸미는 자는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참의 강서(姜緖)의 사람됨을 칭찬하며 비록 술을 너무 마시지만 인품이 매우 높아 신묘한 감식안이 막힘없다고 하며 회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밖에 교유한 선후배 약간 명을 품평하였는데, 대부분 방정하고 정직하며 충성스럽고 신의있는 무리였으니 사귀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호방하여 얽매임이 없었다. 집안에서 음률을 전수받아 악보에 통달하였는데, 흥이 일어날 때면 거문고를 가지고 낙봉(駱峯)에 올라 스스로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왔다.
아름다운 산수를 더욱 좋아하여 요행히 말미를 얻으면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험한 곳까지 두루 찾아다녀도 의기가 쇠하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도 지나치게 강직한 것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성질을 꺾고 변화하여 덕성을 성취하자 사람들은 독실하고 공경하며 순후하고 근실하며 진정으로 어질고 후한 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
공은 비록 스스로 학문에 어둡고 문사가 부족하다 말하였으나 식견이 투철하여 처신하고 남을 다스릴 적마다 규범이 있었으니, 평생 강론한 자라도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문장이 해박하여 상소와 차자, 편지가 명백하고 간략하였으니, 오로지 글짓기를 일삼는 자라도 뒤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엽(鄭曄) 공이 정승 신흠(申欽)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어, “완평은 참으로 좋은 사람인데 다만 책을 읽지 않는 것이 흠입니다.”하니, 신 정승이 답하기를, “완평은 일을 하면 모두 이치에 맞으니 이것이 학문입니다. 한갓 글재주뿐이라면 어디에 쓰겠습니까.”하였다.
필법이 고아하고 굳세면서도 빼어나 여든 이후에 쓴 글씨도 한창 때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을 명필로 일컫는 사람이 없었으니, 덕망과 사업에 가려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어려서 배울 적에 지나치게 열심히 책을 읽다가 위장병이 생겨 뼈만 남은 것처럼 수척하여 옷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듯하였다.
어떤 이가 장수할 관상이 아니라고 의심하였으나 공은 정기를 보존하고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약을 먹으며 본성을 해칠 만한 것은 일절 금지하였다. 한번은 서쪽 지방에 갔다가 우연히 여인을 가까이 하였는데, 곧 깨닫고 징계하여 이로부터 더욱 굳게 지조를 지켜 묵수(墨守)하였기에 깨뜨리기 어려웠다.
주량이 제법 컸으나 취한 적이 없었기에 이 때문에 노년에 이르러서도 총명과 정력이 쇠하지 않았다. 정숙자(程叔子)가 이른바 ‘나는 삶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한 것이 공에게도 있었다. 항상 열여섯 자의 가르침을 지어 자손에게 보였는데,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에게 악이 없도록 하며, 뜻과 행실은 목표를 높이 두고 분수와 복은 아랫사람과 비교하라.”하였으니, 독실히 실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관으로 다스리는 곳마다 아전과 백성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신명처럼 공경하였으며, 떠날 때면 수레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차마 이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떠난 뒤에는 송덕비를 세워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평양 사람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였는데, 공이 몰래 사람을 보내 훼철(毁撤)하자 다시 세웠으니, 우리나라에 생사당이 생긴 것은 공에게서 시작되었다.
혼조(昏朝 광해군) 때 공이 곤액을 당하자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모두 공의 성명을 외며, “아무 어르신은 어진 사람이다.”하니, 광해군이 아무리 공이 자기 일을 거슬러 성이 나더라도 감히 공의 이름을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반드시 완평이라 하였다. 소인들이 아무리 속으로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역시 반드시 “아무개는 어진 정승이라 할 수 있다.” 하였다.
만력 정사년(1617, 광해 9) 무렵 경리 양호가 요동에 있을 때 우리나라 사신을 보고 공의 안부를 묻자 지방에 있다고 대답하니, 양호가 또 말하기를, “오리와 오성은 어진 정승인데 너희 나라가 등용하지 않으니 필시 소인이 나라를 맡았을 것이다.”하였다.
공의 일신의 출처에 국가의 안위와 치란이 달려 있으니, 천하 사람이 모두 알았다고 하겠다. 세상 사람들의 말로는 공의 정신이 남달라 사변이 있으면 번번이 꿈에 먼저 나타난다고 하는데, 분조 때 병조 참판 이명준(李命俊)이 공을 뵙고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에는 과연 이런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몹시 늙어서 꿈도 예전 같지 않다.”하고, 근간의 꿈에 나타난 두 가지 조짐을 말해주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 증험되어 일행이 신기하게 여겼다.
계유년(1633, 인조 11) 겨울, 꿈에 절구를 얻었는데, 봄이 되면 불길하다는 조짐이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정당(正堂)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고는 돌아가셨다. 공은 풍수설을 좋아하지 않아 경계를 지어 돌에 새기고 가법으로 정하였다. 동종(同宗)에게 엄히 신칙하여 다른 산에 묏자리를 잡지 말고 모두 선영의 사방에 비늘처럼 붙여 장사 지내되, 종자(宗子)로 하여금 자제들을 감동하여 장사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백세토록 바꾸지 않도록 하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배위(配位) 정경부인 모군(某郡) 정씨(鄭氏)의 묘 왼편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의전(義傳)으로 누차 고을을 맡고 완선군(完善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는 이유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딸은 군수 이정직(李廷稷)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으로 2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효전(孝傳), 제전(悌傳)이다.
완선군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약(守約)으로 전임 순창 군수(淳昌郡守)이다. 다음은 수기(守紀)로 감찰을 지냈으며 다음은 수강(守綱)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위장(衛將)을 지냈다. 내외 손자 및 증손, 적서 남녀가 50여 명이다.
한번은 공이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소 주장을 지키다가 중도에 맞지 않은 적도 있고, 재물을 앞에 두고 피하지 않은 적도 있으며, 의리를 보고 용감하지 못한 적도 있으니, 다소간의 허물은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내가 죽은 뒤 알지 못하던 자에게 묘도문을 맡기면 행여 실상에 지나치게 과장하여 나의 부덕을 무겁게 할까 두렵다.”하고, 자제들에게 씨족과 관력의 시말을 대략 기록하게 하고 부제학 이준(李埈)에게 맡겼다.
공이 죽은 뒤 장남 완선군(完善君) 의전(義傳)이 공의 시장(諡狀)을 고(故) 판서 이식(李植) 공에게 부탁하였는데, 겨우 다 짓고는 미처 올리지 못했는데 완선군과 판서가 잇달아 죽었다. 지금 공의 후손 수약(守約)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조부께서 살아계실 적에 조부의 문하에 노닌 사람이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대가 시장을 지었으면 한다.”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이식의 시장을 이상과 같이 조금 고쳐 쓴다. 아, 공이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이 70년인데 정승으로 있던 기간이 40년이다. 처음에는 우리 선조를 보좌하여 중흥의 공업을 세웠고, 중간에 혼란한 시대를 만나 비록 먼 곳으로 물러났지만 그에 힘입어 강상이 추락하지 않았다.
우리 인조를 섬기게 되어서는 나라의 시초(蓍草)나 거북 같은 덕망 있는 사람이 되어 백성들을 소생시켰다. 삼대(三代) 이하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정승의 공업을 남긴 자가 대대로 없지 않았으나 대개 한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공처럼 충성을 다해 수고하고 정성껏 절조를 지켜 가는 곳마다 드러나고, 나라가 있는 줄은 알되 제 몸이 있는 줄은 모르며,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를 지키며 70년을 하루같이 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내가 신미년(1631, 인조 9)에 경연에 입시하였을 때 성상께서 특별히 연신(筵臣)에게 공의 거처가 어떠한지 물으시고 이어서 이르기를, “옛적 어진 재상이 비가 오자 비새는 집에서 우산을 들고 밤을 지샌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지나치게 청렴하다고 여겼다. 지금 완평의 청렴함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하고, 한참동안 탄식하셨다.
훗날 내가 수령으로 나갔을 적에 금천의 시골집에서 공을 뵌 적이 있었다. 공은 그때 여든을 넘었는데 갈옷에 거친 밥을 먹으며 살고 계셨다. 하루 종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씀마다 그저 나랏일만 걱정하고 그 밖에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제야 하늘이 공을 우리나라에 태어나게 한 것이 사직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지만 겸손한 덕으로 항상 부족한 듯이 여기며 자손에게 경계를 남겨 실상이 없는 말이 행여 죽은 뒤에 더해질까 두려워하였다. 〈억(抑)〉 시를 지어 경계한 위무공(衛武公)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감히 세상 사람들이 공에 대해 과장하는 말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과문한 견문을 대략 덧붙여 태사(太史)의 채택과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의논하는 데 대비한다. <끝>
[註解]
[주01] 영의정 …… 시장 : 이 글은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시장이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
(梧里)이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디 이원익의 시장은 이식(李植)이 지었으며, 《택당
집》 별집 권8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말미에 언급한대로 이식과 이원익의 아들 이의전(李義傳)이 1647년 세상을 떠나 미처 시장을 올리지 못한 관계로
저자가 이식의 시장을 가감하여 이 글을 짓게 되었다.
[주02] 사우록(師友錄) :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16집에 수록된 《추강집(秋江集)》 권7에 실려 있
다.
[주03] 흑두재상(黑頭宰相) : 젊은 나이에 재상이 될 만한 인재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왕순(王詢)이 환온(桓溫)의 연리(掾吏)로 있었는
데, 환온이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흑두공(黑頭公)이 될 것이라 하였다. 《晉書 卷65 王詢列傳》
[주04] 도승지 …… 있었다 : 왕자 사부 하락이 상소하여 이이(李珥)를 탄핵한 삼사(三司)를 비난하자, 도승지 박근원 등이 계사를 올려 하
락을 탄핵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어느 승지가 계사를 기초(起草)하였는지 물으며 남의 말을 막고 군주의 총명을 가린다는 엄한 전교
를 내렸다. 《宣祖修正實錄 16年 8月 1日》
[주05] 제목(除目) : 이조나 병조에서, 임금이 제수한 관리들의 명단을 적은 목록을 말한다.
[주06] 고포(雇布) :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납부하는 포를 말한다.
[주07] 이백기(李伯紀)의 …… 충성 : 이백기는 남송(南宋)의 재상 이강(李綱)으로, 백기는 자이다. 고종(高宗)을 섬기며 금(金)나라의 침
입을 막을 계책을 올렸다. 장백원은 남송의 재상 장준(張浚)으로, 백원은 자이다. 역시 금나라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08] 맛있는 …… 뜻 :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 남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사마천전(司馬遷傳)〉에 “이릉(李陵)
은 맛있는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주었기에〔絶甘分少〕 사람들에게 죽을 힘을 다하도록 할 수 있었으니, 옛적의 명장이
라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 하였다. 《漢書 卷62 司馬遷傳》
[주09] 중산(中山)의 광주리 : 전국 시대 위(魏)나라 장수 악양(樂羊)이 중산(中山) 땅을 정벌하고 돌아오자 문후(文侯)가 광주리에 가득
찬 그에 대해 비방하는 글을 보여주었다. 악양은 그제서야 신하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문후가 자신을 믿어주었기에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戰國策 秦策2》
[주10] 차율(次律) : 유배에 해당하는 죄를 말한다. 사형에 처하는 일률(一律)보다 한 등급 낮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11] 평반(平反) : 되풀이 신문하여 죄를 공평히 하는 것을 말한다.
[주12] 베이불을 덮은 공손홍(公孫弘) : 한 무제(漢武帝) 때 정승을 지낸 공손홍이 절약을 강조하며 베이불을 덮고 지내자 급암이 공손홍
은 녹봉을 많이 받는데 베이불을 덮으니 거짓이라며 비난하였다. 《史記 卷112 平津侯列傳》
[주13] 장전(帳殿) : 임금이 거처하는 장막을 말한다.
[주14] 나는 …… 여긴다 : 정숙자는 정이(程頤)이다. 정이가 제자 장역(張繹)에게 말하기를, “나는 타고난 기운이 몹시 허약하여 서른에
야 점차 성해지고 40, 50세 이후에야 완전해졌다. 지금은 태어난 지 72년이 되었는데, 근골을 한창 나이 때와 비교하면 조금도 약
해지지 않았다.” 하였다.
장역이 묻기를, “선생께서는 타고난 기운이 허약한 것이 삶을 보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기십니까?” 하니, 정이가 잠자코 있
다가 말하기를, “나는 삶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吾以忘生, 徇欲為深恥.〕” 하였다. 《近思錄 卷4》
[주15] 억(抑) …… 위무공(衛武公) : 위무공은 나이 95세에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의 〈억〉 시를 지었다. 《詩經 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김하라 김재영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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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梧里先生文集附錄卷之二
領議政 完平府院君 李公 諡狀 - 趙絅(조경)
公諱元翼。字公勵。號梧里。我太宗恭定大王第十一嗣有諱。封爲益寧君。諡昭剛。於公爲高祖。曾祖諱貞恩。封秀泉君。以文行名一世。與南秋江孝溫友善。見師友錄。祖諱彪。封靑杞君。考諱億載。封咸川君。精經史竗音律。人以爲緖秀泉風韻。先娶禹氏不育。後娶東萊鄭氏。監察錙之女。追封郡夫人。夫人賢而習女訓。奉尊章極其誠敬。事夫子極其和順。嘉靖丁未十月二十四日。生公于漢城楡洞里第。公生而有異質。三歲。在皇妣抱中。因飢索乳。誤捽皇妣鬢髮數莖。妣有痛色。公遽驚啼。自是手不敢近妣鬢邊。旣喪恃。每語此事。悲咽不已。自知讀書。刻苦伊吾。忘寢與食。父母慮其成疾。時呵止之。然亦不能奪其志。十八。選上舍。二十三。登第選人槐院。時國制重待王人。別選年少文官習漢語。選人例慢不學。公獨不避嘲笑。剸心學習。遇閱試必居最。屢夢褒賞。由著作博士。歷奉常直長。癸酉。陞成均典籍。充聖節使質正官朝京。萬曆甲戌。朝廷大籍兵。選拜黃海都事兼敬差官。專管籍事。事務坌如。案牘委積。左酬右答。捷疾如響。觀察使李文成公珥才公之爲。凡有文書之有肯綮處。輒詢公裁決。及其還朝。力薦揚之。遂開顯途。然其後公一不造李公之門。丙子。入爲司諫院正言。戊寅。擢遷弘文館修撰。壬午。由應敎特陞通政。拜承政院同副承旨。陞至左。蓋自癸酉陞典籍。迄玆十年。其間歷戶工刑禮四曹佐郞正郞,軍器判官。成均則陞至直講,司成。諫院則陞至獻納,司諫。憲府則自持平。陞至掌令,執義。弘文館則陞至校理,副應敎,應敎。所至以勤敏聞。在經筵者五六年。玉堂諸學士例厭入直。相持不肯代。其來蓋久。公則未嘗推諸人。故入侍最多。講說精明。聲音疏亮。宣廟傾聽甚樂。未幾陞擢。際遇之期。蓋自此始云。是年。以延慰使。逆黃天使洪憲于定州。黃公有藻鑑。招舌官謂之曰。此人擧止端詳。當作黑頭宰相矣。癸未。復爲承旨。是時東西分黨始盛。都承旨朴謹元性頗峭。攻斥異己之論。王子師傅河洛上疏論政院。以激上怒。一日因政院啓辭。下敎詰問執筆構草者何員。朴目公欲以實對。公持不可。覆啓曰。此乃臣一院中共爲之事。歸罪於執筆一人。幸其獨免。臣等義不敢出也。抗言再三。上遂幷遞承旨四員。其後朴謹元以主議。至竄江界。公就散者數年。甲申。丁咸川公憂。丁亥春。安州牧使缺。朝議以安關西重鎭。近緣爲牧者不良。凋瘵幾不振。須擇遣才望。除目三出。皆被劾。於是吏參權克禮請起廢用公。旣拜翌日。單車就道。至州。民大饑散者殆半。公卽戒漕舶。往待于豊儲邊海之邑。躬詣方伯。乞糶數萬餘石。又卽馳往糶邑。出倉實載船。不數日運至。賑飢給種遍一境。民咸曰。此政若遲一日。吾等擧不免溝壑矣。州舊多盜。歲荒尤梗。爲設法購捕。盜卽屛息。公明條敎勸耕作。明年歲仍大熟。公私俱足。關西一道。無邑不業蠶事。獨安無桑。邑人相傳土不宜桑。公曰。第從我令。即課戶播椹。不數歲茁盛。至今人稱爲李公桑。本州防邊軍額多闕。虐及族鄰。徵其雇布。猶不給。公計其一年所徵布數。則三千匹有奇。乃出官穀。春夏穀貴則減價貿布。以充各鎭闕雇。秋稔則於常賦添若干數。以當布直。民不重費而積年闕戍族鄰之敝遂寢。又州稅例納于邊邑。猾吏緣其問倍徵剩數。爲民重瘼。公約定剩數。自領以納。以束奸手。江,義,昌爲邑最邊且遠。見公自來大驚。爭設酒伎迎勞。公却而不受。其爲民祛弊興利。若嗜慾者類此。數年之間。政化大行。閭井戶歌。監司尹公斗壽屢上其治績。宣廟下旨褒美。特進階嘉善。以刑曹參判召還。辛卯。拜大司憲。時國人多寃己丑逆獄株累之濫。咸指主獄大臣。公卽論大臣之罪。上允之。是年。又進階資憲。歷戶曹禮曹判書。拜吏曹判書。鑑財公明。稱量不頗。物論偉之。壬辰四月。倭奴入寇。列鎭瓦解。上下劻勷。爭事懾竄。公奮不顧身。請于上曰。臣以宗戚之臣。受國厚恩。不可坐視顚覆。願卽橫屍陣前。以報國家。宣廟壯之。下廟堂議。大臣以爲李某一羸病書生。投餒虎何益。即不許。公請上西幸。命公爲本道都巡察使先行。公灑泣登途。一以喩軍民親上之義。一以飭守宰策應之務。與原任大臣柳公成龍協規幷力。坐牢一道心。大駕次平壤。賊進逼大同江。朝廷議守與避孰便。柳相成龍,左相尹斗壽主守平壤議。寅城府院君鄭澈主出避議。俄而車駕出平壤向寧邊。命公與左相尹斗壽,元帥金命元留守平壤。公自當一面。抽銳卒。同高彦伯夜襲綾羅島賊陣。賊大驚擾亂。我軍射殺賊頗多。其後賊大軍滋至。勢固不能敵。然西軍之嘗賊。自公始矣。宣廟嘉公蹈難感發。特命進階正憲。宣廟進次龍灣。公住安,肅間。以當賊衝。時元帥金命元及韓應寅,權徵竝稱都巡察使。與公等夷。皆均茵坐。公言其不可。公先自降禮具戎服。謁拜元帥。號令始一矣。公當危急之秋。摠領平安一道。治法征謨。行朝供奉。餽餉天兵。咸責之公。而公血誠所注。籌畫皆當。不煩而事辦。論者以爲有李伯紀之才而兼張德遠之忠云。明年九月。賊退回鑾。命公留後。因兼本道觀察使。又命進階崇政。公益加盡悴。吹喣瘡痍。調諫卒伍。民情大悅。忘喪亂之新經也。乙未。宣廟遣使閱視西兵。兵幾萬餘且精。特命進公崇祿階。俄拜右議政入朝。兼四道都體察使。巡視嶺南山城險夷要害。以爲制勝。倭寇無出山城。遍令設版收士民入保。時元帥以下諸將玩寇日久。不知絶甘分少之義。公切責權慄勉以簡約。且治按臣帥臣之不如法者。雖驍猂。無不不寒而慄。又以嶺南地廣。聲勢不相接。請分置左右監司。以便事機。時水軍統制使李舜臣。柳相成龍所薦也。精忠智略。有古將風。一鎭閑山島 。賊不敢入西海。湖南賴以全。一朝中中山之篋。朝廷欲以全羅兵使元均代李。元實貪暴無才。公極陳其不可。章再三上。不得請。元竟代李果大敗。水軍全沒。賊遂躪兩湖。先是公以碧堅山城當嶺要衝。檄兵使金應瑞守之。應瑞諼以受元帥。令棄城遁。公遣軍官。卽所在斬之。元帥故匿應瑞。廷議有不悅公者。又因是颺言公軍法不行。實解散應瑞事也。公欲自死守關嶺一城。被旨還朝。于時楊經理鎬方集大軍南征。兵食調度。一委於公。一日經理招公謂曰。我已發行牌。爾可速接軍餉。公曰。兩南峙糧于僻邑。以待必須。預知師期。乃可轉運戰所。今老爺不告于我國。先發行牌。今雖催運。定不及也。請少緩師期。經理大怒曰。爾不欲討賊而爲此歇後語耶。公曰。糧先於軍。則必爲賊得。軍先於糧。則一日之飢。足以致敗。必須糧與軍齊到。可以濟事。爭辨不已。經理益怒曰。師期爾何敢干。命牢卒拉公出。公顧而大聲曰。如是則老爺事去矣。經理默然。旣而復招公前密問曰。爾欲退期幾日。曰非五六日不可。經理遂如公言。當是時。微公漢語精敏。乘機應對。可回經理之强項乎。是冬。經理擊破蔚山賊外柵。久圍內城不克還。方謀再擧。主事丁應泰劾經理輕進諱敗。蓋應泰素不平東征之擧而嫉人有功者也。宣廟以楊公當丁酉變初。單車赴急。且指揮麻貴等鏖賊稷山。使吾東奠安。皆其力也。其功甚大。其誣安可不辨。問諸大臣誰當使事。首相柳公成龍以有八十老母。不自請行。左相金公應南方有疾。公亦新經重病。宣廟見其憊。不忍強使。公退私於柳相曰。吾病已蘇。筋力可勉。但此大使事也。我乏文辯之才。故不敢自請耳。柳相卽以公言白于上遣之。行到鴨綠。望見應泰從西來。公避諸樹林間。應泰到義州。始料公行必爲經略地。遣飛騎趕公一行回。且搜文書。行中大擾。公徐爲華語引丁使。入房問之。丁使具言應泰指。公曰。吾奉吾王命。奏事天子。已入上國境上。今若以主事之故徑返。是棄吾君命於草莽也。丁使猶不肯持之急。公曰。無已則有一計。爾等盡縛吾等。倒載而去。則吾等可以有辭於吾君。丁使意沮而去。丁遂差人直奏于朝。全不擧楊經理事。反誣奏我國用僣禮。至有招倭入犯之說。公在玉河館。日與副使許筬,書狀官趙正立。詣諸部科官。請雪國寃。陳辯剴切。又自草奏本。乞依民本例轉奏天子。叩頭流血。通政司感其至誠。相顧歎息。又叩閣老馬前。乞上其奏。奏雖見阻。朝廷仍是而知丁劾之誣云。及還。宣廟面勞。慰籍之甚厚。陞左議政。俄陞領議政。時柳相已被彈而去也。公上箚言柳成龍之不自詣燕行。果爲非矣 。淸介自守。血誠憂國。素著於危難之時也。而讒舌乘㕁構揑百端。用賢不卒。朝廷將亂。臣竊痛之。然柳相卒見逐而公亦不安於朝。亡何朝紳岐黨。色目尤多。議論紛紜。熒惑日月。公又上箚曰。朝廷不尊。主威不立。是非不明。擧措多錯。鄭榮國,蔡謙吉等。雄唱雌和。托以草野。迭進邪疏。搖撼臺閣。如此不已。禍人國家必矣。又請登對。直陳分黨人姓名。以爲某是某黨。某黨主某論。某如此某如彼。請振發乾斷。進賢退不肖。以鎭浮議。其所峻斥以爲尤不可用者。卽洪汝諄,任國老等橫甚者也。上爲之聳聽。仍問公曰卿意欲用誰耶。對曰。柳成龍可謂捄時之相。此時人才無出其右者。公仍乞骸骨。陳懇不已。宣廟面諭曰。卿以宗戚大臣。舍我將何之。將之楚乎。之齊乎。公言愈激厲。大觸時諱。而聖敎乃更平溫。蓋宣廟素知公忠誠出於天性。爲國家爲此論。無它腸也。故勉留敦眷如此。於是李爾瞻等毒腹仄目。害公毁公無不至。以公望重。終莫敢彈擊。惟於避嫌之啓。以高亢固執斥之而止。公遂免相。己亥秋。退居東湖。復拜相力辭免。宣廟念公不置。聞公病重。遣內醫不離救療。又召卜人於臥內。問公壽算長短。且以江上寒凜。撤御室氊障子賜之。問遺交道。庚子。懿仁王后昇遐。公自衿川入臨。九月。有命以公爲三道都體察使。開府星州。辛丑。以病還。壬寅。上命選淸白吏。公與柳相居首。李相恒福所定也。甲辰。策扈聖功臣。封完平府院君。又以公久在兵間。命勘宣武功等第。公辭焉。自壬寅至戊申。家居養閒者幾五六年。光海嗣位。復拜領議政。朝野加額相賀。然群小已握朝柄。公所薦淸謹宿望之人。光海皆不用。上下相煽。樂造禍網。一朝三司誣告臨海謀逆。遂起大獄。諸大臣當庭鞫左右視。莫敢先發言。公獨曰。 謀逆大故也。必須告者與被告兩造具備。方可尋端緒治之。今三司實告變。三司雖不可致理。啓辭有曰。以草薦裹椎劍。潛入闕門。時守門將卒有見之者。此將卒可問也。諸公皆然之。即問將卒。皆曰椎劍非小物 。吾等亦有目矣。入門時豈不見乎。仍抗聲大唱。臺廳錯愕者良久。乃請窮訊其將卒。光海不許。別批曰。此獄不必問外人。鐵椎大劍。宮中或有見之者。公即引疾入。光海以其間誘宮奴有罪者許以免死。使證其逆。有二奴亂言而獄已具矣。光海屢諭公出視事。公終不起。仍上箚極陳嚴肅宮禁。屛絶女謁。敬事母后。愛護同氣。毋受奸讒。又言待詔使恤民事數條。光海仍遣六卿就第。問民事何先。公請設宣惠廳行大同法。其法每春秋。逐民田一結。各收米八斗。輸於京庫。以時俵給各司私主人。使自貿納上供諸物。視時市估高下而優剩其數。使私主人亦得以自資。此外不許尺布升米加徵民戶。以革防納什倍之弊。科條精密。經久可行。光海命先試之畿內。巨室豪民與私主人等。皆失防納大利。百途沮撓。光海屢欲罷之。以圻民爭言其便。故行之至今。然公之始設大同法者。通行一國之謂。豈但畿內而止哉。皇朝疑光海立不以序。遣嚴,萬兩差官。査問臨海病癈狀。鄭仁弘請斬臨海頭以示査官。公言皇命天也。天可拒乎。順天則保無它虞。李公德馨,李公恒福皆主公議。竟得無事準封。仁弘大怒。又與李爾瞻等主論請誅臨海。三司伏閤齊請。促大臣率百官廷請。而公顧上屈法伸恩之箚。大臣李公恒福,沈公喜壽,大司憲鄭公逑皆與公同。仁弘等以此尤嫉公。目以護逆。公復引疾入。翌年。始得遞。辛亥。復入相。又稱疾篤累辭。數月乃拜入對。極言君德傾危。朝政紊亂狀。辭氣切直。言淚俱下。光海遽起入宮。怒謂左右曰。人言李某日食粟飯一匙。此妄也。今日喫它罵辱。甚不祥不祥。汝輩早晩必死於它手也。公即辭免。益杜門謝人事。壬子。誣獄大起。癸丑。獄禍尤大熾。三司百寮指幼穉永昌爲禍本 。至請誅殺。有一觸兇議者。必推而內諸黨逆之中。舊日名流多被削竄。公謝以病。一不參永昌廷請。時有大拍頭之論。以爲永昌臣子也。大臣不可爲一臣子而死。於是賢如李,沈諸相。亦參廷請焉。沈相喜壽白光海曰。如此大事。宜遍與諸大臣議之。光海曰。大臣有不參者乎。沈曰。李某終始不參。光海終無怒語。但曰。李某病甚。其不參勢也。蓋慮公來則有妨此議也。鰲城戲謂沈相曰。公之必欲援入無過之友者。以爲分過之地耶。君果不爲無過之人耶。及永昌之死。鄭公藴抗疏極言永昌之寃。且曰。殿下何面目入先王廟庭乎。光海大怒。欲置之死。盡召諸大臣議蘊獄。公辭以病。因上箚言蘊不可深。罪光海雖不納而意少解。宥蘊配濟州。乙卯春。公見頒敎語甚不道。又見鄭造,尹訒等兩宮各處之啓。嘆曰。此關倫紀綱常事。宗戚老臣如我者。敢惜一死。無一言乎。即屛子弟。草小箚切諫。大意言父母雖不慈。子不可以不孝。光海大怒。遣注書南溟羽迫責問曰。卿以我爲不孝。不孝是極罪。卿將欲置我何地。且此言出於何人。直言無諱。公對曰。上至誠奉承如此。而臣陳妄言。臣當伏法受誅。不敢復染它人。再三逼問而終不對。群兇尤憤。請置重律。光海止命中道付處。配洪川縣。儒生金孝誠,鄭澤雷,洪茂績等上疏論救。皆遠竄。又誣謂南以恭以舊時幕僚指嗾公。亦配中道。蓋欲實公罪也。是年。關東大旱。及公至洪川配所。忽大雨。關東人謂之相公雨。庚申。放歸田里。公以衿川先壟近京城不敢歸。客寓驪江。草屋數間。不蔽風雨。家小倂日而食。面有飢色。公坦如也。是時大妃已錮西宮。國將顚覆。客有來公者。傳言時事。公輒垂淚不答。客不敢竟其語而去。先是光海有流竄者贖銀許放之令。時相有欲自出銀代贖之者。沈相喜壽曰。此非完平意也。止之。天啓癸亥。仁祖大王反正。首起公領議政。遣承旨宣召。公入來。而朝廷大定。上下恃以爲安。光海時主癈論爲戎首者。先公未到。旣已正刑。其他可議者亦多。公請分等定律。次律則免籍沒。緣坐䝱從註誤之類。多請平反。上皆從之。仁穆大妃積怨深怒於光海。累請於上欲殺之。公涕泣進曰。光海自絶于天。癈則宜矣。若至誅殺。則老臣嘗所委質。非所忍聞。臣當自此退去。仍涕泣不已。上曰。寡人亦有此意。聞卿言。敢不保全之是力。公又請設裁省廳。以祛冗費。又請行宣惠法于八路。則此便民之第一政。而巨室豪吏非議猶夫前日。只令關東倣畿內行之。識者恨其不咸。秋引年乞退。上命賜几杖。遣近侍中使。宣醞設宴。又命肩輿赴闕。上殿給扶。皆盛禮也。甲子賊适叛。以公爲都體察使。公請自出戰。上曰。危疑之際。元老不可遠去。只遣副使行。方适之初反也。奇自獻亦罹株累。下理械繫。公進言曰。自獻之罪狀未著。況此人當廢母后時。獻議力爭。遂至遠竄。是可謂十世宥之者也。其後常自咄咄語侍側子孫曰。夜行誅殺。如許之多。而身都首相。曾不得與聞末議。久矣吾耄矣。公扈駕公州。傷於鞍馬。行步不良。力辭得遞。乙丑復拜。辭以廢疾。難於供職。丙寅得遞。丁卯翟變。復爲都體察。使扈昭顯世子南行。公以世子分朝。本爲拊綏南方。請簡約陪從。以省州縣供億。時散班官多從分朝。一行煩擾。公使於陣後從行。止宿於十里外。又先遣從事官詣宿次。禁斷浮費。有不如戒者。輒杖其守令。所至肅然。行中憚其嚴束。謗議喧騰以爲體察使不往討賊。却來點撿行李。幕中輕銳皆憤惋。請公收兵殿後以自別。公泣曰。是何言耶。上以沖嗣托於老臣。吾豈忍一刻離違也。卽一行驅我使去。我不聽也。行中或有異議。公至誠開諭。諸公咸悅服。至今兩湖人民語及分朝時事。必曰無一事勞費。大率公戒勅之力也。四月。大駕還都。九月。公請暇展墓衿川。仍上疏言臣本意欲需時事平定。得乞骸骨。今太平無象。臣老病垂死。不得已退歸。若國有變故。則未死之前。當奔赴不敢後。上始知公決去。宣召相銜。公終不起。累請致仕。上不許。以公不受祿。令京畿監司繼給米饌。每有警急。公輒輿疾入覲。上甚倚毗而敬之。聞公田舍湫隘。命起第其旁。公辭不許。又賜素褥素衾。敎曰。卿儉素可敬。以此賜之。以成卿之德。甲戌正月二十九日。卒于正寢。壽八十八。上震悼。輟朝三日。遣近侍弔祭賻恤。官庀有加。公孝友天植。幼長篤行。咸川公中歲以後。屢苦危疾。公每就國醫安德壽問藥。安老痺不能見客。有一婢傳語。公往必袖贄遺婢。安感其意。爲之盡力。藥輒有效。公侍咸川公側。官方居執義或承旨時。而人有來候咸川公。或伻人來問者。公必親自往復內外以傳咸川公語。不假婢使。人不知官貴也。居喪廬墓。率禮盡誠。自製墓表。手刻石樹之。事長兄縣令某。愛敬俱至。其亡也。營葬樹石。皆自竭力。不以貧故。有所不足。縣令子性傳客死湖四。時公已貴重。尙有它子姓。而躬往扶櫬返葬。又爲性傳子守諴奉咸川祀。欲置家舍而力不贍。以所構宅推而與之。宅本公之胤子義傳。自鳩木石所築者也。推仁恤族。分俸救乏。惟恐不及。公退之暇。惟以訪問親戚爲事。然而未嘗薦授官職。曲從請托。常曰。吾早爲將相。非不隆貴。而與時齟齬。此身不自謀。何敢論薦親舊。不料晩年遭遇聖明。姪孫輩忝竊仕版者多。吾甚愧懼。吾於兩銓。不無論薦人才。而兩銓多不用。今不問於我而官我子弟。豈以我有私愛耶。其事上也。唯以誠信不欺爲主。當言必言。言必盡意。言雖萬端。而無不中窾。故動人主之聽。無益之辯。務華之言。未嘗一出於口。居官。未嘗無故呈辭。其有不病而引入者。則必其言有不得行。而不欲爲苟去。以冀回悟。如昏朝逆獄不參鞫之類是也。自小官以至公宰。當職服勤。雖朝夕例仕。一未嘗後於人。宣廟嘗語閫臣曰。當今盡心國事者。唯平安監司李某一人。聞者媿焉。公自少不喜交遊。旣釋褐。愈益韜晦。人稱爲處子正字。立朝言論未嘗偏係。惟惜名流扶公議。是事是急。雖有偏心者。不敢以偏黨窺公。公持廉太高。不但苞苴不敢近。雖外方歲時例遺。名數稍優。則門僮已却之。自奉寒儉。甚於窮鄕布素。脫粟之飯。不糝之羹。以終身焉 。人亦不敢以布被譏之。其開府成川也。以國家新去亂。而帳殿在泥露。不處宏侈館宇。自擇朴陋下室居之。且積馬蒭于降仙樓上。雖軍官子弟不許一登。其處困約己何如也。其莅下也。仁恕莊重。使人知愛而不敢狎。刑獄主意在寬。而亦未姑息放過。初仕槐院。典祀昌陵。奉常童奴偸食籩實。公卽夜馳還改受行事。奴當坐法。公悶其迷騃誤陷。力言于覆啓諸宰。得末減不死。常飯于體府。飯中有沙。卽潛吐袖裏斂之。坐客亦不識也。其爲政。提挈綱維。務用典故。雖事變無窮。宰割曲當。凡行政。四方人名地名。品目度數。一閱目便不忘。故吏胥不敢欺。及踰耆耋。歎曰。吾才長於刀筆。少長能辨公事者。徒以記性兼人也。今老矣。事過而有遺忘如此。而尙可仕乎。或問某性鈍懼。不能從政。公曰。此不專之過也。專則志慮必精。且能記憶。吾常時亦好看書。若當官則便束書庋之。蚤夜思惟公事而已。今人作郡讀書。此非吾才所能及也。其取人。必先論心術平頗。尤不喜回互矜飭者。每稱姜參議緖之爲人。雖逃於酒而人品甚高。神鑑無碍。追思不已。其他評隲先後輩所與游者若而人。而率皆端方正直忠信之流。其不與者則可知矣。少時。豪邁不羈。家傳音律。盡通樂譜。每乘興。携琴上駱峯。自彈自歌。興盡而返。尤好佳山水。幸得官暇。遊遍名區。探歷險阻。意氣不衰。亦嘗自病剛克過中。及其涵揉變化。德器成就。則人視其篤恭淳謹。肫肫仁厚而已。公雖自言昧於學問短於文詞。而識見洞徹。處己治人。動有規範。則終身講說者。能及是乎。辭令該贍。疏箚書帖。明白簡當。則專門操觚者。瞠乎後矣。鄭公曄書問於申相欽曰。完平誠可人而但不讀書久也。申相答曰。完平作事皆中理。是學也 。徒文何用。筆法雅健遒逸。八十以後所書。少不減盛年時。然人莫以善筆稱公者。豈非德望事業掩之耶。童習時讀書過苦。仍成胃症。瘦似骨立。若不勝衣。或疑非壽相。而公保嗇精氣。且勤藥餌。凡可以伐性者。一切斷却。嘗於西行。偶有所眄。 旋卽懲悟。自此益堅所操。墨守難破。頗有酒量。而未嘗酣暢。由是鮐耉之境。聰明精力不替。程叔子所謂吾以忘生徇欲爲恥者。公亦有焉。常作十六字訓。以示子孫曰。無怨於人。無惡於己。志行上方。分福下比。踐履之篤。亦可見矣。凡所臨莅。吏民愛之如父母。敬之如神明。去則攀轅涕泣不忍別。旣去。頌德立碑。追慕不置。平壤人至立生祠薦祀。公潛遣人毁之而復立。我國之有生祠自公始。昏朝時公當厄。兒童媍女咸誦姓名曰。某爺仁人也。雖光海癉怒公忤己事。而不敢斥言公名。必曰完平。雖小人內懷媢忌。亦必曰某可謂賢相。萬曆丁巳年間。楊經理鎬在遼東。見我國使人。問公起居。答曰在外。楊又曰。梧理,鰲城賢相。而爾國不用。必是小人當國。公之一身出處。係國家安危治亂。可謂天下人皆知之也。世傳公精神絶異。凡有事變。輒先形於夢寐。分朝時。兵曹參判李命俊謁公問之。公曰。吾少也果有此異。今已衰甚。夢亦不復舊矣。仍以近夢二兆語之。不數日皆驗。一行神之。癸酉冬。夢得絶句。有春月不吉之兆。及病革。命移簀正堂而終。公不好風水說。作誡刻石。定爲家法。嚴勅同宗。勿卜他山。皆於先壟四周。鱗櫛附葬。使宗子董率子弟葬祭。俾百世無改。用是年某月日。葬于配貞敬夫人某郡鄭氏墓左。夫人生一男一女。男義傳屢典州郡。襲封完善君。以壽八十。陞資憲。女李廷稷郡守。側出二男七女。男孝傳,悌傳。完善生三男三女。男長守約。前淳昌郡守。次守紀。監察。次守綱。通政衛將。內外孫曾嫡庶男女五十餘人。公嘗謂子孫曰。吾平生持論或不中。臨財或不避。見義或不勇。多少愆尤有不可追者矣。吾死之後。若以墓道之文。託於不相知者。或恐張大過實。重吾不德也。仍令子弟略記族出歷官終始。屬於李副學埈。公歿後。家督完善君義傳以公易名之狀。屬于故尙書李公植。才卒業未及上。完善尙書相繼而亡。今公后孫守約來絅而言曰。及我大父存。游大父之門者非子而誰。願子之爲之狀也。絅辭不獲。就李狀中。稍加櫽栝數語如右。嗚呼。公立朝七十年。爲相四十年。始佐我宣廟。建中興之業。中値昏亂。雖遜于荒。而綱常賴而不墜。逮事我仁祖。爲邦家蓍蔡。民物昭蘇。則三代以下及我東方做相業者。雖代不乏人。類不過一名之休一事之善而止耳。夫豈若公之忠勞誠節。隨所遇而著。知有國家而不知有其身。秉大公至正七十年如一日者哉。絅於辛未年間。入侍經筵。上特問筵臣以公居處何㨾。仍曰。古有賢相當雨屋漏。秉傘度夜。一時以爲潔廉太峻。今完平之淸。奚異於是。嗟歎良久。後絅出宰時。謁公於衿川村第。公方踰耋。而褐衣糲食而處。陪語終日。言言惟憂國家事。不及其它。乃知天生公於我東者爲社稷也。豈偶然哉。然謙謙之德。常若不足。垂戒子孫。以無實之言或加身後爲懼。衛武公作抑戒何以加玆。絅用是不敢盡記世人之侈說公者。略贅謏聞 。以備太史之採擇太常之議諡焉。崇禎紀元後歲辛卯。正憲大夫。前行龍驤衛副護軍趙絅。謹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