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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문익공(文益公) 백천장(白天藏) 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83호)
1 . 위치 :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기안리 산7 (고금산(86.6m)下)
고려시대 문신이자 수원백씨의 9세조인 문익공(文益公) 백천장(白天藏) 선생 묘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기안리 고금산(86.6m) 아래에 있다.
화산(108.2m)에서 정조와 사도세자의 隆健陵을 보고 2km정도 가면 3거리에서 우측으로 500m직진 좌측에 수원농업전문대학 전문 맞은편 도로변에 백천장 푯말이 있다.
우측 산 기슭을 따라 조금만 돌아가면 깨끗하게 정비된 백천장 선생 묘지가 나온다. 묘지 주변에 철망을 쳐놓고 주차장 문을 잠그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힘들지만 墓 案山쪽 넓은 공터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묘비는 봉분의 오른쪽에 신비와 구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석물로는 양석, 묘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 무덤을 수호하기 위하여 세우는 문인석,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우는 장명등이 있다. 묘역 앞 약 50m지점에 큰 연못이 있고 묘소 입구 약 200m지점에는 1975년에 건립한 神道碑가 있다.
수원의 주산인 광교산(582m)에서 백운산(564.2m), 오봉산(205m)을 거쳐 안양군포의 주산인 수리산을 만든다. 여기서 한남정맥은 계속 서북진하여 김포 월곳면 문수산(376.1m)과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도까지 이어진다.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은 의왕시 부곡동 신갈-안산간 고속도로 의왕 나들목(I.C) 부근을 지나 구봉산(九鳳山, 146m)을 만들고 다시 남하하여 화성군 매송면 원평리에 기세강한 칠보산(七寶山, 238.8m)을 일으킨다.
칠보산은 화성군 서쪽일대 지기를 관할하는 태조산(太祖山)으로 산은 높지 않지만 험한 바위로 되어 있다. 칠보산의 중심맥은 화성군 매송면 천천리로 내려와 순한 야산으로 변한 다음 험한 살기를 모두 털고 수원과 남양 안중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난다. 수 천리를 행룡하는 대간룡은 때로는 고산 지역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야산이나 작은 구릉을 행룡하며, 때로는 평지인 들판을 건너기도 하는데 이를 용의 삼세(三勢)라 하여 각각 산룡세(山龍勢), 평강세(平岡勢), 평지세(平地勢)라 부른다.
수원 권선구 장지동은 넓은 평야이고 기안리 일대는 낮은 구릉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 두 개의 산이 우뚝 솟아 일대의 기가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는 형상이다. 화산은 마치 보름달이 반쯤 떠오르는 듯한 무곡(武曲) 금성체(金星體)이고 古琴山은 귀인이 앉아 있는 듯한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다.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 능을 화산으로 옮겼는데 왕릉이 조성되면 10리 이내의 민간 산소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하는 것이 당시 법이었다. 그러나 학문을 숭상한 정조는 백천장 선생 묘가 있는 것을 알고 묘 주변에 깃발을 세우고 이곳 안 쪽은 제외하도록 하였다.
이를 나열삽입(羅列揷入)이라 하는데 기전동(旗田洞), 기안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깃발을 세운 안쪽이라는 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묘지 위에 오르면 수원 시내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확 트여 시원함을 준다. 얼핏보기에는 혈을 감싸주는 청룡 백호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주산인 고금산에서 양쪽으로 개장한 능선이 이중삼중으로 가깝게 감싸주고 있다. 주변 산이 가깝게 감싸주고 있으면 속발(速發)이 특징이다.
특히 백호는 혈 앞을 감고 돌아 청룡 끝까지 끌어 안아주고 있는데 그 위로 마을 길이 나있다. 청룡 백호가 감싸준 안의 공간은 평탄원만(平坦圓滿)한 명당이 형성되어 길한 모습이다. 지금은 이곳을 성토하여 잔디를 심고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는데 참배하러오는 후손들이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공원을 만들 었다.
멀리보이는 산들은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듯 하고 있다. 이를 나성(羅城)이라고 하는데 마치 혈을 중심으로 외곽에 성을 쌓은 것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성이 있으면 혈의 생기를 외곽에서부터 보호하므로 대지명당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나성 안의 명당은 원만하면서도 광활하고 짜임새가 있으니 온갖 재물을 쌓을 수 있는 곳이다.
主山과 穴場이 단정하고 밝아 귀(貴)를 낳게 한다면 내명당과 외명당은 부(富)를 낳고 있다.
입수도두에서 주산 쪽을 바라보고 입수룡을 살펴보면 짧은 거리지만 많은 변화를 하였다. 거리가 짧은데 변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용맥의 기세가 활발하다는 것을 말한다. 생왕룡(生旺龍)에서만 혈의 결지가 가능하다.
입수룡(入首龍)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살피기에는 쉽지 않은 장소지만 입수도두와 연결된 작은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맥이 좌우로 국곡하면서 주산의 능선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큰 능선인데 이 능선에서 入首脈이 出脈한 것으로 보여잔다.
선생의 묘도 하늘이 지켜주었다 하여 천사릉(天使陵)으로 일컬어 왔다. 풍수지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명혈(名穴)임을 금방 알 수 있는 곳이다. 우선 산소 아래 연못이 이곳이 혈임을 증명해준다.
혈 앞에 샘물이 솟는 것을 진응수(眞應水)라 하는데 진응수 중에서도 연못이나 물웅덩이가 될 만큼 수량이 많은 것을 지당수(池塘水)라 한다. 지당수의 형성은 생기를 용맥 양쪽에서 보호하면서 따라온 물이 혈 앞에서 합수하여 지상으로 용출(湧出)된 것이다. 수량이 풍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주룡의 기세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기세가 강한 용에서만이 대혈(大穴)을 맺을 수 있으므로 이곳이 대혈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또 지당수가 있으므로 혈의 생기가 조금도 앞으로 누설(漏泄)되지 않고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 역할을 해준다.
생기는 물을 만나면 멈추기 때문이다. 묘 근처 산세를 보면 골짜기가 많지 않아 지표면의 물이 유입될 곳이 없는데도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연못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 이유를 풍수지리를 모르고 설명할 수 있을까? 풍수지리는 이처럼 자연의 현상을 자연 이치에 맞게 설명하는 학문이다.
지당수가 혈 앞에 있으면 왕정치부(旺丁致富) 즉 자손이 왕성하게 번창하고 큰 부자가 된다고 했다. 백천장 선생 후손들이 백씨들 중에서 가장 많이 번창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혈 앞에 지당수가 좋다하여 인공적으로 연못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용혈의 생기를 누설(漏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묘 앞에 웅덩이를 파면 혈의 생기를 보호하고 있던 수기가 웅덩이로 빠지면서 혈의 생기도 같이 뽑아 나오기 때문이다.
3 . 이기론
입수맥을 좌측으로 출맥시킨 큰 능선은 계속 나가 백호를 형성한다.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안정감이 있는 이곳은 백자천손(百子千孫)할 자리이지만 특별한 안산(案山)과 사격(砂格)이 없다는 것이 흠이다.
主山이 좋으면 主山과 相應할만한 案山이 있어야 제대로 발복이 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砂格은 발복을 극대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렇다할 특징 있는 砂格이 없다. 그래서 일까 수원백씨 문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오긴 했지만 역사적으로 크게 賢達한 人物은 없었다.
白天藏 先生 墓 좌측 청룡 능선에는 수원백씨의 시조인 송계(松溪) 백우경(白宇經) 선생의 묘단(墓壇)이 있다.
이곳 穴場은 간인파(艮寅破)로 물은 우측에서 득수하여 좌측으로 흘러가는 우수도좌(右水倒左)이므로 신좌을향 ㅡ 술좌진향(辛坐乙向ㅡ 戌坐辰向)을 하여 吉向인 정양향(正養向)을 하였다.
우측의 손사장생수(巽巳長生水)와 병오천록귀인수(丙午天祿貴人水), 정미관대수(丁未冠帶水), 곤신임관수(坤申任冠水)가 같이 간방절위(艮方絶位)로 나가니 正養向으로 귀인록마상어가(貴人祿馬上御街)라 하여 귀인록마(貴人祿馬)가 대궐길에 오른다는 말이며, 양향절파(養向絶破)로 양공(楊公)의 구빈진신수법(救貧進神水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