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온돌의 시대적 변천
1 선사시대
1-1. 신석기시대
■ 평남온천군 운상리 익산유적
1) 제1호 주거지 -
B.C. 5000 - 4000
● 노지 - 1개의 노(爐)가 장경 90cm, 단경 78cm의 타원형으로 깊이는 30cm 정도로
주변에는
깨어진 석판을 돌렸는데 그 중 한 개에 원추형의 소공이 있어 이것이 발화시설인 듯 하다.
2) 제5호 주거지 - 신석기 B.C 3000
● 대체로 방형에 가까운 평면이나 원형수혈에서 방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
● 노지 - 남북 약 1m, 동서 약 0.7m의
타원형으로 깊이 35cm정도로 주변에 불에 구운 점토가 폭 5 -10cm로
노지 주변을 둑 같이 돌려 있음.
■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 B.C. 5000 - 4000
1) 1호 주거지
● 한 변이 7m 내외의 방형 평면이고,
바닥깊이는 약 40cm로 벽과 바닥에는 점토를 깔고 다짐.
● 노지 - 중앙에는 냇돌을 돌린 타원형 노지가 발견.
2) 3호
주거지
● 노지 - 남북으로 긴 타원형인데 남북 1.1m, 동서 0.9m, 중앙깊이 20cm 정도이고
노지 주변에는 돌이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흔적이 있다.
■ 서울 암사동 움집터 제 6호 집터 : 신석기 B.C 3000
● 방형 평면을 다시 중앙의 노지를 중심으로 한 원형 평면으로
약 30cm 파내고 그 바깥 4변에 주공을 둔 2단식 수혈주거
● 노지 : 타원형 모양으로 한 변이 55-85cm 정도로 길죽한 냇돌과
할석을 가장자리에 둘러놓았음.
■ 함북 웅기 송평동
● 온돌식으로 판석을 세워 불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판석을 덮어서 바닥으로 한 발달된 온돌 유적이
발견되어졌다고
언급된 적이 있는데 그 형태가 그 당시의 다른 유적에 비해 상당히 후대의 것과 비슷하고, 이 유적에 대한 보고서가
출간된 적이
없으며, 모든 것의 근거가 불분명함으로서 이를 선사시대의 온돌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1-2.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초기
■ 함경북도 회령 5동 유적 8호 집터 : 청동기 B.C 10C - B.C 4C
● 길이 8.4m, 폭 6.5m의 방형 평면으로 바닥의 깊이는 0.75 - 1.4m로 집터의 바닥은 진흙을 깔고 다졌다.
● 노지
: 중앙에는 동남쪽에 치우쳐 85x65cm의 장방형으로 주위에 돌을 두르고, 서북벽 가까이에 붉게 탄 진흙을 싼
둑 모양시설의 노지(이것은
난방용이 아닌 부뚜막 시설로 믿어진다)를 한 노(爐) 2개가 발견됐다.
동남쪽의 화덕은 방바닥을 파고 그 둘레에 막돌 8개로 둘러 싼 것이고,
서북쪽 것은 방바닥에 진흙으로 둘러 싼 것인데
동남쪽 것에만 재가 차 있는 것으로 보아 항상 불을 피우던 즉 취사용 화덕이고,
불피운 흔적만
있는 서북쪽 것은 추운 겨울에만 불을 지핀 난방용의 것이라 추측되는 것이다.
■ 평북 공귀리유적 제5호 주거지 : B.C. 1000-300
● 혈거의 평면은 한 변이 5.7-6.7m인 부형 방형이며,
깊이는 50cm 내외로 바닥은 진흙을 다져 깔음.
● 노지 - 중앙에서 좀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그 바닥은 판석을 깔고
주변에는 동쪽에
2개 서쪽에 2개의 자연석을 세우고 노의 크기는 70x55cm의 장방형.
■ 경기도 파주군 교하리유적 제1호 주거지 : B.C. 1000-300
● 수혈주거의 장축이 서에서 약간 북으로 기운 동서향을
하고 있고 장변이 9.5m, 단변이 3.2m, 깊이는 35-50cm 이다.
장축을 따라 중앙에 기둥구멍이 나란히 나있다.
● 노지 :
동쪽에 치우쳐 2개가 있었는데 장변이 60cm되는 타원형으로 그 깊이는 10-15cm 정도이다.
노(爐)주변에는 아무시설도 없었으나 수혈의
서북벽 가까이에서 이 벽에 평행으로 되다가
서남벽쪽으로 ㄱ자로 꺾여 나가는 배수구로 보이는 유구가 보이나 그 끝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외부보다 더 낮았던 수혈 내부바닥에 배수구가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 평북 영변군 세죽리 (B.C.1000 -
B.C.300)
● 장방형 평면으로 북벽에 취사용 화덕자리가 치우쳐 설치됨.
●■ 강원도 춘천시 중도유적 제 1호, 제 3호 집터 : B.C 2C - A.D 1C
● 평면은 모를 죽인 방형으로 그 규모는
5.4x5m이고, 바닥깊이는 42cm이며, 주공이 동벽과 남벽에 몇 개가 있다. 바닥은 중앙에 직경 2m만 점토를 다진 모래바닥이다.
●
노지 : 중앙에 위치하며 서쪽에 큰돌을 놓고 세 방향에 냇돌을 돌리고, 바닥에는 납작한 냇돌을 빽빽이 깔아 타원형을 이루고 진흙으로 이를
보강했다. 동벽에 폭 150cm의 진흙둑이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져 어깨선 위에서 폭 70cm, 높이 30cm가량 되므로 부뚝막으로
생각된다.
■ 수원시 서둔동 제 7호 집터 : B.C 1000 or B.C 300-0
● 한 변이 4m내외의 방형 움집터로 최초의 ㄱ자
구들이 나타남.
● 노지 : ㄱ자 구들로서 북벽에 붙여 한 변이 약 30cm인 얇은 흙벽돌을 30cm간격으로 양측에 세우고 그 위에
똑같은 크기의 벽돌을 덮어서 터널형 구들을 구축하고, 서쪽 끝에서 다시 서벽을 따라 굽어져 아궁이를 만들고 동쪽 끝에서는 벽에 붙여 굴뚝을
올림.
●■ 북창 대평리 제 2호 집터 : 고구려 B.C 1C
● 기존의 주거지와 비슷한 평면.
● 노지 : ㄱ자로 꺾인 두
고래의 구들. 구들의 북단이 화구로서 2줄 고래이며 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것이 ㄱ자로 꺾여 동쪽으로 연장되는 부분부터 외골로 되어있다. 즉,
우리나라 두고래 구들의 초기형태이다.
●■ 평북 노남리 제 2호 집터 : B.C 400C - A.D 100C
● 지상가옥에 가까운 장방형 평면으로 14x11m의
대형유적으로 바닥은 점토를 깔아 다짐.
● 노지 : 바닥 중앙부와 동서편에 ㄱ자형과 외골형 구들이 있는 것으로 한 주거지에 2개의 구들이
나타남.
■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 움집터 : B.C. 2C - 1C
● 중도 유적과 같은 형태로 5m 내외의 정방형 집터에 내부에는
북쪽벽에 치우쳐 길이 1.2m, 폭 1m의 바닥과 주위의 띠를 거의 진흙으로 만들고 북쪽의 일부만 돌을 세워 막은 타원형 爐 발견.
■ 경기도 한강변 미사리 유적 : B.C. 4C - A.D.1C
● 바닥에 돌을 가지런히 깔고 주위에도 돌을 두르는 하향식
온돌형 爐를 시설하고 후대로 들어와서는 직경 5m 내외의 둥근 평면 움집에 북쪽 또는 서북쪽에 붙여 길이 1.3m, 폭 70cm, 높이 50cm
정도의 부뚜막을 시설.
2.2 역사시대(歷史時代)
2.2.1. 원삼국(原三國)시대 및 고구려시대
■ 전남 승주군
낙수리 2호 주거지 : 원삼국시대 A.D. 1C - 300C
● 말각 방형의 형태로 된 평면으로 크기 560x500cm로서 남벽 서쪽
기둥구멍 옆에 화덕자리가 나왔는데 이는 전시대의 ㄱ자형으로 꺽인것과는 달리 석기시대의 단순한 화덕자리와 흡사한 것이었다.
■ 압록강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 제 4호 주거지 : B.C. 4C- 기원
● 방안의 벽쪽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벽을 따라 꺾어서
외줄고래가 ㄱ자형으로 2-3m 정도 설치하고 방밖으로 굴뚝 설치.
■ 압록강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 제 5호 주거지 : A.D.
1C
● 3-4줄의 ㄱ자형 구들 발견.
■ 고구려 후기 즙안 동대자 유적 : A.D. 4C 중엽
● 동서 35m, 남북 15m의 장방형으로 평면에 동서로 2개의 방이
있다. 여기에는 각기 동벽 중간에서 시작하여 벽을 따라 북향하다가 북벽을 따라 ㄱ자로 꺾여 연장되고, 이것이 다시 북쪽으로 꺾여 집밖의 굴뚝과
연결된 구들 시설이 있다. 쌍줄고래를 형성한 구들도 있고, 또 시대를 달리하는 3줄 고래도 일부 발견되었다.
■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 상경 용천부 궁성터 : 발해 8C
● 기단 규모는 동서가 약 30cm, 남북 17.3m로 주위에는
회랑채와 같은 복도가 접해있고 안쪽에는 3개의 방을 둔 안채로 돼있다.
● 구들 : 3개의 방 각각에 쌍줄고래를 ㄱ자 평면으로 형성하여
건물 밖 북편 양측에 세웠던 굴뚝으로 연결시켰다.
■ 안악 제3호 고분 벽화, 약수리 고분벽화 부뚜막 그림
● 방아간, 우물, 마차고, 외양간 등과 함께 한 채의 부엌에 부뚜막이
있고, 연기를 빼는 굴뚝이 측면벽에 나와 있어 부뚜막이 난방용 아궁이와 독립된 것으로 추측.
■ 도제, 철제 부뚜막
● 고분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대 취사용 부뚜막 모형.
2.2.2 백제시대
● 주남철 : 돌석(突石)이란 표현이 장갱(長坑)이며, 후일의 온돌(溫突)이라고 하여 이를 온돌(溫突)로
해석함.
● 최영택 : 돌석(突石)이란 굴뚝처럼 구멍이 있거나 떠있었던 고인돌로서 움집으로 주거가 전환되기 전의 주거형태이며, 그 고인돌
밑에 모닥불을 피워 외구들로 채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 홍형옥 : 왕의 예불을 위해 밑에서 불을 때어 가열했을 가능성이 많고, 그
돌에 관한 특수한 예이지 이것이 이 당시의 일반적인 구들을 나타낸 문장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 화양지구유적 : 기원 - A.D. 5C
● 집터는 원형평면을 따라 주위에 기둥을 배열하고, 기둥사이에 판자를 대어 토벽을
쳤던 흔적이 있고, 출입구는 남쪽에 놓여 높이 1.5m 내외의 석축벽 위를 넘어 다닐 수 있게 경사처리함.
● 북동쪽에는 약간 굽은
一자구들이 놓였는데 남쪽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3.4m연장되어 끝에서 굴뚝을 세워 건물 밖으로 배연하고, 불을 때는 아궁이는 고래의 측면으로 뚫려
고구려의 부뚜막과 같았고, 이 곳에서도 아궁이 안에 솥받침 돌을 발견할 수 있어 취사와 난방을 함께 하였음을 추측함.
■
부소산성내 수혈주거지 제 3호 움집터 : 백제 4-5C경
● 바닥깊이는 70-90cm정도로 남쪽벽 중앙부에 출입을 위한 계단을 마련하고
북변쪽과 서변쪽에 접하여 ㄱ자형의 침소가 있음.
● 노지 : 집터 동쪽벽에 연접하여 벽 중앙부위에서 시작하고 북벽외부로 뻗어나간 구들의
측벽 두줄이 나타났는데 할석을 세워 점토와 사질토를 다져 쌓은 것이다. 남쪽 끝에서
구들폭이 넓어져 이 부위에서 서쪽으로 아궁이 구멍을
마련하여 구들의 남쪽 끝을 막았으며, 내부 중간부에는 작은 돌을 몇 개 세워놓아 솥을 걸치도록 하였다.
■ 부여 능산리 제 4호 및 5호 건물지 : 백제시대
● 동실과 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구에서 각 실별로 입구에서부터 ㄱ자형
구들 발견.
■ 고구려 후기 즙안 동대자 유적 : A.D. 4C 중엽
● 동서 35m, 남북 15m의 장방형으로 평면에 동서로 2개의 방이
있다. 여기에는 각기 동벽 중간에서 시작하여 벽을 따라 북향하다가 북벽을 따라 ㄱ자로 꺾여 연장되고, 이것이 다시 북쪽으로 꺾여 집밖의 굴뚝과
연결된 구들 시설이 있다. 쌍줄고래를 형성한 구들도 있고, 또 시대를 달리하는 3줄 고래도 일부 발견되었다.
2.2.3 신라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 경남 하동군 칠불암 亞字房 온돌 : 조선 후기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암 경내에 위치한 승방으로 남북 장방형으로 놓인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집인데 남쪽 2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고, 북쪽 3칸은 방인데 방의
서쪽은 퇴칸을 두어 툇마루를 달아냈다. 그런데 여기 3칸 온돌방의 평면이 亞字로 되어 안쪽 十字 부분은 한 단 낮게 꾸미고, 네 귀와 남북 변은
바닥을 높게 꾸며서 걸터앉기 쉽게 하였다. ● 1981년 해체 수리 시 조사된 바에 의하면 부엌 벽 중앙부에 큰 부뚜막 아궁이를 두어 불길이
부채살 방향으로 들어가 남북으로 놓인 줄고래를 통하여 북벽 밖 중앙에 있는 굴뚝쪽으로 유도되었다.
● 구들골과 굴뚝의 폭은 거의 같이
30cm내외였고, 둑의 높이는 30cm이상인데 특히 앞서 기술한 높은 부분은 더 높여 구들장이 높게 얹히도록 하였다. 이 亞字房은 그 동안
신비의 구들로 알려졌으나 몇 번에 걸쳐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어 본래의 구법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나, 부엌과 방의 높이차가 약 1.8m나
되어 불길이 잘 들도록 설계된 것으로 판단된다.
●■ 안압지 출토 풍로
● 겨울에는 옥내의 부뚜막에서 취사를 하고 여름에는 밖에서 취사를 한 것으로 판단.
2.2.4 고려시대
● 高麗圖經 券二十八 空張一臥榻條 : 서긍이 1109-1146 사이에 고려를 다녀감.
- 부잣집에는 큰
자리를 깔고 침상과 평상을 사용하였고, 일반백성은 대부분 흙침상(土榻)으로 땅을 파서 화갱(火坑)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귀족계급이나 왕궁에는 여전히 온돌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서민의 경우 방 전체가 아닌 방안에 장갱(長坑)을 놓은 형태로 화갱이나 토탑이란
표현으로 보아 폭이 상당히 넓어진 것으로 이해됨. 그리고 이 문헌에서 長坑이 아니고 火坑으로 표현하고 土榻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제는 고구려의
장갱처럼 폭이 좁고 길이가 긴 갱이 아니라 폭이 상당히 넓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 상경 용천부 궁성터 : 발해 8C
● 기단 규모는 동서가 약 30m, 남북 17.3m로 주위에는
회랑채와 같은 복도가 접해있고 안쪽에는 3개의 방을 둔 안채로 되었다.
● 구들 : 3개의 방 각각에 쌍줄고래를 ㄱ자 평면으로 형성하여
건물 밖 북편 양측에 세웠던 굴뚝으로 연결시켰다.
●■ 익산 미륵사터 서쪽 10호 후대 건물 : 고려 11C
●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건물터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남북이
3칸이고 동서로 단칸만 확인된 집터로 그 중앙칸에 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 구들 : 3-4줄의 구들이 동남쪽에 있는 아궁이를
시발점으로 동벽을 따라 북으로 향하다가 북벽에서 서쪽으로 꺾여 서북쪽 귀퉁이에서 북으로 빠져나갔는데, 대체적으로 쌍줄고래를 이루어 결국 ㄱ자
평면을 하였다.
■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 고종 28년 1192-1259
● 火爐와 溫突을 모두 경험
■ 李仁老 東文選 公州東亭記 : 1152-1220
● 공주땅에 정자를 지으면서 더운 방인 환돌(煥室)과 시원한 마루구조인
양청(凉廳)을 대칭적으로 비교하여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상류계층에서도 온돌구조와 마루구조가 한 건물에 건축되었음을 시사.
■ 崔滋 補閑集 券下 默行者 : 1186-1260 13C초 平北 龜城지역
● 온돌에 대해 극히 평범한 태도로 기술한 것으로,
묵행자가 승방에서 좌선 시 천천히 문을 나가 돌과 자갈을 주워 아궁이(돌구)를 막고 진흙으로 재가 떨어지는 구멍까지 막았다고 되어있어, 이는
승방의 아궁이를 틀어막는 이야기로 빙돌, 온기돌, 돌구라는 문구가 등장하므로 이미 온돌이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아궁이가 방밖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경주군 감은사터 서회랑터 (고려중기 이후 12C말 - 13C초)
● 동서 장방형으로 놓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앞뒤로
퇴간을 둔 건물터, 서쪽 중앙부 2칸에만 방전체 구들을 놓고 아궁이는 서쪽 집밖에 한데 부엌을 마련하고 아궁이에서 4갈래로 각 고래에 불길을
유도.
● 구들: 고래는 동서로 길게 네 줄 놓여있는데, 동쪽벽에서 북쪽으로 유도되어 방안 동북쪽에 놓인 개자리를 통해 북쪽의 기단
밖으로 길게 연결되어 굴뚝에 연결.
●■ 전남 완도 법화사터 : 고려말
● 아궁이를 방밖에 하나를 두고 방 전체에 구들을 시설한 것으로 조선시대 함실 아궁이 구조와
거의 같았음을 알 수 있으며 차이점은 골폭이 좁고 고래의 둑폭이 넓으며 방 전체가 4줄 고래 정도로 간소하다는 것.
■ 익제난고 권육, 기, 중수개국율사기 : 1344
● 학도사와 감사당이 있고, 廚와 庫라 한다는 기록으로 부뚜막과 온돌방
아궁이가 겸용으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침방의 旭室 이 그윽하고 따라서 승이 거처할 곳이라고 기록
2.2.5 조선시대
■ 신동국여지승람선산에서 월파정의 권근기 : 정종 일년 1399
● 월파정은 따뜻한 방인 환실(煥室)을
만들어 길손의 숙소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일반 백성은 널빤지나 띠풀을 깔아 습기를 막고 방석을 깔고 생활했다고 묘사되어, 북부지방에서
일반적이었던 온돌이 경도를 포함한 중부지방에서는 아직 일반화되지 않음.
■ 世宗實錄 券二十九 丙戊條 : 1418-1450
● 임금이 성균관학생들이 습질에 걸리는 일이 많다는 말을 듣고 동재와 서재
5간씩을 온돌로 만들도록 공조에 명하였다는 기록 - 온돌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임.
■ 이익 성호사설 : 1681-1763
● 온돌의 융성과는 반대로 조선시대초기에 온돌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견해로서,
17C초만 해도 상류주택에도 난돌은 불과 1-2칸 만들어 노인이나 환자가 쓰도록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판방에서 생활했는데 주위에 병풍과
휘장을 치고 살았다고 하나 이는 근검절약을 강조하기 위한 글로서 판단됨.
● 고려중기에 이미 상류층의 정자 및 주택의 일부에 온돌구조가
사용되고 있었던 점과 용제총화 및 제주풍토록의 내용 등을 상고 해볼 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100년 전을 "먼 옛날의
일로" 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조선초기의 상류주택에서의 마루방과 온돌방의 이용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홍형옥 : 조선 영조대 이전에는 한 집안에 온돌과 마루가 있기는 했으나 거처하는 방은 모두 온돌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고,
거처하는 방이 모두 온돌로 일반화된 것은 적어도 그 이후라고 하였다.
● 주남철 : 근검절약을 강조하기 위한 글로서 실제 상황과는 다른
글이라고 하였다.
● 김일진 :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100년 前을 '먼 옛날'로 해석하여 고려시대로 보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박지원 열하일기 : 1737-1805
●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드는데, 그 돌의 크고
작음과 두껍고 얇음이 애초에 고르지 못하므로 , 조약돌로 네모를 괴어서 그 절름발이를 금지하려 했으나 돌이 타고 흙이 마르면 곧잘 허물어짐이
첫째 흠이요, 돌이 울룩불룩 하여 옴폭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므로, 불을 때어도 고루 덥지 못함이 둘째 흠이요, 불고래가 덩실 높아서
불길이 서로 맞물지 못함이 세째 흠이요, 벽이 성기고 얇아서 곧잘 틈이 생기므로, 바람이 새고 불이 내쳐서 연기가 방안에 가득하게 됨 이 네째
흠이요,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있지 않으므로, 불길이 안으로 빨리어 들어가지 않고 땔나무 끝에서만 남실거림이 다섯 째 흠이요, 또 방을 말리려면
적어도 땔나무가 백단은 들고, 열흘 안으로 입주를 못함이 여섯째 흠이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 : 17C
<돌제>
● 박지원의 6가지 결점 외에 또 다른 6가지 해독을 언급하고, 빨리
캉의 제도를 따라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 온돌제도가 잘못된 까닭에 부득불 땔감을 낭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큰 도읍에서는 땔감이
계수나무처럼 귀하여 몇 식구의 집에서는 일년에 백금을 들이더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대저 소상인들이 져날라오는 것과 장토에서 거둬들인 것의 태반이
부엌 아궁이 안에 서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첫번째 해독이다.
● 땔감이 귀한 까닭에 큰 도회지의 교외에 있는 산은 도끼행렬이 날로
침범하여 나무 그루터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한 아름이 되는 나무는 백리를 가도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하여 평시에 쓸 재목이나
장례에 쓸 관재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이것이 두번째 해독이다.
● 땔감이 귀한 까닭에 사방의 산이 씻은듯이 벌거벗은 채 마른
나무등걸이나 죽은 뿌리조차도 모두 뽑혀졌다. 그래서 한번 큰물이 지나가면 모래와 진흙이 씻겨 내려가 도랑과 시내에 가라앉아 쌓이고, 논밭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독이다.
● 땔감이 귀한 까닭에 가난한 집안에서는 며느리, 시어머니가 한 방에 거처하므로 장자가
말한 '방안에 여유가 없으면 며느리, 시어머니가 싸우게 된다'라는 기롱을 불러들인다. 또한 남자가 내실에 처하게 되어 예기의 '내실에 거하면
조문을 해도 좋다'는 경계를 어기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해독이다.
● 여러 날 불을 때지 않는다면 벌레와 쥐가 벽에 구멍을 뚫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불을 때면 연기가 불길을 끌어들여 벽대까지 미쳐서 집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다. 이것이 다섯번째 해독이다.
● 구들을
깔고 흙을 바르고 난 다음 종이를 서너겹 바른다. 종이를 바른 뒤 기름을 먹인 전후지를 풀로 먹이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유둔이 바로 이것이다.
유둔은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부유한 집이 아니면 사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굴뚝에 가까운 부분은 불꽃이 미치지 못하여 항상 습기를 띠고
있으므로 깔아 논 유둔이 얼룩덜룩 썩은 채로 있다. 사방 한장의 부분을 바꾸고자 하여 유둔 한 장을 걷어올리면 구들장 위의 흙 손질한 것이
걷어올리는 대로 일어나 구들장 전체를 다시 깔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 . 그렇다고 3년 동안 바꾸지 않으면 재가 불고래에 가득차 구들장이
쇠붙이처럼 차갑다. 여러 해만에 한번씩 바꾸면 옛 유둔을 내버리고 새 것을 깔아야 하므로 구한 물건을 마구 버리게 된다. 이것이 여섯번째
결점이다.
<복요법>
● 근세에 경성의 부유한 집에서는 이중온돌(複突)을 만들기도 한다.
그 법을 살펴보면 먼저 땅을
고르게 다진 다음 앞부분은 높고 뒷부분은 낮게 한 뒤 일반적인 방법에 따라
고래등을 쌓고 깐다. 그러나 불목은 일반적인 온돌보다 배정도 깊게
하고, 부뚜막으로부터 3-4척 정도 떨어지게 만든다.
■ 탐라지 : 1653
● 사람들은 대개 초가집에 살고 기와집은 아주 적었으며 품관인 사람 외에는 온돌이 없다.
땅을 파고
구덩이를 파서 돌을 메꾸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마른 다음에 취침을 한다.
이는 방 전체에 구들을 놓은 온돌방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제주도의
민가에서 볼 수 있듯이
연료가 마분이며 방의 1/3 정도가 구들이고 나머지에 둥근돌을 쌓아 놓고
굴뚝은 없는 구조로 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즉, 사람들은 대개 초가집에서 살고 품관외에는 기와집이나 온돌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조선초기에는 육지의 양반계층
집들에는 온돌방의 사용이 널리 보편화되었으며, 제주에는 전파가 않된 듯함.
■ 五洲衍文長箋散稿 : 헌종 1834-1849
● 탐라의 풍속에서는 집의 대들보가 다섯이다. 다 마루방으로 하여 자는 곳을 삼고
난돌은 없다.
다만 초목으로 취난했으나 사람들은 질병 없이 나이 백세는 넘기니 사람의 질요는 후양 여부에 많이 달렸음을
비로소 깨닫도다.
사실인즉 온돌제도는 중고 때부터 있었다.
■ 전남 완도군 보길도 세연정 : 17C
● 조선 후기에 윤선도가 병자호란 후 은거하기
위하여 제주로도 가던 중 풍랑을 피해 들렀다가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머물게 된 곳으로 세연정은 세연지 곁에 있는 정자로,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인
정자로 온돌방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퇴간을 두른 평면이다.
특히 온돌이 건물 북동면 중앙 기단 위에 아궁이를 두고 그 반대편 기단에 연도시설을 둔
것이 발견되었는데
아궁이가 놓이는 툇마루 밑에는 날개와 같이 생긴 용도를 알 수 없는 中자형 고래가 놓이고
이 고래는 한 줄로 방을 향해 올라가
방구들과 연결되었다.
■ 전남 화순군 萬樹亭 (조선 후기)
● 중앙부에 온돌방 아궁이에서부터 방까지 이르는 도중 방보다 낮고 작은 온실을 두고,
방벽의 하방쪽으로 작은 창을 내어 통하도록 되어 있어 방안에서 이 작은 온실을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