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토의 온 산하가 꽃대궐입니다.
지난 주말 봄비치고는 꽤 많은 80mm쯤의 비가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주 곱게 내린 덕에 활짝 핀 벚꽃이 주말을 지나서도 건재한 모습입니다. 먼저 꽃을 피운 녀석들은 이미 파릇한 잎새를 올리고 있지만, 조금 늦게 피기 시작한 것들은 아직도 큰 꽃 무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벚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피기 시작한 개나리, 진달래꽃도 한창입니다. 이보다 조금 먼저 피었던 목련꽃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제 산벚나무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울 차례입니다.
서울 지역에서 올해 가장 먼저 벚꽃이 핀 것은 3월 24일이라고 합니다. 올해의 벚꽃 개화는 1922년 서울 벚꽃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빨리 핀 것이라고 합니다. 예년에는 보통 4월 초 또는 중순에 벚꽃이 피는 데 비해 올해는 그 시기가 1주일 이상이나 빨리진 것입니다. 따뜻해지는 날씨 때문일 테지요.
강원도 산촌의 나래실아침농원에서도 올해 꽃이 피는 시기가 앞쪽으로 여러 날이 앞당겨 졌습니다. 보통은 4월 둘째 주는 되어야 개화를 시작하던 진달래가 올해는 3월을 넘기지 않고 개화를 시작했습니다. 매화꽃 역시 보통은 4월 10일을 넘겨야 꽃을 피웠는데 올해는 4월 둘째 날이 되자 꽃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나 산촌이나 할 것 없이 꽃이나 잎이 피는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꽃이 피고 잎이 나는 순서만큼은 큰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꽃이 피는 순서를 ‘꽃 차례’, 나뭇잎이 돋아나는 순서를 ‘잎 차례’라고 할까요? 꽃과 잎은 조물주 하느님께서 점지해 준 섭리에 따라 각자의 차례를 지켜 꽃을 피우고 잎을 냅니다. 물론 같은 지역일지라도 그들이 자리한 곳에 따라서 얼마간의 차이는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큰 어김이 없이 그 순서가 지켜집니다. 때를 다투지 아니하고 자신의 때가 되면 그 자리에 틀림없이 각자의 새 꽃과 순을 피워 올립니다.
산촌 농원에서 새해 들어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은 늦겨울 2월의 이끼들입니다. 남쪽에서는 매화, 복수초, 그리고 수선화 꽃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하는 시기이죠. 그런데 산촌 농원에서는 돌을 뒤덮은 돌이끼, 소나무 둥치의 솔이끼, 땅바닥에는 온갖 또다른 종류의 종류의 이끼가 피어납니다.
이어서 피어나는 꽃은 꽤 여러 날 뒤인 3월 중순의 올괴불나무입니다. 산 섶 어딘가에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의 자잘한 연분홍 꽃송이가 피어나고 부드러운 향기를 퍼트립니다. 올괴불나무는 산촌 농원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꽃입니다. 뒤이어 사나흘 뒤에는 산동백山冬柏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가 샛노란 꽃 문을 엽니다. 그리고 3월 말 은빛 털북숭이 노루귀 꽃이 피어날 즈음 산촌 농원에는 노랑너도바람꽃이 환한 얼굴을 내밉니다. 양지바른 산 섶에는 양지꽃이, 언덕바지에는 꽃다지도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4월에 들어서면서 도시보다는 며칠이 늦기는 하지만 개나리꽃이 피어나고 이어서 진달래와 미선나무가 거의 동시에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목련꽃, 벚꽃, 매화梅花가 함께 피기 시작하고, 너댓새 후에는 자두나무의 아주 옅은 연둣빛 이화李花가 가득 피어납니다. 그다음의 차례는 다홍의 복사꽃, 연분홍 앵두꽃이지요.
산 섶에는 활짝 처녀치마가 보랏빛 치마폭을 들어 올리고, 곳곳에 민들레와 산괴불주머니가 노란 꽃송이들을 펼쳐놓기 시작합니다. 앙증맞은 제비꽃이 피어나는 것도 이때쯤입니다. 4월 하순이 되면 냉이, 봄맞이꽃과 각시붓꽃, 봄구슬봉이가 피고, 이스라지나무, 야광나무가 꽃을 피웁니다. 입 순이 일찍 돋아나는 버드나무에는 나무 전체에 연둣빛 구름과도 같은 너울이 걸려 있습니다.
잎눈을 부풀리던 온갖 다른 나무들도 4월 중하순에 들어서면서 일제히 새 잎순들을 분출하기 시작합니다. 여리디여린 연둣빛 자작나무, 파릇한 낙엽송과 산사나무, 발긋한 참나무와 마가목, 단풍나무와 신나무, 찔레와 장미, 두릅나무와 엄나무, 물푸레나무와 붉나무... 가장 늦게 잎을 피우는 대추나무와 뽕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잎 꽃들을 피워냅니다.
5월에 들어서면 좀 더 참고 기다리던 것들이 아우성치듯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과수나무 아래 풀밭은 미나리냉이와 광대수염이 한데 어우러져서 눈부시게 흰 풀꽃 세상을 펼칩니다. 산등성에는 연둣빛 잎새와 함께 연분홍 철쭉꽃이 피어납니다.
숲과 정원은 이제 봄의 절정입니다. 숲에는 앵초, 은방울꽃과 으아리, 정원에서는 튤립과 라일락, 수수꽃다리, 분꽃나무, 고광나무가 향기 가득한 꽃을 피웁니다. 화려한 양귀비꽃, 보랏빛 붓꽃, 노랑꽃창포와 애기똥풀, 자줏빛 엉겅퀴와 자주달개비, 매발톱꽃, 함박꽃도 피어납니다. 꽃사과나무와 아그배나무, 팥꽃나무, 산사나무.... 그 수를 셀 수도 없습니다. 아카시아, 층층나무, 산딸나무의 하얀 꽃들도 피어납니다.
그리고 5월 하순쯤이면 산섶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떨기나무인 고광나무가 새하얀 꽃을 피웁니다. 그 꽃의 그윽한 향기가 농원 가득 퍼져 나갑니다. 장미보다 조금 먼저 짙은 향기의 찔레꽃도 피어나기 시작하구요.
6월 정원엔 향기로운 장미가, 들에는 새하얀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6월 말 여름으로 들어서며 온갖 허브 향초, 원추리, 접시꽃, 메꽃과 벌개미취가 피어납니다. 이루 그 이름을 낱낱이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어서 나리와 참취, 곰취, 개미취, 마타리, 백일홍, 물봉선... 여름꽃이 피어나고 코스모스, 구절초, 산국과 감국, 쑥부쟁이, 용담 따위의 가을꽃이 핍니다. 그리고 이제 눈꽃이 피기 전까지 나무들은 단풍 꽃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그 순서를 지켜 다채로운 꽃 차례, 잎 차례, 그리고 단풍 차례가 한시도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2021.4.8.)
첫댓글 자연의 순환, 4계절에 따른 산하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고 사노라면 나도 어느 덧 자연인으로 동화되겠지요. 같은 아파트 단지라도 그늘에 숨어있는 꽃은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햇볕에 노출되어 있는 꽃은 낙화직전의 모습이에요. 다 같은 꽃이지만 위치에 따라 그 운명도 달라지는 걸 보면서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게 바로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게 아닐까요...강원도 어느 산골짜기 봄이 오는 길목이 그려집니다. 봄 소식 고마워요.....
최근 양평을 오가면서 이원수 작사·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우 선생이 오늘 글로 다시 재현해 주고 있군요. 나도 봄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동요를 연상하며,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퇴직 후 그 현장에서 살게 된 것이 그 무엇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고향인데, 도시와 문명으로만 향하는 현대생활과 각박함이 아쉽기만 합니다. 네티즌 여러분! 자연을 소유하기보다는 종종 아들 손자 대동하고 삼천리금수강산을 주유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순우의 아기자기한 꽃 소식에 감동을 받습니다. 꽃과 잎들이 자기 때가 되면 모습을 드러낸다. 참 의미가 깊은 말이네요.
제주 이곳도 벚꽃이 지기 시작하고 이제 유채화가 만발합니다. 귤꽃은 5월 중순 만발하고 하순에 지면서 콩만한 열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4계절 자연의 섭리대로 피고 지고 맺고 익고 마침내 따는 과정을 멋지게 묘사해주신 순우의 모습이 보고 싶네요.
제주에 가 계실텐데 언제 올라오시나요?
올라오시면 한 번 봅시다~
꽃같은 마음을 가진자만이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즐깁니다.
감동입니다.
완전히 식물박사가 다 되었군요~ 처음으로 들어보는 종류도 많아서 줄줄이 꿰고있는 순우님의 일상이 엄청 부러워 보입니다~ 한 두해 가지고는 안될 내공의 힘이 느껴집니다. 막 단기간의 여행에서 돌아와 반가운 산촌의 소식과 눈에 어리는 듯한 풍광을 대하니 지나가는 봄기운이 한결 따뜻하게 다가와 반갑습니다!
남당선생, 과찬이십니다.
그간 20여년 동안 한 공간을 가꾸고 보살피며 관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어런저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치열하지만 묵묵하게 살아가는 뭇 생명체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경이로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