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4
세종시대가 우리나라 역사상 태평성대였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나름 고충은 많았다.
왜구의 침탈도 잦았다.
북방에서는 여진의 침입도 있었다.
가믐, 홍수등 기상재해도 잦았다.
기근도 있었다.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세종시대에는 궁궐 안에서는 해괴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청백리의 대명사로 알고있는 황희정승에 관한 일도 실록에 나온 내용을 보면 많이 다르다.
오늘은 세종시대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 대부분은 세종대왕이 학문을 좋아하는 성군 이미지가 강해 만원짜리에 나온 초상화처럼 근엄한 학자형 모습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실록에 나온 세종은 100키로에 육박하는 비만 체질이었다.
세종은 고기없는 밥은 먹지 않을 정도로 육식도 좋아했다.
아래는 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 태종이 죽은 지 6개월이 되던 날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태종의 유교에 따라 세종에게 고기를 먹도록 청하였다. 세종이 평소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던 태종이 자신이 죽은 뒤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유교를 내렸던 것이다."
실록에 나온 내용이 이 정도니 세종이 평소 얼마나 고기를 좋아했는지 알만하다.
특히 세종이 좋아한 고기는 고기 중에서도 왕이라는 전라도 담양의 떡갈비였다.
세종이 육식을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세종은 또 다른 성(?)군이기도 했다.
부인만 무려 6명이었다.
자녀는 18남 4녀를 두었다.
조선 왕들 중에서도 기록적이다.^^
세종은 또한 독서광이었다.
사경(밤 1~3시)에 일어나 정사를 본 까닭에 여러 병을 달고 살았다.
세종이 육식을 좋아했고 부부생활에 충실한 반면 움직이기를 싫어했다.
운동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세종은 두통과 이질, 풍병과 심지어는 성병인 임질과 각기병, 등창에 당뇨까지 병치레가 잦았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이었다.
아마도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업무에 대한 책임감으로 정신적 과로와 운동부족에의한 병들이 합병증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세종이 이런 병치레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수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점은 현대 의학자들 눈으로 보았을 때도 참으로 경이적이라 한다.
세종시대 18남이나 되는 아들들이 세종 속을 꽤나 썩힌다.
특히 여자문제로 상당히 말썽을 많이 피운다.
세종의 큰아들(후에 문종) 세자빈 봉씨가 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궁녀와 동침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폐 세자빈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자빈 봉씨는 조선의 제5대 왕 문종의 세자 시절의 두번째 부인이자, 세종의 며느리로 나인과 대식’(동성애)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폐출 당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런 기술 내용때문에 문종은 아주 나약한 이미지가 되어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문종편에서 자세히 쓰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 최고 기생은 황진이다.
각종 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몇 번이고 다루어진 그녀 일생은 조선 기생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진이’란 이름이 없다.
그런데 실록에 무려 16번이나 이름이 나오는 기생이 있다.
그녀는 초나라 미인처럼 가는 허리를 가지고 있다하여 이름이 ‘초요갱’이다.
초요갱이 수없는 남자들을 상대하지만 그 남자들 중 왕자가 세 명 있었는데 세 명 모두가 세종의 아들들로 형제 간 이었다.
초요갱의 첫 번째 왕자는 세종대왕의 정실왕비인 소헌왕후의 일곱 번째 왕자인 평원대군 ‘이임’이었다.
평원대군 이임은 세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요갱을 궁으로 데리고 와 첩으로 삼는다.
그리고 세종시절 유명한 음악가 박연에 부탁하여 노래와 춤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임은 열아홉이란 짧은 인생을 살고 요절하고 만다.
이임을 만나면서 배웠던 춤과 노래덕분에 궐 안 행사에 춤을 추러 드나들던 초요갱에게 두 번째 왕자가 다가온다.
그는 평원대군보다 한 살 위였던 화의군 이영이었다.
화의군은 평원대군처럼 정실소생이 아닌 서자왕자였다
화의군과 같이 살던 초요갱이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보고 화의군이 그 남자를 때려 죽였다.
그 때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은 세조 초기였다.
화의군은 귀양을 가고 초요갱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의군의 동복동생인 계양군 이증이 초요갱은 세종조 대에 박연이 만들어 논 악무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
바로 이 계양군이 초요갱의 세 번째 왕자가 된다.
화의군이 초요갱과 간통하다 쫓겨나간 것을 똑똑히 본 계양군 이증이 또다시 그녀를 품에 안기 위해 구애를 했다.
이러한 것은 초요갱의 용모와 매력이 정말 출중했다는 증거이지 않을 까?^^♡
이처럼 초요갱은 세종 세 아들을 홀려놓았다.
세종시절 오래동안 정승을 한 청백리의 표상이자 우리 역사상 최고 명정승으로 알려진 황희정승 이야기도 우리가 아는 바와는 조금 다르다.
사관 이호문이 황희정승에 관해 실록에 쓴 내용의 일부이다.
“황희는 대사헌이 되어 승려 설우에게서 황금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 했다.”
“ 왕자의 난을 일으켜 참수당한 난신 박포의 아내가 죽산현에 살면서 종과 간통했다.
간통 사실이 우두머리 종에게 발각되자 박포의 아내는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한참 후 부패된 시체가 떠오르자 수사가 시작됐다.
박포의 아내는 발각될까 두려와 한양에 올라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살았다.
이 때 황희가 박씨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박포의 아내는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황희는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을 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다.
~그의 심술은 바르지 아니하며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했다.”
“박용의 아들 박천기를 잡아 문초했다.
박천기는 ‘황희에게 말1필을 뇌물로 주었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오승·권희달에게 말 1 필, 이순몽에게 소 1두를 주었다.’고 진술했다.
황희는 말 1필과 술대접을 받고 뇌물을 준 지방관리를 변호하는 편지 1통을 전달했으며….”
그러나 정인지 등 <세종실록> 편수관들은 ‘황금대사헌’ 운운 내용과 박포의 아내 사건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다.
정인지는 말했다.
“만일 사관 한 사람이 사감을 갖고 사서를 쓴다면 천만세가 지나도 고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특히 정인지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직필(直筆)이라 할 수 없다”고 사초 삭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황보인은 신중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가벼이 결정할 수 없어요. 마땅히 중론을 모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황보인이 이 논란에 마무리 발언을 한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큰 일은 한사람이라도 안된다고 하면 반드시 정법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삭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황희의 스캔들’을 두고 최근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박씨 아내 사건’과 ‘황금대사헌 사건’ 등 갖가지 의혹들 정확한 사실은 현재도 진실여부를 ‘모른다’는 것이다.
1452년 2월 8일자 <문종실록>에 기재된 ‘황희 졸기’에는 ‘박씨 사건’과 ‘황금대사헌 운운’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졸기’에도 “황희가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법 행위를 저질러 압수 당한 아들과 과전을 자신의 과전을 바꾼 이야기. 처형들의 불법행위를 변명한 일, 중죄인이 된 서자의 성(姓)을 바꾼 일 등을 예로 들었다.
사실 황희정승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쩜 황희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현명한 처세술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황희는 세종시절처럼 태평성대에 딱 어울리는 정승감이다.
그래서 그렇게 오래까지 정승직을 유지 했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청백리 정승으로 알려진 황희를 둘러싼 엄청난 논란은 세종~단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이어졌다.
이처럼 세종시절에도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