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첫 반성
글마루 김서형
새해 연휴를 지나고 출근을 하니 화장실 물이 처음으로 얼어 있었다. 오후가 되면 녹겠거니 했다. 출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사실 그리 불편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마음에 무슨 조그마한 일이라도 께름칙하면 참지 못하는 고약한 성질 탓이다. 휴대용 가스버너에 물을
끓여서 내 키보다 한참 높이 달린 물받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몇 번을 부어도 쉽게 녹지 않았다. 팔을 다 뻗어도 잘 닿지 않아서 조심하느라고 하는데도
조금씩 물이 튀었다. 뭐 그리 급한 상황도 아니었고
또 화장실 바로 옆 수도는 얼지 않아 그쪽 물을 퍼다
부어도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고 말아야지 생각했다. 키가 닿지 않아 어림짐작으로
작은 그릇에 담긴 뜨거운 물을 다 부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은 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몇 번을 부은 이력도 생겼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조급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은 물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 없이 멍 하니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찬물에 얼굴을 씻고 자리에 와서 거울을 보니
얼굴 왼쪽이 벌겋게 익어 있었고 화끈거리고 따갑기
시작했다.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울리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잠시 다니러 갓을 때, 아이가 갑자기 울어서 달려가 보았더니 얼굴을 앞으로
찧었는지 막 이가 나기 시작한 아이의 입술과 입속이
다 터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같이
울고 있는데 어머니는 조용하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괘않다, 마. 죄 없는 얼라들이라서 금방 낫는기다.
얼라들이 놀다 보면 다 그렇지 애미가 되
가꼬 맨날 같이 울고 않았을래? 쯧쯧."
하시며 아이를 쓰윽 안아 달래셨다. 아마 우리 칠 남매를 키우시고 또 내가 막내이니 위로 여러 손자 손녀들을 봐 오신 어머니는 아이보다 어쩔줄 몰라 하며
같이 울고 있는 내가 더 안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는 거짓말 같이 저녁에는 밥도 잘 받아 먹고
아무 탈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아이가 아플 때마다
"죄 없는" 아이는 낫게 해주시고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내 몫이니 내가 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었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그 정신 없는 상황에 순식간에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들.
'내가 너무 많은 죄를 지은 탓일거야.'
'이 작은 입으로, 세치도 안 된다는 이 혀로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일거야.'
'모임들에 나가서 너무 직선적인 성격 탓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 일도 많을거야.'
'그리고 내가 모르는 죄도 너무 많을거야.'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사실 생각도 안 나는 죄들을
열심히 기억해내고 용서를 구하고 기도를 했었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약국에 가서 연고를 사
바르고 퇴근길에 밍크오일을 사 와서 발랐다. 지금은
흔적 하나 없지만 마음속으로 감사의 화살기도를 수도 없이 쏘아 올렸다. 아마 오만함으로 가득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려는 신의 뜻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세상에 죄가 있어 아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도 늘 모자라는 것뿐이고
감사 할 줄 모르며 하루 하루를 사는 나에게 그 사건은 많은 반성의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을 배우기 위해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복지관에서도 작지만 후원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이 세상에서 죄 없이 고통 받는 많은 아이들과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중의 하나는 한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리고
수첩 앞에 커다랗게 적어 놓았다.
"내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 짓지 않게 도와주소서."
나의 2002년은 이렇게 뜨겁게 시작되었다.
(2002년 2월 15일 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