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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efusal of redress took place in virtue of the legal doctrine, that no person can be allowed to give evidence in a court of justice, who does not profess belief in a God (any god is sufficient) and in a future state; which is equivalent to declaring such persons to be outlaws, excluded from the protection of the tribunals; who may not only be robbed or assaulted with impunity, if no one but themselves, or persons of similar opinions, be present, but any one else may be robbed or assaulted with impunity, if the proof of the fact depends on their evidence.
이 시정(바로잡음)의 거부는 하나님(어떤 신이라도 좋다)과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허락될 수 없다는 법적 원칙 때문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러한 개인들을 재판소의 보호에서 제외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선언하는 것과 동등하다. 그들 외에는 없거나 같은 의견을 가진 개인들만 있다면 아무런 법적 조치를 받지 않은 상태로 강도를 당하고 공격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의 증거가 그들의 증거에 의지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법적 보호를 받지 않은 상태로 강도를 당하고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어떤 신이든 신을 믿으면 가능하지만 무신론자는 안 된다는 법의 원칙
The assumption on which this is grounded, is that the oath is worthless, of a person who does not believe in a future state; a proposition which betokens much ignorance of history in those who assent to it (since it is historically true that a large proportion of infidels in all ages have been persons of distinguished integrity and honor); and would be maintained by no one who had the smallest conception how many of the persons in greatest repute with the world, both for virtues and for attainments, are well known, at least to their intimates, to be unbelievers.
이것이 근거하고 있는 가정은 내세를 믿지 않는 개인의 맹세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 명제는 그것에 동의하는 이들 가운데 있는 역사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며(역사적으로 모든 세대에 신앙심 없는 자들의 대부분이 탁월한 전인성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덕과 성취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그들의 지인들에게는 불신자들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는 이 최소한의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명제)이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infidel : 신앙심 없는 자(진정한 종교라고 여겨지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을 모욕적으로 가리키는 말)
The rule, besides, is suicidal, and cuts away its own foundation.
게다가 그 법칙은 자살적이며 그 자신의 근거를 제거해버린다.
Under pretence that atheists must be liars, it admits the testimony of all atheists who are willing to lie, and rejects only those who brave the obloquy of publicly confessing a detested creed rather than affirm a falsehood.
무신론자들은 거짓말쟁이들일 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구실 아래 거짓말(=자신이 무신론자이면서도 무신자론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하려고 하는 모든 무신론자들의 증언은 받아들이고 거짓을 긍정(=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인정하기)하기보다는 혐오스러운 신조를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악평을 무릅쓰는 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A rule thus self-convicted of absurdity so far as regards its professed purpose, can be kept in force only as a badge of hatred, a relic of persecution; a persecution, too, having the peculiarity, that the qualification for undergoing it, is the being clearly proved not to deserve it.
공언된 목적에 관한 한 스스로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된 부조리한 법칙은 증오의 표, 박해의 유물로서만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박해에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히 증명된 것이 박해를 받는 조건이라고 하는 특이성을 가진 박해.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라고 증언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했으므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처벌받지 않고, 무신론자가 무신론자라고 하면 진실을 말한 것인데 그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The rule, and the theory it implies, are hardly less insulting to believers than to infidels.
그 법칙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이론은 신앙심 없는 자들을 모욕하는 것 이상으로 신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For if he who does not believe in a future state, necessarily lies, it follows that they who do believe are only prevented from lying, if prevented they are, by the fear of hell.
왜냐하면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믿는 자들이 보호를 받는다면 지옥의 공포에 의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뿐이라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세가 없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내세를 믿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내세가 없다는 것.
We will not do the authors and abettors of the rule the injury of supposing, that the conception which they have formed of Christian virtue is drawn from their own consciousness.
우리는 그 법칙을 만들어낸 자들과 교사자들에게 기독교의 덕으로 구성한 개념이 그들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These, indeed, are but rags and remnants of persecution, and may be thought to be not so much an indication of the wish to persecute, as an example of that very frequent infirmity of English minds, which makes them take a preposterous pleasure in the assertion of a bad principle, when they are no longer bad enough to desire to carry it really into practice.
이런 것들은 정말로 박해의 누더기와 자투리일 뿐이며 박해하기를 바라는 표시라기보다는 그것(=박해)을 실제로 실행하기를 바랄 정도로 나쁘지는 않지만 나쁜 원칙의 주장에 있어서 터무니없는 즐거움을 취하게 하는 영국인의 심성의 가장 빈번한 병약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박해가 사라지고 없으나 누더기 조각과 자투리 천처럼 남아 있는 박해의 흔적들이 있다. 정말로 박해를 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주장하면서 묘한 즐거움을 느끼는 영국인의 심성의 악한 측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But unhappily there is no security in the state of the public mind, that the suspension of worse forms of legal persecution, which has lasted for about the space of a generation, will continue.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적인 마음의 상태에는 약 1세기 동안 지속된 법적인 박해의 더 나쁜 형태들의 보류가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공공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하는 측면에서 판단할 때에는 법적인 박해와 같은 일들이 중단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공공의 이익을 내세워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사실상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
In this age the quiet surface of routine is as often ruffled by attempts to resuscitate past evils, as to introduce new benefits.
이 세대에는 정해진 틀의 조용한 표면이 새로운 이익을 도입하려는 <시도에 의해서 헝클어지는> 만큼 과거의 악들을 소생시키려는 시도에 의해서 종종 헝클어지곤 한다.
새로운 이익을 도입하는 일은 이해당사자들의 차이에 따라서 환영하는 정도가 다르지만 대부분이 환영하는 일이다.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서 정해진 대로 흘러가던 일상에 파문이 일어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악들을 소생시키는 일도 찬·반이 나뉘겠지만 찬성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파문이 일어난다. 과거의 악들을 소생시키려는 자들은 그 사회의 다수라고 여겨지는 이들에 의해서 시도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What is boasted of at the present time as the revival of religion, is always, in narrow and uncultivated minds, at least as much the revival of bigotry; and where there is the strong permanent leaven of intolerance in the feelings of a people, which at all times abides in the middle classes of this country, it needs but little to provoke them into actively persecuting those whom they have never ceased to think proper objects of persecution.
현재 종교의 부활이라고 자랑되는 것은 적어도 편협성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서 언제나 좁고 세련되지 않은 심성에 있다. 또한 이 나라 중산층 가운데 항상 깃들어 있는 사람들의 감정 안에 불관용의 강력한 영원한 효모가 있는 곳에서는 그들(=중산층)로 하여금 그들이 박해의 적당한 대상을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아 온 이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도록 거의 자극할 필요도 없다.
중산층은 언제나 박해에 합당한 대상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거의 자극하지 않아도 그들은 박해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각주)
Ample warning may be drawn from the large infusion of the passions of a persecutor, which mingled with the general display of the worst parts of our national character on the occasion of the Sepoy insurrection.
세포이 반란(1857년 5월 10일 - 1858년 7월 20일)의 경우에 우리 국민의 성격의 가장 나쁜 부분들의 일반적인 드러남과 혼합된 박해자의 격정의 큰 투입으로부터 충분한 경고가 도출될 수 있다.
세포이의 반란(insurrection)은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고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항쟁(resistance movement)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포이의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해자의 격정과 혼합되어서 영국 국민의 성격의 가장 나쁜 부분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The ravings of fanatics or charlatans from the pulpit may be unworthy of notice; but the heads of the Evangelical party have announced as their principle for the government of Hindoos and Mahomedans, that no schools be supported by public money in which the Bible is not taught, and by necessary consequence that no public employment be given to any but real or pretended Christians.
강대상에서부터 나오는 광신자들이나 사기꾼들의 고함소리는 주목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파의 수장들이 성경이 가르쳐지지 않는 학교는 공공 자금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과 그 필연적인 결과로 실제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인 척 하는 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공공 고용이 주어지지 않을 것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의 통치를 위한 그들의 원칙으로 발표했다.
pulpit은 주로 교회의 설교단을 뜻하는 ‘강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의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비기독교인들을 그들의 적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을 강제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것을 광신자들이나 사기꾼들의 목소리로 치부하고 그들이 교회 안에서 떠드는 것은 유념할 필요가 없지만 교회 밖에서 강대상에서 하는 말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An Under-Secretary of State, in a speech delivered to his constituents on the 12th of November, 1857, is reported to have said: ‘Toleration of their faith’ (the faith of a hundred millions of British subjects), ‘the superstition which they called religion, by the British Government, had had the effect of retarding the ascendancy of the British name, and preventing the salutary growth of Christianity....
한 내무성 차관은 1857년 11월 12일에 그의 선거구민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들의 신앙(수억의 영국 신민들(=인도인들)의 신앙), 그들(=인도인들)이 종교라고 부르는 미신에 대한 영국 정부에 의한 관용은 대영제국의 이름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지연시키고 기독교의 효과적인 성장을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
Toleration was the great corner-stone of the religious liberties of this country; but do not let them abuse that precious word toleration.
관용은 이 나라의 종교적인 자유들의 커다란 기초석이었다. 그러나 관용이라는 소중한 단어를 남용하지 않게 하라.
As he understood it, it meant the complete liberty to all, freedom of worship, among Christians, who worshipped upon the same foundation. It meant toleration of all sects and denominations of Christians who believed in the one mediation.’
그가 이해한 바와 같이 그것(=관용)은 동일한 기초 위에서 예배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모든 이들에 대한 완전한 자유, 예배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것은 한 중재자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모든 분파와 교파에 대한 관용을 의미했다.
이 내무성 차관이 가지고 있던 관용의 의미는 오직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중재자를 믿는 기독교 안에서의 관용이었다. 관용의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원주) 세포이 반란은 인도에서 영국의 통치에 대항해서 1857년에 일어난 원주민 부대의 저항을 가리킨다. 밀이 인용하는 연설은 솔포트(Salford) 하원 의원이자 내무성에서 1855년부터 1858년까지 차관을 역임한 맛세이 씨(Mr William Nathaniel Massey, 1809-1881)가 한 것으로 『더 타임즈 The Times』와 『맨체스터 타임즈 Manchester Times』에 1867년 11월 14일 토요일에 게재되었다.
I desire to call attention to the fact, that a man who has been deemed fit to fill a high office in the government of this country, under a liberal Ministry, maintains the doctrine that all who do not believe in the divinity of Christ are beyond the pale of toleration.
나는 이 나라 정부에서 자유당의 부처에서 고위직을 수행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관용의 한계 너머에 있다고 하는 신조를 주장한다는 그 사실에 주의를 촉구하고 싶다.
Who, after this imbecile display, can indulge the illusion that religious persecution has passed away, never to return?
이런 바보 같은 시전에도 불구하고 누가 종교적인 박해는 이미 가버렸고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을까?
(역주) 각주에서 인용부호의 마침 부분이 growth of Christianity.... 뒤에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의 문장은 밀이 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Unclear endpoint for quotation beginning “the superstition which….” Some texts have this quotation ending after “one mediation,” or after “growth of Christianity.” The phrase “As he understood it,” suggests Mill is the speaker at that point.—Econlib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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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it is this—it is the opinions men entertain, and the feelings they cherish, respecting those who disown the beliefs they deem important, which makes this country not a place of mental freedom.
왜냐하면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과 관계를 끊은 이들에 관하여 사람들이 가지는 의견이며 품는 감정, 그것이 바로 이 나라를 정신적인 자유의 장소가 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For a long time past, the chief mischief of the legal penalties is that they strengthen the social stigma.
과거에 오랫동안, 법적인 형벌들의 주요한 폐해는 그것들이 사회적인 낙인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It is that stigma which is really effective, and so effective is it, that the profession of opinions which are under the ban of society is much less common in England, than is, in many other countries, the avowal of those which incur risk of judicial punishment.
정말로 효과적인 이 낙인은, 또한 그것(=낚인)은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다른 나라에서 사법적인 형벌의 위험을 일으키는 것들에 대한 공언보다 사회의 금지 아래 있는 의견의 표명이 영국에서는 훨씬 덜 일반적이다.
In respect to all persons but those whose pecuniary circumstances make them independent of the good will of other people, opinion, on this subject, is as efficacious as law; men might as well be imprisoned, as excluded from the means of earning their bread.
자신의 금전적인 환경이 그들을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는 상관이 없게 해주는 그런 사람들 외에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이 주제에 대한 의견은 법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빵을 버는 수단에서 제외될 바엔 차라리 투옥되는 것이 낫다.
Those whose bread is already secured, and who desire no favours from men in power, or from bodies of men, or from the public, have nothing to fear from the open avowal of any opinions, but to be ill-thought of and ill-spoken of, and this it ought not to require a very heroic mould to enable them to bear.
자기의 빵이 이미 확보된 자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나 사람들의 조직들이나 대중으로부터 어떤 호의도 바라지 않는 자들은 나쁘게 생각되고 나쁘게 말해진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견의 공개적인 공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것은 그들이 견뎌내도록 하는 데 어떤 대단히 영웅적인 자질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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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room for any appeal ad misericordiam in behalf of such persons.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동정심에도 호소할 필요가 없다.
(원주) ad misericordiam : (라틴어) 그것(=논의)이 전달되는 이들의 동정심이나 연민에 호소하는 논의
But though we do not now inflict so much evil on those who think differently from us, as it was formerly our custom to do, it may be that we do ourselves as much evil as ever by our treatment of them.
그러나 우리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지금은 이전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었던 것과 같이 그렇게 많이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대우에 의해서 여전히 우리 자신이 그 정도로 해를 가할 수도 있다.
Socrates was put to death, but the Socratic philosophy rose like the sun in heaven, and spread its illumination over the whole intellectual firmament.
소크라테스는 사형에 처해졌으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하늘에 태양처럼 떠올라서 온 지성의 창공 위로 그 빛을 비추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온 지성에 영향을 주고 온 지성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Christians were cast to the lions, but the Christian church grew up a stately and spreading tree, overtopping the older and less vigorous growths, and stifling them by its shade.
기독교인들을 사자들에게 던져졌으나 기독교회는 그 이전의 덜 활발한 성장체들을 압도하고 그것들을 그 그늘 아래 질식시키면서 위풍당당하고 가지를 뻗는 나무로 자라났다.
Our merely social intolerance kills no one, roots out no opinions, but induces men to disguise them, or to abstain from any active effort for their diffusion.
우리의 단지 사회적일 뿐인 불관용이 누구도 죽이지 않고 어떤 의견도 뿌리뽑아버리지는 않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의견들을 위장하거나 그것들의 유포를 위한 어떤 적극적인 노력을 그만두도록 유도한다.
merely social intolerance라는 표현은 묘하다. 우리가 ‘사회적인’ 불관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인’ 불관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공동체와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인 불관용’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는 불관용을 가리킨다. 그 불관용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그 불관용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무책임 혹은 방임을 콕 집어서 표현하고 있다.
With us, heretical opinions do not perceptibly gain, or even lose, ground in each decade or generation; they never blaze out far and wide, but continue to smoulder in the narrow circles of thinking and studious persons among whom they originate, without ever lighting up the general affairs of mankind with either a true or a deceptive light.
이단적인 의견들은 우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10년이나 한 세대에서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지도 않고 더군다나 약해지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멀리 그리고 널리 타오르지 않으나 그것들이 유래한 생각이 있고 학구적인 사람들의 좁은 동아리들에서 참된 빛이나 기만적인 빛을 가진 인류의 총체적인 일에 빛을 비추임 없이 계속해서 불타고 있다.
단지 사회적인 불관용은 이단적인 의견들을 제거해 버리지는 않지만 그 의견이 강해지지도 못하게 하고 약해지지도 않게 해서 그저 일정한 작은 동아리 안에서만 통용되는 의견으로 가두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 의견은 좁은 동아리 안에서 꺼지지 않고 불타오르고 있다. smoulder라는 단어는 1. (불이 불꽃은 없이 서서히) 타다 2. 연기를 내다 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사회적인 불관용이 작은 동아리 안에 가두어버린 그 불꽃은 그 동아리 안에서는 불꽃은 없지만 서서히 타고 있고, 외부에서 보면 연기만 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And thus is kept up a state of things very satisfactory to some minds, because, without the unpleasant process of fining or imprisoning anybody, it maintains all prevailing opinions outwardly undisturbed, while it does not absolutely interdict the exercise of reason by dissentients afflicted with the malady of thought.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어떤 마음들에게는 일들의 상태가 매우 만족스럽게 유지된다. 왜냐하면 사고의 병폐에 영향을 받은 이들, 즉 다수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한 이유의 시연을 절대적으로 금지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벌금을 부과하거나 감금하는 불편한 과정 없이 모든 주도적인 의견들이 외면적으로는 방해를 받지 않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불관용은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들을 드러나게 외면적으로 억압하지도 않고, 그들의 의견 표명의 기회를 박탈하지도 않으면서도 다수 의견을 유지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이 일이 to some minds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mind라는 표현은 그 사회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 불관용을 가지고 실행하고 있는 자들이 가진 것이 어떤 논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mind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A convenient plan for having peace in the intellectual world, and keeping all things going on therein very much as they do already.
지적인 세계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대로 유지하는 편리한 방침.
But the price paid for this sort of intellectual pacification, is the sacrifice of the entire moral courage of the human mind.
그러나 이런 유의 지적인 평화의 회복에 지불되는 값은 인간 마음의 온전한 도덕적 용기의 희생이다.
A state of things in which a large portion of the most active and inquiring intellects find it advisable to keep the general principles and grounds of their convictions within their own breasts, and attempt, in what they address to the public, to fit as much as they can of their own conclusions to premises which they have internally renounced, cannot send forth the open, fearless characters, and logical, consistent intellects who once adorned the thinking world.
가장 활발하고 탐구적인 지성인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확신들의 일반 원리들과 근거들을 자기 자신의 가슴 안에 담아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 자신의 결론들을 그들이 내적으로 포기해 온 전제들에 맞추려고 하는 것들의 상태는 한 때 사상계를 장식했던 열려 있고 겁 없는 인물들, 논리적이고 일관된 지성인들을 낼 수가 없다.
The sort of men who can be looked for under it, are either mere conformers to commonplace, or time-servers for truth, whose arguments on all great subjects are meant for their hearers, and are not those which have convinced themselves.
그런 것 아래에서 찾아질 수 있는 유의 사람들은 상식에 순응하는 자이거나 진리에 대해서 줏대 없는 자(=시류에 편승하는 자)일뿐이며 모든 거대한 주제에 있어서 그들의 논쟁은 자기들의 청자들을 위한 것이며 그들 자신을 확신시켜 온 것들이 아니다.
자기들이 확신을 가지게 된 그것은 말하지 않고 피해 간다.
Those who avoid this alternative, do so by narrowing their thoughts and interest to things which can be spoken of without venturing within the region of principles, that is, to small practical matters, which would come right of themselves, if but the minds of mankind were strengthened and enlarged, and which will never be made effectually right until then: while that which would strengthen and enlarge men’s minds, free and daring speculation on the highest subjects, is abandoned.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벗어나는 사람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관심을 원리들의 영역 내에서 모험하지 않고서도 말해질 수 있는 것들, 즉 작은 실천적인 문제들로 좁힘으로써 그렇게 한다(=두 가지 선택지를 벗어난다). 그러한 문제들은 인류의 마음이 강화되고 확장되기만 하면 호전될 것들이며 그때까지는 실제적으로 호전되지 않을 것들이다. 인간의 마음을 강화하고 확대되는 동안에는 최고의 주제들에 관한 자유롭고 대담한 추측은 포기된다.
두 가지 선택지는 상식에 순응하는 자이거나 진리에 대해서 줏대 없는 자(=시류에 편승하는 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Those in whose eyes this reticence on the part of heretics is no evil, should consider in the first place, that in consequence of it there is never any fair and thorough discussion of heretical opinions; and that such of them as could not stand such a discussion, though they may be prevented from spreading, do not disappear.
그들의 눈에 이단자들 측의 이런 침묵이 나쁘지 않은 이들은 먼저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단적인 의견들에 대한 공정하고 철저한 토론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 다음으로는 그것들 가운데서 그러한 토론을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이 확산은 막아질 수 있겠지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공정하고 철저한 토론을 견뎌내지 못하는 이단적인 의견들은 잘못된 것이므로 검증을 거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데 그런 토론이 존재하지 않으면 잘못된 이단적인 의견들이 확산되지는 않지만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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