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15-24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여호수아 2장은 정탐꾼들의 임무로 시작하여 라합의 이야기로 역전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라합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라합은 참 신비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보면 거짓말쟁이이자 민족과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예수님의 조상이며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라합의 기지와 간구(15-21)
(15-16)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본문을 보면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성벽을 강화하기 위해 벽을 두 개 세우고 그 사이에 돌이나 흙을 채워 넣거나 거주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라합이 거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라합은 그 하는 일이나 지위도 사회에서 미천한 자였을 뿐 아니라, 그 거주하는 장소도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고백한 라합이 발휘하는 기지와 용기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정탐꾼들과 대담하게 교섭하고 그들을 숨기며 추적자들도 돌려 보냅니다. 이제 모든 이야기는 라합을 중심으로 흘러가며, 라합이 말하는 대로 이뤄집니다. 성문은 이미 닫혔기 때문에 라합은 창문에서 줄을 달아 그들을 내립니다. 그리고 뒤를 쫓는 사람들이 요단 나루터를 향해 갔기 때문에 오히려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간 숨어 있다가 길을 떠나라고 세부적인 지침까지 내려 줍니다.
그 누가 이 창기 라합을 못 배운 여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는 여리고의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웠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야 참으로 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듣고 간담이 녹아내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성벽에 의지하여 그 허울뿐인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장면을 볼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죄악, 그리고 그로 인한 온갖 고난과 걱정 근심으로 인해 찌들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간담이 서늘합니다. 너는 죄인이라는 그 말씀의 확정적 선포, 그리고 자신을 의지해서는 살 수 없으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투항하라는 도전이 들려올 때, 아 이 세속적인 삶이 헛된 것이구나, 나는 참된 생명을 살아내지 못했구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리고 성벽과 같이 든든해 보이는 외적인 허울에 둘러싸여 항전을 결심합니다. 그러한 삶의 외적 조건은 삶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속여 그 삶을 파멸로 이끔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누구보다도 영적으로 영민하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지를 고백하며 삶이 부과하는 무거운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여리고 왕이 보낸 사람들을 속였으며, 여리고 주민을 배신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라합은 용서할 수 없는 대역 죄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라합의 행위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했고, 따라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했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서 인정받기 위해 살다가,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가치를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담이 녹아내렸지만, 정신없이 이 땅의 가치에 몰두하며 이 세상이 세운 큰 장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 맞서고, 일시적으로는 배신으로 보이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멸망의 자리를 벗어나 생명의 자리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세상은 네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가 이 갇힌 성벽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며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 내면이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그 외면을 더욱 공고히 세우고 강력하게 문을 닫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라합은 그러한 내적 외적 압력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처음 전파될 때에도 이러한 저항과 박해가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점을 구실로 삼아 온 가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집안에서 몰아낸다는 위협은 물론 폭력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 많은 믿음의 선배는 그 굳은 불신앙의 성벽을 깨뜨리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승리는 이미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에서도 평안함을 누리며 담대히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사회적 압박 때문에, 그 무너진 내면의 상태를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러 성벽에 숨어 있다면 함께 망할 도리 외에 없습니다. 믿음의 선택을 담대히 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17-20)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이 정탐꾼들은 라합과 서약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도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을 멸하라고 하셨는데 이 정탐꾼들은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라합에게 속한 이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성은 라합 이야기에 담긴 의도를 반영합니다. 즉 누구든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를 맞이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했다면 살려 주셨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과연 창녀 라합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만 하겠습니까? 이 역시 가장 보잘 것 없는 직업과 거주지를 가진 천대받는 여성도 기쁘게 받으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이 광야의 교회 역시 보편적인 교회로서 심판받아 마땅한 가나안 자손들까지도 포괄하는 하나님의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이지만, 라합의 이야기를 볼 때 여리고 성을 돌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리고가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면 그들은 라합과 같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비해 그들이 우습게 알던 라합과 거기 속한 사람은 온 성이 무너져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가 들어가 있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속하기로 작정한 자는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도 순종하여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이 땅의 모든 체계와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여리고 성벽과 같은 철옹성과 같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근본을 흔드시고 녹아내리게 하십니다. 아니 이미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자리에 있다면 라합과 같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편을 택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변 사람에게 욕먹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비난받고 심지어 왕따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생명이 있다면, 거기에만 탈출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 정탐꾼들이 갑자기 이 붉은 줄을 매라고 했다는 점을 봐서 그 라합의 집에는 붉은 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줄이 정탐꾼들을 내린 줄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탐꾼들은 그 줄을 봤고, 그들이 여리고를 침공하여 올 때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있으면 그 집에 있는 자는 안전할 것이라고 명합니다. 붉은 줄을 창밖에 드리우고 거기에만 머무르라는 명령은 분명히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만 머물기만 한다면 무사할 것이라는 약속도 유사합니다. 그 희망의 상징을 믿고 신뢰하면 거기에서 안전함을 누린다고 약속합니다. 이 시기에도 구원받는 방법은 사랑을 바라는 소망에서 나오는 믿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22)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라합은 곧 그들이 말한 대로 실천합니다. 그리고 라합의 예측대로 뒤쫓는 자들은 사흘 정도 수색한 후에 아무 성과 없이 돌아서고 맙니다. 라합의 지혜는 참 대단했습니다. 결단력도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는 지혜가 가장 뛰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살몬과의 사이에 보아스를 낳아 예수님의 계보에 여자로서 이름을 내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이 들어간 여성들의 면면을 보면 사실 자랑할 거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23-24)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두 사람은 산에서 은신하다가 내려와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한 보고는 정탐한 내용이라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들은 라합의 집 안과 그 집의 지붕만을 봤을 뿐이고, 라합이 그들에게 한 말만 보고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미 선언하신 내용이고, 더 나아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땅의 모든 주민이 간담이 녹더이다 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예전에 비하면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그 땅에 가서 스스로 위축되어 오히려 자기 백성의 간담을 녹아내리는 말을 했습니다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말을 전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의 입으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님이 이기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승리가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원합니다. 종합하자면 여호수아 2장은 정탐꾼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라합까지도, 그리고 가나안 땅에 있는 자 누구라도 믿는 자는 구원의 역사에 포함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반영하는 삽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는 방법도 어떤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그 능력 안에 거하는 것 뿐입니다. 이미 광야 교회도 보편교회로 삼으시고 라합까지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며 우리 역시 그런 교회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합의 구원받는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가나안 정복에서도 구원의 소망이 있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장벽 아래 녹아내린 간담을 속이고 하나님과 맞서는 이 시대에 라합과 같은 바른 지식과 믿음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구원의 소식과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인간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행위와 하나님이 의롭다고 보시는 행위의 차이는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2. 가나안 정복과 전멸의 명령이 라합의 예로 깨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오늘날 나에게 붉은 줄은 무엇일지 묵상해 보십시오.
4. 오늘 내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포해야 할 가나안 땅은 어디입니까?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