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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숨결 따라
걷는 강화나들길을 다녀와서!
길게 이어진 길, 때론 한적하고 고즈넉한 길이 여행자를 맞는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섞여 있고, 한낮의 햇살은 따사롭다. 강화
나들길에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노라면 새로운 풍경과 세계가 펼쳐진다.
의 오래된 역사부터 근현대사를 만날 수 있고, 한국인의 오랜 정서와 삶의
문화가 길 깊숙이 배여 있다. 강화나들길의 유래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1906년 화남 고재형 선생이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길을 살려냈다. 2009년 3월 처음 4개 코스를 열었고, 그
후 하나둘 새로운 길이 이어졌다. 지금은 19개 코스 20개 구간, 310.5
km에 달한다. 심도역사문화길, 호국돈대길, 능묘가는길 등 주제에 따라 나눠
져 있어 원하는 대로 길을 선택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길을 걷다가 세계문화유산을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나들길은 선사시대
고인돌을 통과한다. 나아가 길은 고려시대의 왕릉과 건축물, 그리고 외세에
맞서 싸웠던 조선시대 진보와 돈대를 만나게 한다. 바다와 강이 있으며, 파란
하늘과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걷다보면 여행자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과 조우한다. 뜨거운 숨결이 채 가시지 않아 붉게 타오르는 태양, 그
강렬한 빛에 검은색으로 변해버린 바다와 섬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길
위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자연. 강화나들길이 지금 우리를 부른다.
강화나들길 코스는 모두 19개 코스가 있다. 강화 본섬 13개 코스 14개
구간 226.4km / 석모도 2개 코스 26km / 교동도 2개 코스 33.2km
주문도 11.3km / 볼음도 13.6km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길이는
310.5km이다.(홈페이지 www.nadeulgil.org 참조)
(인천관광 100선, 2016. 11.)
황산도(黃山島) 초지대교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섬
초지대교를 건너서 왼쪽으로 길을 따라 1km가량 달리면 황산 어판장
입구를 가리키는 팻말이 보인다. 낡은 목선 한 척이 황산도 어판장 입구
를 지키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목선 대신 지금은 대부분 FRP(유리섬유
강화플라스틱) 재질로 배를 만드는데 철보다 강하고 알루미늄보다 가볍
고 녹슬지 않으며 가공하기 쉽다는 것이 장점이다. FRP 재질의 배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목선을 보니 정겨워서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밝은 색을 페인트로 칠했지만 나무가 썩어서 생긴 상처는 어쩔 수 없어
얼마만큼의 세월인지 짐작케 했다. 나무배는 여행객들에게 마치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강화도와 그 부속섬들을 다 돌아
보고 마지막으로 들른 섬 아닌 섬 황산도 답사는, 25년의 섬 답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황산도에 도착하니 구름 사이로 숨어 있던 햇살이 터진다. 황산포구 거대한
남단 갯벌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곳은 배 안에서 횟집을 하는 독특한
어판장이다. 31년 전만 해도 독립된 섬으로서 뭍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지만, 지금은 초지대교 개통 덕을 톡톡히 보게 되었다. 2008년에
재개장한 어판장이 있으며, 같은 위치의 황산도 포구는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항산도(項山島)로 불리기도 했다. 강화 나들길
은 산과 바다와 들녘을 골고루 거닐 수 있는 20여 개의 다양한 코스가 있다.
특히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막 건넌 후, 초지진에서 황산도, 동검도 길을
따라서 동막해변을 걸어가는 8코스는 여름철 최고의 길로 꼽힌다. 강화남단
거대한 갯벌을 끼고 상쾌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걸을 수 있다. 초지대교
바로 옆에 있는 황산도는 더 이상 섬은 아니지만, 황산도 갯벌을 쉽게 접근
수 있도록 1.3km 정도의 데크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출처:(한국의 섬 - 인천광역시·경기도)
호국돈대길은 도보여행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선 길이
평탄하다. 해안을 따라 거의 평지를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으로,
중간중간 들를 곳이 많다. 강화역사관부터 용진진·화도돈대·광성보·
덕진진·초지진까지 잘 정비된 역사 유물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사실
이 구간은 강화도 여행에서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였다. 강화 장어
대부분이 바로 이 염하산이어서 주말에는 차량 정체가 빚어지는 지역
이다. 호국돈대길 일대 지역은 자체로 강화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하나 호국돈대길이 최적의 도보여행지인 이유는 따로 있다. 호국돈대
길에는 도보여행자만을 위한 길이 있기 때문이다. 호국돈대길은 강화
외성 터 위를 걷는 코스인데, 강화외성을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고려 왕조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강화도에 성벽을 두 겹이나 친다. 하나가 해안선을 따라 친
외성이고, 다른 하나가 왕궁을 둘러싼 내성이다. 외성은 몽골에 의해
무너졌지만, 그 흔적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해안을 따라
야트막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강화외성 터의 어떤 구간은 논두렁이기도 하고, 제방이기도 하다. 또
어떤 구간은 가로수길이기도 하며, 웃자란 갈대밭이기도 하다. 하나
이 길은 오로지 호국돈대길을 걷는 자만의 길이다. 길 왼쪽으로 긴
갯벌이 드러나 있고, 오른쪽으로 차가 달린다. 물길 옆에 나들길이
있고, 나들길 옆에 찻길이 있다. 세 개의 길이 나란하다. 아마도 호국
돈대길은, 전국의 걷기 명소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인프라를 갖
춘 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호국돈대길은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길이 못 된다. 우리 반만
년 역사에서 가장 아팠던 현장을 찾아가는 길이어서다. 그중에서
가장 가슴 시린 역사가 신미양요(1871년)다. 호국돈대길 위에 있는
유적 대부분이 구한말 치욕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지만, 구간 끄트머리
광성보·덕진진·초지진에서 조우하는 참담한 역사는 지금도 피를 끓게 한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의 전력은 군함 5척과 해병대 1,230명, 대포 85문
이었다. 초지진은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함몰됐고, 덕진진은 교전 없이
점령됐다. 어재연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킨 광성보는 교전 1시간 30분
만에 함락됐다. 미 해군 기록에 따르면 광성보 전투가 벌어진 1871년
6월 12일 하루에만 조선군 243명이 죽었다. 반면 미국은 3명이 전사
하고 9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미군의 전력은 세계 최강 수준이었다.
남북전쟁(1861∼1865) 참전 경험이 있는 장교가 대다수였고, 전투병
은 최정예를 자랑하는 해병대가 투입됐다. 무엇보다 화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조선의 화포는 사거리 120미터였지만, 미 군함에서 쏜 함포는
사거리 1,560미터였다. 조선군이 쏜 화승총은 겨우 120미터를 날아
갔지만, 미국은 사거리 914미터의 스프링필드 소총을 겨누었다. 이건
전투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지만, 꾹꾹 참는다. 직접 가서 듣고
보시라. 초지진 성벽을 보면 아직도 미군의 함포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 강화역사관에 휘날리고 있는 수자기(帥字旗)는 진짜가 아니다.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수자기를 뽑아 본국으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꽂았다. 이것 말고도 분이 차오르는
역사가 곳곳에 널려 있다.
호국돈대. 나라를 지키는 해안요새란 뜻이다. 그러나 두 눈으로
지켜본 호국돈대는 힘없는 민족의 슬픈 안간힘이었고, 외세에
무참히 짓밟힌 현장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그 길을
걷는 걸음은 진지해야 한다. 여느 나들이의
걸음과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
출처:(해안누리길 정보, 한국해양재단)
강화갑곶돈(江華甲串墩)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돈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하였고, 그 뒤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다. 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어영군(御營軍) 3,000인과 함경·황해·강원 등 3도
승군(僧軍) 8,000인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조하였다. 갑곶돈은 통진
(通津)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설치하였는데, 돈대 주위가 113보
(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은 40개였다고 한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에 속한 600명의 군사가 이곳
으로 상륙하여 강화성을 점령하였지만,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하여 물러났다.
1875년(고종 12)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되었다. 이 때 갑곶돈은
망해(望海)·제승(制勝)·염주(念珠)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하였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
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고종실록(高宗實錄)』
『강화사』(강화사편찬위원회, 1977)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화도돈대(花島墩臺)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후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로 1679년(숙종 5)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御營軍) 2,000여 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군(僧軍)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강화도의 돈대는 53개 중 49개가 병자호란 43년
후인 숙종 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때 성곽이나 변방 요지에 세워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련한 초소인 돈대는
일반적으로 주변보다 높은 평지에 쌓는데, 밖은 구릉을 깎아서 높게 하여
적의 침입을 막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간척지 벌 가운데의 작은 동산 위에 위치하는 화도돈대는 오두돈대
(鰲頭墩臺)·광성돈대와 함께 강화의 7보(堡) 5진(鎭) 중 하나인 광성보
(廣城堡)의 관리하에 감시소와 방어진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쪽
으로 700보 거리에 오두돈대가 있고 북쪽으로 1,390보 거리에 용당돈대
(龍堂墩臺)로 이어진다.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 주변의 외성은
소실되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수구(水口) 옆에는 강화유수 한용탁(韓用鐸)
이 1803년 세운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가 있다. 성벽
터로 볼 때 평면은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북쪽에 무너진 성벽의
석재들이 약간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성벽의 터만 남아 있을 뿐 완전히
소실되었다. 돈대 내부는 과일나무를 심은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강화군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출처:(두산백과)
손돌목(孫乭項, Sondolmok)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길상면 덕성리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사이의 염하 가운데에 위치한다. 이곳은 염하의 수로 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험하고 소용돌이가 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삼남지장의 세곡미를 운반해 오던 조운선이 수시로 난파되었던 곳이
기도 하다. 『강화부지』에 "물 흐름이 빠르고 격렬해 아주 위험한 곳
으로 이름이 높다. 삼남의 선박이 이곳으로 모인다. 한양으로 가려는
자는 모두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도 지명이 기입되
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시대의 한 왕이 피난을 위해 손돌이라는
뱃사공에 의지하여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물살이 위태
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참수하였는데,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그것을 따라가면 안전
하게 지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돌의 말대로 하여 안전하게
이곳을 지난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넋을 위로하며 장사
를 지냈다고 한다. 손돌의 무덤이라 전하는 곳이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다.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광성보(廣城堡)
외세에 맞서 싸우며 강화해협을 지켰던 곳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한 광성보. 숲과 해안이 어우러져 싱그러운 풍경
이지만 이곳엔 굽이쳐 흐르는 바다의 거센 물살만큼이나 강렬한 호국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광성보는 강화 해협을 지켰던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 중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
한 후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터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 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한 후 숙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는 가장 치열
했던 격전지였다.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즈
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 물리
쳤으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해 덕진진을 점령한 뒤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 등 조선군 대부분이 순국
했다. 이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는 1976년에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
용사들의 무덤도 보수 정비했다. 피비린내 났던 광성보 전투의 기억은
시간 속으로 흩어져 흔적만 남아있다. 안해루를 지나 잘 다듬어진 산책로
를 걸으면 울창한 소나무 숲과 시원한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산책로를 따라 쌍충비,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용두돈대를
만날 수 있다. 이 외에도 무명용사비, 신미숭의총 등이 세워져 있다.
출처:(인천관광 100선, 2016. 11)
용두돈대(龍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
돈대의 하나.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
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
(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
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
(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
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두산백과)
강화도령 이원범 조선조 25대왕 철종(哲宗)
조선 제25대 왕(재위 : 1849~1863). 휘는 변(昪), 초휘는 원범
(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전계 대원군(全溪
大院君) 광()의 셋째 아들. 1849년(헌종 15)에 덕완군(德完君)
에 피봉, 헌종이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
王后 : 순조비(純祖妃)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명으로 강화(江華)
에 촌거(村居)하다가 승통을 이어 1850년 19세로 인정전(仁政殿)
에서 즉위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고 촌에서 농경(農耕)을 하다가
왔으므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에 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王妃 : 철인왕후(哲仁王后))로
삼았다. 김문근이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고 국구(國舅)
로서 왕을 돕게 되자 순조 말부터의 세도(勢道)의 폐해는 사라지지
않고 또 다시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손으로 들어가고, 3년부터
친정(親政)은 하였으나 보잘것 없이 되었다. 정계(政界)는 김씨
일족의 독무대가 되고 백반(白般)을 전횡,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기강은 문란해졌으며, 수뢰는 공공연하게 행하여지는 상태가 되었
다. 따라서 삼정(三政 : 전부(田賦)ㆍ군자(軍藉)ㆍ환곡(還穀))은
어지러워지고 도처에 탐관 오리가 늘고, 백성을 착취하여 인민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여
1862년(철종 13)에는 진주(晋州)에 민요(民擾)가 일어나 삼남
일대를 휩쓸었으며, 잇달아 함흥(咸興)ㆍ제주(濟州)에서도 민란
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 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은 시의에 맞는 사상 운동으로 날로 커져갔다. 관에서는
겁을 내어 1863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고 최제우
잡아 대구에서 처형하였으나 그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에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철종은 정치를 모르는
농군의 아들로 즉위하여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잡아보지 못하고
후사(後嗣)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예릉(睿陵)에 장사하였다.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출처:(인명사전편찬위원회)
강화도령
작사 이서구
작곡 전수린
노래 박재란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 지던
강화도련님 강화도련님
도련님이 어쩌다가 이 고생을 하시나요.
말도마라 사람팔자 두고 봐야 아느니라.
두고 봐야 아느니라.
음지에도 해가 뜨고 때가 오면
꽃도 피듯이 꽃도 피듯이
도련님이 운수 좋아 나라님이 되었구나.
얼싸 좋다 좋구 좋구 말구 상감마마 되셨구나.
상감마마 되셨구나.
2019-05-04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