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마음의 종교 / 김형효 교수
우주적 자연의 마음이 곧 불심이며
기도는 내 마음 불심으로 변화시켜
지난 번에 법신은 법성의 보이는 측면이고
법성은 법신의 안보이는 측면이라는 것을 말한 적이 있었다.
법의 몸과 법의 마음과의 관계가 우주 법계를 읽는 두가지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불자의 모습은 부처님을 맹목적으로 믿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무엇이든지 믿어야 함을 늘 강조하지만, 불교는 믿어야 할 교리가 근원적으로 없다.
오직 불교의 믿음은 이 우주에 늘 있어 온 우주적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 사실은 더 이상 그것을 더 원초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기에
불교는 그 사실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고, 인격적 하나님의 세상주재를 믿고,
인격적 하나님의 선악심판을 믿고,
인격적 하나님이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는 구원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도대체 인격적 하나님이 있어서
이 세상을 진선진미하게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망상임을 불교는 생각한다.
그런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의거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하나의 거짓꾸밈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다.
기독교는 인간의 인격이 이 세상을 아주 지배하고 다스리고 주재한다는
인간중심주의의 철학을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 이외의 존재자는 인간에 비하여 별로 가치가 없다고 본다.
기독교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니고, 신중심주의라고 말하겠으나,
사실상 신중심주의는 인간중심주의와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인간의 인격이 이 우주를 절대로 총관리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다.
바로 이 인간중심주의(신중심주의)의 절대적 인격주의가 철학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세상이 절대적 인격자인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됐다면,
왜 이 세상에 무의미한 부조리가 또한 창조되었는가 하는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인격적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고 관리한다면,
왜 새벽기도를 하러가는 기독교신자들의 버스전복 사고가 나서
불행히도 떼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흔히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악과 전쟁과 같은 불행은
인간이 스스로 잘못 선택한 자유의지라고 하자.
그러나 저 버스사고와 같은 일은 인간이 잘못 선택한 자유의지가 아니지 않는가?
불교는 이런 인간중심주의의 철학을 견지하고 있지 않다.
불교도 기독교처럼 부처님을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순응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부처님께 복달라고 기도하고 소원을 빌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인격적 절대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것과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은 다르다.
절대자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다 쥐고 있는 전지전능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 우주의 마음이다.
삼라만상과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의 욕망을 다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우주심(宇宙心)이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그것을 일심(一心)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은 이 일심에 해당한다.
이 일심은 절대적인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 유일 인격신이 아니다.
일심은 삼라만상 우주적 생명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자연적 마음이
다 함께 이익으로 같이 기뻐하고 괴로움으로 함께 애통해 하는 그런 마음이다.
이 악기의 G선이 저 악기의 G선과 공명을 일으키듯이,
자연적 생명의 세계는 그렇게 서로 얽혀 있다.
불자가 기도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인 인격적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만들어 달라고 이기적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쁨과 슬픔을 우주적 자연적 마음의 바다에 띄워 보냄으로써
나의 개인적 심리적 마음을 자연적 마음으로 희석화시켜
마음을 아주 고요히 진정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흥분된 나의 마음을 자연의 마음으로 묽게 하여 진정시키는 일을 한다.
우주적 자연의 마음이 불심이므로, 기도는 나의 마음을 불심으로 변화시킨다.
자연의 마음이 법성이고, 자연의 몸이 법신이다.
불교는 개인의 마음을 자연의 마음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
2010. 12. 28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