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손 양원 목사님의 걸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은 몇년 전 그분의 따님이신 손 동희 권사를 직접 교회(형곡교회)로 초청하여 간증을 들은 바 있기에 손 목사님을 생각하면 그때 받았던 은혜가 너무나 컸다.
손 목사님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 부친 손 종일 장로와 어머니 김 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살때부터 그의 부친이 되시는 손 종일 장로를 따라 새벽 기도회도 열심히 참서했으며, 어려서 부터 기도와 신앙생활에 힘써 왔다. 그는 1914년 4월 1일에 칠원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할 것을 강요하는 동방요배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10년이 되자 한일 합방과 함께 일제는 신사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 천왕 사진 배례와 요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함병 직후 관공서와 각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 주고 행사때마다 거기에 경례를 하게 함으로서 천황숭배의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자 했다.
1912년 일제의 우상화하던 명치 천황이 죽자 일제는 각지에 요배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요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배의 강요는 일반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일제의 각종 제일, 축일때마다 학생들에게 까지 강요를 했다.
이때 기독교 학교는 총독부의 결의에 따르지 않았으나 문제는 관공립 학교에서는 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으로 천황숭배 이데올로기 주입에 광분했다. 저들은 매일 아침마다 동경을 향하여 종교적인 경의(동방요배)를 표함으로써 수업이 시작되었고, 신도 의식이 모든 공휴일마다 개최되고 학생들은 천황 사진에 절을 하게 되었다.
순교자 손 목사님이 3학년 때 이러한 궁성요배는 십계명 중에서 제 1계명에 범하는 죄라고 하여 긍성요배를 하지 않으므로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선교사의 도움으로 계속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계속 일제는 주일에도 학교에 출석하라고 했으나 주일은 학교에 갈 수 없고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서 출석하지를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으로 살아 갔다. 그의 생애의 순간들을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 은혜 중심 사상(Sola Gratia) 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사상 역시 사도 바울으 사상이요, 신, 구약 66권의 내용이다.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도 바로 이 Sola
Gratia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혁주의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사랑 중심 사상이었다. 손 목사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였으며, 그 하나님 만이 그의 전부였고, 그 분께만 충성을 다 할 것을 말하는 것이 그분의 삶의 전부였다. 그는 옥 중에서나 일제 형사들의 갖은 고문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말씀 중심 사상이었다. 성경 말씀 한 마디에 생명을 건 분으로서 성경 우선 순위요, 성경에서 생활의 원칙이 나왔고, 성경을 그대로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 얼마나 싱앙적으로 나태하고 있지를 않는가?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님들은 장로로서, 권사님들은 권사로서, 집사님들은 집사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앞서 걸어 갔던 선배들의 발 자취를 따라가야 하지 않는가? 우리 각자 각자 자신들의 신앙 나태에서 다시 한 번 순교자 손 목사님을 생각하며 제 자리로 돌아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