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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52)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본문 : 마11:2-11 (신 17)
어느 전도사님이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교만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무슨 설교를 저렇게 하나!
내게 기회가 주어지면
깜짝 놀랄 설교를 할 텐데…….”
드디어 설교할 기회가 왔습니다.
매우 열심히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강단에 서 보니
아무것도 안 보이고...,
떨리기만 하고.....
손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고....,
목소리는 자꾸만 기어들어가는 겁니다.
갑자기 뒤에 앉은 교인이 손을 번쩍 들면서......
“전도사님! 안 들리니까
크게 말씀하세요.”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맨 앞에 앉은 교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차라리 안 들리는 게 낫소!”
못 들어 주겠다는 거죠.
설교는 하면 할수록 더 어렵습니다.
늘 기도해 주시기를.........
<세례 요한의 질문>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이 질문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했다면 모르겠지만 ....
세례요한이 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대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 그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고 ...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에게 서슴없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며
회개를 촉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불과 같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또 이 세례요한이 어느 날
예수님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탄성을 질렀고 .....
자신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진정 따라야 할 분은
저분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줄 만한
노예도 되지 못한다”고
자신을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까지
베풀었던 사람이고....
세례를 베풀 때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3절)
세례요한이 의심의 덫에 걸리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
- 환경의 악조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례요한은 옥에 갇혀있는 상황입니다(2절).
캄캄하고 습기 차고 춥고 배고프고....,
심지어 고문까지 자행되는 그런 감옥에서.....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
오랜 세월 동안 거기서 육체의 제한을 받았을 때
(아무리 광야에서 훈련된 세례요한이라 하더라도)
절망감과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소망을 잃고
순간적으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의심이 꼭 불신앙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어려울 때 사람에게는
마음의 동요와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사람도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의심합니다.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요
위대한 선지자요 성자와 같을지라도,......
어느 한 순간 환경의 변화로 인해
최악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일을 하다가 거의 탈진 지경에 이르게 되면
우울증과 심리적인 위축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왕상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번제물을 놓고 어느 신이 불로서
응답하는가를 내기한 것입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불태웠습니다.
승리한 엘리야는 사백 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모조리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와 같이 1대 450의 대결에서
승리한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왕상19장에는 의외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엘리야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화가 나서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러자 그토록 용감했던 우리의 엘리야가
이 이세벨의 한마디 말 앞에 절망하고 맙니다.
그녀를 피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남쪽 끝)까지 멀리 도망을 갑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평양에서 활동하던
엘리야가 남해 땅 끝 마을까지 도망을 간 것).
그것도 모자라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더 갑니다.
그리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19:4).
한마디로 “나를 죽여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한 엘리야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분노를 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너무 지쳐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그를 어루만져 주시고 친히 먹을 것을....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먹고
마시면서 충분히 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찰력입니다.
-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불신앙 때문인가 .....
- 아니면 인간적인 약점과
조건 때문인가를 통찰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다가도 어느 순간,.....
곧 생각지 못했던 고난이 닥칠 때에.....
(어려운 환경에 오랫동안 머물 때에)
신앙의 침체에....,
의심의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지만.....
속에서는 .....
-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 내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가?....
-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하는 등등의 의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영원히 의심 없이 잘 믿는 사람은
지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정직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도 육신을 입은 한 인간으로서,...
육신의 고통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 순간적으로
의심의 덫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여, 당신이 정망 메시아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약속한 그 메시아입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응 : 꾸짖지 않으심>.......
이러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본문 4-5절 읽어라>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근본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일시적인 환경의 어려움....,
육신의 고통 때문에 .....
그 마음에 좌절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상담가요
심리학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품과 체질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성도님들!
가운데에도 한때 우리는 주님을 잘 섬겼으나 .....
지금은 탈진상태에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때 주님은 무조건 야단을 치시지 않습니다.
“우선 쉬어라. 그리고 다시 생각하라”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분명한 말씀을 통해...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35:5-6 읽어라>
5절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절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사야 61:1 읽어라>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5절 읽어라>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세례요한을 칭찬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불쑥 나타나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가니까.....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화나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비판하고 정죄하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
세례 요한의 위대성에 대하여
(몇 가지 비유를 통해서) 적극 변호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본 위대성은 무엇입니까?
<본문 7-9절 읽어라>
7절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절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하여....
광야로 기꺼이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거처가 바로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문(질문)의 형식으로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적극 변호합니다.
첫 번째 질문,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7절)
즉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지조 없고....
신념이 없는 사람 아니라,.....
한결같은 신념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그가 옥에 갇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비록 왕(헤롯)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
추상같은 질책을 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
신념....,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문(질문)의 형식으로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적극 변호합니다.
첫 번째 질문,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7절)
두 번째 질문,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8절)
부드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자기의 욕망이나....
성취감을 만족시키며.....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느끼는 사람을 ....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왕궁이란......
권력의 주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권력의 주변에 가면 .....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광야에서 청빈한 삶을 삶)......
세례 요한은 자신의 편안함이나
높은 지위를 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오직 진리와 정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광야에서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위대하다.
예수님은..... 반문(질문)의 형식으로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적극 변호합니다.
첫 번째 질문,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7절)
두 번째 질문,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8절)
세 번째 질문,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9절)
그러면서 스스로 답변을 내리십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9)
유대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끝으로
무려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인생최대의 목마름은 .....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갈증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못지않게 .......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예언자들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메시아를 준비한 사람>......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위대함이.....
선지자 정도였다면 ......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예레미아..... 등
구약에서 존경받는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그들보다 나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10절에 있습니다.
10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말3:1)
이 말씀은 말3:1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 메시아를 기다리고.....
- 메시아를 가르치고,......
-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했다면,..........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직접 만나서
그 길을 앞서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절a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실족
실족한다.
여러분, 이 말을 자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실족한다는 발을 헛디디고
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걸을 수 없게 됩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에 문제가 발생하면
실족했다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실족하게 되던가요?
교회나 목사에 대한 실망,
아니면 여러 이유로 실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한 번쯤 실족하기 마련입니다.
실족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되었냐?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얼마나 다양하든지
간에 실족하게 되는 이유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것은 품었던 기대에 대한 실망입니다.
때로 실족으로 신앙이 좌초되고
심지어 아예 뿌리마저 뽑히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족하는 것을
절대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해 열정을 품으면
품을수록 크게 실족할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선 줄로 생각한다면
넘어질까 조심하신 말씀을 유념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지 않을 줄 알고 도주했고
많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에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떤 선지자는 하나님께 소리치며
묻고 싶어서 높은 망대에 오르기도 했고
어떤 선지자는 세상에 만연하는
악의 문제로 인해 거의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실족은 믿음이 없고
열정이 없는 자에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실족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실족이 그 누구도
아닌 세례요한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실족은 세례요한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 내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날 때부터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예수님 앞서 보내셨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자신에게 오는
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은 그야말로 회개를 몸으로
소리로 외치는 자였습니다.
약대 털옷은 회개할 때 입는
베옷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거칠고 아프게 합니다.
그는 세상과 분리된 광야 죽음과
고난을 의미하는 땅에서 회개를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은 광야로 몰려와
그의 말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으며
심지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인기를 온몸에 받았지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걸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그의 귀에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옥에 갇힌 그에게 예수께서
타작마당을 정리하듯 불로 세상을
심판하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더욱 승승장구하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기대는 무너졌고 그는 예수님에 대해
포기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확인을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이 흔들렸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그건 그의 기대와 예수님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대신
자신의 기대를 붙들고 있습니다.
“실족한다.” 실족하는 것의 태반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신의 기대를
붙들 때 벌어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게 맞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 삶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그렇게 되던가요?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타당한가요?
실족의 원인이 자신의 기대라면
우리는 기대를 버려야만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며 내 영혼과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염려입니다.
세례요한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내가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으니
그것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선지자 이사야가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했던 것이 바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의심의 구덩이에 빠졌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가 붙들어야 할 것은 그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고민해야 할 건 도리어 자신이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해 괴로워하고
세례요한이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것에 대해 당황한 것처럼
우리도 기대와 현실 속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자신의 영혼에 대한
염려 대신 온갖 다른 것에
매달려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반드시 실족하게 됩니다.
물론 실족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그럴 수 없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책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를 다시 세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
예수님에게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광에 흩날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생명 없는 땅에서 열매 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사명을 위해 옥에 갇히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궁에 있는 자들처럼 자신의 인기를 통해
권력과 부를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화려하고 좋은 옷 대신 거친 낙타털로
옷을 지어 입고 왕궁의 진미 대신
광야에서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소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누가 세례요한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나은 자라고 평하셨습니다.
그는 선지자 그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는 예수님은 단언하십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이런 평가는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례요한은 대단한 자임은 분명하나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지 못했으며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사람처럼
그 시대의 눈과 그의 기대를 통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세례요한을
예수님 이전 시대의
마지막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큰 자이나 천국의 가장 작은 자
즉 예수님의 복음 안에 있는 자보다
작다고 말씀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보다 천국에 있는 자 중
가장 작은 자도 세례요한보다
큰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며 예수님에 대해
절대로 실족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는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나라의 주인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가장 작은 자와
큰 자의 기준은 바로 예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 바울이 말하는 거울은
유리가 없던 시절 구리 같은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 거울은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왜곡되게 보여줍니다.
그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기대와 맞물릴 때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아니 목이 말라 죽을 것처럼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영혼과 영원한 삶에 대한
정말 깊은 고민을 지니고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기대가 무너지고 실망이 될 때
그러면 그럴수록 찾고 붙들어야만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기대가 아니라 내 영혼에 대한
고민이 우선입니다.
기대는 충족될 수도 있고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그대로 있는 법은 없습니다.
교회도 가정도 세상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단순히 기대가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있다면
주님이 누구신지 안다면 옥에서도
소망을 지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하겠지만
소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울을 보듯 희미하나
시간이 지나면 얼굴과 얼굴에 대하여 보듯이
모든 것이 확연해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우편에 계신 주님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더는 의구심도 실족하게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을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충분히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강하던 세례요한이
그렇다면 우리는 더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통해 바로
그런 그를 잡아주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세례요한의 실족에서
말씀으로 건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 주시기를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실족하고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실족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시며
내 영혼을 위한 진지한 염려로 주님 앞에 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도 환경에 따라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환경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격려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변호하여 주십니다.
마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확실한 응답을 듣고 ...
당당히 순교했던 것처럼 ......
우리에게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침체를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영적 침체의 순간을 맞이한다 해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정하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영적 침체에 있는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