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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짓기지도회 창립 60주년 기념 지상 인터뷰
2021.9.30.
상주 글짓기 신화의 주역 최춘해 선생님
박상재 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지요? 올해에 9순을 맞은 것으로 아는데, 오래 전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시고 지금은 아동문학 문하생들을 길러 내고 계시지요? 우선 선생님의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춘해: 곶감의 고장 상주 사벌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벌에는 삼국시대 이전 사벌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왕릉만 남아 있습니다. 상주의 특산물은 삼백(三白)입니다. 흰 쌍, 누에고치, 곶감 등. 공갈못 민요와 상주서보가가 있습니다. 들이 넓어서 농수로 이용한 보와 못입니다. 서보가 가사는‘상주서보 유명하다. 서보수 물만 열어 놓면’으로 시작되고,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채련요) 등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낙강 시제를 이어받아서 지금도 해마다 낙강 시제를 열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놀았습니다. 냇가에서 씨름도 하고 웅덩이에서 입술이 새파랗도록 헤엄을 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이 사랑방에서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등을 한 사람이 소리 내서 읽는 걸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워싱튼 카네기 등 전기집을 우연히 만나서 읽기도 했습니다.
박상재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원로 동시인인데 등단 할 무렵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최춘해: 1967년에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을 하고 『한글문학』지에 당선을 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35세이니 늦게 등단을 했습니다. 상주글짓기회원인 신현득, 김종상 두 분은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데 이미 등단을 했기 때문에 두 분에게 작품 합평을 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등단한 사람이 대구 경북에서 손꼽을 정도로 숫자가 적었습니다. 신현득 김종상 권태문, 김한규, 박택종 등입니다. 제가 등단하기 전에 김종상, 이천규와 같이 서울에 가서 내 작품 노트를 윤석중 선생께 보였더니 볼 생각도 않고 그냥 밀쳐놓았습니다. 내 딴은 정성을 쏟은 작품이고 지도 말씀을 듣고 싶은데 무척 섭섭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섭섭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시골 낯선 사람의 시작 노트를 바쁘신 분이 안 봐 주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노트를 집어 들고 이원수 선생께 갔습니다. 노트를 보시더니 그냥 두고 가라고 했습니다. 얼마 뒤에 붉은 글씨로 첨삭을 해서 보내왔습니다. 감동을 했습니다.『한글문학』지에 마지막 추천을 해 주신 분도 이원수 선생이었습니다. 초회 추천 작품은 조유로 선생이었습니다. 추천 완료 작품은 ‘이른 봄’입니다.
암탉이 알을 품듯/봄님이/온 세상을 품고 있다. 안개 낀 아침.//닭의 체온으로/보송보송 예쁜/병아리가 깨이듯//봄님의 품안에서/병아리처럼 그렇게 예쁜/연둣빛 새싹이 깨일 테지.//보슬보슬 내리는 안개비는/새싹의 젖줄//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을 빤다.
추천의 말 동시 이른 봄
최춘해님의 <이른 봄>을 추천한다. 님의 동시들은 이미 적지 아니 보아 왔고 기대도 걸어온 나였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귀여웠다. 아침 안개를 알을 품은 암탉처럼 느끼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안개비를 새싹의 젖줄로 보고 “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을 빤다.”고 한 끝 연에서 이 동시는 뛰어난 시의 광채를 보게 해 주었다. 최님은 그의 생활시 들에서 내용의 동화나 소설다움에서 떠나 시다운 내용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준 것 같다. 이원수
당선 소감 무거운 짐을……
최춘해
선아, 창아!
나는 너희들을 바라볼 때마다 늘 죄를 지은 것 같구나. 찌들은 살림과 바쁜 나날 속에서 흐뭇하게 웃어주지도, 포근히 안아주지도 못했다. 나는 너희들이 소중한 꿈의 날개를 펴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도 내일도 시를 쓰련다. 내가 쓰는 시가 너희들의 꿈을 가꾸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글을 쓰는 보람을 느끼겠다. 내가 쓴 글에 대해서 ‘이만하면’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마음을 살찌울 글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 마음이 무거워지는구나. 그 동안 이끌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존경하는 이원수님, 신현득님, 조유로님, 김종상님을 비롯한 상주글짓기회 여러분 그리고 교단동인 여러분, 늘상 저를 아껴주시던 여러 선배님들께 깊이 머리 숙여 절하오며 특히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한글문학사 안장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북 상주에서 남 •196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가작 •대구신천초등학교 교사
등단 직전에 아동문학 교단동인회 간사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는 1963년에 대구칠성초등학교에서 발족을 했습니다. 신현득, 오규옥, 옥미조, 하계덕 등이 발기인이었습니다. 1963년에는 신현득씨가 초대 간사를 맡았습니다. 회장은 없고 회의 주관은 간사입니다. 발족 당시 회원은 발기인 4명과 김동국, 강청삼, 김종상, 김원기, 엄기원, 이진호, 이천규, 임교순, 허동인 등 13명이었습니다. 신현득씨가 1년간 간사를 하다가 2대 간사 엄기원씨께 인계를 하고 다시 1년 뒤 3대 간사 최춘해가 맡았습니다. 이 회에서는 매월 <은방울>이라는 동인지를 냈습니다. 매월 1회씩 작품을 교환하고 전호 작품에 대한 각자의 평을 하였습니다.
제가 간사를 맡았을 때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 활동을 취재하러 중앙일보 최종률 기자가 내가 근무하는 상주 사벌초등학교에 왔습니다. 내가 거처하는 사택에서 하루 밤을 자고 갔습니다. 동인회 기사가 문화면 전면에 게재되었습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줄판으로 긁어서 등사를 했습니다. 등사한 작품을 회원 수만큼 간사한테 보내면 간사는 미리 만들어 놓은 표지 <은방울>에 묶어서 다시 회원에게 보냈습니다. 20호까지는 등사판 문집이었는데 21호와 27호는 인쇄판으로 발행했습니다. 인쇄판은 21호와 27호 둘뿐입니다. 상주에서는 김종상, 권태문, 이무일, 이천규, 강세준, 이철하, 박노익 등 유능한 회원들이 있어서 간사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1년간 간사를 하고 1965년 2월에 대구 유상덕 회원께 인계를 했습니다. 그 뒤 한두 달 이어지다가 <은방울> 회지가 중단되었습니다. 교단동인회 활동 기간은 3년간이었습니다. 교단동인회원이었던 분들이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화작가, 동시인, 시인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회가 발족한 지 내후년이면 60주년이 됩니다. 작고한 회원이 권기환 권태문 김삼진 김원기 김정일 박종현 오규옥 유상덕 이무일 최일환 허동인 외 모두 24명입니다. 현재 작품활동을 하는 분은 김완기 김종상 박승일 신현득 엄기원 옥미조 이진호 이천규 임교순 전문수 최춘해 한상수 등이고 이영호 김선주 등은 몸이 불편해서 제대로 활동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은방울> 마지막 회지에 발표하려고 보낸 필자의 원고가 있어서 당시를 회상하는 뜻에서 다시 읽어 봅니다. 66년 8월 17일에 쓴 ‘은방울 37호를 읽고’라는 글이 남아 있어서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아마 제가 간사를 유상덕님께 인계한 뒤에 유상덕 간사께서 나한테 청탁을 해서 쓴 것 같습니다.
은방울 37호를 읽고
아직은 자신 있는 작품을 못 쓰기에 남의 작품을 보는 눈도 밝지 못합니다. 간사님께서 특집으로 꾸밀 원고로 37호 작품 평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망설이다가 간사님의 청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둔한 사람의 잡담이라고 생각하시고 잘못 본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실 줄 믿고 붓을 들어보겠습니다.
‘편지글 동무’(엄기원)- 모략, 중상, 갈등이 많은 현실에서도 한결같이 어린이만은 착하게 키워보겠다는 숭고한 정신에 머리 숙여진다. 이웃을 사랑하고 동무로 삼고 싶은 마음 ‘편지글 동무’도 그런 인생관에서 태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곡이라도 붙여 보고 싶다. ‘편지글 동무’보다 ‘잔디밭’을 더 좋게 생각한다.
‘섬 아이’ (옥미조)-‘섬 아이’ ‘금붕어를 바라보며’ 두 작품 다 어린이를 아끼고, 마음에 조그만 상처도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보드라운, 엄마 같은 마음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을 쓰는 정신이나 요리하는 솜씨가 한결같이 자기 세계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중간 생략)
‘생각을 싣고’ (김상문)-한 편 한 편마다 많은 말이 함축되어 있으면서 비약이 심하거나 억지가 없이 이미지를 잘 형상화해 가고 있다. 잔재주를 부리던 동시에서 이만한 품위와 무게를 갖춘 작품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해 본다.
(중간 생략)
(허동인)-콩나물 교실에서도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알뜰히 살피는 교육애를 존경하고 싶다. 작품의 기교에 앞서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허동인의 작품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제비’는 작품의 깊이가 좀 약한 듯하다. 허동인형은 한결같이 독자적인 세계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우리 마을’ (이영호)-초가지붕, 실 같은 연기, 끄으름내, 갓난애 칭얼거림, 된장 냄새, 삽살이, 소방울 소리 등 모두 평화로운 농촌의 서정곡이다.
‘운동회 준비’ 박승일-운동회 준비로 온통 법석이 된 운동장을 바라본 작품인데, 그 속에서 운동을 하는 아이의 시리를 그렸으면 어떨까? 박승일형의 평소 수준에 미급한 작품인 듯하다.
‘키’, ‘우리 집 번지’, ‘1억5천만 년 훗날의 아이에게’ (신현득)-‘키’에서도 신형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흔히들 쓰고 있는 사생 시나 서정시가 아니다. 어떤 근원을 파고들어 작가 나름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자칫하면 용해되지 않고 무리를 범하기 쉬운 작업인데도 용하게 성공시켜 놓았다.
‘1억5천만 년 훗날의 아이에게’는 오늘 하루 이 시간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복잡하고 바쁜 현실에서도 1억5천만 년 훗날을 머리에 그려보는 것이다. 오늘 이 시점은 역사 속에 한 순간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다. 임시변통으로 얼버무릴 수가 없겠지요.
‘우리 집 번지’는 우주의 섭리를 노래하고 있다. 옛날에서 현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164번지 안에 편히 누우면 은하계가 열린다.’로 다리를 놓았고, 현대 로켓 세상에서 별나라와 왕래될 미래를 그리기 위해 끝 연에 ‘공전을 하면서 손을 흔든다. 별나라에 164번지에서’라고 노래했다. 이렇게 우주를 들먹거리는 굵은 선이다.
‘선생님 눈 속엔’ (김완기)-도서실 운영이라고 하면 으레 김완기라는 이름이 떠오를 만큼 유명해졌다고 생각된다. 당선된 수기가 아니더라도 어린이를 무척 아껴주는 존경할 교육자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항상 어린이를 떠날 수가 없다. ‘눈만 감으면/ 쏙 쏙/ 얼굴을 내밀고/ 쪼르르/ 달려와/ 매어달립니다.’ 어린이의 편에 서서 어린이의 마음을 그렸으면 더 낫지 않을는지?
‘저녁연기’ (이무일)-이 소재로서는 흠 잡을 데 없이 잘 짜여진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어디 흠이 없나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찾을 데가 없다. 둥근 식탁에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저녁 식사를 할 즐거운 기대, 엄마, 아빠 지친 팔 다릴 주물러 드리고 싶어 아직은 일찍하다만 저녁연기를 하는 높이 피워 올리자고 했다. 얼마나 따스한 마음인가. 많은 어린들에게 읽히고 싶다.
(1966년 8월 17일 탈고)
박상재 선생님은 교사가 되었는데 교직 생활에서 보람이 있었던 일, 기억에 남는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최춘해: 제가 교직 생활에서 일관되게 실천한 것은 글짓기 지도였습니다. 여러 학교로 전근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글짓기 지도를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들은 백일장에 나가서 입상을 많이 하기를 바라지만 바라는 만큼 입상을 못 했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글짓기 지도는 백일장에서 입상을 많이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장래에도 계속 글을 쓰고 건전한 생각을 가진 어린이가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1960년대 후반) 자유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고전을 읽고 고전의 내용에 대해서 시험을 치기도 하고 독후감 모집도 했습니다. 또 교사들을 상대로 자유교양 지도 사례 공모도 했습니다. 제가 지도한 아이들이 시도에서 뽑혀서 대구 대표로 서울에 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유교양 대회가 해마다 이어졌습니다. 수년 동안 독서지도를 집중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보람이 있었습니다.
가는 학교마다 일기 쓰기 지도를 하고, 학교신문, 학급신문을 냈습니다. 학교 문집, 학급문집도 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건전한 생각과 서정을 길렀다는 보람이 있습니다.
글짓기 지도에 대한 논문을 써서 시도 대회를 거쳐 전국 대회에서 논문이 당선되어 푸른 기장증 (1983년 11월 11일 제27회 전국현장교육 연구대회 1등급 (제12098호)을 대한교육연합회장 류형진께 받고,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논문집이 발행되자 전국 글짓기 지도자들이 이 논문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제 논문이 글짓기 지도에 도움이 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박상재 선생님은 상주에서 교사로 있을 때 김종상 신현득 생님과 함께 글짓기 지도교사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최춘해: 상주에는 상주글짓기회가 있었는데, 무척 활발했습니다. 신현득, 김종상, 이오덕, 박노익, 이철하, 권태문, 이무일, 이천규 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상주 어린이들 글이 신문 잡지 방송 등에 계속 발표가 되었습니다. 외남, 청동, 상주, 상주상영, 청리 초등학교 어린이 글이 쉴 새 없이 발표가 되었습니다. 이들 학교에는 신현득 선생, 김종상 선생, 이무일 선생, 박노익 교장, 이철하 교감 등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밤에 글짓기 지도를 하기도 하고, 학교 숙직실에서 하기도 했으며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남들이 놀 때도 글짓기지도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백일장이 많았는데 박봉인 자기 월급으로 아이들을 인솔해서 대구로 서울로 백일장에 참가했습니다. 학교 신문을 냈습니다. 컴퓨터가 없던 때라 철판에 원고지를 긁어서 등사를 했습니다. 평일에는 시간이 없으므로 토요일이나 일요일 남이 놀 때에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신문뿐만 아니라 어린이 글을 모은 등사판 문집도 만들었습니다.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하고 싶어서 신이 나서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상주 읍에 모여서 아동 글짓기 지도에 대한 연수를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게 모자라서 주 중에도 만나야 할 만큼 회원들 얼굴이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지 않곤 못 배겼습니다. 글짓기 지도의 목적이 글 쓰는 재주를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 생활지도의 목적도 겸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그늘진 데서 불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생물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했습니다. 일기 쓰기를 중요시했습니다. 일기 끝에는 붉은 글씨로 착한 생활을 칭찬하는 내용을 써 주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이 써 주는 붉은 글씨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윤석중 선생께서는 상주 어린이들의 글로 서울에서 시화전을 열고 그 글을 묶어서 <동시의 마을>이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상주가 <동시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향신문에서 시상하는 경향 교육상을 상주글짓기회 대표 김종상 선생이 받았습니다.
박상재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과 제자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최춘해: 퇴직을 하고 나서 아동문학 강좌를 개설한 것을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98년에 퇴직을 하면서 공직에서 국록을 받아서 잘 살았으니 사회를 위해서 봉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동문학을 해 왔으니 아동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아동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싶었습니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도서관, 복지관, 성당 등을 다니며 찾았으나 장소가 없어서 5년을 헛되게 보냈습니다. 그루 출판사 사장님과 이야기하는 중에 우리 사무실에 와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은재 사장님은 충청도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숱한 고생을 하다가 근근히 셋집으로 작은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좁은 공간이지만 감지덕지하고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 수강생 모집을 했습니다. 오전반 15명, 오후반 15명을 모집했습니다. 1년 과정으로 시작을 했는데 늦게 신청한 사람은 수강을 못 했습니다. 제가 수강료를 안 받으니까 사장님도 전기세, 에어컨, 난방비 등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장님도 넉넉하지 않은데 제가 꼽사리를 끼어서 여간 미안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제 혼자 월요일에는 오전반, 화요일에는 오후반을 하루 두 시간씩 강의를 했습니다. 10기생을 수료시키고 나니, 제 나이가 81세가 되었습니다. 저한테 강의를 받은 1회 수료자 중에서 등단을 하고 봉사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강의를 맡겼습니다. 지금도 수강생 모집, 문학하는 기본이 되는 내용은 개강식부터 약 한 달 동안 제가 강의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제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 18회가 수료를 했으니 어언 19년째가 되었습니다.
1회생이 수료하면서부터 문학지 신춘문예 등에서 신인상에 등단을 하고 창작지원금 수혜자로 선정이 되고 동시집, 동화집을 발간했습니다. 발간된 책이 세종우수 도서, 문학 나눔 도서로 선정이 되고 초중등 교과서에 실리고, 푸른문학상, 눈높이 아동문학상, 천강문학상, 황금펜문학상, 한국안데르센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잇달아 들리는 회원들의 반가운 소식으로 즐겁습니다. 다음은 혜암아동문학회가 발족한 지 15년 되는 해의 통계입니다. 등단자가 81명, 회원이 낸 동시집이 27권, 동화집 5권, 시집 5권, 우수 도서로 선정된 책 8명, 창작지원금 수혜자 21명, 초중등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 사람 4명, 문학상 수상자 15명 등입니다. 그 뒤 3년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훨씬 많습니다. <혜암아동문학회>라는 이름은 1회생이 수료할 때 문학회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고, 우리 선생님 호가 혜암(兮巖)이니 호를 따서 ‘혜암아도운학회’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발족한 지는 아직 20년도 덜 되었지만 회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니 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수강생들에게 우리들의 ‘마음가짐’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1, 우리는 정으로 산다. 2.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 3. 계속하면 열매를 맺는다. 정은 사랑인데 사랑만 있으면 어려운 일도 해결이 되며 문학 작품도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어야 감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우리 회원 중에는 봉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드러진 분이 두 분 있습니다. 한 분은 혼자는 해결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는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는 전화를 받는 일을 3년을 계속했습니다. 그것도 남들이 한창 단잠에 들어 있는 12시부터 3시 사이의 시간입니다. 사랑 없이는 이런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또 한 분은 1억을 기부해야 회원이 되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도 회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오피스텔 한 층 10여 개 방을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작업실로 무료로 내어주고, 가난한 사람 40여 명에게 해마다 쌀 두 가마니씩 직접 가져가서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벌써 수십 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헤암아동문학상을 제정해서 3회 시상을 했습니다. 회원들의 성금으로 발족을 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제정된 상이기 때문에 이 상이 지속이 되려면 제가 그 기금을 마련해야 됩니다.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시 당선자와 동화 당선자 각 100만 원씩 상금을 주고 있으나 곧 상금도 올리고 수상 작품이 책 한 권 양이 되면 수상 작품집도 발행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수상자를 혜암아동문학회 준 회원으로 모시고 있는데 수상자를 잘 모시고 싶습니다. 저는 신인문학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인이란 문단에 첫 발을 들여놓는다는 뜻도 있지만 신인이란 기성문인을 능가할 수 있다는 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단 발전을 신인에게기대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제자도 헤암아동문학회원 가운데 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교통사고로 실명한 분과 연세가 높은 분들을 아동문학의 길로 이끌어 준 것이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활동을 해서 좋은 작품을 쓰면서 정을 나누고 있는 회원들입니다.
박상재 선생님께서 펴낸 동시집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최춘해: 제 첫 동시집이 <시계가 셈을 세면>인데, 무지했던 게 반성이 됩니다. 이원수 선생이 서문을 쓰고 김종상 선생이 발문을 썼습니다. 표지 그림, 속 그림은 신현득 선생의 안내로 전연 모르는 김정은이라는 사람이 그렸습니다. 출판사에서 낸 것이 아니라 상주 사람이 경영하는 대남인쇄소(대표 여인철)에서 활자를 주워 조판을 해서 손으로 돌리는 인쇄기로 만들었습니다. 출판사는 한글문학사 이름을 빌었습니다. 대가의 서문을 받았으면 응당 사례비를 두둑하게 드려야 하는데, 그걸 몰랐습니다. 발문을 쓴 김종상 선생인데, 가까운 친구라도 사례비를 주어야 할 텐데, 그것도 모르고 그냥 넘긴 것 같습니다. 작품집이 나오기까지 바쁜 가운데도 내일처럼 쫓아다니며 그림을 부탁하고 인쇄소를 안내하느라 수고를 해 준 신현득 선생께 사례는 고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말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표지 그림, 속 그림 화료가 출판비의 반은 된다는데, 한 푼도 안 주었으니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신현득 선생이 얼마나 난처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니 낯이 화끈거립니다. 그 뒤 낯선 대구 도시 생활에 적응하느라 10년 동안 책을 못 내다가 다시 고향 상주에 돌아가서 2집 <생각이 열리는 나무>를 내고, 이어서 선집을 합해서 15권을 냈습니다. 근간에 낸 <엄마가 감기 걸렸어>는 앞의 동시집을 내고 13년 만에 냈습니다. 그 동안 작품을 안 쓴 건 아닌데,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내고 있다가 혜암아동문학회원 가운데 출판사를 하는 분이 원고를 내 달라고 졸라서 마지못해서 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지니 작품이 제대로 안 됩니다.
박상재 선생님께서 스스로 대표작을 고르라면 어떤 작품을 들 수 있을까요?
최춘해: 제 마음에 드는 작품은 ‘생각이 열리는 나무’입니다.
안테나는/지붕 꼭대기에 높이 솟아/공중에 떠도는 /말들을 잡고,//감나무도/떠도는 생각을 잡으려고/키가 자란다.//손바닥을 펴서/빗방울을 받아도 보고//햇살을 받아들고/주물러도 보고//바람을 감아쥐고/작게 크게 흔들어도 보고//달빛 강물 속에/멱을 감아도 보고……./잡힐 듯 잡힐 듯/잡히지 않아//눈을 감고/입을 다물고/하느님께 기도를.//생각이 떠돌다가/키가 자란 감나무에/잡혔다.//주렁주렁 생각이 열리는 나무/생각이 익어간다./감이 붉어간다.
남들은 ‘시게가 셈을 세면’(여러 낭소 시집에 실림) ‘이른 봄’(6차 교육과정 5-1 국어 교과서 실림) 등을 들고 있습니다.
박상재 동시집도 많이 출간하셨으니 상도 많이 받으셨겠네요? 어떤 문학상을 받으셨나요?
최춘해: 1968년 12월 14일 제1회 최근유 한글문학 신인상 (등단이 아닌 등단 후 신인 때 받은 상-상금이 제법 두둑했습니다.)
1980년 제6회 한국아동문학상, 1984년 제17회 세종아동문학상, 1993년 제3회 방정환 문학상
1993년 제34회 경상북도 문화상 (문학부문), 2010년 제9회 국제펜 대구아카데미문학상
박상재 요즈음은 그 전에 비해 학교나 가정에서도 글짓기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춘해: 제가 교직에 있을 때엔 학교마다 학교 신문, 학급 신문, 학교 문집, 학급 문집 등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도 스스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의욕이 적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백일장 또는 현상 모집 같은 행사가 많았는데 그런 행사가 적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경향이 그렇고 지금도 독서 지도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가진 선생님들이 있다고 문학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아동문학에 열성이 있는 선생님들입니다.
박상재 아동문학가가 되려는 후진들에게 바라거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세요.
최춘해: 저의 경우는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내 자신이 자연이 되어 산 것이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책이 귀할 때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 학생 때 책을 많이 못 읽은 게 후회가 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게 제일 큰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지혜롭게 대처하고 품위 있고 값지게 살아갑니다. 동시를 많이 읽고 동화를 많이 읽으면 굳이 창작법을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작품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명작을 읽으면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작품을 많이 읽기를 제일 권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일기 쓰기입니다. 문장력을 기르는 데 일기 쓰기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의 생명은 문장력입니다. 문장력과 더불어 값지게 사는 인생관이 길러집니다.
박상재 오랫동안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잘 유지하시며 앞으로도 후배들에게 좋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최춘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