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그날을기다리며
구원의 여정 1. 광야시대 성막, 노아의 방주는 3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 모세가 세우도록 했던 성막은 성막뜰,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었습니다. - 노아는 방주는 1층, 2층, 3층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2.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a. 은혜구원과 성화구원 - ‘우림과 둠밈’이라는 사이트의 글을 보면 ‘죄사함’과 ‘칭의’를 ‘은혜구원’으로, ‘중생’과 ‘성화’를 ‘성화구원’으로 구분했습니다. b. 죄사함과 몸의구속 - ‘참빛선교회’ 김윤구 목사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500년간(이집트 430년 + 바벨론 70년)의 과정을 통해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나온 것은 ‘죄사함’이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한 것은 ‘몸의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 김윤구 목사님은 ‘죄’와 ‘죄의 몸’으로 구분하며 파리를 쫓기보다는 파리가 끼게 하는 근본이 되는 ‘똥’을 치워야 하는데 파리를 쫓는 것이 죄의 사함이라면, 똥을 치우는 것이 죄의 몸을 처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죄사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보혈의 공로를 영접하면 되는 것이고, 죄의 몸을 해결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하여 함께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c. 교인, 신자, 성도 - 한나라교회 김상배 목사님은 신앙성장의 단계를 교인, 신자, 성도로 구분하였습니다. 교인은 교리적으로 알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신자는 거듭났으나 열매가 없는 식물로 하면 줄기는 나왔으나 꽃이 피어 수정하지 못한 정도를 의미하며, 성도는 거듭나 열매를 맺는 단계라고 하였습니다. d. 연속적 중생관 - 부산 삼일교회, 인터넷 카페 ‘양무리 마을’에 가서 보면 볼 수 있는 견해로 중생을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로 착상이 되고, 자라나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인데, 앤드류 머레이의 경우는 말씀으로 생명이 생기고, 이렇게 생긴 생명이 세상가운데 나타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며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e. 영, 혼, 몸의 구원 - 서울 왕십리 삼성교회 서영민 목사님, 정동석 목사님, 이현수 목사님의 견해로써 먼저는 거듭나서 영의 구원이 이뤄지며 이는 과거의 구원에 속하고, 현재는 혼의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고, 장차 몸의 구속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영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이뤄진다면, 혼의 구원은 십자가의 도(주와 연합하여 옛사람이 함께 죽는 것)를 통과함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몸의 구원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것처럼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는 순간 이라는 것입니다. 3. 이러한 이해는 왜 중요한가? a. 거듭남은 영생과 영벌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 우리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거듭남’은 매우 중요합니다. -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구분하면 거듭남에 대해 우림과 둠밈, 김윤구 목사님의 경우는 제2의 은혜, 즉 성화구원 과정에서 이뤄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본 것이고, 그 외 김상배 목사님이나 정동석, 이현수 목사님은 영의 구원의 단계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것이고, - 손성은 목사님이나 양무리 마을의 경우는 연속적 중생관을 제시하므로 입장이 유동적이라 보입니다. b. 거듭남의 증거가 무엇인가? - 거듭남의 증거가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먼저 거듭남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서에 의하면 ‘새마음’과 ‘새영’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 분명 거듭나면 새마음과 새영이 부어진다고 했는데 이상하죠? 그런데 내 안에 내마음과 새 영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의심하고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부가하여 요한1서에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보면 더더욱 마음이 힘들어 지고, 하나님께로 난 자에게는 어둠이 없다고 했다가 같은 성경에서 또 죄가 없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든다고 말하여 종을 잡을 수 없게 합니다. - 다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보면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절망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 이러한 문제는 거듭남에서 다음 단계로 성장을 하지 못하여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 베드로의 모습이 아주 대표적인 거울이라 생각됩니다. 주목하여 볼 것은 거듭남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의 목적지는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c. 문제는 상상임신 ? - 거듭남은 사람편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처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두 번 날 수 있겠습니까 또 모태에 들어가야 할까요? 반문할 수 밖에 없으나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하실 수 있다고 하셨으니 쉬운 일입니다. - 열매로써 알 수 있다고 했고, 주님의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고, 밀가루 속에 뿌려진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 폴 워셔나 베들레헴교회 존 파이퍼 목사님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는 거듭남을 마치 백화점의 진열된 물건마냥 쉽게 말한다고 합니다. 거듭남은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 하고, 열매가 나타나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듯 싶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불의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지속적으로 죄에 거할 수 없습니다. 양심과 영혼이 끝임없이 고통하며, 예배의 열기를 잃어가고, 기도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염려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 상상임신일 수 있습니다. - 구원이 믿음으로만 되는가 믿음에 행위가 동반되어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는 결국 진정으로 ‘거듭났느냐!’의 문제 다름 아닙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며, 죄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자신으로 인해 로마서 7장의 사도바울과 같이 탄식을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믿음으로만이냐? 논쟁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났는가? 돌아 볼 일입니다. d. 쓴소리 ? - 장로교 등 기성교회는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저는 “구원파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솔직히 구원파가 왜 이단인줄 잘 모르겠습니다. 기성교회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과 구원파에서 말하는 것이 뭐가 다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구원파는 과거 영지주의나 니골라당마냥 영은 구원을 받고 육은 무익하며, 영은 이미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이는 취소되지 않으므로 육은 어떻게 살아도 된다고 하므로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구원파가 그렇게 육신적으로 함부로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러면 기성교회 우리들은 구원파보다 나은게 무엇인지요? 이건 바리새인적 위선일 뿐이죠. 이렇게 되면 처음 거듭남,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라는 논리도 같고, 나중 삶의 모습도 대동소이할 뿐(기성교회식 표현을 빌자면, 구원파는 대 놓고 비윤리,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고 기성교회는 바리새인처럼 외식을 할 뿐)이니 뭐가 다른지 불신자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요? 4. 성소를 지나 지성소에는 어떻게 나아가나 a. 거듭났을 뿐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같은 자들 - 거듭남은 신앙의 끝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결코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남에만 머무르고 성화되어 열매 맺는 삶,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들림 받을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이 사람들은 남겨져 7년대환란(타작마당)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 이런 상태에 있는 자들은 계시록의 말씀(이제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처럼 휴거가 오기전에 죽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b.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거듭남의 논쟁만큼이나 논쟁이 되는 것이 언제 성령의 내주가 시작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기서도 마찮가지입니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데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앤드류 머레이에 의하면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우긴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육신적 눈으로 판단하고 육신적인 것에 끌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지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내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증거한다고 하는데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 합니다. 그러면서 꼭 이럴때 '보지 못하고 믿는자들이 복되도다'라고 말했다는 말씀을 인용하곤 하죠 - 이문제가 중요한 것은 거듭남이 구원의 시금석인것처럼 성령의 내주는 성화로 가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셔서 인도하시고 기름부으심이 아니면 결코 마귀와 옛자아를 실제적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 다수의 크리스찬들이 마귀가 이끄는 대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에 끌리고 메이면서 옛 자아가 순간순간 튀어 나오며 전혀 변화받지 못한 모습으로 살면서도 자신들은 성령 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 특히, 교리적인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3절에 기초해서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으니 이것이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요, 이렇게 역사하신 성령님은 떠나 가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거듭나게 하신 성령님이 그 때부터 성도에게 내주하여 떠나 가시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리나 이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심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4. 결론입니다. a. 우리는 스스로 거듭남을 점검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13:5) b. 누가 휴거될 것인가? - 요새 휴거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들림을 받을 수 있을까요? 계시록에서는 십사만사천명이 들림을 받는데 이들은 새노래를 부르고, 여자들과 더불어 음난을 행하지 않고, 어린양이 어디로 이끌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 김상배 목사님의 경우 성도가 휴거될 것이라고 했고, 박마이클 목사님이나 여러 종들이 휴거 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휴거는 거듭난 자들중에서 영적 성장을 이뤄 주님의 신부가 될 정도의 자격이 되는 자들이 받을 것입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될런지 계시록에 기록된 십사만사천은 아니겠으나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c. 성령 받아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 신부로 성장해야 합니다. - 사람들이 야단을 떨지만 어떻게 신부가 되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 성령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따르면서 성령안에서 내 안에 하나님의 영토가 확장되어 신랑에 걸맞는 신부가 되면 들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시간표가 얼마나 남았을까요?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주님이 지금으로부터 얼마 안 되어 오신다면 우리가 급 성장하여 신부가 될 수 있을까요? 열매는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고, 식물은 그렇게 쉽게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 이제 막 거듭난 사람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단정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음이 성경의 약속 - 기실 이는 첫 열매였던 이스라엘보다 이방인의 구원이 먼저 이뤄지고, 들림 받는 것을 말한다고 봄이 더 타당할 듯 싶기도 하지만요- 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는 확실히 거듭난 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들림을 받던 아니 받던 구원의 기회는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거듭난 자는 히브리서 말씀처럼 이제는 그리스도도의 초보에서 벗어나 안식에 들어가는 단계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도의 초보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