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수채화를 배우게 되었다.
나이 오십 넘은 남자가 하고많은 취미활동 중에 수채화를 배운다는게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
수채화를 배우겠다고 저녁에 미술학원 가서 입시반 학생들 틈에서 배우기를 하겠나,
인터넷 동영상, 책을 사서 혼자 배우기를 하겠나.
뭘 어떻게 준비하며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다.
언젠가는 그림을 한 번 배워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가져더랬다.
미대를 졸업하고 조각을 하시는 분의 사무실에 놀러갔다가
"그림을 한 번 배웠으면.."하고 이야기 드렸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유인물을 한 장 꺼내 보여 주었다.
"진주시 능력개발원"에서 개설한 '진주시민 교육' 프로그램 중에
수채화반이 수, 목요일 각 3시간씩 편성되어 있었다.
'진주시 능력개발원..?'
평생을 이 지역에서 산 내 기억으로는 진주시와 능력개발원이라 단어 사이에 '여성'이란 단어가 분명히 붙어서 <진주시 여성 능력개발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성들만의 교육원 일터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분명히 <진주시 능력개발원>으로 명칭되어 있고 학력과 성별을 구분하지 않으며 진주시민이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되어 있었다.
5개월 수강비 7만5천원. 한 달 수강비가 7만5천원이 아니고 5개월에 7만원 5천이란 이야기다.
시내 여타 학원에 비하면 무척 쌌다.
강의료가 저렴하다고 강사선생님의 강의까지 저렴하지는 않았다.
경력소개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경상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경력이 쟁쟁했다.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선착순 모집이란 단어가 맘을 급하게 했다.
당장 가입과 함께 강의료까지 송금을 했다.
수강 신청 후 보름 쯤 지나 드디어 첫 수업시간.
진주시 능력개발원 들어가는 입구의 분위기가 묘하다.
출입하는 사람들 모두가 여자!
남들 일하는 낮시간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자영업자가 나만 있으랴, 설마 남자 한 사람 없으리.
일말의 희망을 품고 능력개발원 지하 강의실 수채화 반에 들어갔다.
세상에나.. 26명의 여자 중 유일한 청일점.
내 평생을 두고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여자 틈에서 홀로 남자로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 시선은 어디로 두며, 말은 어떻게 하나.. 괜히 왔다.. 도망치자는 생각이 열 두번도 더 들었다.
'저 아저씨가 누군가..?' '어찌 잘 못 알고 오신 분은 아닌가..' 하는 표정들.
어째저째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 가지 궁금한 걸 물어보면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수채화반 10년에 내가 유일하게 찾아 온 남자 수강생이란다.
내가 기억했던대로 <진주시 여성 능력개발원>이란 명칭을 썼고 여자 분들만 교육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눈 밝으신 진주시민이 "여성"이란 명칭을 사용하여 진주의 여성시민만 시민교육한다는 것은 성차별이다라고 항의를 했단다. 내가 수채화반에서 성차별 금지 혜택을 받은 1호 남자라는 것.
참 가문의 영광이다.
허우대 멀쩡한 대한민국 남자로 살면서 '차별'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성차별 현장의 일면을 예전 '여성'능력개발원에 남아 있음을 보게된다.
수채화반 강의실이 지하 1층인데, 지하에는 남자용 화장실이 없다. 지상1층까지 올라가야한다.
이거 은근히 기분나쁘다. 왜 나만 1층으로 걸어 올라가서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런 거 말이다.
남자로 살면서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차별이다. 평소 내게 익숙한 것과 반대로 여자이름 먼저 부르고 남자이름부르고, 내 이름이 당당히 있는데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빠로만 불려지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다.
싼 수업료 내고 비싼 인권교육을 덤으로 받은 셈이다.
첫 강의시간은 26명의 여성과 1명의 남성이 서로에게 약간의 충격과 흥미를 유발시키며 끝났다.
그런데 이거 수업을 마치고 나오며 다음 시간에는 나가지 말고 도망을 치자고 해도
남자는 내가 유일했으니 '용기없는 아저씨 도망쳤다'는 소리가 뒷 덜미에서 들리는 듯 하여 끝까지 수채화반에 가기로 마음을 다졌다. 물론 선불한 수강료가 더 아까웠던 게 사실이다.
둘째 날.
내가 가졌던 수채화반의 수업 시간 그림은 이랬다. 선 그리기, 스케치 연습부터 하다가 익숙해지면 물감칠하기. 그런데 대강의 수채화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바로 스케치와 물감 칠하기를 했다.
이런 수업 방식이 내게 낯설지는 않았다.
시골공고 다닐 때 실습을 이렇게 했다. 재료와 도면을 실습선생님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제한 시간 내에 만들어라."
시간 내로 만들지 못하면 엉덩이가 얼얼하던 그런 수업.
사실 몸으로 배우는 것은 무조건 시작을 해야한다.
머리 속으로 백 번 천 번을 배우고 익혀도 한 번 손으로 만드는 것 만 못하다.
중학교 미술 시간 이후로 한 번도 그려보지 않았던 그림이다.
선생님은 눈 밭에 청정한 소나무를 그리며 따라 그려 보라고 하는데 나는 어째 그리는 소나무들 마다 둥그렇고 귀여운 버들강아지가 되는지 모르겠다.
여자 분들은 색을 칠해도 하나같이 화사하고 은근한 빛이 돌건만
어째 나는 빨갛고 노란 원색의 해병대 명찰 색깔만 나오는지.
수채화 24색 물감 종류가 적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막상 필요한 색을 못 찾겠고 못 만들겠다.
내 머리 속에는 '예쁜 분홍색', '예쁜 노랑색', '칙칙한 회색' 이런 형용사가 고정되어 있다.
근데 색을 칠하기 위해서 팔레트에 물감을 개면 예쁜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그냥 탁하고 칙칙한 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채화 용지 위에 제 자리를 찾아 스~윽 칠하면 거기에 맞는 화사한 색이 떠 오른다.
그런데 보라!
예쁘다고 우리가 생각한 하나의 색만으로는 수채화 용지를 채우지 못한다.
칙칙하다고 생각한 어떤 색이 옆에 어우려져야 그 색이 빛나 보인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하나의 물감이 하나의 존재다.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빛난다.
어디에 예쁜 색이 있고, 나쁜 색이 있으며, 필요없는 물감이 있는가.
세상 어디에 잘나고 못난 사람이 있으며 필요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버릴 색이 없다. 아니 버릴 사람이 없다. 어우려져야 빛난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이후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명제가 옳다는 걸 느끼는 아침이다.
첫댓글 교수님. 저 번에 글 한 번 남겼었는데... 2006년에 교수님께 가르침 받던 컴기과 A반 최연석 입니다. 추석은 잘 보내셨습니까?ㅎ. 학교에 한 번 들리라 셨지만, 저는 현재 김해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평일에 진주에 가기가 어렵습니다. ㅎ... 혹, 10월 5일에 '진주라천리길전국걷기대회'라는 걸 하는데 아십니까? 저는 거기 55Km로 참가 할 것 입니다. ㅎ. 혹 시, 교수님께서도 그 날 다른 계획 없으시다면, 같이 걸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ㅎ. 오랜만에 교수님 얼굴도 한 번 뵈면 좋겠습니다. ㅎ. 참고로, 19시 출발 입니다. ㅎ. 참가신청은 '워킹진주연합회' 다음카페에서 인터넷 접수도 가능하시고, 당일 현장 접수도 가능 합니다.
코스는 10Km, 30Km, 55Km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가 그 중 55Km로 참가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