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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분홍빛 비단이불을 깔아놓은 듯한 철쭉이 극락보전 주위를 에워싸며 청정도량을 천연색으로 수놓고 있다.
| 해인사 2대 강주 명봉 스님이 창건 철저한 참선 수행 가풍 이어져 법당·요사채 뿐인 소박한 절
붉은 바위 가에 잡고 온 암소를 놓게 하시고 저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향가인 <헌화가>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라 성덕왕 재위 무렵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순정공이 부인 수로가 천길 절벽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에 반해 누가 꽃을 꺾어 줄 사람이 있는가 물어본다. 모두 망설이자 마침 지나가던 견우 노인이 이 노래를 부르며 수로부인의 허락을 기다려 꽃을 꺾어 따온다. 이 꽃이 바로 철쭉이다.
이 노래에는 절세가인인 수로가 초라한 늙은이에게서 꽃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까봐 걱정하는 노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전국의 산에서 돌아가며 철쭉 잔치가 펼쳐진다.5월산의 주인공은 단연코 철쭉이다. 봄의 여왕 벚꽃이 꽃비 흩날리며 퇴장한 늦은 봄. 벚꽃처럼 잎 버리고 홀로피지 않고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푸른 잎 사이 수줍게 피어나 붉은 자태 뽐내는 철쭉의 계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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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사는 1994년 개축한 17평 규모의 극락보전이 주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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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이하는 이즈음의 주인공은 철쭉이 제격이다. 붉은 꽃잎이 눈부신 철쭉은 늦은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길목에 절정을 이룬다. 예전에는 철쭉은 산에나 가야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곳곳에 쉽게 붉은 빛을 토해내는 철쭉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철쭉은 군락을 이루어야 더욱 빛을 발한다. 전주 감천사의 철쭉이 그러하다.
감천사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서면 붉은 철쭉을 만날 수 있다. 주차장 주변부터 주법당인 극락보전을 둘러싸고 온통 철쭉 잔치다. 족히 잡아 수백그루는 되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극락보전 단청도 철쭉을 닮아 보인다.
전주의 팔복동 공단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처럼 자리잡은 감천사는 100여년 짧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 2대강주를 지내신 명봉 스님이 창건했다. 창건 당시는 명봉 스님이 주석하면서 자신의 공부를 위해 지은 작은 인법당이었다. 명봉 스님은 우리나라 근대 강맥의 두 산맥인 진응 스님과 한영 스님 중 한영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수 받은 대강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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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삼존불이 인상적인 극락보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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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명봉 스님을 해인사 강주로 모시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중앙포교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66년 역경위원으로 당시 종정 효봉선사로부터 위촉받기도 했다. 1973년 선학원에 등록하라는 스님의 말씀에 따라 선학원 사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학원에 등록할 때의 이름인 보승선원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현주지 훈재 스님과 남원 승련사 경훤 스님에 따르면 동학사서 공부하던 중 명봉 스님이 감천사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6명의 스님이 무작정 감천사를 찾아 능엄경, 원각경, 화엄경 등의 경전을 공부했다. 강의 하실 때는 경전이나 노트도 없이 어느 경전이든 줄줄 외워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명봉 스님은 경전 공부를 하면서도 참선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항상 가르쳤다. 경전을 아무리 줄줄 외워도 참선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제대로 된 강의를 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물론 명봉 스님 자신도 쇠방망이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참선을 했다고 한다.
명봉 스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한 스님들은 절 살림이 어려워 전주 정혜사, 익산 혜봉원등 인근 사찰서 김치, 쌀, 양초를 탁발해 가며 공부를 이어왔다. 스님들이 직접 탁발 하면서 공부 했다.
경훤 스님은 “그 당시는 참 어려웠지만 모두 힘든지도 모르고 공부했죠. 아마 신심이 없었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시기였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명봉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곳 감천사는 내가 열반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절 시주 받지 말고 뽕나무라도 심고 그것을 거울삼아 힘들더라도 수행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라는 유시를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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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 스님 부도탑 |
1973년 세납 88세, 법납 72세로 입적한 명봉 스님의 부도는 감천사 철쭉동산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명봉 스님의 유시를 받들어 현주지 훈재 스님은 절 앞마당에 유실수를 심고 법당주변에는 온통 철쭉나무를 심어 도량을 장엄했고 염불 소리가 1년내내 멈추지 않는 수행도량으로 키워오고 있다. 또한 절 앞마당은 전주 공단이 들어서면서 도로에 편입되는 바람에 모두 없어졌지만 지금도 명봉 스님 유시에 따라 스스로 자급자족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감천사는 자연이 주는 선물인 꽃 이외에는 내세울게 없는 소박한 절이다. 전각도 극락보전과 요사채 달랑 2채뿐으로 단촐하다. 1994년 개축한 17평 규모의 극락보전 단청도 지난해에야 불사를 마쳤다. 극락보전 내부도 아미타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작은 삼존불을 모셨고 외형적인 불사보다는 스님들과 신도들의 마음불사에 전념하는 꽃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운 절이다. 그래서 더욱더 정이가고 그리워진다.
전주 감천사=조동제 전북지사장
여행수첩
<주변 가볼만한 곳>
▲한옥마을 /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들어와 전주성벽을 철거하고 중앙의 상권을 독점하자 한국인들이 1930년경 이에 대한 반발로 전주시 교동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에는 교동 한옥마을과 화산동의 양옥형식인 선교사촌, 교회, 일본식 집들이 집단 형성돼 묘한 도시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한옥마을 입구에 전동성당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이 마주하고 있어 한옥과 양식건축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경기전 / 전주에 있던 어용전을 가리키는데 이는 조선 태종 10년(1410)에 완산·계림·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세종 24년(1442)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고쳐 지었다. 건물 구성은 중심 건물과 부속건물, 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제사기능을 지진 건축물의 특성을 잘 따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 모신 태조의 영정(초상화)은 세종 24년(1442)에 그린 것을 고종 9년(1872)에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맛집>
전주는 맛의 고장이다. 비빔밥과 콩나물 국밥이 유명하다. 비빔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여러 곳 있지만 가격이 조금 비싼편이다. 최근에는 지역 농산물은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로컬푸드 운동이 일어나 로컬푸드 전문 식당이 늘어나고 있다. 완주 로컬푸드(www.hilocalfood.com)사이트에 들어가면 원하는 입맛에 맞게 자세한 식당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그중 로컬푸드 농가 레스토랑 비비정(063-291-8609), 청와삼대(063-223-0990), 전주 풍남정(063-285-7782), 콩나물국밥 왱이집(063-287-6980), 성미당(063-287-8800), 한국관(063-272-9229) 등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전주의 향토음식인 비빔밥과 한정식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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