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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 본교 3행동실천 목표 설정
1971년 4월 1일 본교는 교사들에게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 이념구현 3행동 실천 목표를 공모하였다. 교사마다 한 가지씩 목표안(目標案)을 내었는데, 그 중에서 장상우 교사(張相雨敎師)의 안이 직원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 채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나라 위해 단결합시다.(國家 倫理)
(2) 우리는 남을 위해 봉사합시다.(社會 倫理)
(3) 우리는 부지런히 노력합시다.(個人 倫理)
23. 대창 배구부, 도민체전과 경북추계배구선수권대회 우승(1971.6.5)
찬서리 내린 은빛 잔디밭엔 아침 햇빛이 비치고, 낙엽은 한 잎 두 잎 떨어져 처량히 딩굴던 가을도 어느 듯 지나고 한기(寒氣) 감도는 겨울이 북풍(北風)을 타고 찾아오면 빛나는 반세기(半世紀)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학창원(大昌學院)의 개교기념일이 다가올 때 모교(母校)와 더불어 자라온 대창 배구부가 경상북도에서 가장 강하여 우승을 휩쓸었다. 여기에서 우리 배구부원들이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승리, 무적을 자랑하던 타교와 열전 끝에 이루어진 승리의 기쁨을 만긱하던 것만 추린다. 먼저 1971년 6월 5일 대구에서 열린 제8회 경북도민체전부터 시작하겠다. 송대 배구부(松臺排球部)는 예천의 명예와 모교의 명예를 걸머지고 부푼 가슴을 안고 예천을 뒤로 두고 도민체전이 열리는 대구를 향했다. 대구에 도착한 우리 선수단은 먼저 고전이 되리라고 예상되는 다른 대표팀의 특기의 사정을 알아보고 다음 있을 경기에 대비해서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휴식을 취했다. 경북맘모스체육관에서 벌어진 예선전에 무난히 통과한 우리 선수단은 다음 날 종합경기장에서 열리는 준결승전에서 평균 신장 180cm를 능가하는 장신이라는 유리한 조건하에서 뛰는 울진농고(蔚珍農高)와 대전할 때 때마침 부는 바람 관계로 단신인 우리 선수들은 예상치 못했던 고전을 하였다. 이길우(李吉雨) 체육 교사와 예천 출신 주민들의 격려에 힘입은 우리 선수들은 투지와 필승의 신념으로 분투하여 2:1이라는 스코아 차로 승리하여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다음 날 경북맘모스체육관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운집한 관객들이 시선을 모으고, 상주고등학교(尙州高等學校)와 게임을 2:0으로 가볍게 눌러서 금메달을 획득한 우리 선수들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땐 정말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도민체전을 승리하고 온 우리 선수들은 후배들의 실력 향상과 아울러 경북추계선수권대회(慶北秋季選手權大會)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을 하러 다녔지만 전용 운동장 없는 서러움을 많이 당하여 우리 선수들은 예천경찰서에서 서장의 후원 아래 2주일이란 맹렬한 연습과 트레이닝을 단행했다. 날은 바뀌어서 시합 날은 박두해 왔다. 이길우 체육 교사의 지시 아래 필승을 다짐하며 대구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1971년 11월 19일 예선전은 무난히 통과하여 준결승전에서 고전을 했으나, 2:0으로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20일 오후 마지막 시합에 군위고등학교(軍威高等學校)와 실력을 겨루었다. 2:1로 우승기는 우리가 차지했었다. 우승을 한 우리 선수단은 승리의 기쁨이 도민체전보다 더 감격깊은 순간이 되었다. 우리 선수단을 육성한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님, 선수들과 함께 추리닝을 입고 트레이닝을 한 이길우 체육선생께 사의(謝意)를 표한다. 그리고 도민체전과 경북추계선수권대회 때 많은 협조를 해준 예천체육회 배구이사 김종식(金종植) 씨와 우리 배구부 창설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체육회 김수남(金秀男) 씨와 다른 예천읍 유지 여러분께 감사한다. 대창 배구부의 전적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970. 4.19 학도체전(學徒體典) 2지구 선발 우승
1970. 5. 5 제7회 도민체전(道民體典) 선발 우승
1970. 5.10 제7회 학도체전 우승
1970. 6. 3 제7회 경북도민체전 우승
1970.10. 1 안동 36사단장배 쟁탈 우승
1971. 4.21 학도체전 2지구 선발 우승
1971. 5.15 제8회 도민체전 선발 우승
1971. 6. 5 제8회 경북도민체전 우승
1971.11.19 경북추계배구선수권대회 우승
24. 대창 육상부, 도민체전에서 24개의 메달 획득
1971년 6월 5일 도민체전(道民體典)에서 우리 대창의 육상부원(陸上部員)들이 24
개의 메달을 땄다. 1971년 3월에 부임한 이길우(李吉雨) 체육교사의 지도 아래 무적의 용사 대창의 선수들은 1971년도의 활동에 들어갔다. 우리 선수들은 4월 20일부터 열리는 학도체전 제2지구 선발대회에 대비해서 새 학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서 제각기 체육인의 헌장(憲章)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날마다 수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지정된 장소로 나와서 부지런히 온 전력을 기울이고 연습에 들어갔다. 본교의 운동장이 좁아서 한천 뚝, 예천동부국민학교, 예천국민학교 운동장을 번갈아 다니면서 새로 도입된 기술이라고는 없이 선배들이 물려준 그대로를 적용해서 저마다의 소질을 살려 연습에 몰두했다. 시합이 임박해 올 무렵에는 학생회 대의원들의 호의로 선수들에게 정성껏 부식(副食)을 가져와 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4월 19일 김교용(金敎容) 교장 앞에서 여러 교사들과 재학생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중고(中高) 선수 대표가 필승의 선서를 했다. 재정 부족으로 아침 동차편을 이용해서 당일치기로 대구에 갔다. 20일 입장식에 이어 모든 선수들을 대표하여 본교 체육부장 이상목(李相목) 군이 선수단 선서를 함으로써 마스게임에 이어 시합이 진행되었다. 우리 학교는 작년(1970)의 우승에 이어 금년 전적도 100m에서도 이주연 군 우승, 우남석(禹南錫) 군이 4위를 했고, 800m에서는 이상목(李相목) 군이 우승을 했고, 1,500m, 5,000m, 400m계주 등 트랙 종목 모두를 휩쓸었다. 필드부에서는 넓이, 삼단에 김영학(金영學) 군이 우승을 했고, 포환, 원반에서도 변병식(邊병植) 군이 우승했고, 투창(投槍)에서도 김석우 군이 우승함으로써 육상 종목 전체를 휩쓸 듯이 했으나, 불행하게도 혼자서 여러 종목에 출전하다 보니 마라톤에서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중학교 권기영 군이 다행히도 우승을 하고, 김규식(金규植) 군이 고등부 3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마라톤 대창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모든 선수가 우승 또는 준우승을 했기 때문에 경주에서 열릴 학도체전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학교 재정 부족으로 배구부는 제외되고, 육상부 9명만이 출전을 해서 단거리는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중장거리, 필드부에서는 입상을 했다. 학도체전이 끝난 10여 일 후로 제8회 경북 도민체전을 위한 예천군 선발대회를 거쳐 합숙 훈련을 실시했다. 그 중 육상, 배구, 탁구, 씨름 종목은 우리 학교 학생들로 구성되어서 4일 간의 열전을 장식하는 도민체전(1971.6.5)에 참가하여 배구, 탁구, 씨름부가 우승을 했다. 거기에 못지않게 육상부는 1,500m, 5,000m에서 우승하고, 필드부에서 넓이, 삼단을 우승하고, 포환에서 준우승를 차지하였다. 그것은 오직 모든 선수들의 선전 분투(善戰奮鬪)한 결과로 사상 최대(史上最大)의 24개란 메달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도민체전을 마지막으로 우리 선수들의 1학기 동안의 운동은 화려한 막을 내렸다. 2학기에 있는 예천군민체육대회에 대비해서 훈련을 시작했다. 2학기 개학과 동시에 1969년도에 선배들이 빼앗겼던 우승기를 도로 찾기 위하여 빌려 주지 않겠다는 예천공설운동장을 여러 유지와 선배들에게 애원(哀願)하여 빌려서 마음대로 넓고 넓은 운동장을 뛰고 달리면서 맹훈련을 했다. 부지런히 모든 선수들이 일치단결해서 연습에 열중하고 지도자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한 결과로 1971년 10월 5일 많은 귀빈(貴賓)들과 군민(郡民)들이 응시하는 가운데 대창의 육상, 대창의 힘을 많은 관중들에게 다시 한번 더 과시하였다. 또는 공설운동장 준공식이 시합 직전에 있었으므로 모든 선수들의 심정은, '내가 먼저 달려서 우승해야 한다.'라는 각오로 시합에 총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교사들과 선배들, 재학생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길러 온 자기의 실력을 최대로 발휘했기 때문에 우승을 했다. 예년(例年)에 없었던 규정을 택해서 한 학교에서 2명의 선수들이 결승전에 출전해서 우승을 눈앞에 놓고 다투었다. 그 날의 전적을 보면, 100m에 김영학(金영學) 군 우승, 이주년 군 준우승, 200m에 이주연 군 우승, 우남석(禹南錫) 군 3위, 400m에 김규식(金규植) 군우승, 우남석 군 준우승, 1,500m에서는 이상목(李相목) 군이 우승을 했고, 김규식 군이 준우승을 했다. 또한 5,000m에서 모든 교사들과 학생 등을 애태우는 경기를 했었다. 그것은 종목이 많아 지친 다리를 이끌고 최후의 힘을 다해서 우승의 테이프를 이상목(李相목) 군이 가슴에 걸었다. 마라톤에서도 황병의 군 우승, 오만석 군이 준우승을 차지했고, 필드부에서도 포환, 원반에 변병식(邊병植) 군 우승, 넓이, 삼단뛰기에 김영학(金영學) 군이 우승했고, 마지막 경기인 400m 계주에서도 우승을 함으로써 그날의 경기를 완전히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우승할 때마다 학생회 대의원들이 만들어서 목에 걸어준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응원석으로 달려서 대창 사자(獅子)가 덩실덩실 춤추는 가운데 전교생의 뜨거운 환영의 환호성을 모든 선수가 받아 보았다. 그러므로, 1969년도에 빼앗겼던 우승기를 시상식 때 받아들었고, 또한 그 날에 중학교가 오래 간 만에 우승을 함으로써 10여 년 만에 중고등(中高等)이 한꺼번에 우승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므로 공설운동장은 온통 대창의 홈 그라운드로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어두움이 짙을 무렵 우리 학교 학생들은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님 이하 그 날에 공이 큰 이길우(李吉雨) 고등학교 체육교사와 김길영(金吉永) 중학교 체육교사를 가마에 태운 채 교가(校歌)와 응원가(應援歌)를 목이 터저라고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했다. 시가행진을 끝마치고 1,400여 명의 건아들이 교장 선생님의 사택(舍宅) 앞에 가서 대창의 만세 3창(三唱)을 교장 선생님의 선창으로 재학생 모두가 목이 터지라 소리쳐 불렀다. 대창의 만세소리가 한없이 넓은 공간으로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 날의 기쁨을 모두가 앞세우며 헤어졌다. 그 날의 기쁨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우리들 마음속에 굽이치고 있다. 9명의 선수들이 1971년에 가져온 트로피와 우승기를 총결산해 보면, 우승컵이 2개, 우승기가 1개였고, 구기(球技)와 육상을 도합하면 트로피 8개와 우승기 2개로서 대창의 명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25. 본교 씨름부, 도민체전에서 우승함
1971년 6월 5일 본교 씨름부는 도민체전(道民體典)에서 우승을 하였다. 본교 씨름부는 오랜 침묵을 깨고, 1969년에 재발족되었다. 2학년 박문식, 황연한과 1학년에 이의성, 임장환, 김순휘 군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연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해 4월 중순에 영주에서의 지구별 학도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우리 씨름부는 학교 당국의 훌륭한 뒷받침으로 착실히 자라났다. 해가 바뀐 1971년에는 그 맴버 그대로 진급해서 지구별 학도체전, 도민체전에서 우승하고, 학도체전에서는 전국을 7년 간 주름잡아 오던 영신고등학교(永信高等學校)에게 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대회에서의 준우승은 다른 대회에서의 우승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다. 우리 고등학교 선수들은 쟁쟁한 대창 씨름을 외치면서 우리 대창중학교 선수들까지 키우기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우렸다. 행운의 1970년도를 넘기고 1971년에 들어서면서 이상해 군, 조인락 군이 씨름부에 가입되어 학년 초부터 맹렬한 훈련을 쌓았다. 그리고 중학교 거구인 김주한 군, 권세달(權世達) 군도 함께 훈련을 하였다. 중학부에서는 김주한 군, 권세달 군의 우세한 실력으로 지구별 학도체전에서 2년 연승(連勝)하는데 힘들이지 않고 도민체전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정말 아슬아슬한 찬스도 많았다. 중학부에서 전국을 휘어잡던 의성중학교(義城中學校)를 넘어뜨릴 때는 너무나도 벅찬 기쁨이었다. 말이 중학생이지, 고등부에 비해 봐도 신체면에서나 기술면에서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 김주한 군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고등부도 중학부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고, 더 우수한 공훈을 세웠다. 지구별학도체전에서 3년 연승하는데 힘들이지 않았고, 도민체전에서 2년 연승을 차지하였다. 중학부, 고등부 모두 대창이 가는 곳마다 우승이니 대창 씨름을 외쳐보지 않을 수 없다.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은 많은 괴로움도 뒤따랐다. 대학 진학을 앞둔 고3 학생에게는 더욱 괴로움이 많았다. 그러나 부풀은 우승의 영광을 가슴에 안고 교장 선생님께 상장과 우승컵을 봉납(奉納)할 때 전교생들의 박수갈채 소리는 모든 괴로운 일들을 말끔히 잊게 한다. 도민체전 준결승전 때의 이야기이지만, 의성에 있는 봉양상고와 대전을 하였다. 이때는 겁이 났다. 선배들도 모두 입을 모아 봉양상고 실력들이 뛰어나더라고 하고, 선수들을 보니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우리 학교 선수들보다 몸집도 더 컸다. 그러나 막상 대회장에 임하니 별 것 아니었다. 임장환 군의 약싹빠른 재치와 기술, 김순휘 군의 강인한 지구력(持久力), 이상해 군의 노련한 솜씨. 조인락 군의 그 재치, 이의성 군의 노련한 경력... 모두들 자기의 시원한 특기로써 대창 씨름부의 이름을 한층 높혀 주었다. 씨름은 옛날 신라 때부터 우리의 민속 스포츠로서 전해 내려온 고유의 민족 스포츠이다. 힘과 힘의 대결인 씨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포츠이다. 그러기에 5월 단오와 8월 추석을 즈음하여 각 지방에서는 황소를 내걸고, 씨름대회를 개최하여 장사(壯士)를 뽑는다. 이러한 민속 스포츠가 오늘날은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서 각 체육대회 때마다 씨름 종목을 별도로 마련하기까지 발전하였다.
26. 군내 고등부 웅변대회 우승
1971년 9월 15일 예천군농공훈련소(醴泉郡農工訓練所)에서 초중고 학생웅변대회(初中高學生雄辯大會)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본교 황웅진 군이 고등부 우승을 하였다. 이는 대창의 사자(獅子)로서 필승의 제일 자리를 한 번도 양보할 줄 몰랐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통 계승이 가만 앉아서 이룩된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고등부 웅변에 다소 침체 현상을 면치 못한 감이 있었으나,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대창의 정신은 기어코 재기를 이룩하고야 말았다. 이 날 30여 연사(演士)들은 저마다 모교의 명예를 걸고 최종 최선 최고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힘찬 열변(熱辯)이 마이크를 통하여 운집한 청중들의 가슴 속에 호소되던 동안 출전 연사들은 물론, 방청객들과 지도 교사(本校 張相雨 敎師)들이 긴장된 속에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때 우리 대창의 명예를 걸고 1,500여 건아(健兒)들의 간절한 기원과 절대적인 응원을 받으며 출전했던 고등부의 황웅진 군, 그는 우리의 소원을 아니! 대창 웅변의 전통을 기어이 이어 놓은 것이다. 그의 우렁차게 외치던 사자후(獅子吼)와 높이 치켜든 우승 토로피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외치던 절규가 승리의 환호성을 송대(松臺)에 메아리치게 했던 것이다. 우리 웅변부(雄辯部)는 1971년도의 목표를 필승으로 내걸었고, 또 계획도 활동도 그러하였다. 처음부터 차분히 쌓은 황군의 실력은 이날따라 열이 흐르게 부릅뜬 눈의 정기와 무게있게 선 자연스런 자세는 보는 이의 초조를 멀리하게 했고, 청중들의 마음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묵직한 목소리와 알찬 내용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있게 외칠 때마다 청중들의 숨가쁜 호응은 박수갈채로 표현되었고, 또한 그때마다 대창의 얼이 청중들의 가슴가슴 속에 깊이 심어진 것이다. "우승" "대창고등학교 황웅진" 하는 심사 결과의 등위 발표가 있을 때는 연패(連敗)의 몇년 간의 치욕이 말끔히 씻겨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옆 자리에 초조하게 앉아 계시던 지도 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듯 필승의 신념으로 다져왔던 보람은 우리 대창 웅변의 전통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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