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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唐 : 618∼906)나라와 북송(北宋 : 960∼1127) 시대(時代)의 여덟 명의 저명(著名)한 산문 대가(散文 大家)를 총칭(總稱)하는 이름임
① 퇴지 한유(退之 韓愈 : 768~824)
㉠ 생애(生涯)
당(唐)나라 때의 하남성(河南省)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에서 출생(出生)한 후, 792년 진사(進士)에 등과(登科)하여 지방 절도사(地方 節度使)의 속관(屬官)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長官)을 탄핵(彈劾)했다가 도리어 광동성(廣東省) 양산현(陽山縣)의 현령(縣令)으로 좌천(左遷)되었으며, 이듬해 소환(召還)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勤務)하였음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叛亂 平定)에 공(功)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諫)하다가 다시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左遷)되었지만, 역시 이듬해 헌종(憲宗) 사후(死後)에 소환(召還)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음
㉡ 문학적 업적(文學的 業績)
퇴지(退之)의 문학적 공적(文學的 功績)은 첫째, 산문(散文)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는데, 종래(從來)의 대구(對句)를 중심(中心)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反對)하고 자유(自由)로운 형(形)의 고문(古文)을 자후 유종원(子厚 柳宗元 : 773~819) 등과 함께 창도(唱導)함으로써 고문(古文)은 송대(宋代) 이후(以後) 중국(中國) 산문 문체(散文 文體)의 표준(標準)이 되었고, 그의 문장(文章) 또한 그 모범(模範)으로 알려졌으며, 두 번째는 시(詩)에 있어 지적(知的)인 흥미(興味)를 정련(精練)된 표현(表現)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試圖)한 것으로, 그 결과(結果) 때로는 난해(難解)하고 산문적(散文的)이라는 비난(非難)도 받았지만 제재(題材)의 확장(擴張)과 더불어 송대(宋代)의 시(詩)에 큰 영향(影響)을 미침
또한, 사상 분야(思想 分野)에서는 유가(儒家)의 사상(思想)을 존중(尊重)하고 도교(道敎)․불교(佛敎)를 배격(排擊)함으로써 송대(宋代) 이후(以後)의 도학(道學)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었음
② 자후 유종원(子厚 柳宗元 : 773~819)
㉠ 생애(生涯)
당(唐)나라 때 하동해(河東解 : 지금의 ‘산시[산서(山西)]성(省) 운성(運城) 지방’) 출신(出身)의 시인(詩人)이자 수필가(隨筆家)로서 관직(官職)에 있을 때 한유(韓愈 : 768~824)․유우석(劉禹錫 : 772~842) 등과 친교(親交)를 맺어 혁신적 진보분자(革新的 進步分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參劃)하였으나 실패(失敗)함으로써 변경 지방(邊境 地方)으로 좌천(左遷)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유주자사(柳州刺史) 등의 지방관(地方官)을 지냈는데, 이러한 좌절(挫折)과 13년간에 걸친 변경 생활(邊境 生活)이 그의 사상(思想)과 문학(文學)을 더욱 심화(深化)시켰음
㉡ 문학관(文學觀)
고문(古文)의 대가(大家)로서 한유(韓愈)와 병칭(竝稱)되기도 했으나 사상적 입장(思想的 立場)에서는 서로 대립적(對立的)이었는데, 한유(韓愈)가 전통주의(傳統主義)였던 데 반해, 유종원(柳宗元)은 유(儒)․도(道)․불(佛)을 참작(慙怍)하고 신비주의(神秘主義)를 배격(排擊)한 자유(自由)․합리주의(合理主義)의 입장(立場)을 취했음
그의 문학(文學)은 한 시대(時代)에 획(劃)을 그을 정도로 풍부(豊富)하고 다양(多樣)했는데, 특히 현실비판(現實批判)의 사언(寫言)․전기(傳記)․평설(評說) 외에도 많은 산수유기(山水遊記)를 남겨 그 광채(光彩)가 독특(獨特)했음
③ 영숙 구양수(永叔 歐陽脩 : 1007~1072)
㉠ 생애(生涯)
북송(北宋) 때의 대표적(代表的)인 문인(文人)이자 사학자(史學者)로서 강서성(江西省) 영풍(永豊)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하는데, 10세 때 당(唐)나라 한유(韓愈 : 768~824)의 전집(全集)을 읽은 것이 계기(契機)가 되어 문학(文學)의 길로 들어섰음
1030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 후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官職)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으며,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때에는 오늘날까지도 ‘상징적(象徵的) 명재상(名宰相)’으로 통하고 있는 범중엄(范仲淹 : 989~1052)을 중심(中心)으로 한 새 관료파(官僚派)에 속하여 활약(活躍)하였으나, 신종(神宗) 때 동향 후배(同鄕 後輩)인 개보 왕안석(介甫 王安石 : 1021~1086)의 신법(新法)에 반대(反對)하여 관직(官職)에서 물러났음
㉡ 문학관(文學觀)
구양수(歐陽脩)는 범중엄(范仲淹)의 정치혁신론(政治革新論)과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고문 운동(古文 運動)을 지지(支持)했고, 문단(文壇)의 스승으로서 개보 왕안석(介甫 王安石)․자고 증공(子固 曾鞏 : 1019~1083)․동파 소식(東坡 蘇軾 : 1036~1101)․자유 소철(子由 蘇轍 : 1039~1112)같은 문호(文豪)를 육성(育成)하였음
송(宋)나라 초기(初期)의 미문조(美文調) 시문(詩文)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改革)하고,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를 모범(模範)으로 하는 시문(詩文)을 주장(主張)한 그의 시문(詩文)은 평이(平易)하면서도 함축적(含蓄的)이고 산문적(散文的)이면서도 호방(豪放)한 힘을 지니고 있는데, 시(詩)로는 원릉 매요신(宛陵 梅堯臣 : 1002~1060)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송대(宋代)의 고문(古文)의 위치(位置)를 확고부동(確固不動)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였음
㉢『붕당론(朋黨論)』
ⓐ 원문(原文)
臣聞朋黨之說 自古有之 惟幸人君 辨其君子小人而已 大凡君子與君子 以同道爲朋 小人與
(신문붕당지설 자고유지 유행인군 변기군자소인이이 대범군자여군자 이동도위붕 소인여
小人 以同利爲朋 此自然之理也
(소인 이동리위붕 차자연지리야)
然臣謂小人無朋 惟君子則有之 其故何哉 小人所好者利祿也 所貪者財貨也 當其同利之時
(연신위소인무붕 유군자칙유지 기고하재 소인소호자리록야 소탐자재화야 당기동리지시)
暫相黨引以爲朋者 僞也
(잠상당인이위붕자 위야)
及其見利而爭先 或利盡而交疏 甚者反相賊害 雖其兄弟親戚 不能相保 故臣謂小人無朋 其
(급기견리이쟁선 혹리진이교소 심자반상적해 수기형제친척 불능상보 고신위소인무붕 기)
暫爲朋者 僞也
(잠위붕자 위야)
君子則不然 所守者道義 所行者忠信 所惜者名節 以之修身 則同道而相益 以之事國 則同
(군자칙불연 소수자도의 소행자충신 소석자명절 이지수신 칙동도이상익 이지사국 칙동)
心而共濟 終始如一 此君子之朋也 故爲人君者 但當退小人之僞朋 用君子之眞朋 則天下治
(심이공제 종시여일 차군자지붕야 고위인군자 단당퇴소인지위붕 용군자지진붕 칙천하치)
矣
(의)
堯之時 小人共工驩兜等四 爲一朋 君子八元八愷十六 爲一朋 舜佐堯 退四凶小人之朋 而
(요지시 소인공공환두등사 위일붕 군자팔원팔개십육 위일붕 순좌요 퇴사흉소인지붕 이)
進元愷君子之朋 堯之天下大治 及舜自爲天子 而皐夔稷契等二十二人 幷列于朝 更相稱美
(진원개군자지붕 요지천하대치 급순자위천자 이고기직계등이십이인 병렬우조 갱상칭미)
更相推讓 凡二十二人 爲一朋 而舜皆用之 天下亦大治
(갱상추양 범이십이인 위일붕 이순개용지 천하역대치)
書曰 紂有臣億萬 惟億萬心 周有臣三千 惟一心 紂之時 億萬人各異心 可謂不爲朋矣 然紂
(서왈 주유신억만 유억만심 주유신삼천 유일심 주지시 억만인각이심 가위불위붕의 연주)
以此亡國 周武王之臣 三千人爲一大朋 而周用以興
(이차망국 주무왕지신 삼천인위일대붕 이주용이흥)
後漢獻帝時 盡取天下名士 囚禁之 目爲黨人 及黃巾賊起 漢室大亂 後方悔悟 盡解黨人而
(후한헌제시 진취천하명사 수금지 목위당인 급황건적기 한실대란 후방회오 진해당인이)
釋之 然已無救矣 唐之晩年 漸起朋黨之論 及昭宗時 盡殺朝之名士 或投之黃河曰 此輩淸
(석지 연이무구의 당지만년 점기붕당지론 급소종시 진살조지명사 혹투지황하왈 차배청)
流 可投濁流 而唐遂亡矣
(류 가투탁류 이당수망의)
夫前世之主 能使人人異心 不爲朋莫如紂 能禁絶善人爲朋 莫如漢獻帝 能誅戮淸流之朋 莫
(부전세지주 능사인인이심 불위붕막여주 능금절선인위붕 막여한헌제 능주륙청류지붕 막)
如唐昭宗之世 然皆亂亡其國 更相稱美推讓而不自疑 莫如舜之二十二人 舜亦不疑而皆用之
(여당소종지세 연개란망기국 갱상칭미추양이불자의 막여순지이십이인 순역불의이개용지)
然而後世 不誚舜爲二十二人朋黨 而稱舜爲聰明之聖者 以其能辨君子與小人 也周武之世
(연이후세 불초순위이십이인붕당 이칭순위총명지성자 이기능변군자여소인 야주무지세)
擧其國之臣三千人 共爲一朋 自古爲朋之多且大 莫如周 然周用此以興者 善人雖多而不厭
(거기국지신삼천인 공위일붕 자고위붕지다차대 막여주 연주용차이흥자 선인수다이불염)
也 夫興亡治亂之迹 爲人君者 可以鑑矣
(야 부흥망치란지적 위인군자 가이감의)
ⓑ 번역문(飜譯文)
신(臣)은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이 예부터 있다고 들었는데, 오직 다행히 임금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分別)할 따름이니 무릇 군자(君子)는 군자(君子)와 더불어 도(道)를 함께 함으로써 붕(朋)을 만들고, 소인(小人)은 소인(小人)과 더불어 이를 함께 함으로써 붕(朋)을 만들고 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理致)입니다.
그러나 신(臣)은 생각건대 소인(小人)은 붕(朋)이 없고, 오직 군자(君子)라야 그것이 있다고 여기오니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소인(小人)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利益)과 녹봉(祿俸)이고, 탐내는 것은 재물(財物)과 화폐(貨幣)이니, 그 이로움이 같을 때를 당해서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黨)을 만들어 붕(朋)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이로움을 보고 앞을 다투는데 이르러서는 간혹 이익(利益)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지고 심한 자는 도리어 서로 해쳐서, 비록 그 형제친척(兄弟親戚)이지만 능히 서로 보전(保全)하지 못하니, 신(臣)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은 붕(朋)이 없고, 그 잠시 붕(朋)이 된 것은 거짓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군자(君子)는 그렇지 아니하여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요, 행하는 것이 충신(忠信)이며, 아끼는 것이 명예(名譽)와 절개(節槪)입니다. 그것으로써 몸을 닦으면 도(道)를 함께 하여 서로 이롭고, 이로써 나라를 섬기면 같은 마음으로 함께 다스려 끝과 시작이 한결 같으니, 이는 군자(君子)의 붕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된 자는 다만 마땅히 소인(小人)의 그릇된 붕(朋)을 물리치고 군자(君子)의 진정한 붕(朋)을 쓴다면 천하(天下)가 다스려 질 것입니다.
요(堯)임금 시절에 소인배(小人輩)인 공공(共工)․환두(驩兜) 등의 네 명이 하나의 붕(朋)을 만들었고, 군자(君子)인 팔원(八元)․팔개(八愷) 등 16명이 하나의 붕(朋)을 만들었는데, 순(舜)은 요(堯)임금을 도와서 네 사람의 흉악(凶惡)한 소인(小人)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八元)․팔개(八愷) 등의 무리를 나아가게 하였으니, 요(堯)임금의 천하(天下)가 크게 다스려졌으며, 순(舜)이 스스로 천자(天子)가 됨에 이르러서는 고(皐)․기(夔)․직(稷)․계(契) 등 22인이 조정(朝廷)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일컬으며 밀어주고 사양(辭讓)했으니, 무릇 22명이 한 붕(朋)이 되었는데, 순(舜)은 모두 등용(登用)을 해서 천하(天下)를 또한 크게 다스렸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주왕(紂王)에게 신하(臣下)가 억만 명이 있었는데 오직 억만 명 각자(各自)의 마음이었거니와, 주(周)나라의 신하(臣下)는 삼천 명이 있었는데 오직 한 마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주왕(紂王)의 시절(時節)에 억만 명의 마음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붕(朋)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고, 주왕(紂王)은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신하(臣下) 삼천 명은 하나의 큰 붕(朋)이 되어 주(周)나라가 그들을 등용(登用)하여 흥하게 되었습니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에 천하(天下)의 명사(名士)들을 다 모아서 가두어 구금(拘禁)하여 당인(黨人)이라 지목(指目)하니,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한(漢)나라 황실(皇室)이 크게 어지러우니, 뒤에 바야흐로 후회(後悔)하고 깨달아 다 풀어서 당인(黨人)을 석방(釋放)하였으나, 그러나 그때는 이미 구제(救濟)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唐)나라 말년(末年)에 이르러 붕당(朋黨)의 논(論)이 점점 일어났는데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朝廷)의 명사(名士)를 다 죽여서 간혹 황하(黃河)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들은 맑은 무리들이다. 혼탁(混濁)한 물에 던질 만하다.”라고 하니, 이에 당(唐)나라가 마침내 망(亡)하였습니다.
대저 앞 시대(時代)의 군주(君主) 중에 능히 사람마다 마음을 다르게 해서 붕(朋)을 하지 못하게 함은 주왕(紂王)과 같은 자가 없었고, 선인(善人)이 붕(朋)을 함을 금한 것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만한 이가 없었고, 맑은 무리들의 붕(朋)을 베고 죽인 것은 당(唐)나라 소종(昭宗)의 시대(時代)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 나라를 혼란(混亂)시키고 멸망(滅亡)하였으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일컬어 밀어주고 사양(辭讓)하여 의심(疑心)하지 않음은 순(舜)의 22명 만한 이가 없었고, 순(舜) 또한 의심(疑心)하지 않고 모두 썼지만, 그러나 후세(後世)에 순(舜)이 22명의 붕당(朋黨)에게 속임을 당하였다고 꾸짖지 않고, 순(舜)을 총명(聰明)한 성인(聖人)이라고 칭(稱)하는 것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分別)하였기 때문입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시대(時代)에는 그 나라의 신하(臣下) 삼천 명이 모두 하나의 붕(朋)이 되었으니, 예로부터 붕(朋)을 함에 많고 또한 큰 것은 주(周)나라만한 나라가 없었으나, 주(周)나라가 이들을 등용(登用)하여 흥(興)한 것은 선인(善人)이 비록 많더라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저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의 자취를 임금이 된 자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④ 개보 왕안석(介甫 王安石 : 1021~1086)
㉠ 평가(評價)
북송(北宋) 때의 사상가(思想家)․수필가(隨筆家)․시인(詩人)이면서 동시에 변법도강(變法圖强)을 주장(主張)했던 혁신적(革新的)인 정치가(政治家)였는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정치적(政治的)․철학적(哲學的) 성향(性向)이 짙은 산문(散文)을 많이 남겼음
㉡ 생애(生涯)
강서성(江西省) 무주(撫州) 임천(臨川)에서 출생한 왕안석(王安石)은 회남판관(淮南判官)․은현지현(鄞縣知縣)․상주지주(常州知州) 등 강남(江南) 지역(地域)의 지방관(地方官)으로 근무(勤務)하다가 이재(理財)의 능력(能力)을 인정(認定)받아, 때마침 정치(政治)의 일대 쇄신(一大 刷新)과 개혁(改革)을 갈망(渴望)하던 야심적(野心的) 황제(皇帝)인 신종(神宗)에게 발탁(拔擢)돼 역사적(歷史的)으로 유명(有名)한 파격적(破格的)인 개혁 정책(改革 政策)을 실시(實施)하게 되었음
1069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任命)되어 국정 전반(國政 全般)을 관장(管掌)하게 되자, 한기(韓琦 : 1008~1075)․사마광(司馬光 : 1019~1086) 등 구법당(舊法黨)의 인물(人物)들을 축출(逐出)하고, 이재(理財)에 능한 강남 출신(江南 出身)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을 대거 발탁(大擧 拔擢)하여 신법(新法), 즉 농업 생산성(農業 生産性)의 향상(向上)을 목적(目的)으로 종래(從來) 가뭄과 홍수(洪水) 등으로 황폐(荒弊)해진 전토(田土)의 복구(復舊)와 어전법(淤田法) 등에 의한 새로운 경작지(耕作地)의 조성(造成) 및 하천(河川)의 개수(開修) 등을 통한 조운(漕運)의 진흥(振興) 등을 골자(骨子)로 한 농전수리 정책(農田水利 政策), 농민(農民)과 도시(都市)의 중소상인(中小商人)들을 대상(對象)으로 저리(低利)의 금융정책(金融政策)인 청묘법(靑苗法)과 시역법(市易法), 차역(差役) 부담(負擔) 대신 재력(財力)에 따라 차등적(差等的)으로 면역전(免役錢)을 징수(徵收)하게 한 모역법(募役法), 모병제도(募兵制度)의 약점(弱點)을 보완(補完)하기 위하여 당(唐)의 부병제(府兵制)하(下)의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원칙(原則)을 모범(模範)으로 한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하였음
하지만 그의 개혁정책(改革政策)은 국가 재정(國家 財政)의 확보(確保)와 국가 행정(國家 行政)의 효율성(效率性) 증대(增大) 측면(側面)에서는 상당한 실적(實績)을 거두었지만, 원래 취지(原來 趣旨) 중의 하나였던 중소농민(中小農民)과 중소상인(中小商人)의 구제(救濟)라는 면(面)에서는 오히려 많은 문제점(問題點)을 야기(惹起)해 영세농민층(零細農民層)의 몰락(沒落)을 가속화(加速化)시켰고, 그리하여 반대파(反對派)인 구법당(舊法黨)이 재집권(再執權)하는 명분(名分)을 제공(提供)하였음
⑤ 자고 증공(子固 曾鞏 : 1019~1083)
㉠ 생애(生涯)
북송(北宋) 때 강서성(江西省) 남풍(南豐) 출신(出身)의 수필가(隨筆家)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는데, 소동파(蘇東坡)와 같은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했을 때의 나이가 39세였기에 벼슬은 대부분 태평(太平)․월주(越州)․복주(福州)․박주(亳州) 등지의 지방관(地方官)을 지냈지만, 노력형(努力型)의 인간(人間)으로서 민간(民間)의 질고(疾苦)를 구제(救濟)하는 데 공(功)을 세웠음
㉡ 문장론(文章論)
그의 글은 북송(北宋) 때 고문혁신운동(古文革新運動)을 주도(主導)할 정도로 문장(文章)의 법도(法道)와 기교(技巧)를 중시(重視)하면서도 완곡(緩曲)하고 평탄(平坦)하였는데, 문장(文章)에서도 끈기 있는 의론(議論)을 특색(特色)으로 하였으며, 객관적(客觀的)인 서술(敍述)에 뛰어났던 것도 이러한 특색(特色)에 기인(基因)한 것으로 보임
⑥ 명윤 소순(明允 蘇洵 : 1009~1066)
중국(中國) 사천성(四川省) 메이산[미산(眉山)] 출신(出身)으로 젊은 시절에는 협객(俠客) 노릇을 하다가 27세 때 분발(奮發)하여 학문(學問)에 정력(精力)을 쏟았으나 진사시(進士試)에 낙방(落榜)하자 관리(官吏)가 되기를 단념(斷念)하고 정치(政治)와 역사 평론(歷史 評論)의 저술(著述)에 힘썼는데, 1056년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情熱的)인 필치(筆致)에 의한 평론(評論)이 영숙 구양수(永叔 歐陽脩 : 1007~1072)의 인정(認定)을 받게 되면서 일약(一躍) 유명(有名)해졌음
그 후 조정(朝廷)에 나가 북송(北宋) 이래(以來)의 예(禮)에 관한 글을 모은『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100권을 편찬(編纂)하였고, 정치(政治)․역사(歷史)․경서(經書) 등에 관한 평론(評論)도 많이 썼기에 아들 소식(蘇軾)․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리기도 했으며, 그리하여 소순(蘇洵)을 일컬어 ‘노소(老蘇)’․소식(蘇軾)을 대소(大蘇)․소철(蘇轍)을 소소(小蘇)라고도 불렀음
⑦ 동파 소식(東坡 蘇軾 : 1036~1101)
㉠ 평가(評價)
흔히 ‘동파거사(東坡居士)’란 호(號)로 유명(有名)한 송(宋)나라 제일(第一)의 시인(詩人)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또한 중국(中國)을 대표(代表)하는 서예가(書藝家)로 손꼽히는 인물(人物)인데, 비록 정치적(政治的)으로는 지방관(地方官)을 역임9歷任)하는 불운(不運)을 겪었지만 평이(平易)하면서도 호방(豪放)하고 청신(淸新)하면서도 낭만적(浪漫的)인 문풍(文風)으로 문호(文豪)의 지위(地位)만큼은 확실히 굳혔음
㉡ 생애(生涯)
사천성(四川省) 미산(尾山)에서 태어난 동파(東坡)는 22세 때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고, 과거시험(科擧試驗)의 위원장(委員長)이던 영숙 구양수(永叔 歐陽脩 : 1007~1072)에게 인정(認定)을 받아 그의 후원(後援)으로 문단(文壇)에 등장(登場)하였는데, 개보 왕안석(介甫 王安石 : 1021~1086)의 신법(新法)이 실시(實施)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동파(東坡)는 지방(地方)으로 전출(轉出)되어 밀주(密州)․서주(徐州)․호주(湖州)․동주(董州)․혜주(惠州)․담주(儋州) 등지의 지방관(地方官)을 전전(輾轉)하였음
천성(天性)이 자유인(自由人)이었기에 기질적(氣質的)으로도 신법(新法)을 싫어해 “독서(讀書)가 만 권(萬 券)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발언(發言)이 사상 초유(史上 初有)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을 일으켜, 44살의 동파(東坡)는 서울로 호송(護送)돼 어사대(御史臺)의 감옥(監獄)에 갇혔으며, 심한 취조(取調)를 받고 후베이성[호북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流配)됐으나, 50세 때 철종(哲宗)이 즉위(卽位)하면서 구법당(舊法黨)이 득세(得勢)하자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歷任)하였음
그러다가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契機)로 신법당(新法黨)이 다시 세력(勢力)을 잡자, 중국 최남단(中國 崔南端)의 하이난[해남(海南)]도(島)으로 유배(流配)되었으며, 7년 동안의 귀양살이 끝에 휘종(徽宗)의 즉위(卽位)로 풀려났으나, 돌아오던 중에 장쑤성[강소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死亡)하였음
㉢ 문학관(文學觀)
동파(東坡)는 폭넓은 재능(才能)을 발휘(發揮)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에 훌륭한 작품(作品)을 많이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Humor)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好感)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文人)들이 모여 들었다고 하는데, 동파(東坡)는 서정적(抒情的) 느낌이 주조(主調)를 이루던 당시(唐詩)에서 벗어나 철학적 요소(哲學的 要素)가 짙은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開拓)하였으며, 그 대표작(代表作)이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으로 널리 애창(愛唱)되고 있는『적벽부(赤壁賦)』임
㉣ 우리나라에서의 문학적 위상(文學的 位相)
동파(東坡)는 무수한 중국(中國)의 문인(文人)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인(詩人)’으로 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대단한 인기(人氣)를 끌었는데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 일례(一例)를 들어보면『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軾)과 그의 동생(同生) 김부철(金富轍)의 경우 당시의 대문호(大文豪)였던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兄弟)와 같은 학식(學識)을 갖춘 인물(人物)이 되게 하려고 부모(父母)가 그 이름까지 본 따 지었다고 함
㉤ 대표작(代表作)『적벽부(赤壁賦)』
동파(東坡)가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로 추방되어 지방관(地方官)인 부사(府使)로 재임하던 1082년에 양세창(楊世昌)이란 친구(親舊)가 찾아오자 장강(長江)에 배를 띄워 적벽(赤壁 : 양자강(揚子江) 연안에 있는 바위로 ‘색깔이 붉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선유(船遊)하면서 인간(人間) 존재(存在)에 관한 깊은 사색(思索)과 강산풍월(江山風月)의 아름다움을 향유(享有)할 수 있는 기쁨을 노래한 운문(韻文)이 바로 ‘임술지추(壬戌之秋) 칠월기망(七月旣望)에 소자여객(蘇子與客)으로 범주(泛舟)하고 유어적벽지하(游於赤壁之下)할새, 청풍(淸風)이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로 시작되는『적벽부(赤壁賦)』로서 중국 최고(中國 最高)의 산문(散文)으로 회자(膾炙)되고 있는데, 다음은 그 전문(全文)임
임술년(壬戌年) 가을 칠월 열엿샛날 밤, 동파(東坡)는 나그네와 배를 빌려 적벽(赤壁) 아래에 띄웠다. 물결도 일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살살 불었다. 나그네에게 술을 권하면서『시경(詩經)』「월출(月出)」편(篇) 맨 처음에 나오는 “요조(窈窕)”의 구절(句節)을 외웠다.
이윽고 동산(東山) 위로 달이 솟아 북두(北斗)와 견우(牽牛) 사이를 서성일 때 강(江) 위로 하얗게 이슬이 비끼고 물빛 끝난 곳에 하늘이 맞닿았다. 우리들 한 잎 갈대가 흘러가는 곳은 망망한 만경창파(萬頃蒼波)를 타야 하는 곳. 더덩실 허공(虛空)에서 바람 타면 훨훨 나부끼는 깃털은 신선(神仙)의 몸짓, 세상(世上) 너머 어디쯤에서 멈출지 모른다.
부어라! 마셔라! 뱃전을 두드리며 목청을 돋구었다.
“굵직한 계수노야. 얄따란 난초노야! 저 청명한 물길을 치면 와르르 달빛이 부서진다. 나의 그리움은 아득히 번지는데 저 님은 하늘가에 저토록 멀어!”
때마침 나그네 가운데 피리 부는 사람이 노래에 맞추어 구슬프게 불거늘, 그 소리 붕붕 사무친 듯, 애원하듯, 울부짖듯, 하소연하듯 그 여운(餘韻)이 실오라기처럼 맴돌다가 끝내 깊숙한 골짜기를 교룡(蛟龍)처럼 춤추고 외로운 뱃전에서 울부짖는 과부(寡婦)처럼 흐느낀다.
동파(東坡)는 놀란 듯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나그네에게 물었다.
“피리 소리가 어찌 그리 슬픈가?”
나그네의 대답은 길었다.
“조조(曹操)의 시(詩)에 ‘달 밝고 별빛 성길 때 오작(烏鵲)들이 남(南)으로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쪽에서 하구(夏口)를 바라보거나 동쪽에서 무창(武昌)을 조망(眺望)하면 산천(山川)은 짙푸르게 손잡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는데, 바로 거기서 조조(曹操)가 주랑(周郞)의 손아귀에 잡혀 꼼짝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조조(曹操)는 형주(荊州)를 대파하고 그 기세로 강릉(江陵)까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동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뱃머리에서 배꼬리가 천(千) 리(里)에 뻗은 데다 전승(戰勝)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었더이다. 넘치는 강물을 마주보고 술 마시며 긴 창(窓) 옆으로 누인 채 시(詩)를 지었던 그 일대(一大)의 영웅(英雄)이 지금은 어디에 있나이까?
하물며 나와 당신은 강나루에서 물고기 잡고 땔감 뜯으며 물고기나 새우를 벗 삼고 사슴들과 떼를 짓지 않나이까? 한 닢 조각배를 몰면서 표주박 술잔을 서로 부딪치고, 하루살이처럼 잠시 천지간(天地間)에 기생(寄生)하나니, 아! 내 목숨은 저 아득한 창해(蒼海)에 뜬 한 알의 좁쌀이어라. 이 목숨의 찰나(刹那)를 슬퍼하며 저 출렁이는 장강(長江)의 무한(武漢)을 부러워한 나머지 신선(神仙) 따라 멀리 날개를 펴고 밝은 달을 안으며 장생(長生)을 그려보지만 아서라, 그것은 부질없는 망상(妄想)들, 그래서 슬픈 한(恨)을 저 피리에 실어 불고 있나이다.”
동파(東坡)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물과 달을 아는가? 물은 끊임없이 흐르건만 강(江)은 여전히 출렁이는 물이요, 달은 달마다 둥글다 이지러지건만 끝내 커지거나 사라지지 않네. 변하는 쪽에서 천지(天地)를 보면 천지(天地)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변하지 않는 쪽에서 만물(萬物)을 보면 만물(萬物)은 우리와 함께 영원(永遠)하거늘,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물건(物件)엔 각기 그 소속(所屬)이 있으니 우리의 소유(所有)가 아니라면 우린 터럭 한 오라기라도 점유(占有)할 수 없는 법일세. 다만 강(江) 위의 청풍(淸風)과 산간(山間)의 명월(明月)은 그렇지 않네. 귀로 그걸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그걸 보면 빛깔이 되네. 아무리 가져도 금할 사람 없고, 아무리 써도 동이 나지 않나니, 이는 하느님이 인류(人類)에게 주신 무궁(無窮)한 재화(財貨)로세. 자네가 나나 이를 실컷 향락(享樂)할 일일세.”
나그네는 빙긋이 웃으며 술잔을 씻더니 다시 잔(盞)을 채웠다. 안주와 과일이 비고 술상과 잔이 흐트러진 채로 배 속엔 취객(醉客)들이 이리저리 뒹굴며 자느라 해가 솟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 무정설법(無情說法)에 얽힌 일화(逸話)
또한, 동파(東坡)는 시(詩)와 글씨에서 이미 천하(天下)에 그 명성(名聲)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선(禪)에 대해서도 일가견(一家見)을 가진 거사(居士)였는데, 어느 날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주석(住錫)하고 있던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의 상총 선사(常聰 禪師)를 찾아가 “소생(小生)이 스님을 찾아 뵈옵는 바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성불 득도(成佛 得道)와 중생 제도(衆生 濟度)를 말함)을 해결코자 함입니다.”라고 하니, “대관(大官)께서는 그동안 어떤 스님들을 만나보셨습니까?”라고 상총(常聰)이 물었고, 이에 “여러 고을의 관직(官職)을 거치면서 많은 고승 대덕(高僧 大德)을 만나 뵈었습니다.”라고 답(答)하자, 다시 상총(常聰)은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어찌 대관(大官)께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유정설법(有情說法)만 청(請)하십니까?”라고 나무랐는데, 그동안 수많은 불경(佛經)과 조사 어록(祖師 語錄)을 독파(讀破)했지만 ‘무정설법(無情說法)’이란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에 그는 곧바로 자리를 물러나 나오면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화두(話頭)에 담긴 뜻을 알고자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精神)을 집중한 채 말을 타고 오다가 어느 덧 여산폭포(廬山瀑布) 앞에 이르렀으며, 골몰해 있던 그가 폭포(瀑布) 소리에 잠시 눈을 뜨는 순간 이백(李白)의「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가 머리에 떠올랐고, 바로 그때 자신도 모르게 탄성(歎聲) 소리가 나면서 “바로 저 폭포수(瀑布水) 소리가 존재(存在)의 근원(根源)을 밝힌 부처의 법문(法文)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며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는데, 그 기쁨에 못 이겨 읊은 노래가「오도송증동림총장로(悟道頌贈東林總長老)」, 일명「계성산색(溪聲山色)」이라고도 하는 다음의 7언절구(七言絶句)임
「계성산색(溪聲山色)」
溪聲便是廣長舌 계곡의 물소리는 그대로가 부처의 설법(說法)이요
(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 푸른 산빛은 그대로가 부처의 깨끗한 몸이로다
(산색개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밤 사이에 들은 부처의 팔만사천 가지 노래를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뒷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타일여하거사인)
⑧ 자유 소철(子由 蘇轍 : 1039~1112)
명윤 소순(明允 蘇洵 : 1009~1066)의 아들로 19세 때 형(兄)인 동파 소식(東坡 蘇軾 : 1036~1101)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해 정계(政界)로 들어갔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反對)하여 지방 관리(地方 官吏)로 좌천(左遷)되었음
철종(哲宗) 때 구법당(舊法黨)이 정권(政權)을 잡자 우사간(右司諫)․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지만, 또다시 신법당(新法黨)에 의해 광둥[광동(廣東)]성(省) 레이저우[뇌주(雷州)]로 귀양을 갔고, 사면(赦免)된 후에는 허난[하남(河南)]성(省)의 예창(穎昌)으로 은퇴(隱退)하였음
당송팔대가
중국 당(唐)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 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의 총칭.
한유 ·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세가 약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과 착상의 연구가 뜻의 전달성을 희박하게 하였고, 또한 도덕지향(道德指向)의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도학 냄새가 짙은 것이 원인이었으며, 그 반동으로 당나라 말기에서 5대에 걸쳐 육조식(六朝式) 탐미적 산문(耽美的散文)이 부활하였고, 북송(北宋)의 천성기(天聖期)가 되자 구양 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유창한 산문을 만드는 혁신운동에 앞장서,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등 우수한 문학자가 배출되었다. 당송팔대가라는 병칭(竝稱)은 송나라의 진서산(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당순지(唐順之)가 당나라 ·송나라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문편(文編)》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명(明)나라의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