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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소선방 원문보기 글쓴이: 梅君子
[ Mountain Essay ]
달빛 가득하고 매화꽃 찬란하니 예가 도솔천이로다 - 부용산 야영
일 시 : 2014년 3월 15일 ~ 16일
장 소 : 전남 보성군 벌교읍 부용리 부용산 일원
부용산은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진산이다. 부용산에서 둘러 보면 낙안읍성의 금전산과 동화사가 있는 제석산, 고흥의 첨산이 두루 보이는 수승한 위치에 있는 산임을 대번에 알 수 있게 된다. 해방 전에 불려졌던 유명한 노래 '부용산'은 특히 빨치산 노래(Partisan 歌)라고 해서 금지된 곡으로 묶였다가 1990년대에 해금이 되었는데, 이후 안치환이 리바이벌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사연이 있다. 그 노래의 주체가 바로 벌교읍의 진산 부용산인 것이다. 아무튼 부용산 노래의 낭만적인 슬픈 내역기는 본문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벌교는 기차든 자동차든 모두 통과의례처럼 지나치기만 했던 곳이니 이곳이 교통의 요츙지임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르지 못했던 벌교의 부용산은 그렇게 가파르지도 경관미가 풍부하지도 않은 산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메리트를 느끼게 된 것은 오랫동안 타보지 못해 벼르고 벼르던 기차여행을 함께 동반하는 트레킹 코스라는 점에서였다. 얼마만에 타보는 기차여행이던가. 학창시절에 가끔 기차를 타고 멀리 원정야영을 다니던 때가 엇그제 같았는데 벌써 백발의 나이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경춘선을 타고 춘천의 호반을 찾아 가던 기억이나 경전선을 타고 입교 송석정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던 추억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는 점에서 기차여행은 포근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메리트가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기차여행을 떠나 학창시절의 옛 낭만을 한번 되돌려 보고 싶었다.
그러니, 가자꾸나. 기차를 타고 벌교로 달리자꾸나.
춘삼월의 화순역 모습
화순역 대합실은 매우 한가로워 보였다
승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이윽고 목포에서 출발한 경전선 무궁화호가 들어 서자
화순역을 뒤로 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서광주역에서 타고 오신 다도님, 두목님, 슈렉님, 새끼 슈렉님, 새끼두목님과 반갑게 조우했다
기차는 이내 능주역을 지나
드들강의 유명한 정자로 알려진 현학정을 지나쳤다
이양역을 지나 명봉역에 이르렀고
보성, 예당을 지나 조성역에 이르렀다
근 한시간반만에 모두들 내릴 준비를 한다
벌교역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제 도보여행이 시작된다
벌교역사
벌교는 농수산물이 풍부한 부자읍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명한 벌교꼬막을 슈렉님이 담고있다
짱뚱어탕으로 요기를 하고 태백산맥순례길을 답사해 보기로 의견들을 모아 본다
500만부나 팔렸다는 조정래의 베스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
-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태백산맥』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인 조정래의 10권짜리 대하 소설이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야기된 세계적인 냉전체제 속에서 한반도가 그 파도에 휩쓸리며 일어난 비극적 충돌을 다루고 있다.
그 비인간적인 이념의 충돌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계속된다. 『태백산맥』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남서부의 작은 마을 벌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때는 좌파나 우파로 파벌이 갈리던, 평범한 민간인들은 견디기 어려운 격동의 시기였다. 그 긴장은 종종 폭력을 동반했다. 힘의 균형이 깨질 때마다 고통받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300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몇몇 주인공들—좌익분자를 색출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난폭한 감찰관 염상구, 공산당 위원장인 염상진, 중도를 지키는 반공산주의자 김범우, 소작농들에게 땅을 분배해주기로 마음먹는 지주 김사용,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대표하는 무당 소화 등—의 발자취를 좇는다. 의심과 공포 속에서 펼쳐지는 개개인의 드라마를 작가는 교묘하게 놓치지 않는다.
어떤 일본 평론가에게 ‘한국 민족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백과사전인 동시에, 강대국들이 저지른 횡포가 어떠했는가를 반추하게 하는 세계사적 의미까지 포괄하는 소설이다’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며 ‘20세기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히는 『태백산맥』은 7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조정래는 종종 독자들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 둘 사이의 경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소설이 진짜 좋은 소설이라고.”
[네이버 지식백과] 태백산맥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2007.1.15, 마로니에북스)
태백산맥으로 유명해진 보성여관을 먼저 둘러 본다
문화재청이 매입해서 리모델링했던 보성여관
1970년대의 흑백TV가 카페에 진열되어 있다
현재도 운영 중인 보성여관 숙박시설(문화재청이 인수해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리모델링했다)
< 보성여관 소개 >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보성여관'은 소설에서처럼 해방 이후부터 한국 전쟁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기억하는 근현대 삶의 현장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억의 장소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벌교는 일본인의 왕래가 잦아지며 유동인구가 증가했고, 그 역사의 중심에 있던 '보성여관'은 당시의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근현대 벌교의 역사문화환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보성여관'은 2004년 역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보성여관의 관리단체로 지정되었으며, 2년간의 복원사업을 거쳐 2012년 6월 7일 예전 모습을 되찾은 '보성여관'을 새롭게 개관하게 되었다. 새롭게 복원된 보성여관은 벌교와 보성여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전시장과 차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휴식공간인 카페, 다양한 문화체험의 공간인 소극장, 그리고 소설 속 남도여관을 느낄 수 있는 숙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은 다다미방으로 다목적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문학과 하룻밤을 지내다
시대를 초월한 국민 소설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태백산맥 문학거리'는 벌교우체국, 벌교읍사무소, 금융조합 등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어 문학인과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문학기행로이다.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 벌교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위치하였으며, 현재는 홍교다리, 소화의 집, 죽도방죽을 잇는 태백산맥 문학거리의 중심이며, 문학적 역사적 주요한 거점으로써 가치를 발하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보성여관)에서의 하룻밤은 이제껏 경험할 수 없었던 문학적, 역사적 체험으로 방문객들에게 소중한 경험적 가치를 선물하고 있다.
- 영화 속 공간으로 들어가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풍의 근대식 여관들은 차를 마시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차대(茶代)라 하여 숙박료와는 별도로 요금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보성여관도 2층에도 차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피곤에 지친 여행자는 떠나온 고향을 생각했을 것이고, 혼란의 시대에 일확천금을 꿈꾸던 자들은 밀담을 나누기도 했을 것이며, 또 그 시절 젊은 청춘남녀들은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근대기를 다룬 영화들에서는 의례히 등장하는 공간으로,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지만 1990년도 개봉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장군의 아들'에서도 비슷한 공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펼쳐진다.
보성여관의 2층 공간은 일자형 평면에 4칸으로 구성되어 전통 일본식 다다미방과 거의 흡사하며 규모면에서도 당시 다른 건물에 비해 큰 규모이다. 현재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2층의 다다미방은 좋은 전망과 색다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따뜻한 茶 한잔으로 태백산맥을 생각하다.
카페는 오래된 전통찻집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다. 요즘엔 브랜드커피전문점이 즐비한 가운데 보성여관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곳이 카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른들은 다시금 추억의 향수를 일으키는 곳이고, 젊은이들은 다도체험의 기회가 주어진 곳이기도 하다. 찻잔 하나도 옛 멋이 그대로 담겨있다.
차의 종류는 다양하게 구비되어있다. 커피, 녹차, 황차, 국화차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한 차를 마실 수 있다.
보성여관 카페는 큰 창문 또한 매력적인데, 창가에 앉아 내리는 비·눈을 보며 차를 마시면 더욱 운치있게 즐길 수 있다.
출처: 보성여관 홈페이지
닷상의 꽃병이 앙증맞다
2층 다다미방
2층 목창에서 내려다 본 벌교읍내
이 굴뚝이 보성여관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흑색톤의 일본식 목조건물이 리모델링되면서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봄빛에 활기를 찾은 모습이 매우 싱그럽다
찻주전자에 난초를 앉혔다
벌교제일교회
원형을 간직한 벌교금융조합
보성 구 벌교금융조합 (寶城 舊 筏橋金融組合)
위치: 전남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39-1 (벌교리)
1919년에 건립된 르네상스식 바탕에 절충주의적 양식 건물로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으로 사용되었다.
벌교 홍교
벌교 홍교 [筏橋虹橋]
위치: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153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약 27m, 홍예(虹霓) 높이 약 3m. 3칸의 홍예를 연결, 축조한 석교이다. 이 홍교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 승선교(仙巖寺昇仙橋:보물 400)와 함께 그 구조 형식이 가장 뚜렷하다. 홍교는 다리 밑이 무지개처럼 반원형으로 쌓은 다리를 말하는데, 홍예교·아치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벌교’라는 지명은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하였다. 이 홍교는 원래 조선시대인 1718년(숙종 44)에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이 현지에 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다리를 놓았는데, 1728년(영조 4)에 전라남도 지방의 대홍수로 이 다리가 무너져서 1729년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가 석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1734년에 완공되었으며, 그뒤 1737년에 다리를 다시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 다리가 만들어졌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수공사를 하면서, 홍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가운데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표현하였다. 다리 밑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다리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다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벌교 홍교 [筏橋虹橋] (두산백과, 두산백과)
아치를 이루는 곳에 둘러앉혀진 옛돌만이 유일한 원형석이다
홍매, 백매님을 보고 탄성이 나온다
중도파였던 김범우의 가옥이란다
< 영화 태백산맥 >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서편제’(1993) 등 탄탄한 대작을 연출해온 임권택의 또 하나의 대표작. 5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영화화한 작품. 분단으로 비롯하여된 냉전 상황이 극한에 달했던 시기에 분단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소설은 1983년 9월부터 1989년까지 《현대문학》에 연재되면서 첫 연재 때부터 문단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에서 한국전쟁을 거쳐 1953년 휴전까지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을 다룬 이 소설은 작가의 고향인 벌교를 무대로 삼고 있다. 또한 지식인 김범우가 세습무당 소화에게 남긴 말 “이 굿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이라는 대사가 소설의 한 주제로써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적대와 수모의 혼돈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대변해준다.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이데올로기가 인간에 우선했던 격동기에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과 그 속에서 상처받고 신음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일성의 완벽한 영상과 김수철의 음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수철의 대금, 피리, 태평소, 오고북, 대북을 사용한 완성도 높은 국악 곡은 민족 비극에 대한 묘사를 장엄하고 비장하게 살렸다.(「특히 김수철의 음악 돋보인다고 찬사」, 동아 95. 2. 15)
격동의 시대상, 이념의 혼란, 그리고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 등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168분 시간 속에 섬세하게 영상화하여 청룡 영화상과 대종상에서 염상구 역 김갑수가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 영화제에서 김수철 음악상, 춘사영화예술제에서 임권택 감독상, 정일성이 촬영상을 수상하고 1995년 독일에 3만 5,000$에 수출됐다. 배역 배우만 100여 명, 30억 원의 제작비와 7천여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대작으로 43개 극장에서 개봉되어 서울 관객 23만 명 동원, 1994년도 한국영화 흥행 순위 4위에 올랐다.
현재 벌교에는 작품 속의 사건이 벌어졌던 홍교와 철다리, 좌우익 싸움으로 시체를 산처럼 쌓아놨던 소화다리, 중도방죽, 야학을 하던 회정리 교회, 정하섭(신현준)과 소화(오정해)가 사랑하던 현부자네 고가, 양조장, 남도여관, 자애병원, 그리고 지식인 김범우의 집과 벌교읍 북단의 낙안읍성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교보문고가 주도하는 남도문학 기행의 한 코스로 소개되고 있다.
- 줄거리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이 팽팽한 가운데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전라남도 보성군 당 위원장인 염상진(김명곤)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은 벌교를 장악한 후 인민재판을 열어 반동분자를 숙청한다. 그러나 반란군이 패퇴하면서 좌익세력은 다시 조계산으로 후퇴하고 이번엔 벌교로 돌아온 우익세력이 좌익 연루자와 그 가족들을 연행하여 조사한다. 이때 대동 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김갑수)는 형 염상진에 대한 증오심으로 빨치산의 아내를 겁탈하는 등 좌익 가족에 대한 보복 테러를 가한다.
순천중학 교사이며 민족주의자인 김범우(안성기)는 벌교 내에서 벌어진 좌익의 잔인한 반동숙청과 우익의 과도한 보복 등 양쪽을 비판하고 막아보려다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된다. 한편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심재모(최동준)가 이끄는 계엄군이 벌교에 들어서고 염상진은 염상진대로 해방구가 된 율어면에서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는 주민들의 높은 호응을 얻지만 심재모의 기습작전으로 빨치산들은 다시 산으로 쫓긴다. 산자락 마을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심재모와 염상진의 싸움은 점점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김범우는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전쟁을 예감한다.
1949년 겨울부터 시작된 군경이 합세한 동계 대토벌 작전으로 빨치산은 많은 군사를 잃게 되고 그들이 혹독한 굶주림과 절망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 6·25 전쟁이 터진다. 남아 있던 빨치산들이 모두 전투에 나간 후 염상진은 자폭하여 죽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백산맥 [太白山脈, The Tae Baek Mountains]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2011.4.20, 마로니에북스)
와담과 너무나 어울리는 백매님!
태백산맥에 나오는 단아한 옛 조선여인들을 연상시켜 주는 홍매님!
후원에 가득한 매화밭이 이 집의 품격을 대변해 준다
소설 속의 소화다리
< 소화다리 >
중도방죽을 막으면서 세워졌다고 하는 소화다리는 해방 후 부용교(芙蓉橋)라 부르다가 지금은 중앙교로 부르는데, 여순사건 당시 피의 보복이 이뤄졌던 곳이다.(1권 59~61쪽, 1권 238쪽) 본래 난간이 있었으나 일제말 뜯겨진 것이 여순 사건 당시에도 그대로 있어(3권 46쪽) 다리에서 처형된 시체들이 강과 강둑으로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교통량이 늘면서 그 옆에 새로운 다리가 하나 놓여 졌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하게 널렸는디, 아이그메 인자사 징혀서 못보것구만이라" (1권 61쪽)라는 문서방의 말은 벌교 주민 누구에게서나 확인할 수 있는 말이다. 학살의 현장과 가까운 제석산 기슭에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벌교중학교 교사를 새로 지으면서 없어졌다.
출처: 네이버
동백이 난분분하니 예가 따뜻한 벌교로구나
채동선기념관과 함께 자리한 벌교읍사무소
벌교읍사무소 부근이 오늘 부용산 산행의 들머리다 (목포에서 차를 손수 몰고 오신 오신 각도기님)
저곳 가파른 데크길을 올라가야 한다
먼저 우측의 부용정에 들렀다가 좌측끝 전동산성전망대(총 3.2Km)에서 숙영하기로 했다
데크길은 매우 가파랐다
충혼탑광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암향 가득한 매화밭을 지난다
근대음악의 선구자 채동선 선생의 묘소
채동선 [蔡東鮮]
1901∼1953. 전라남도 보성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독일 베를린 슈테른쉔음악학원에 입학,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뒤 1929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악리(樂理)와 실기를 가르쳤다.
1924∼1939년에 4회에 걸친 독주회를 가진 바 있으며, 광복 후에는 작곡에 전념하였다. 고려음악협회장·작곡가협회장·국립국악원 이사·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는 등, 음악관련 활동을 하면서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독창곡을 지어냈다.
특히, 성악곡 가운데 「조국」과 「한강」의 교성곡이 있고, 「현악4중주곡 제1번」과 바이올린독주곡도 있으며, 우리 민요도 채보(採譜)한 바 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져 있다.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가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이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양악백년사(韓國洋樂百年史)』(이유선, 음악춘추사, 1985)
[네이버 지식백과] 채동선 [蔡東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치환이 리바이벌해서 유명해진 60년대 금지곡이었던 부용산 노래비
부 용 산
*부용산-윤선애 버전
*부용산-안치환버전
이곡이 원래 오빠의 마음이고, 남자의 마음이어서인지 그런지 몰라도 안치환 버전이 더 애닯다는 느낌도 든다.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 <부용산의 내력기>
이곡의 작사가인 박기동은 벌교 출신으로 목포 향도여중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박기동에게는 박영애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당시로선 고치기 힘든 병이었던 폐결핵을 앓게 되었고 결국 24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박기동은 여동생을 그리워 하며 시를 한편 썼는데 그 시가 바로 부용산이었다.
시가 너무 애잔하고 아름다워서 이 시를 접하게 된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안성현[1]은 자신이 가르치던 16살 여제자 김경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슬픔에 이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가 완성되었다.
이후 이듬해인 1948년에 향도여중 조희관 교장이 이 곡을 알게되고 향도여중 학예회에서 처음 이노래를 학생들을 통해 발표했는데 너무도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인지라 금새 목포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전라도 각지로 퍼져나가 많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곡의 창작 배경을 두고 박기동의 고향인 벌교에서는 박기동이 요절한 누이를 그리워 하며 만든 노래다, 목포에서는 아끼던 여제자의 죽음에 슬퍼해서 만든 노래다라며 한때 창작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이민갔던 박기동이 저런 배경을 밝히면서 정리되었다.
- 금지곡 그리고 저항가요
그런데 이 곡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금지곡이 되버리고 말았다. 애당초 전혀 이념과 무관한 노래였던 이곡이 금지곡이 되버린데에는 빨치산들이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라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빨치산들도 딱히 이 노래에 이념성을 넣어서 불렀다기 보다는 그냥 자신들 처지가 슬퍼서 불렀지만 이승만 정부가 그런걸 봐줄리가 없다. 기록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여순사건 이후 이 노래가 좌익성향이 있다고 규정되어 작곡자 안성현은 탄압을 받았고 결국 1949년 9월에 면직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안성현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해서 2006년까지 생존해 있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2]
아이러니칼 하게도 금지곡이 되어버리자 이 노래는 저항적인 내용의 노래로 재해석되었다. 사실 저항가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6-80년대에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운동권에서는 이 노래를 저항가요로 많이 불렀다. 그외에도 노래는 전해내려 왔지만 작자미상의 노래로 구전될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 작곡자인 안성현은 월북해버렸고 작사가인 박기동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부용산 시를 지었다는것을 철저히 숨겨야 했기 때문이었다.[3]
이런 탓에 부용산을 두고 갖가지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부용산이 장흥의 부용산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전사한 빨치산들을 추모해서 만든 노래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광양 백운산 근처의 빨치산 근거지, 혹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엉뚱한 주장들이 난무했다.
- 되찾은 노래
노래 자체는 1987년 해금되었으나, 이후에도 부용산의 진짜 창작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후 1998년에서야 박기동의 제자인 경기대 김효자 교수가 부용산의 원본을 발굴하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이틀에 걸쳐서 부용산의 사연을 기고하면서 세상에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다.
호주로 이민가 있던 박기동은 부용산이 재조명되면서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고 창작 배경을 정리해주었다. 이후 2003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해 2004년 서울에서 8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부용산은 본래 1절만 있었으나, 1998년에 원로 연극인 김성옥[4]이 호주로 박기동을 찾아와 2절을 짓는게 어떤가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에 박기동은 자신의 한많은 삶을 회고하는 듯 2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고 녹음했는데 대표적으로 안치환, 한영애, 이동원 등의 버전이 유명하다.
[1] 대표적인 동요 작곡가로 유명했다. 대표곡은 <엄마야 누나야>
[2] 여담이지만 안성현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라는 설이 있었다. 그래서 안막의 영향으로 월북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안막과 안성현은 서로 고향이 다르기 때문에 삼촌 조카사이는 아닌것 같다고 한다. 만약 안성현이 안막의 조카라면 안막과 최승희가 숙청당할때 안성현은 살아남은 이유를 해명하기 힘들다. 북한에서 인민예술가 칭호까지 받은걸로 미루어보면 안막과 안성현은 상관없는 인물이 분명해보인다.
[3] 박기동은 부용산의 작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늘 감시대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박기동이 써모은 시들이 적힌 노트마저 빼앗겼다고 한다. 결국 이런 고난속에 박기동은 한국을 떠나 이민을 가버렸다.
[4] 연극배우 손숙씨의 남편이다.
이상 <퍼온 글>
부용산오리길은(2Km가 더 된다) 근자에 벌교읍이 닦아놓은 트래킹 코스로 널리 알려졌다
왼쪽길이 부용산오리길이다
부용정은 2층누각으로 세워졌다 (나중에 비박지를 못찾아 여기에서 야영했다)
봄빛을 즐기는 쉬엄쉬엄 모드의 슈렉님
부용정에 오르니 벌교읍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왼쪽 전동산성전망대가 비박지로 적합한지 보려고 선발대가 먼저 출발했다
고흥군의 첨산이 고졸하게 눈에 들어 온다
선발대를 따라 부용산오리길을 걷는다 (선발대가 비박지 부적합 판정을 내려, 중도에서 부용정으로 되돌아 왔다)
참으로 멋지고 완만한 능선길에 불어오는 소나무향의 청량한 공기가 너무나 좋았다
다시 첨산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백홈한다
제석산의 조망도 좋았다
제석산 [帝釋山]
전라남도 순천시의 서남쪽 별량면과 벌교읍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560m). 북쪽 오봉산에서 남쪽에 위치한 여자만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중간에 있다. 제적산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같은 산줄기에 해당한다.
산은 사료에 개운산(開雲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낙안)에 "개운산(開雲山)은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라고 하였고 '개운산 봉수(開雲山烽燧)'가 기재되어 봉수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일 문헌에 "동화사(桐華寺)가 개운산(開雲山)에 있다."라고 수록한 것으로 보아 개운산은 제석산의 이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동화사는 제석산 동쪽 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에 "개운산은 관아의 동쪽 10리 금전산 아래 기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여비고』(전라도)에 개운산이 낙안읍치 동쪽에 표기되어 있으며 동화사가 함께 묘사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도 제석산 동쪽에 동화사가 표기되어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에 제석산은 오봉산 아래에 표기되어 개운산이 제석산과 동일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용안리 서남쪽에 위치한 동화사는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형국은 오동봉서형(梧桐鳳棲形)으로 봉은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하여 오동 '동(桐)'자와 꽃 '화(華)'자를 넣어 동화사라 하고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경내에 삼층석탑(보물 제831호)이 있다. [지명유래➣➣보성 제석산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제석산 [帝釋山, Jeseoksan]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2010.12, 국토지리정보원)
일행은 부용정에 숙소를 잡았지만, 매군자는 소원이던 매화나무 곁으로 내려가 보금자리를 잡았다
매군자의 소원이 '매화낭자 그늘에서 하룻밤 잠자 보자!'는 매우 소박한 꿈이었다
매화낭자님 오늘의 동침을 허락해 주소서
묵매 - 우봉 조희룡(1789∼1859)
暗香浮動月黃昏 황혼의 달빛 아래 은은한 향기 떠오르니
堂上一樹春 마루 위 나무 한 그루에 봄이 왔네.
東風何事入西隣 동풍은 무슨 일로 서쪽 이웃으로 들어왔나,
兒家常閉門 아이의 집안은 항상 문이 닫혔네.
雪肌冷 玉容眞 눈같은 살갗 차갑고 옥같은 모습 참되니
香腮粉未匀 향기로운 뺨에 가루가 고르지 않네.
折花欲寄嶺頭人 꽃을 꺾어 고개 마루 사람에게 주려하니
江南日暮雲 강남에 날은 저문데 구름이 피어나네.
錄坡公梅花集句 동파의 매화 집구를 적음
■ 광적인 매화 마니아, 조희룡
<매화시경연>이라는 벼루에 <매화서옥장연>이라는 먹을 갈아서 매화 병풍을 그린다. 목이 마르면 <매화편다>라는 차를 마신다. 자신이 그린 큰 매화 병풍을 둘러치고 누워 잠을 잔다. 날이 밝으면 일어나 <매화편다> 차를 마시고, 매화시를 읊조린다. 매화시 백 수를 지을 것을 목표로 세우고, 자신의 방을 ‘매화백영루’라 이름붙인다. 자신의 호를 ‘매화두타’라고 한다.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 특히 매화 그림이 유명하다. 누구일까. 이 광적인 매화 마니아는 바로 ‘매화에 미친 화가’ 우봉 조희룡(1789∼1859)이다.
우봉은 매화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매화에 대한 열렬한 애정행위는 결국 조선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매화 그림은 간결함과 절제가 미덕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전통은 우봉에 의해 무너진다. 화려하고 섬세하고 풍요로운 양식의 매화 그림이 등장한다. 꽃잎이 적었던 매화 그림을 수만 송이가 만발한 매화 그림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또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던 매화를 대자대비한 부처의 마음으로 탈바꿈시키는가 하면, ‘홍매대련’처럼 매화나무의 줄기를 마치 비상하는 용의 자태로 그림으로써 힘찬 역동성을 부여했다.
출처: 파이낸셜뉴스 / artmin21@hanmail.net
간절함 끝에 겨우 허락을 받고, 힐레베르그 <솔로>를 세팅했다
오늘밤의 동침에 너무나 가슴이 뛴다
달 뜨는 날, '그대 곁에서 한번 잠들어 보고 싶다!'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 임포(林逋)의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의 원산지였던 중국에는 옛날부터 애매가(愛梅家)로 이름이 알려진 역사상의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첫째로 꼽아야 할 사람은 아마도 송(宋)나라의 화정(和靖) 임포(林逋)라고 할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화정은 일찍이 학문에 정려하여 명성이 높았지만 당시의 부패한 정치에 불만을 품은 채 항주(杭州)의 서호(西湖) 부근 고산(孤山)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20여년 동안 성시(城市)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신변에는 언제나 백학(白鶴)과 사슴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는데, 술을 마시고 싶으면 목에 술병을 걸친 사슴을 술집에 술을 사러 달려 보내고 손님이 방문해 오면 학이 공중에서 울어서 알린다고 하는 풍아(風雅)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느 때 아는 사람의 권고에 따라 집 주변에 3백여 본의 매화나무를 심은 후에는 완전히 매화나무에 심취하여 매화를 감상하고는 시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과히 '매치(梅痴)'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매화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가르켜 "매화로 아내(梅妻)를 삼고 학을 아들(鶴子)로, 사슴을 집안 심부름꾼(鹿家人)으로 삼았다"고 말한 것은 정말 그럴 듯한 평가라고 할 것이다. 영리한 사슴의 등에는 매화 모양의 반점이 있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봄날 저녁에 그는 서호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바로 시를 읊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제의 시로서 매화의 매력을 남김없이 묘사하고 있다.
뭇꽃들 시들어 모두 졌는데 홀로 선연히 피어 衆芳搖落獨喧姸
조그마한 정원의 풍정을 독차지하였구나 占盡風情向小園
성긴 가지 그림자는 호수에 어리 비치는데 疎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가 움직일 때 달은 몽롱하구나 暗香浮動月黃昏
이 칠율(七律)의 대구(對句)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읊은 명대(名對)의 전형으로 이후의 매화 이미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소영(疎影)'과 '암향(暗香)'의 대어(對語)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반드시 매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이 시어(詩語)가 이후는 오로지 매화를 의미하게 될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송대(宋代)나 송시(宋詩)를 상징하는 꽃이 매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되어 버린 것은 다름아닌 이 시가 그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는 확실히 생생하고 운미(韻味)가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매화의 자태와 기질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일평(文一平)은 《화하만필》에서 임화정은 매화의 신수(神髓)를 미득(味得)한 이로서 이 시는 실로 매화시가 생긴 이래 천고의 절조(絶調)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대구는 오대(五代) 남송(南宋)의 시인 강위(江爲)의 잔구(殘句) '죽영횡사수청천(竹影橫斜水淸淺) 계향부동월황혼(桂香浮動月黃昏)'을 각각 한자씩 '소영(疎影)······, 암향(暗香)······'으로 고쳐서 점철성금(占鐵成金)의 효과를 올린 것이라고 하였다.
홍매에 깃든 동박새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이 시가 절창으로 일컬어지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임화정의 '월황혼(月黃昏)'이라는 글구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황혼이란 말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고금을 통하여 이 구절을 절창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으로는 이는 본시 우리가 흔히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말인데 황혼에 달이 뜨면 꽃의 흰 색깔과 혼동이 되어 잘 들어나지 않지만 풍겨오는 향기만은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암향이라 한 것이다. 또 물이 맑고 얕기 때문에 그림자는 반드시 옆으로 비끼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두 구는 다 즉경(卽景)을 말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익은 '월황혼'의 뜻에 대해 사실적인 해설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달이 뜬 황혼녁 눈에 덮여 드러나지 않는 흰 꽃은 은은히 전해오는 향기를 통하여 인식하게 된다는 것과 비낀 가지가 물에 비치는 사실적 경물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포(林逋)의 매처학자(梅妻鶴子)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3.10, (주)넥서스)
빙옥혼골께서 허락하심에 오늘 매군자는 너무나 행복하나이다
삼월 보름달이 너무나 감미롭게 비쳐 주어
오늘의 그림이 완성되었으니 어찌 시가 한 수 빠지랴
< 매화월명 梅花月明 >
- 小鄕 權 大 雄
매화월명 梅花月明
춘삼월몽 春三月夢
목하비박 木下斐泊
청향선몽 淸香禪夢
매화꽃에 달빛 어리니
춘삼월의 꿈이요
매화나무 아래 아름다운 잠자리리니
맑은 향기에 고요한 꿈이로다
보름달 떠있는 밤내내 매화꽃의 암향暗香이 심신을 맑혀 주었다
친구들의 답신이 문자로 날라 온다
오메, 청풍명월입니다
밤과 낮 구별 없이
계절을 느끼는 행복을 안으니
축복입니다
이불 걷어 차지 말고 주무세요
미르기 - 3월 15일 오후 11시 51분
또 한 수 날라 온다
지금 계신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휘영청 보름달과
조응하는 텐트의 높고 외로운 불빛이
그대 마음인 듯 하네
천지간에 절대고적 속에서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으리
부럽고 경의를 표하네
낭주처사 - 3월 16일 오전 1시 16분
달빛이 너무나 포근하다
매화꽃에 안기는 감미로운 달님을 보아라
백매와 월광이 서로 어루만지는 <우주의 상응相應 소나타>를 들어 보아라
보름달에 태어난 매군자는 그러니 보름달이 좋을 수 밖에
매화에 어리는 달빛
- 小鄕 權 大 雄
구름 한 점 없는 날
암향이 펼쳐지는 날
보름달도 떠오르던 날
그런 날!
매화나무 그늘에서
하룻밤 잠에 취하리니
그대는 와도 좋다
거문고 가져오면 더욱 좋겠고
달빛에 그대 가락 들으며
왜 이리도 아름다운 삶의 향기인가
눈물 젖도록 매향에 울어 보리라
맑은 청주는 필요 없다
이미 취했는데
어디 다른 취향인들
무슨 소용 닿겠는가
그래 보름달 보고 포효하는 라이언이 되고자 하는 겐가!
또 놀자며 떠 오르시는 해님은 매군자의 근본을 아시겠지요?
이제야 매화비박斐泊으로 그 소원을 풀었도다 (비박: 아름다울 비斐, 머물 박泊)
순천만에서 떠 오르는 해님을 보아라
제석산에 어리는 서기로운 기운이 너무나 숙연하다
백매와 매군자의 상응 소나타!
일출이 시작되니 지상의 마을들에 서기로운 안개가 피어 올랐다
혼자 가지기에는 너무나 큰 축복이기에 모두에게 나누어 드리리라
잠들었던 벌교의 모든 이들도 축복 받으소서
곱고 맑은 축복만 온 산하 가득 펼쳐 지소서
우주에 삿됨은 결코 없나니, 이를 가벼이 여기지 않게 하소서
여기 계신 분들에게도 축복이게 하소서
산하 가득 깨어나는 이 우주의 신비로운 조화를 보아라
첨산의 기운이 내리 꽂히는 자리에 <솔로>를 펼쳤었다
첨산 [尖山]
전라남도 고흥군의 동강면 대강리 · 마동리 · 한천리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14m). 『여지도서』에 "지래산 동쪽 기슭에서 뻗어 나오며, 관아의 북쪽 75리에 있다. 선조 30년(1597)에 고을 사람 송대립(宋大立, 1550~1597)이 왜적과 싸우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1872년지방지도』, 『조선지형도』에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병풍산에서 동쪽으로 비켜 선 산으로 정상부 쪽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다. 지명은 산의 이러한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첨산 [尖山, Cheomsan]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2010.12, 국토지리정보원)
이로써 매군자의 마음은 햇님의 기운과 매화향으로 인해 한 점 의혹 없이 치유되었다
그렇게 부용산의 아침은 장대하게 펼쳐 졌다
오전 10시 21분 이후로는, 오후 6시에야 열차가 있어 홀로 서둘러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 부산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신 무궁화호님이 순천을 거쳐 이곳까지 와주셔서 정말 고맙수다
어제, 오늘은 그대의 조력이 너무나 컸오이다
능주의 영벽정을 지나
화순역에 이르기까지
근 십여년만에 맛보는 기차여행길이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새벽을 보고 온 자! 꿀먹은 벙어리가 되리라......
오랫만에 시도했던 기차여행은 너무나 감미로웠다. 기차로 누비는 이 산하는 너무나 정중동의 고요함을 간직한 서사시라는 생각이 드니 언잰가는 기차로 한번 한반도 전체를 누벼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 서사시 속에서 달빛을 느끼고 매화의 암향을 느끼고 우주를 느끼리니, 그에 비하면 문득 세상사가 참 속절없이도 허망하기만 하다. 돈과 집과 토지에 얽매어 한 평생을 허덕이며 보내는 자! 께서는 잘 들으시기 바란다. 어디 엽전 한 잎이라도 쥐고갈 수 있는 우리네 저승길이던가 말이다.
그러니 오늘 당장 그대의 애인 또는 그대의 아내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해 보자꾸나!
이제 더는 미루지 말고 "어때? 지금 당장 기차여행을 떠나 볼까?"하고 말해 보자꾸나!
우리집 마련한 뒤에 사주겠다던 멋진 한복도 미루지 말고 지금, "어때? 한복 필요하면 지금 당장 사러 갈까!"하고 다정하게 말해 보자꾸나!
사랑한다면, 지금 당장 '사랑한다!'고 말해 보자꾸나! 그것도 큰소리로...... 당장 해보자는 말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 2014년 3월 17일 완성하다 -
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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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첫댓글 한편의 소설 같읍니다.
정말 로 잘 보앗음니다.
감사 합니다,
태백 산맥 .가치.잇는
소설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