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990년 스무 일곱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이만기는 천하장사만 10번, 자신의 원래 체급이었던 한라장사 7번, 한 체급을 올려 전성기를 누리게 했던 백두장사를 19번이나 차지했다. 11차례의 번외경기까지 합치면 공식대회에서만 47차례 우승을 했으니 현존하는 씨름인 중에서 그의 이런 우승경력에 견줄만한 이가 없다는 것 자체가 그의 전성시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대통령이 결승전을 보기 위해 경기시간까지 늦췄던 일화가 있을 정도로 씨름의 인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씨름계는 그런 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천하장사대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씨름판을 주름잡았던 이준희, 이봉걸, 홍현욱, 이승삼,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이든 전국대회든, 한 번도 우승이라곤 해본 적이 없던 이만기는 그저 천하장사를 만들기 위한 들러리로 간주될 시기였다. 그러나 준비된 2인자에겐 단지 시간만이 필요했다. 사건은 바로 경남대 2학년이던 1983년 봄에 터지고 말았다.
4월 16일 한라장사 결승전은 한마디로 천하장사 예고편이었다. 당대 최고의 기술씨름을 자랑했던 경상대 3년생 최욱진(당시 22살)이 복병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우승했다. 이만기(46) 김해 인제대 교수(사회체육학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한라급 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지요. 준비도 많이 했구요. 그날 지고 난 뒤 숙소로 돌아와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아~, 나는 또 1등을 못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체구가 이만기보다 더 작은 최욱진이 결승전에서 자세를 낮추며 파고 드는 바람에 가슴에 멍까지 들었다. 그에게 천하장사는 단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8강만 가도 좋겠다”는 바람이 그의 원래 목표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준비된 노력은 그를 결승전까지 진출시켰고, 행운의 여신은 이만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