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의 고향 육신사와 삼가헌 / 신형호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데 있다.’라는 마르셀 프르스트의 말을 가슴에 안고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를 찾았다. 여행이란 힐링이 아닌가? 산뜻한 마음으로 새로움을 즐긴다고 생각하니 콧노래도 나온다. 한때 소나기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쪽빛 하늘은 더 맑고 사랑스럽다. 어귀에서 ‘삼충각’ 비석이 먼저 반긴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육신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묘골은 사육신의 한분인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들이 사는 순천 박씨의 집성촌이다. 반짝이는 햇살이 앞서서 길을 안내한다. 길가에 수백 년의 역사를 안고 차분하게 자리한 고가들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골기와와 추녀의 부드러운 곡선을 보고 걸으니 나그네의 마음도 편안하다. 곧게 뻗은 길을 잠시 올라가니 ‘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린 높다란 외삼문이 나온다. 원래는 박팽년 후손이 제사지내던 사육신 사당 현판은 ‘절의묘(節義廟)’였는데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육신사’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예전 것은 안쪽에 새 것은 입구에 걸게 되었다.
계단위에 자리한 홍살문 아래에 섰다. 홍살문은 문짝 없이 문 가운데가 텅 비어있고, 권위와 신성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화살이 꽂힌 문’이란 뜻이다. 육신사의 홍살문은 다른 곳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횡목 상부(13개)와 하부(11개)의 홍살개수가 다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질이 나무가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것이다. 이는 육신사 자체가 박정희 대통령 때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으로 조성되었기에 당시에는 모두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천천히 ‘태고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정자의 특징은 오른쪽은 팔작지붕이고 왼쪽은 맞배지붕과 부섭지붕으로 지어진 특이한 지붕형태이다. 정면에 ‘태고정太古亭’이란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이고, 옆에는 비해당 안평대군이 쓴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도 새롭다. 단정한 해서체의 한획 한점마다 쓴 사람의 정신이 살아있는 듯 힘차면서도 단정하다. 정자에 앉아 내려다보니 첩첩이 이어진 옛집들이 말없이 과거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중앙에 우뚝 선 육각비가 눈에 확 안긴다. 하단에는 여섯 마리의 거북이 받쳐있고 상단에는 열 두 마리의 용들이 절의를 지킨 신하를 호위하는 형상의 비석이다. 이곳이 처음에는 사육신 중 박팽년만 모셨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박팽년의 후손이 기일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여섯 충신들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게 되었다. 깜짝 놀라 다시 제수를 더 장만하여 다른 다섯 분도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육신사를 내려오면서 곰곰 생각에 잠겼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육신사라고 하면 사육신 모두를 모신 곳이 아닌가.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순천 박씨의 집성촌이기에 다른 다섯 분의 유적은 거의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리도 후손인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수 만평의 땅을 희사하였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달성삼가헌’으로 들어가는 길은 개망초가 지천으로 손을 흔든다. 집을 지키고 있는 후손이 입구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삼가헌三可軒은 박팽년의 11대손 성수공의 호이다. 묘골에서 파회로 분가하여 초가에 살다가, 12대손 광석공이 초가를 헐고 지금의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고 한다. 안채에서 마흔 명이 넘는 손님에게 얼음이 동동 뜨는 시원한 차까지 내어놓았다. 얼음위에 뒤뜰에서 딴 스피아민트 잎이 운치와 향을 더하니 후덕한 안주인의 심성도 느낄 수 있었다. 대문에 걸려 있는 ‘도덕과 평화’라는 패를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나중에 알아보니 부부의 이름이라고 한다.
사랑채에는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弟忠信’이라는 유려한 전서체의 현판이 나그네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이 글은 조선시대의 명필인 미수 허목이 쓴 글이라고 한다. 오른쪽에는 목각에 세로로 새긴 행초서도 눈을 끈다. 글씨는 지금 후손의 부친인 박병규 서예가의 글씨였다. 나도 서예공부를 조금 했다고 자부해 왔건만 한 두 글자를 읽지 못했다. 후손에게 묻고야 뜻을 새길 수 있었다. ‘심청문묘향心淸聞妙香’ ‘오묘한 향기로 마음까지 맑아지네.’라는 뜻으로 당나라 두보의 시 <대운사찬공방4수>중 한 구절이었다.
별당채인 ‘하엽정荷葉亭’은 ‘파산서당’이란 현판과 함께 사랑채 왼쪽 쪽문으로 연결된다. 뜰 앞에 아담한 연못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 연당은 본채를 지을 당시 흙이 필요하여 그 흙으로 집을 짓고 파인 자리를 꾸며 연을 심었다. 하엽정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다. 아직 꽃이 필 시기가 아니라서 활짝 핀 연꽃은 보지 못했지만 쑥쑥 뻗은 연잎에서 싱그러움이 풍긴다. 둥근 연못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네모로 만들어진 것이 이색적이다.
오늘 여정은 시간이 멈춘 공간을 여행하는 길이다. 길을 따라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풀잎이 치는 소리도 즐긴다. 조상의 숨과 얼이 배어있고, 어제의 삶을 돌아보고 내일 살아갈 삶을 비추어 주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다. 선인의 문화유산 속에 어떤 추억이 묻어 있는가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진정한 내 삶의 힐링이 아닐까.
일행을 실은 차는 다음 코스인 하목정으로 천천히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