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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顔男子]
도망자(逃亡者) 2
다음날 아침 정민아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때는 강현식과 두 사내도 일어나 있었는데 어젯밤 술이 아직 덜 깨어서 모두 내복 차림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 커졌으므로 사내들이 짜증을 냈다.
“어떤 새끼야?”
벽에 걸린 싸구려 시계는 오전 아홉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이른 시간은 아니다. 정민아도 새벽까지 잠이 들었다가 깼다가 하는 바람에 여섯 시경에야 겨우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이다. 옷을 그대로 입고 잤으므로 다시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정민아는 문 쪽을 보았다. 강현식은 아직 앉아 있었지만 사내 둘은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소리쳐 물었다.
“누구요?”
“정민아 씨 계십니까?”
그 순간 정민아는 눈과 입을 딱 벌리고는 숨을 멈췄다. 얼굴색이 하얗게 굳어졌다가 금방 발갛게 달아올랐다. 고동수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때 자리를 차고 일어선 강현식이 사내들에게 지시했다.
“야, 문 열어. 그리고 그 놈을 잡아. 이년 애인인 모양이다.”
과연 사채업 20년 관록의 강현식이었다. 순식간에 상황 판단을 한 것이다. 사내들의 행동도 재빨랐다. 사내 하나가 문고리를 풀어 젖힌 순간에 다른 사내가 불쑥 튀어나가 문 앞에 서있는 고동수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미처 안에 있던 정민아가 뭐라고 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어?”
멱살을 잡힌 고동수가 방 안으로 끌려 들어왔지만 사내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룸살롱 종업원부터 시작했던 고동수의 기질이나 싸움실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방안으로 끌려 들어왔지만 곧 고동수는 머리를 뒤로 젖히는가 하더니 번쩍 그 탄력을 이용하여 멱살을 쥐고 있는 사내의 콧잔등을 이마로 받아버렸는데 마른바가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와우.”
그런 비슷한 소리를 입으로 뱉으면서 사내 하나가 그 자리에 엎어진 순간 고동수에게 다른 사내가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뒤에서 감싸 안은 것이다. 다급해서 그랬겠지만 허점투성이의 동작이었고 그것을 고동수는 놓치지 않았다.
팔꿈치로 사내의 옆구리를 찍더니 곧 몸을 돌리면서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차올리고 사내의 입에서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뿜어졌다. 사내가 온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주저앉았을 때였다.
홀린 듯이 그것을 바라보던 정민아의 눈이 다시 커졌다. 방안으로 조철봉이 들어선 것이다.
“이것들은 뭐야?”
고동수가 강현식을 노려보며 물었고 조철봉도 눈을 크게 뜨고 정민아를 보았다.
“무슨 일이오?”
“넌 누구야?”
고동수가 식식거리며 강현식에게 다가가면서 다시 물었다.
“너, 중국놈이야?”
이 상황에서 강현식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넌 누구냐고 물은 것보다 중국놈이냐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나, 한국놈이야.”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한 강현식이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병신 같은 두 놈은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 이 새끼야,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어?”
고동수가 기세를 잃지 않고 다시 소리쳤을 때 정민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 좀 살려줘, 나 좀 살려줘.”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를 경험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있다고 해도 그 순간의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면에서 의혹을 받게 된다. 어쨌든 살았으니까.
간발의 차이라고 모두 그러지만 조금 과장했을 수도 있고 다른 여건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이 많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에 메모를 남긴 일본인이 있었다. 가족에게 남긴 짧은 유언으로, 그것이 비행기 잔해에서 발견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감동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도 그 순간 메모를 쓸 수 있는 그의 정신력 때문일 것이다.
죽는 순간 극도의 공포심으로 흐트러진 정신을 집중해서 한 자 한 자 쓴 것이다. 주위에서 들리는 비명과 기체의 요동, 추락할 때의 압력까지 극복하면서 말이다. 조철봉 같으면 소리는 지르지 않겠지만 같이 죽을 사람이 여럿인 것에 위안이나 받고 있었겠지.
어쨌든 정민아는 경각에 달렸던 목숨이 살아났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 승객에 비유한다면 절망으로 정신을 놓고 있다가 비행기가 산비탈을 훑으며 착륙한 셈이 될까? 정민아는 아우성을 치는 승객은 아니었고 물론 메모를 남길만한 정신력도 없었다.
정민아가 살려달라면서 흐느껴 울었을 때는 이미 살아났다는 안도감으로 긴장이 풀린 상태인 것이다. 이런 울음은 길다. 방 한쪽에서 두 사내가 끙끙대고 있는 상황에서 정민아는 꽤 오래 흐느껴 울었고 그동안 조철봉과 동수는 강현식으로부터 두서없는 해명을 들었다.
강현식은 정민아를 개 잡듯이 족쳤지만 이번에는 정세가 역전되었다. 우선 근본이 없는 객지여서 뒤가 허전했기 때문이다.
조철봉이 정민아와 함께 방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정민아는 그저 입은 옷 그대로인채 빈손으로 따라 나왔는데 강현식과 두 사내는 방에 남았다. 강현식은 잡았던 고기를 놓친 표정이었지만 동수의 기세에 눌려 따라 나오지 않았다.
“천단공원 근처로 가자.”
거리에 나와 택시를 탔을 때 조철봉이 동수에게 말했다. 운전사에게 말해준 동수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호텔로 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숙소가 있어. 전 관리자가 살았던 곳인데 내게 열쇠가 있다.”
양정민의 숙소인 것이다. 정민아는 앞쪽만 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힐러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기분일 테니 모든 것이 다 새롭고 고맙게 느껴져야 마땅하다.
그날 오후, 호텔로 돌아온 조철봉은 동수와 함께 호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정민아도 모든 것이 갖춰진 양정민의 숙소에서 지금쯤 점심을 차려먹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채업자들은 알아줘야 합니다.”
입안의 음식을 삼킨 동수가 뒤늦게 감탄했다.
“귀신같이 찾아낸다니까요.”
“마침 우리가 찾아가서 다행이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국으로 끌려갔겠지, 그렇지 않나?”
“당연하지요. 그리고 아마 피까지 다 빨렸을 겁니다, 하긴.”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동수가 말을 이었다.
“그놈이 기를 쓰고 찾아다닐 만했습니다. 저도 그렇게까지 했을 줄은 모르고 있었거든요.”
정민아가 사기를 친 내막을 강현식에게서 들은 것이다. 동수도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사장님 덕분에 정민아 씨는 살아난 셈입니다.”
*
방으로 들어선 최갑중은 먼저 방 안부터 훑어보더니 소파에 앉았다. 조철봉이 갑자기 정민아의 집을 찾아가 보자고 한 것이었다.
오후 4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최갑중은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온 것이다.
“어디 있습니까?”
인사도 없이 최갑중이 불쑥 그렇게 묻자 조철봉은 시치미를 뗐다.
“누구 말이냐?”
“다른 방에 묵고 있어요?”
“양정민이 숙소가 비어 있잖아?”
“아이구, 참”
감탄인지 한숨인지 그렇게 탄성을 뱉은 최갑중이 다시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 사채업자는 어디 있습니까?”
“아마 지금쯤 돌아갔을 거다.”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갑자기 육박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고동수가 그 놈 부하 두 명을 박살냈지. 그래서 그냥 빼내왔어.”
“동수는 눈치채지 못했지요?”
“당연하지.”
정색한 조철봉이 최갑중을 보았다. 사채업자 강현식이 정민아를 찾아낸 것은 최갑중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최갑중은 사람을 시켜 강현식에게 정민아의 거처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얻은 정보에 강현식이 만사 제쳐놓고 베이징으로 달려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만 하루의 여유를 준 다음에 조철봉이 모른 척하고 고동수를 앞세워 정민아를 찾아간 것이다. 강현식이 금방 정민아를 서울로 압송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하루 여유를 준 것이다.
이틀간 여유를 줄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정민아가 감격을 할 정신상태가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최갑중도 따라서 정색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장님은 돈 한 푼 안들이고 구세주가 되셨구만요.”
“그렇게 된 셈이지.”
“저는 사장님이 사채업자한테 대신 돈을 갚아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요.”
“글쎄, 갑자기 싸움이 일어나는 바람에, 동수가 잘 뛰더만.”
“동수가 한가락 하지요. 밤의 세상에서 오래 놀아서요.”
최갑중은 조철봉으로부터 사채업자 강현식에게 정민아의 거처를 알려주라는 지시를 받고서 금방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상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정민아가 있는지 둘러보았던 것이다. 아마 정민아가 알몸에 가운 차림으로 구석쯤에 서 있을 줄로 예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최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겁니까? 업소 관리를 맡기실 겁니까?”
“도망자 신세부터 벗어나야 될 것 아닌가?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하긴 그렇지요.”
머리를 끄덕이던 최갑중이 다시 정색했다.
“사장님은 그 채무를 해결해주시는 구세주 역할을 하실 계획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넘겨짚지 마라.”
조철봉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네 닭머리로 함부로 추측하지 말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사장님.”
최갑중이 정색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럼 계획을 말씀해주시지요. 그래서 저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그 여자에게 아주 지독한 시련을 주고 싶었다. 위선이나 자존심을 모두 내동댕이치고 나한테 매달리도록 만들고 싶었단 말이야.”
눈을 치켜뜬 조철봉의 말에 열기가 띠어졌다.
“오랜만에 나한테 감동을 주는 여자였다.”
조철봉이 초점없는 시선으로 최갑중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껍질이 벗겨지지 않았어. 도망자 신세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웠고 오만했다.”
“만일에 말씀이죠.”
정색한 최갑중이 말을 받았다.
“처음부터 형님한테 매달려서 징징거렸다면 아예 감동은커녕 돌아보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당연하지.”
조철봉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냐? 한 꺼풀 두 꺼풀 껍질을 벗겨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어이구.”
길게 숨을 뱉은 최갑중이 나중에는 혀까지 찼다.
“벗겨 먹으나 그냥 먹으나 먹고 나면 배부른 건 똑같습니다.”
“무식한 놈 같으니.”
조철봉도 혀를 차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 놈은 어떻게 되었어?”
“그것이, 참.”
쓴웃음을 지은 최갑중도 허리를 세웠다.
“중국 땅이 넓어서 그런지 물가가 싸고 가깝기 때문인지 그 놈도 중국에 있습니다. 천진에요. 주소를 알아 놓았습니다.”
“가깝군.”
“서울에 있는 제 어머니한테는 꼬박 꼬박 전화로 안부도 묻고 생일 선물도 보내고 있었습니다. 효자지요.”
“사기꾼이라고 다 불효자는 아니다. 오히려 효자가 더 많아.”
그러자 헛기침을 한 최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 놈은 제 가게를 부도냈지만 미리 재산을 빼돌렸기 때문에 한 푼도 손해난 것이 없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대충 2백만 불을 갖고 튀었습니다.”
“정민아 돈까지 합쳐서?”
“예, 사장님.”
최갑중은 정민아를 배신하고 도망간 김진수를 찾아낸 것이다. 물론 조철봉의 지시였다.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최갑중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 놈한테 사채업자 강현식이 노릇을 해야겠군.”
“애들 둘을 데려왔습니다.”
“아니.”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팔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청도에서 갑수를 데려와야겠다. 이런 일에는 갑수가 나을 것이다.”
“김갑수를 말입니까?”
최갑중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김갑수가 조선족 패거리를 데리고 권총을 이마에다 겨누면 오줌을 질질 쌀 겁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테니까 너는 먼저 김갑수하고 천진에 가서 기다려. 그놈을 잡지는 말고.”
“감시만 하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내가 정민아하고 같이 갈 테니까 그때까지다.”
“흠.”
이번에는 최갑중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조철봉의 가슴께를 보았다.
“아주 극적 장면이 연출 되겠군요.”
“클라이막스지.”
“배신한 자의 처참한 꼴을 보여주시려는 겁니까?”
“아주 미련을 송두리째 없애 버리려는 것이지.”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정민아는 지금도 배신한 놈이지만 김진수한테 미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산산조각 내야 한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다시 웃었다.
*
갑자기 나타난 조철봉과 고동수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민아는 50평형 아파트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한동안은 응접실의 소파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사람은 다 그렇겠지만 강현식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는 조철봉과 고동수 옆에 거머리처럼 붙었다가 택시를 타면서부터는 혼자 있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챘는지 조철봉은 이곳에다 자신을 혼자 떼어놓고 돌아갔다.
한 시간쯤이나 지나고 나서야 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때부터는 허리가 굽어지는 것 같이 허기가 치밀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주방으로 다가가 냉장고를 연 정민아의 눈이 둥그레졌다.
온갖 밑반찬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젓갈류는 물론이고 마른 찬, 장아찌에 장조림까지 없는 것이 없었고 김치냉장고를 열자 김치 종류만해도 갓김치까지 5가지나 되었다.
정민아는 쌀통에서 쌀을 꺼내 압력솥에다 밥을 했다. 밥이 익는 동안 냉장고에서 꺼낸 사과를 베어 먹으면서 정민아는 그때서야 집 구경을 했다. 방 세개에 베란다가 넓은 중국식 아파트였는데 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가전제품도 모두 한국산이었다. 여기서는 고급이다. 안방의 옷장 문을 연 정민아는 숨을 삼켰다.
브랜드 제품인 옷이 수십 벌이나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여자 옷이다. 그때부터 정민아는 서둘러 벽장을 열고 서랍까지 뒤졌으며 화장실 옆에 쌓인 빨랫감까지 들춰 보았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뱉고는 다시 응접실의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모두 여자 살림뿐이었던 것이다. 남자용품은 양말 한짝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 관리자에게 이런 아파트를 장만해주고 조철봉은 출입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머리를 갸웃하고 이맛살까지 찌푸렸던 정민아는 압력밥솥의 신호음이 울리는 바람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기운차게 일어났다.
조철봉의 전화가 왔을 때는 정민아가 밥을 세 공기나 먹고 노곤해져서 식탁 위에 놓인 그릇들을 치우지도 않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였다. 벨소리에 화들짝 놀랐던 정민아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이곳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조철봉 뿐인 것이다.
“좀 쉬셨나?”
조철봉이 휴가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던지는 인사말처럼 물었다.
“예, 덕분에.”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정민아의 귀에서 후끈 열이 났다.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거긴 안전하니까 푹 쉬도록 해요. 저녁 차려먹고.”
“저기.”
정민아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여기 주인은.”
“주인은 없어. 서울로 돌아가서 앞으로는 오지 않을거요.”
그러더니 조철봉이 짧게 웃었다.
“거기 있는 가구나 옷도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써도 돼요.”
“하지만.”
“그 여자가 도망간 것도 아니고 내가 보낸 것도 아냐. 그쪽 사정이 있어서 갑자기 그만둔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또 뭐야.”
“아녜요.”
그때 조철봉이 생각난 듯 말했다.
“내일 아침에 들를 테니까 외출 준비를 해요. 조금 먼 곳에 다녀올 테니까. 거기 있는 옷을 골라 입으시고.”
이제 정민아는 어디라도 따라갈 작정이었다.
*
조철봉과 정민아가 천진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 반이었다.
베이징에서 천진까지는 비행기로 45분 거리인 것이다. 정민아는 조철봉이 천진에 다녀오자고 했을 때 무슨 일 때문이냐고도 묻지 않았는데 가게 일인 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항에는 어제 저녁에 도착해 있던 최갑중이 두 사내와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최갑중과 정민아는 초면이었으므로 조철봉이 소개를 시켜줘야 했다. 최갑중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조철봉이 겪어온 수많은 여자와 정민아를 열심히 비교할 것이었다.
차 두 대에 분승하여 시내를 향해 달릴 때 앞좌석에 앉았던 최갑중이 몸을 돌려 조철봉에게 말했다.
“김 사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곧장 가시겠습니까?”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이자 최갑중의 시선이 정민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민아에게 상황을 설명했느냐고 눈으로 묻는 것이다. 최갑중의 시선이 옮아 왔을 때 조철봉은 희미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정민아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조철봉의 옆에 앉아 창 밖의 경치를 보는 모습이 마치 관광객 같았다. 차가 멈춘 곳은 시내 수상공원 근처의 주택가였다. 주택가 입구의 상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갑수가 웃음띤 얼굴로 다가오더니 조철봉에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사장님.”
굵은 목소리였고 표준말을 썼지만 북한억양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정민아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김갑수를 보았을 때 조철봉이 소개했다.
“이 분은 나하고 동업하시는 북한군 장교시지.”
“동업자라니요? 아닙니다.”
정색한 김갑수가 머리까지 저었다.
“저는 사장님을 모시고 일하는 직원입니다.”
“자, 가지. 집에 있나?”
“예, 사장님.”
김갑수가 앞장을 서며 말했다.
“제 부하 셋이서 집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때 정민아가 조철봉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표정이었지만 조철봉은 못 본 척했다. 집 앞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었다.
김진수는 단독주택을 임차해서 살고 있었는데 조선족 아가씨와 동거하는 중이었다. 어제 저녁에 도착한 최갑중과 김갑수가 다 조사를 해놓은 것이다.
단독주택은 철제 대문에 담장도 높았는데 앞장서 가던 김갑수가 손짓을 하자 문 앞에 서있던 사내 하나가 벨을 눌렀다. 그러자 인터폰으로 여자의 묻는 목소리가 울렸고 사내가 대답했다. 그때 김갑수가 옆에 서있는 조철봉에게 말했다.
“뒷문도 지키고 있으니까 도망치지 못합니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대문이 열리더니 앳된 얼굴의 여자가 상반신만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더니 여럿이 몰려서 있는 것을 보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김갑수가 여자를 밀어젖히고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당황한 여자가 중국어로 말했을 때 김갑수의 부하가 낮게 한국어로 꾸짖었다. 조선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이 에미나이, 찍소리 말라우.”
그 순간 여자의 몸은 감전이나 된 듯이 굳어졌고 말대로 입을 다물었다. 10평쯤 되는 마당을 단숨에 건넌 김갑수와 부하가 곧장 현관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최갑중과 조철봉, 정민아가 따랐다.
영문을 모르는 정민아가 이제는 놀란 얼굴로 뒤를 보았을 때 사내들이 여자를 양쪽에서 싸안고 따라오고 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그때서야 정민아에게 말했다.
“오늘 정리할 것이 있어.”
정민아는 조철봉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현관 안으로 정민아가 들어섰을 때 방안에서 사내가 나왔다. 놀란 듯 눈을 치켜뜬 얼굴이었다.
“당신들 누구야?”
버럭 소리쳤던 사내의 시선이 정민아에게 옮겨진 순간이었다.
“어엇”
사내의 입에서 비명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고 온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정민아는 사내가 방에서 나온 순간에 김진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었지만 김진수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정민아의 시선이 조철봉에게 옮겨진 것은 이제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를 알겠다는 표시였다. 눈빛이 잔잔한 걸 보면 분명했다. 그때 김갑수가 거친 목소리로 김진수에게 말했다.
“거기 앉으라우.”
김갑수는 최갑중에게서 내막을 들은 터라 김진수를 대하는 태도가 불량했다. 여자를 배신하고 달아난 더러운 놈인 것이다. 총살시켜야 마땅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안간힘을 쓰듯 그렇게 말하고 난 김진수가 둘러선 사내들의 기세에 질려 엉거주춤 소파 끝에 앉았을 때였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이 여자한테서 사기친 돈을 내놓아라, 이자까지 합해서 내야겠다.”
“아니, 저는.”
“이 간나새끼가 웬 말이 많아?”
그때 옆으로 다가간 김갑수가 잇사이로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김진수의 머리에 붙였다.
“당장 쏴 쥑이고 찾아서 가면 되지 않습네까? 이런 더러운 놈한테 여러 말 시킬 것 없습네다.”
“아니, 잠깐만요.”
질색을 한 김진수가 두 손을 흔들었지만 머리에 붙여진 권총은 떼어내지 못했다. 얼굴빛이 하얗게 된 김진수가 초점이 없는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제가 지금 당장은 돈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어?”
“이곳저곳에다 넣어 두었기 때문에.”
“다 찾아와.”
조철봉이 소파에 앉더니 김갑수와 최갑중을 돌아보았다.
“시간은 많아, 네가 다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그리고는 그때서야 생각이 난듯이 조철봉이 정민아를 보았다.
“정민아 씨도 여기 앉지.”
그러자 정민아가 잠자코 다가와 조철봉의 옆에 앉았다.
“잘 사는군.”
조철봉이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구도 고급이었고 가전제품은 모두 대형 한국산이다. 그때 최갑중이 김진수에게 말했다.
“자, 돈을 어떻게 주실 것인지 말씀해보실까? 원금에다 이자를 합하면 대충 10억 정도가 되는데 말이야.”
그러자 김진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말을 뱉지 못했다.
“자, 안으로 가자고.”
최갑중이 김진수의 한쪽 어깨를 잡아 일으켰고 김갑수는 등을 밀어 방으로 데려갔다. 부하들도 몰려갔으므로 응접실에는 조철봉과 정민아, 둘이 남았다. 정민아가 머리를 돌려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까 여자는 어디 있어요?”
조선족 여자를 찾는 것이다. 조철봉이 현관 쪽의 방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방으로 데려갔어.”
“저 사람을 만나게 하려고 저를 이곳까지 데려 오셨군요.”
시선을 벽 쪽에다 준 채 정민아가 낮게 말했다. 정민아는 김진수를 보고 나서 한마디도 한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김진수는 정민아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정민아가 말을 이었다.
“저 여자하고 잘 살고 있네요.”
“저 여자는 이곳에서 세 번째야.”
조철봉이 가볍게 대답했다.
“탈북자만 골라서 데리고 살다가 돈도 안 주고 내쫓았지.”
그러자 정민아가 조철봉을 보았다.
“무서워요.”
머리를 돌린 조철봉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정민아가 다시 말했다.
“조 사장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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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도 도망자 신세였지만 정민아하고는 천지 차이였다.
김갑수와 최갑중이 집안에서 찾아낸 현금만 해도 달러와 엔화, 위안화까지 합해서 한국 돈 3억 원 가깝게 되었으며 김갑수와 2명의 호위까지 붙여 밖으로 나가서는 저녁때까지 다시 5억 원을 찾아왔다.
“내일까지 하루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몇 억은 더 찾아옵니다.”
김진수의 집에서 여럿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김갑수가 말했다. 김진수도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도 들지 않았다. 김갑수가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사기를 치고 도망 나온 놈이 여럿인 것 같습니다. 그놈들만 잡으러 다녀도 한 밑천 잡겠습니다.”
모두 김진수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맞는 부분도 있었다. 중국은 이제 가장 도망가기 쉬운 곳이 되어 있는 것이다.
김진수와 동거해온 앳된 얼굴의 여자는 스물세 살에 이름이 안정옥이라고 했다. 조선족으로 처신하고 있었지만 자강도 강계가 고향이며 작년에 탈북해서 천진까지 흘러들어왔다가 김진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안정옥의 음식 솜씨가 좋았으므로 식탁에 둘러앉은 사내들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김진수를 제외하고 사내만 8명이다.
조철봉에다 최갑중이 서울에서 둘을 데려왔으며 김갑수는 청도에서 부하를 셋이나 데려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기꾼 1명을 잡으려고 중국 땅에서 남북한 합동작전을 편 셈이었다. 닭찜을 먹던 조철봉이 갑자기 생각난 듯한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가는 안정옥을 보았다.
“음식 솜씨가 좋은데, 이곳에서 계속 살 생각인가?”
놀란 안정옥이 주춤 멈춰서더니 힐끗 김갑수의 눈치를 보았다. 김갑수가 북한에서 온 군관인 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눈치 빠른 김갑수가 시치미를 뚝 떼고 안정옥을 보았다.
“날래 대답하라우.”
“예, 저는….”
“탈북자이기 때문에 갈 곳이 없단 말이지?”
그러자 안정옥이 다시 김갑수를 보았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물었다.
“이 사람한테서 한 달에 얼마를 받나?”
“아니, 저는….”
“돈 안 받았나?”
“예.”
“얼마나 같이 있었는데?”
“여섯 달이 조금 넘습네다.”
“그동안 한 푼도 안 받았어?”
“예.”
마침내 안정옥이 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저 먹고 자기만 했습네다.”
“이런 나쁜놈.”
최갑중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김갑수와 3명의 인민군 출신 부하들의 반응은 더했다. 모두 먹던 것을 그치고 김진수를 노려보았는데 조철봉만 없었다면 요절을 냈을 분위기였다. 그때 조철봉이 안정옥에게 다시 물었다.
“안전하게 돈벌 곳이 있다면 이 사람을 떠나고 싶나?”
그러자 안정옥의 시선이 다시 옮아왔으므로 김갑수가 버럭 화를 냈다.
“야, 눈치만 보지 말구 날래 대답부터 하라우야.”
“예, 가고 싶습네다.”
놀란 안정옥이 소리치듯 대답했다. 그리고 흐득 울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네까?”
식탁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조철봉이 김갑수를 보았다.
“자, 그럼 이제 자네가 대답해 줄 차례야.”
그러자 김갑수가 헛기침을 하더니 안정옥에게 말했다.
“청도에 우리 가게가 있어. 그곳 주방일을 맡으면 숙소도 있고 한달에 150불씩 주겠다.”
다시 놀란 안정옥이 붉어진 눈만 치켜 떴을때 김갑수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말라우. 잡아가지 않을테니까.”
“그럼 됐다. 같이 가면 되겠다.”
결말을 낸 조철봉이 잠자코 앉아있는 정민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녁 먹었으니 인사를 나누고 떠나기로 할까?”
머리를 든 정민아가 김진수를 보았을 때 집안은 조용해졌다. 조철봉이 말했던 클라이맥스가 바로 이 장면이었으므로 최갑중은 침까지 삼켰다.
그때 김진수가 처음으로 정민아의 시선을 받았다. 이미 현금 팔억 원을 빼앗긴 터라 김진수는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김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할 말 없어.”
이제 집안의 모든 시선이 정민아에게로 옮겨졌다.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때 정민아가 머리를 돌려 김갑수를 보았다.
“저런 놈은 북한으로 데려갈 수 없을까요? 가서 수용소에 넣든지, 아니면 일을 시키든지 할 수 없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어서 김갑수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정색했다.
“저런 사기꾼은 용도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양곡만 축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갖고 있는 재산을 한푼도 남기지 말고 다 빼앗아서 가져가세요.”
그러자 김갑수가 조철봉을 보았다. 묻는 듯한 시선이다.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우리는 먼저 갈테니까. 저런 놈은 죄값을 받아야지.”
“한푼도 남겨 놓으시지 마세요.”
정민아가 야무지게 말을 이었다.
“저런 놈은 길바닥에서 죽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김갑수가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반항하면 아예 쥑여서 버리겠습니다.”
그래서 김갑수와 일행은 그대로 남고 조철봉은 최갑중과 함께 집을 나왔다. 물론 현금 팔억 원은 최갑중의 부하들이 나눠 들었는데 모두 들뜬 표정들이었다. 택시에 탔을 때 최갑중이 뒷좌석에 앉은 조철봉과 정민아를 번갈아 보았다.
“김갑수도 이번 원정에서 수입을 단단히 올리겠습니다. 저놈한테서 오억 이상 더 나올 것이 있다고 했거든요.”
최갑중이 정색하고 정민아를 보았다.
“돈을 배분해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었는데 정민아 씨께서 한방에 처리해주셨습니다.”
물론 정민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조철봉도 창 밖을 보았다. 그러자 최갑중도 말을 잇지 않았으므로 차 안은 어색한 정적에 덮여졌다. 정민아가 입을 연 것은 십 분 쯤이나 지난 후였다. 택시는 공항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갑자기 모든 일이 한꺼번에 터졌네요.”
혼잣소리처럼 정민아가 말을 이었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저 돈으로 빚 갚으면 돼,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고.”
조철봉이 말했을 때 정민아가 시선을 들었다. 두 눈이 깜박이지도 않고 조철봉을 향해 있다.
“그 다음에는요?”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
“어떻게요?”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겠고.”
정민아의 눈 밑이 붉어졌고 영문을 모르는 최갑중이 눈만 껌벅이다가 아예 몸을 돌렸다. 정민아의 검은 눈동자에 조금씩 물기가 배어 가는 것 같았지만 조철봉은 똑바로 보았다.
“베이징에 돌아가서 마음이 변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좌석에 등을 붙였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리기로 하지.”
“베이징까지 갈 필요 없어요.”
정민아가 말했을 때 앞에 앉은 최갑중이 움칠 했다. 조철봉에게 몸을 돌린 정민아가 바짝 붙어 앉았다.
“날 이렇게 만들어준 당신 은혜를 내가 왜 잊겠어요? 다 받아들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