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靑鶴洞)
⚫청룡(靑陵)마을
청학동은 구한말 인천부의 먼우금면에 속해 있던 동네이다.
옛날에는 대부분이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해안지역이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바다에 의지해 살았기에 선사시대 유물들이 발견되는 곳이다.
구한말까지 이곳에는 청릉마을, 본말, 안골, 뒷골, 물푸레골 등 여러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일제가 이들 마을을 합해 청학리를 만들었는데, 광복 뒤에 이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청학동이 생겼다.
청학리의 ‘청학’은 일본인들이 청릉마을의 ‘청’자와 문학산의 ‘학’자를 따서 새로 만든 이름이다.
일설에는 ‘문학산〈鶴〉의 남서쪽에 있는 푸른〈靑〉 숲속 마을〈里〉’이라는 뜻에서 ‘청학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1914년 당시 일본인들이 국내 곳곳에서 동네 이름을 새로 지어 붙인 방식을 볼 때, 이 역시 그들이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두 개의 이륙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것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청릉마을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청풍마을은 청량산의 동북쪽 기슭, 대략 지금의 서해·성호 하나아파트 자리에 있던 마을이다.
이 이름은 이곳에 있었다던 무덤 ‘청릉’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무덤은 이제 없어져 볼 수가 없는데, 원래 동명왕의 아들인 비류(沸流)의 무덤이었다고 전해 온다. 하지만 무덤의 정체가 분명치 않고, 그런 만큼 그 위치도 확실치 않다. 다만 구한말까지도 무덤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1899년에 나온 「인천부읍지」 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미추왕릉(彌鄒王陵)은 남산(南山)에 있는데, 부(府)에서 2리(里) 떨어진 곳에 있다. 예로부터 고을에서 속칭(俗稱) ‘미추왕릉’이라 불렀다. 그러나 산소가 무너져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고, 단지 석인상(石人像) 하나만이 섬돌 앞에 넘어져 있을 뿐이다. 주변에서 장사(葬事)를 지내는 고을 사람들이 있어서 이를 파내어 이장(移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고쳐 쌓고 정비하여 보존함으로써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두어 후대에 전하는 도리를 아직 못하고 있다.”
여기서의 남산은 문학산을 말하는데, 청량산이 문학산의 줄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며, 단지 주민들이 미추왕(彌鄒王)의 무덤이라 부른다고 돼있다. 그리고 미추왕은 신라의 13대 왕인 미추왕(味鄒王)이 아니라, 비류 백제의 전설 속 비류를 말한다. 그가 이곳 미추홀(彌鄒忽)에 와서 성(城)을 쌓고, 나라를 일구려 했기에 ‘비류왕’이 아니라 ‘미추왕’이라 불렀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편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동명성 왕)이다.
주몽은 나라를 세우기 전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해 졸본부여로 피난을 왔다가 그곳 왕의 신임을 받아 공주와 결혼을 하고, 부여왕이 죽은 뒤에는 왕위에 오른다. 그의 두 아들이 비류와 온조(溫祚)인데, 주몽이 왕이 된 뒤 그가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둘은 혹시 화를 입을까 두려워 남쪽으로 떠난다.
그 뒤 비류는 미추홀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안정시키려 애썼지만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동생 온조가 도읍을 정한 위례성(慰禮城)에 가보니 그곳은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 있었다. 이에 비류는 부끄럽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죽었다.
이렇게 죽은 비류의 무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는 전설인데, 말 그대로 전설일 뿐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이를 믿을 수 없다는 기록도 있다.
1863년 무렵에 나온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청량산 동쪽 기슭에 큰 무덤이 있는데 돌담은 옛 그대로이나 석인(石人:석상)이 쓰러져 있으며 매우 크다. 현재 누구의 무덤인지는 얄지 못하나, 이는 고려의 왕비나 종친의 무덤일 뿐이다.”
이 기록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이 비류가 아니라 고려의 왕비나 종친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무덤이 왜 ‘청릉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따라 붙인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음양오행설에서 동쪽은 청색(靑色)과 대응되는데, 이 무덤이 대략 청량산의 동쪽에 있으니 ‘동쪽(청색)에 있는 무덤’이라 하여 ‘청릉’이라 불렀을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