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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8. 25일자 동아일보에는 “木版畵小品展開催-茶房플라타느
에서”란 작은 전시안내 기사가 있다(도판6). 기사 내용을 보면 “版畫의 硏究家로 또 舞臺裝飾家로 東京서 堀口大學(호리구치 다이가쿠, 1892~1981, 일본 근대기 저명한 시인, 프랑스 문학가) 其他諸氏의 指導아래 版畫限定版을 出版하기로 되어있는 金貞桓, 李秉玹兩氏는 今二十五日부터 오는 三十一日까지 一週間 市內長谷川町 茶房 플라타느(플라타너스)에서 木版小品展을 開催하고 會心의 作 二十餘을 展示하기로 되었다고”라고 되어있다.
한편 경성일보 1934. 8. 26일자에도 이 전시에 관계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동경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日本美術學校 개명 명칭)」 출신의 이병현과 김정환이 목판화 소품 2인전이 5일부터 31일까지 게이죠 하세가와초 플라탄(京城府 소공동 플라타느)에서 열리고 있다고 썼다. 다방 플라타느(당시 경성의 다방들은 지식인이나 문화예술가들의 문화행사를 개최하는 공간의 기능도 하였는데, 이 플라타느 다방은 연극에 관계된 행사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도 가끔 개최했다. 이 목판화전 외에도 1935년 「SPA展」을 열었는데 김환기, 길진섭, 김병기, 이범승 등이 참여했고, 이외에도 「녹과전」이란 전시도 열렸었다)는 장곡천정(長谷川町), 측 지금의 소공동 미도파 뒤편에 있던 다방이었고, 주인은 극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유치진(1905~1974)이었다. 이들이 플라타느에서 전시를 한 것은, 아마도 김정환과 유치진과의 극예술연구회 인연으로 보인다. 극예술연구회 공연의 무대미술을 담당한 김정환이 플라타느에서 전시를 한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이 전시는 목판화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시였다. 당시 여러 다방이나 여타 공간에서 그림 전시가 있었으나, 목판화가 ‘컷’이나 ‘삽화’가 아닌 소위 ‘현대미술로서의 작품’으로 등장한 전시로는 우리 근대미술사에서는 처음이었던 셈이다.
전시작품은 전시 전인 1934년 7월 이병현과 김정환이 동경에서 발간한 오리지널 창작판화 모음집인 『LE IMAGE』(도판7)에 실린 목판화다. 스케치북에 판화를 붙이는 형식의 장정으로 제목은 불어로 된 『LE IMAGE』다. 모음집 크기는 24.5×19.2㎝이고 표지에는 오리지널 판화를 붙였는데, 현재 필자에게 확인된 모음집 2부의 에디션 넘버는 Ed.11과 Ed.9 ((『한일 근대미술가들의 눈 “조선에서 그리다”』, -POLA ART FOUNDATION, 2015-에는 에디션 넘버가 9로 기술되어 있고(p.319),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創作版画の展開(6)-朝鮮人美術家による 日本の創作版画の修得とその展開について』(辻(川瀨) 千春(TSUJI (KAWASE), Chiharu), 名古 屋大學博物館報告)에는 에디션이넘버가 11(p.45)로 되어있다. 총 발간 숫자가 기록되지 않아서 정확한 에디션은 애매하나, 다량을 출간한 것 같지는 않다))다. 모음집의 작품 제목을 나열해 보면, 〈딸기〉(도판8) 〈오누이〉 〈풍경〉 〈아틀리에의 구석〉 〈실내〉 〈해변〉 〈양관(서양식 건물)〉 〈농가〉 〈농촌풍경〉(도판9)〈중얼거리다〉 〈돈키호테〉 〈L’eglise(벨기에 교회)〉 〈선인장〉 〈밤〉(도판10)〈태양과 파도〉 〈무제〉 등 표지 작품을 포함해서 총 17점이다. 이중 〈딸기〉 〈밤〉〈태양과 물결〉이 2도 다색목판화이고, 나머지는 모두 단색 목판화다. 전반적으로 조선의 향토 풍경과 소박함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인데, 모든 작품에 제목이 표기되어 있고, 이중 〈딸기〉와 〈밤〉에만 이병현과 김정환의 사인이 있다. 그리고 첫 장, 즉 표제지에 ‘Byung H 李’ ‘Chung W Kim’이란 두 사람의 사인이 있고, 뒷표지에 ‘李秉玹’ ‘金貞桓’ 등의 한문과 그 옆으로 영문 서명이 있다. 또 ‘1934. 7’이라는 간행 년도가 표기되어 있다.
이쯤에서 『LE IMAGE』와 『성벽』의 교집합인 부분을 보자. 『LE IMAGE』에 실린 작품 17점 중 두 점이 『성벽』의 삽화로 쓰였다. 모음집의 작품 전체를 플라타느의 목판화 2인전에 발표하고, 그 중 두 점을 골라 『성벽』의 삽화로 제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LE IMAGE』의 에디션이 오리지널 작품이고, 『성벽』 100권에 실린 판화 합 200점은 일종의 리프린팅(Re-printing)한 복제판화(Reproduction, Estamp)인 셈이다. 이중 『성벽』의 삽화 두 점은 이병현의 〈해변〉과 김정환의 〈밤〉이란 작품이다. 『LE IMAGE』의 17점 중 작가 사인이 되어있던 두 점이다. 먼저 책의 표제화로 실린 〈꽃〉(도판11)은 이병현의 작품인데 『LE IMAGE』의 작품이 아니다. 오장환의 처녀시집 출간을 위해 이병현이 새로 제작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풍성하게 만개한 장미꽃잎과 몇 개 남지 않은 이파리와 뾰족한 가시를 대비시키면서 장미의 강인한 생명성을 부각한 도상이다. 흑백 단색 목판화에 수성 물감으로 담채를 가했는데 작가의 성의가 더해진 듯 보인다. 이 도상은 이병현과 김정환이 함께 표지화와 삽화를 그린 『해송동화집』 38p 삽화의 장미와 비슷하다.
1부 간지 삽화로 게재된 이병현의 〈해변〉은 화면 아래 흐르는 물 위로 두꺼비를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에 민들레와 나무, 그리고 오른쪽으로 묘한 형체의 물체를 배치한 단색 목판화다. 간단한 장면인데, 작가의 원시적인 생명성에 대한 추구를 상징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로 구사한 세모칼의 맛도 아이들의 그것처럼 활달하고 즉흥적인 표현성을 띈다. 밑그림에 충실한 도장파기식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칼맛과 이미지는 1936년 발간된 『시인부락』 표지화(도판12)나, 윤곤강의 『만가』의 삽화 〈동쪽〉이나 〈樂室〉과 유사한 칼의 구사와 조형적 특징을 보인다. 이에 비하면 시집 가운데인 2부 간지에 부착된 김정환의 〈밤〉은 마치 고향과 같은 서정적 분위기다. 둥근 달 아래 물고기를 건조 시키기 위해서 걸어둔 바닷가 밤풍경은 토속적이고도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낸다. 황태인지, 조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생선을 건조하는 광경으로 어촌의 일상적 풍경을 담백하게 포착해냈다. 칼맛도 비교적 곱다. 대상을 조고조곤 사실적으로 묘사한 서정성이다. 당시 미술계에서 유행하던 ‘향토적 서정주의’의 조선적 토속성이 두드러진 경향이다.
1930년대 당시 한국은 목판화가 매우 드문 시기였다. 조선 후기까지
서책의 삽화로 쓰였던 전래적 인쇄방식이 퇴조하고, 활판ㆍ석판ㆍ마스터ㆍ옵셑 등 서양식 인쇄 기계와 기술이 도입되면서 목판 삽화는 거의 사라졌고, 또 현대미술로서의 창작판화도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작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인으로서는 그나마 일본 유학파인 조각가 장발(張孛, 1901~2001: 이병현과 김정환의 미술교사)과 화가 이병규(李炳奎, 1901~1974: 양정학교 미술교사, 1927년 휘문고보에 교사로 근무)가 서울에서 간간히 『휘문徽文』(도판13)과 『양정養正』(도판14, 14-1, 14-2)의 교지 표지화로 목판화를 선보였고, 평양에서는 최지원과 최영림 정도가 목판화 작업을 할 때였다. 그렇게 목판화가 미술로 제대로 조망을 받지 못한 시절에 이미 오장환은 선배의 개성적인 판화작품을 자기 시집의 삽화로 초대하면서, 시뿐만 아니라 책의 장정과 북 디자인도 주목받게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장정의 시도는 일견 겉멋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화려한 치장을 배제하고 검소하고도 담백한 수공적 미감으로 속물성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오장환의 시적 재능과 함께 심미성과 감성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판화 모음집 『LE IMAGE』가 일본의 저명한 불문학자이자 시인인 호리구찌 다이가쿠(堀口大學)의 도움과 후원으로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이다. 앞 동아일보 기사에 나온대로 “堀口大學其他諸氏의 指導”라는 문구를 보면 호리구찌 다이가쿠는 분명하나, 기타의 사람은 누군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아키 슈노스케(秋朱之介, 1903~1997)로 추측된다. 유명한 미술 출판사 미카사 서방(三笠書房)의 사장이다. 이 둘은 조선의미감이나 도자기를 아끼고 즐긴 사람들이었다. 출판사 「미카사 서방」은 세련된 표지 장정과 편집으로 유명했다. 1933년 『서물(書物)』이라는 인문학잡지를 간행했는데, 창간호 표지에는 일본의 유명 시인이자 소설가인 기노시
타 모쿠타로(木下杢太郞)의 고양이 그림(도판15)을 이와따야 다이치(岩田泰治)와 같은 유명 목판화가가 표지디자인을 할 정도로 책의 장정에 신경을 쓴 출판사였다. 그런데 1934년 4월호 표제화에 이병현과 김정환의 드로잉을 게재하고, 다시 7월호와 8월호 표지에 이병현의 작품을 실었다. 무명의 젊은 조선 유학생의 그림을 유명잡지 표지에 싣는다는 건 파격적인 대우였다. 바로 이런 인연으로 호리구찌 다이가쿠와 아키 슈노스케가 『LE IMAGE』의 발간을 도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創作版画の展開(6)-朝鮮人美術家による日本の創作版画の修得とその展開について』 , 辻(川瀨) 千春(TSUJI (KAWASE), Chiharu), 名古屋大學博物館報告).
이런 과정을 거쳐 이병현과 김정환은 1934년 7월 일본에서 먼저 모음집을 발간한 후, 이어서 8월에 이 작품으로 서울에서 2인전을 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화 모음집인 『LE IMAGE』는 앞서 거론했듯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화 전시에 출품된 셈이다. 아쉬운 것은 이 작품집이 일본에서 출간된 관계로 아직 한국에서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다만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김복기 기증관에 사본이 있다). 이렇듯 작품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이들이 당시 순수미술을 전공한 미술인이 아니고 또 판화로 활동한 기간이 기껏해야 10년이 채 안 되는 정도라서, 기존의 회화 중심의 근대미술사에서 관심을 받지 못해서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들의 주된 활동이 1940년 이후 산업디자인이나 무대미술, 즉 자신들의 전공 쪽으로
집중하면서 미술계와의 단절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1930년대 판화 및 출판미술 활동을 보면 만만찮게 중요한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둘이 함께 작업한 표지 장정이나 내지 삽화로 보자면, 앞서 언급한 판화집인 1934년의 『LE IMAGE』를 비롯해서 1937년 오장환의 『성벽』의 내지 표제 및 간지 목판화 삽화가 단연 두드러지고, 드로잉 삽화로 1934년 동경의 同聲社에서 제작하고 경성의 개벽사에서 간행한 마해송의 창작동화 및 동극 모음집인 『해송동화집』의 표지(도판16)와 내지에 게재된 17점의 삽화(도판16-1~17) 작업도 눈에 띄는 작업이다.
아동을 위한 동화에는 삽화가 필수적이다. 옵셑 필름 제판과정에서 원래 이미지에 스크린톤을 추가한 시각효과의 이 삽화들은, 당시로서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그림체였다고 여겨진다. 이와 함께 같은 해 일본 잡지 『서물(書物)』 1934년 4월호의 표제화(도판17, 17-1, 17-2) 및 삽화도 이들이 삽화가로서 뛰어났음을 증빙하는 주요한 자료다.
이병현의 개별적인 출판미술 작업은 앞서 언급한 『서물(書物)』 1934년 7월호와 8월호(도판18, 18-1)표지화, 1936년 『시인부락(詩人部落)』 표지 목판화,1937년 동인 시집 『자오선(子午線)』 창간호 표지화 드로잉(도판19), 1938년 윤곤강의 『만가』 내지 목판화 4점(추정: 추정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판각법과 도상이 오장환의 시집 「성벽」에 부착된 이병현의 그것과 유사하다. 두 번 째로는 「시인부락」 「성벽」 「輓歌」 모두 안국정 153에 있던 중앙인쇄소에서 제작을 했다는 점이다. 중앙인쇄소의 출간물을 기획-판매하는 서점인 중앙인서관(中央印書館)이 오장환과 「해외문학」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의 아지트였는데 풍림사 발행인 홍순렬, 중앙인쇄소 신사장, 그리고 오장환 등이 여기에서 여러 출판기획을 할 정도로 친했다. 그리고 시집 「성벽」에는 오장환이 이병현에게 이 시집을 헌정한다는(아마도 이병현 증정본일 듯) 친필로 쓴 구절을 보면, 이런 추측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또 윤곤강이 생명파와 「자오선」 동인으로 이들과 교류가 있었을 터, 이병현과 김정환의 판화로 「성벽」과 같은 삽화 편집을 했을 공산이 크다), 1939년 현진건이 「박문서관」에서 간행한 『적도赤道』 표지화(도판20), 그리고 1948년 잡지 『학풍學風』(2-1호)의 표지화(도판21)(1949 학풍/을유문화사/표지 표제지 목차 삽화와 컷?),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서정주의 『김좌진 장군전』 표지화와 표제화(도판22, 22-1) 등이 있다. 시각디자인과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이병현의 출판미술이 자연스럽게 많아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비하면 김정환은 단독으로 출판미술을 한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목판화와 출판미술은 대부분 이병현과 함께 활동했고, 독자적인 출판미술로는 1934년 매일신보사에서 발간한 잡지 『월간매신(月刊每新)』 9월호 표지화(도판23)가 있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무대미술이라는 입체 및 공간디자인에 주력한 입장인 만큼 이병현 없이 단독으로는 출판미술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독자적인 전시로는 1937년 일본 유학중에 일본 작가와의 회화 2인전이 있으나, 그 구체적 기록은 찾기 어렵다. 1940년 귀국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전공인 무대미술에 전념하면서 우리나라 근현대 무대미술의 선구자로 연극계에 그 명성을 남기게 된다. 기실, 이병현이나 김정환은 출판미술과 판화로 활동하던 이 시기에 이미 무대미술에 있어서도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극작가이자 감독인 유치진이 운영한 茶房 플라타느의
전시도 이들의 연극계 인맥이나 활동반경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고.
그런데 앞서 거론했듯 이들의 기록은 근대미술사에서는 상당히 빈약하다. 판화 2인전에 이름이 거론된 것 이외에는 거의 기록이 없다. 당시 문화예술인의 활동과 기록은 대개 도록, 신문, 잡지, 동료나 지인들의 코멘트나 증언으로 자료화나 기록이 되는데, 전문적 화가가 아닌 이들이 1940년대부터 순수미술과는 거리가 있는 영역(산업디자인/무대미술)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다가 보니, 자연스레 미술사로부터 소멸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10여 년이 채 되지 않는 출판미술 활동기간, 타 장르 전공, 그리고 빈약한 자료나 기록으로 인해 이제껏 조명받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