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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야43 원문보기 글쓴이: 고야
고구려의 땅을 찾아 떠나는 여행 제 2일(단동-환인, 2009.6.16.화) . . 우리의 첫 숙소는 국제호텔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통해서 조망한 시내 모습이 제법 큰 도시인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 단동은 당대(唐代)부터 안동(安東)으로 불리었으나 1965년 ‘紅色東方之城’(해가 뜨는 동방의 붉은 도시)라는 뜻을 가진 단동(丹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최근 현대적 건물이 세워지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관광지이다.
.* 단동 국제호텔과 단동 시가지
7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근처에 있는 압록강철교를 관광하러 나섰다.
. * 단교(斷橋)
7시 50분경부터 단교 관광이다. 압록강철교는 본래 조선총독부가 만주 진출의 야심을 품고 1911년에 완공했다. 그러나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미군이 폭격을 해 단교가 되었다. . 원래의 길이가 944m인 이 단교는 북한의 신의주와 중국의 단동을 연결하는 개폐식 다리로 열면 십자(十字)형이 되는데 중간에서 계단을 만들어 놓아 내려가서 그 기계를 볼 수 있게 했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설계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스럽다.
. 매표소를 지나면 왼쪽으로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군사령관이었던 팽덕회와 중공군의 동상이 있다. 중국은 이곳을 애국주의, 공산주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 미화하고 있지만 단교는 우리에게 일제의 침략과 수탈 그리고 한국전쟁의 아픔만을 안겨주고 있다.
* 사령관 팽덕회와 중공군 동상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미 한강인도교를 절단 낸 미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차단하기위해 B29를 동원해 다리라는 다리는 모두 폭격을 했다. 영산강변에 살던 그 시절, 다리를 겨냥한 폭탄은 강 건너 언덕에 떨어졌고 집 지을 때 지하실을 파 두었던 선친의 선견지명(?)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 단교는 이미 잊혀져가는 그런 생각까지 일깨워 주었다. . 단교는 양쪽으로 인도가 있는데 중앙의 철로는 없어졌다. 관광을 위주로 말끔하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끊어진 다리 끝부분은 이북땅을 향해서 사진 촬영하는 명소가 된 듯하다. 멀리 평양면옥집이 가이드의 손 끝에서 제법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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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와 연결된 압록강철교는 단교에서 상류 쪽으로 70m거리에 또 하나 더 있다. 중조우의교(中朝友宜橋)라 하며 이 철교를 통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화물이 오고 간다고 한다. (다리이름을 중국 사람들이 명명한 것 같다.) 단교를 돌아 나오는 길에 우편물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화물트럭이 신의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유람선에서 본 압록강 철교. 오른쪽이 단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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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매표소 쪽으로 나오다 신랑 신부가 타고 지나가는 꽃차를 보게 되었다. 부유층인지 승용차 두 대를 붙여 논 듯한 흰색 긴 리무진(?)이 꽃으로 덮여 있고 그 뒤를 까만색 승용차 7, 8대가 지붕에 색풍선을 이고 뒤 쫒아 가는 것이 이색적이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결혼 행렬을 보았는데 리무진이 아니고 보통 승용차였다. 중국도 부익부, 빈익빈의 차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
* 압록강(鴨綠江) 유람
40여 분의 단교관광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유람선 선착창으로 이동했다. 한동안 기다리게 하더니 안내 받은 배는 빨간 기와모양으로 지붕을 한 유람선. 그러나 잠시 후, 승선자들이 많이 몰려오는지 압록강2호라고 쓴 큰 배로 갈아타게 했다. . 객실은 답답하다고 모두 갑판으로 올라갔다. 시야가 확 트여서 시원하다. 사람이 모이자 중국여성 두 명이 갑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좌판대에서 천막을 걷어낸다. 조잡한 기념품이 즐비하다. 망원경을 들고 다니며 “2천원”을 외친다. (빌리는 값이 그렇다고 나중에 알았다.) 드디어 김연준군이 망원경을 집어 들고 맥아더장군처럼 이북땅을 주시한다. 확연하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니란다. ‘중국제니까 그렇지’
* 오른쪽 사진. 김연준군의 머리 위로 보이는 섬이 위화도다.
먼저 상류 쪽으로 20여분 올라갔다. 왼쪽이 단동, 오른쪽이 신의주다. 많은 사람이 오른쪽 난간에 모여 신의주를 바라본다. 중국 사람들도 다수 있었는데 그들도 이북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 뱃머리를 돌리는 지점의 저~만큼에 위화도가 있다. 위화도 회군. 말로만 듯던 그 위화도가 압록강에 위치한다. 이성계가 거느리는 군사들의 함성과 군마의 말울음이 시끄럽게 들리는 듯했다. . 다시 하류로 내려간다. 왼족이 신의주, 오른쪽이 단동이다. 사람들이 왼쪽 난간으로 이동한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서 이동하는 자동차, 일하는 우리 동포들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난간을 붙들고 그들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강 건너편이 신의주 .
강의 중앙에서 앞을 보면 양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단동과 신의주. 두 도시를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강변 주위만 보면 너무 대조가 된다. 김정일은 어렵게 외화 벌어다 핵실험하는 데만 쓰지 말고 지역발전을 위해서 신경 좀 써야 되겠다. 북한 제 2의 도시라는 게 꼴이 아니다.
. 왼쪽이 신의주, 오른쪽이 단동이다.
9시 30분에 다음 행선지 환인을 가기위해 단동을 출발했다. 버스 타는 일에 익숙해지려면 잠자는 것이 상책이다. 정신이 몽롱해진 탓인지 이동 중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 것이 없다. 중간에 휴게소도 없어 주유소(중국 사람들은 휴게소 정도로 생각한다.) 칙간을 이용해야 했던 것만 생각난다. 물론 푸세식이다. 여성회원들이 많이 곤혹스러워 했다. 환인에 입성한 것이 2시 5분. 무려 4시간 35분을 버스 속에서 죽을 쑤고 있었던 셈이다. . 환인(桓仁)은 요령성에 위치한 만주족 자치구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로 알려져 있으며 주몽이 동가강(비류수) 유역의 졸본에 도읍하였다는 그 졸본이 지금의 환인이다. 고구려의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이곳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재에 등재되기도 했다. . 현지시간 2시면 한국시간 3시다. 이 시간까지 점심을 못 먹었으니 뱃속이 시끄럽다. 더구나 가이드가 식당을 찾지 못해 오녀산성 앞으로 돌아 나오는 바람에 20여분이 지체되었다. 환인에 입성하면서 고려성 앞의 넓은 길을 지나왔는데 버스기사가 물어물어 겨우 찾아 다시 돌아온 꼴이다. 우리 가이드는 이 이후로도 몇 번씩 길을 놓쳤는데, 결국 길치가 길을 안내하는 셈이어서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호텔과 함께 있는 식당 고려성은 동가강변의 오녀산성이 바라다 보이는 높은 언덕의 경관이 좋은 곳에 있었다. 식후경(食後景)이니 경치를 즐기고 있을 여유가 없다. 2시 30분에 받은 밥상에 바싹 붙어 앉아 배를 채워야 했다. . 한국 관광객을 위한 특별 메뉴. 삼겹살에 상추, 푸추절임, 김치, 두부조림, 콩나물, 된장찌개나 미역국 계란국 등은 거의 기본이다. 그런데 요리법이 한국과 차이가 나는지 벌써부터 느끼해지기 시작한다. 나만 그런가? 여성회원들의 식사 분위기는 거의 록밴드 수준이다. 드럼을 두드리는 악사처럼 젓가락 놀림이 재빠르다.
. 식사를 마치고 오녀산성에 도착한 것이 3시15분이다. .
* 오녀산성(五女山城)
오녀산성은 주몽이 부여를 떠나 세운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천예의 요새다. 환인시내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자연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오녀산성은 옛날 이곳에 다섯명의 여신이 살아 산과 마을을 수호해 주었는데 흑룡과 싸우다 전사해 이를 기리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주차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 오녀산박물관이 앞을 가로막고, 박물관의 오른쪽으로 우리키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비석이 서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재 등재(2004년)를 기념하는 비석이니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비석 앞에서
박물관 왼쪽에는 여러 대의 셔틀버스가 있었다. 셔틀 버스로 20분가량 굽이굽이 돌아 서문입구로 가야한다. 중국의 관광지는 광대한 땅을 자랑하듯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곳이 많은데 그 때마다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에 오금이 저린다. . 서문입구의 매표소를 지나면 곧바로 계단이다. 서문까지 99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곧장 뻗어 하늘을 향한 계단에 한 숨부터 터져 나왔지만 다행이도 지그재그 올라갈 수 있는 옛길 십팔반(十八盤, 평평한 돌을 끼워 맞춰 만든 18구비의 길)이 있었다. 어디가나 삶의 지혜는 있기 마련인가 보다.
* 오녀산성 지도 . 40분 걸린다는 길을 모두 30분 만에 서문 앞에 뚝딱 올라섰다. 깍아지른 두 절벽사이를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그 끝이 서문이다. 서쪽 성은 절벽 자체가 성이고 동쪽은 경사로이기 때문에 축성을 했다한다. 서문 터에는 문을 해 달았던 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 * 서문 터
서문에서 왼쪽으로 더 가면 소나무 숲과 저 멀리 기암괴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 바윗덩어리로만 보았더니 정상의 풍광이 이처럼 아름답단 말인가. 구름이 끼면 운해에 소나무만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운해송봉(雲海松峰) 앞에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돌아 나와 서문 터를 다시 지나 산길을 조금 내려오면 천지(天池)라는 연못, 태극정, 거주지, 왕궁터 등이 나온다. 천지의 물은 맑고 깨끗해 보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데 산의 정상에 이렇게 많은 수량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지 신기하기만 하다. 굴뚝모양이 확연하고 구들장이 여기저기 흩어진 주거지, 듬성하게 놓인 돌 몇 개가 주춫돌 이었을 것이라는 왕궁 터, 산성의 필수조건인 물(연못) 등으로 졸본성의 존재를 가늠해 본다 한다.
* 천지
* 주거지
. 남쪽으로 내려가면 점장대(點將臺)라는 곳이 있다. 장군이 산성 내 전쟁을 지휘하던 곳이라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비류수(동가강, 중국에서는 홀강)가 곳곳에 섬을 만들며 호수처럼 펼처져있다. 저 아래 댐을 만들어 놓아 흐르는 비류수가 호수가 되어버린 것이란다.
* 점장대 뒤로 비류수가 보인다.
. 남문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서문 앞 협곡보다 더 깊고 가파른 협곡이 있다. 오직 한 길 밖에는 없으니 오들오들 떨리더라도 내려가지 않을 방법이 없다. 난간에 의지해서 겨우 다 내려왔나 싶었는데 앞에는 더 심한 장애물이 있었다.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절벽의 옆구리에 절벽과 수직인 그것도 받침대도 없는 가교를 지나가야 하는 것이고, 왼쪽은 거의 수직인 철사다리를 15m정도 내려가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가교가 안전하다면 그곳으로 걸어가고 싶은 것이 모두의 심정이다. . 이 가슴조리는 순간에 우리의 리더 오회장의 장난기가 발동을 했다. “연준아!‘ 부르는 소리는 다정하다. “오른쪽의 가교는 만든지 오래되어 부식했을 가능성이 많아 위험하고, 왼쪽의 철사다리가 무섭긴 하지만 튼튼해 보이는데 어느 길로 가면 좋을까?” 설마 어린아이를 겁주려 했을까? 슬며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세요?”하며 어른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 모두 오른쪽 가교로 편안하게 건너왔다. 가교가 무너져 추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흐흐흐
* 깍아지른듯한 협곡과 공중에 매달린 가교
남문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의 도중에서 차를 세웠다. 중국국립공원을 알리는 표석과 저 멀리 그 신비스런 오녀산성의 바위덩어리가 보이는 지점이다. 기념사진을 찍을 시간을 준 것이다. 이런 시간을 줄 것이라면 미리 알려줄 것이지. 처음 오녀산성을 올라 갈 때 원거리 전경을 잡기 위해서 차창을 통해 여러 번 샷터를 눌렀지만 모두 실패 했었는데 괜히 헛고생한 것이 억울하다.
. 3시간의 오녀산성 탐방을 마치고 6시 30분에 상고성자묘군에 도착했다. 상고성자는 지역이름이다. 상고성자묘군(上古城子墓群)은 집석묘(集石墓)로 처음 100여개에서 지금의 30여개로 훼손되었다. 고구려 농민들의 무덤이라 하는데 돌보는 이 없어 초췌하다. 중국내의 고구려 관련 유적지가 남의 땅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심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의 행태마저 가관이다. 안내는 해놓고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겁먹은 표정을 하며 너무 지체하면 공안원이 나타나 시끄럽게 된다며 발길을 재촉하는 가이드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해설자 오회장은 하고 싶은 해설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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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40분 시내의 어품향(漁品香)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중국 두 번째 숙소인 가일대반점(假日大飯店, Holiday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 샤워를 한 뒤 시내 관광에 나섰다. 호텔의 왼쪽으로 걸어 나갔다. 불과 500m 정도이지만 그 끝에는 요란한 네온사인 불빛과 그들의 축제광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팔도 먹거리 장터 비슷한 천막의 행렬이 이어졌지만 무언가 사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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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텔로 돌아와 가장 안심할 수 있고 마음 편한 집들이(매일 호텔의 이방 저방을 돌며 술 마시는 일)로 오늘의 피로를 달랜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 2009.6.29 고야
압록강의 노래
1. 일천구백십구년 삼월일일은 이 내 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년년이 이날은 돌아오리니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가리다
2. 압록강의 푸른 물아 조국 산촌아 고향 땅에 돌아갈 날 과연 언젤가 죽어도 잊지 못할 소원이 있어 내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
죽어도 잊지 못할 소원이 있어 내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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