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先弘慶寺記 (봉선홍경사기) - 崔冲 (최충)
臣謹按內典云。招提者。謂招引提携十方英俊。弘闡佛法居止之所焉。又莊子設蘧廬而視仁義。晉書論逆旅以濟公私。
신이 삼가 생각건대 불경에 이르기를, “초제(招提)라는 것은 여러 곳의 우수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서로 이끌며 널리 불법을 천명하기 위하여 거처하는 곳이다.” 하였으며, 또《장자(莊子)》에는, “여관(旅館)을 설치하여 인의(仁義)를 보인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여관을 만들어서 공무로 다니는 사람이나 사사로 다니는 사람을 구제한다.” 하였다.
今之於稷山縣成歡驛北路一牛鳴地。新置寺舍者。卽其類也。地無長短之亭。人煙隔絶。有蕉蒲之澤。劫賊頗多。雖歧路之要衝。實往來之難便。不可終否。屬於盛時。
지금 직산현(稷山縣)의 성환역(成歡驛)에서 북쪽으로 1마장쯤 되는 곳에 새로 절을 세운 것은 곧 그러한 종류에 속한다. 이 땅에는 전연 객주집이 없어서 사람의 집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그런데다가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서 강도가 상당히 많으므로, 비록 갈래길로서 요충지이지만 사실은 왕래하기가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태평성대에 이곳을 그대로 둘 수가 없는 곳이었다.
惟我主上守位以仁。秉文之德。干戈戚揚。皆偃之矣。禮樂刑政。畢修之矣。若乃喜捨之緣。遹追之業。求諸往代。無得而踰。
생각건대 우리 임금이 인(仁)으로서 왕위를 지키며 문화의 덕을 베풀어 무기의 종류들은 모두 버려두었으며, 예악형정(禮樂刑政)이 모두 밝혀졌으며, 특히 희사(喜捨)하는 인연과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일은 옛날 임금에게서 찾아보아도 나은 분이 없다.
甞命左右。兩街都僧錄通眞光敎圖濟弘道大師臣逈兢曰。昔者皇考安宗憲景孝懿英文大王。初九潛身。大千歸命。每覽法華之妙說。深嘉中道之化城。方欲効行。未能勳集。
일찍이 좌우양가 도승록 통진광교원 제홍도대사(左右兩街都僧錄通光敎圓濟弘道大師)인 신하 형긍(逈兢)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황고(皇考)이신 안종 헌경효의영문대왕(女宗憲景孝懿英文大王)께옵서 왕자로 계실 적에 불법에 마음을 돌리시어 항상 《법화경(法華經)》의 오묘한 학설을 보시고, 깊이 중도(中道)에서 성(城)을 만들었다는 말에 감동하시어 이대로 실천하려 하시다가 마침내 공을 이루지 못하셨다.
朕則善繼其志。永觀厥成。一則救濟征人。莫憂於險地。一則招携緇侶。載轄於法輪。師宜力視贊襄。躬親胥宇。副我書貞之命。主其廬事之權。兢受綸言便圖經。
짐(朕)은 곧 그 뜻을 잘 계승하여 영원히 그 성공을 보아야 할 터인데, 한 가지는 곧 길가는 사람을 구제하는 데에 있어서 험난한 땅보다 걱정스러운 곳이 없으며, 한 가지는 곧 승려를 모아들여서 불법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니, 대사는 마땅히 노력하여 그 뜻에 협조하여 직접 터를 보아서 내가 부탁하는 명령에 부합되게 하며 그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맡으라.” 하시어 삼가 왕의 명령을 받고 지도를 펼쳐 보았다.
縱九迴而無倦。須百足以不僵。所貴同心。用將籲俊。爰有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臣得聦。靜慮修眞理大德賜紫沙門臣藏琳等。競扶顚轂。枚卜要途。蒸烈來斯。實與我役。
비록 9번을 돌아다녀도 게으른 줄을 몰랐지만 반드시 많은 협력자가 있어야만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같이할 사람이었으므로 곧 우수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광리 증현대사 사자사문(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인 신하 득총(得聰)과 정려수진전리대덕 사자사문(靜慮修眞理大德賜紫沙門)인 신하 장림(藏琳) 등이 다투어 넘어지는 수레를 부축하며 모두 중요한 길목을 점령하였다. 열의를 다하고 모여들어서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上續差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知中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二百戶姜民瞻。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太子賓客,柱國,宜春縣開國男食邑三百戶,賜金紫魚袋臣金猛等。爲別監使。
임금께서는 계속하여 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겸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개국남 식읍 이백호(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知中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二百戶)인 강민첨(姜民瞻)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 사금자어대(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太子賓客柱國宜春縣開國男食邑三百戶賜金紫魚袋)인 김맹(金猛)등에게 명하여 별감사(別監使)로 삼았다.
於是事諧共理。謗絶宣驕。庀徒勿奪於農時。程物免煩於公帑。陶人施瓦。木客供材。靈鉅風斤。蜂聚蕩心之匠。雲鍬電鍤。駿奔游手之群。
그리하여 일을 함께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모두들 공치사나 교만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인부를 사역하는 데도 농사철을 피하였으며 물자도 국가의 창고에서 꺼내지 아니하였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무꾼은 목재를 공급하였다. 톱질과 자귀질은 일 없는 목수들을 모아서 시키고 괭이질과 삽질에는 놀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일하였다.
起自丙辰秋。迄于辛酉歲。凡造得堂殿門廊等共二百餘閒。所置塑畫諸功德像。及鐘磬幡盖具如見在。其數寔繁。乃賜額爲奉先弘慶寺。莫不功由鳩僝。勢若飛來。像殿經樓。麗異而宛疑兜率。鳧鐘鴈塔。莊嚴而遙認爛陁。旣當三寶勃興。實可千燈相續。
병진년 가을에 시작하여 신유년까지 법당ㆍ불전ㆍ대문ㆍ행랑등 모두 2백여 간을 세웠고, 그곳에 안치할 소상(塑像)ㆍ화상 등 여러 공덕(功德)의 상(像)과 종경(鍾磬)ㆍ번개(幡蓋)들은 모두 현재 있는 대로이니, 그 수가 사실 많았다. 마침내 절 이름을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고 내렸다. 공사는 여러 사람의 힘을 합쳐서 이룬 것인데, 외모는 어디서 날라온 듯이 보였다. 불상을 모신 불전, 불경을 봉안한 경루(經樓)는 화려하고 기이하여 완연히 도솔궁(兜率官)인 듯 의심스럽고 종(鍾)과 탑(塔)은 장엄하여 멀리서도 절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불도가 크게 진흥되는 때를 만났으니, 실로 영원한 불법의 계통이 서로 계승되리로다.
又於寺西。對立客舘。得一區許八十閒。號曰廣緣通化院。斯亦溫廬冬密。涼屋夏寬。積以糇粮。貯之蒭秣。施賙窮急。設雍伯之義漿。防備盜姧。列陳留之樓鼓。
또한 절의 서편에 여관[客館]을 마주하여 세웠는데, 한 구역이 80간쯤 되었다.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였다. 이곳도 겨울에 사용될 따뜻한 온돌방과 여름에 사용할 널찍하고 시원한 방이 마련되었고, 식량을 저축하며 말먹이도 저장하였다. 빈궁한 사람을 구제함은 옹백(雍伯)이 설치한 의장(義漿)의 제도와 같으며 도둑을 방비함은 진류현(陳留縣)에서 누고(樓鼓)를 세운 것과 같다.
夫如是則不獨方袍之衆。虛往實歸。亦令裹足之徒。宵盤晝憇。終見證眞之境。蔑聞焚次之虞。向若非酌古沿今。賽先王之弘願。隨機設敎。宗彼佛之妙門。則兼濟之仁。幾乎而息。於戲權輿有旨。祖述無窮。
이렇게 되고 보니, 법복을 입은 무리가 맨 손으로 왔다가 실속을 얻어서 돌아갈 뿐 아니라, 길을 가던 나그네가 밤에 헤매다가 낮에는 휴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는 진리를 증명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불한당이 나올 우려가 없게 되었다. 지난번에 만일 옛것을 참작하고 현재를 감안하여 선왕(先王)의 염원을 이루며 기회를 따라서 가르침을 실시하여 부처님의 오묘한 법문을 높이지 아니하였다면, 곧 모든 사람을 구제해야 할 인자한 정책이 하마터면 없어질 뻔하였다. 아아, 출발함에 깊은 의의가 있으니, 영원토록 계승해야 할 것이다.
肯構之功。旣存矣。奉行之道。亦廣矣。盡善盡美。念玆在玆。今則申命儒生。俾書盛事。臣思遲燥吻。學淺嚼筯。雖長卿形似之文。無能爲也。而小子斐然之作。竊敢効焉。略記端倪。聊裨寶錄。時聖上御圖之十八載大平紀曆之第六年夏四月日。謹記。
창건한 공로는 이미 이루었으니, 받들어 시행하는 길도 또한 범위가 넓다. 최선을 다하며 언제나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곧 유생(儒生)에게 명하여 이 거룩한 사실을 기록하라 하셨는데, 신은 생각이 부족하며 학식이 얕아서 사마장경(司馬長卿)처럼 모방하는 문장을 쓸 수는 없사오나, 서생으로서 문채 나는 작품을 감히 흉내내 보고자 한다.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역사 자료로서의 도움이 되게 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18년 되는 해, 태평(太平) 연호(年號) 제 6년(고려 현종 17년. 1026년) 여름 4월 일에 삼가 기(記)를 씀.
ⓒ 한국고전번역원 | 임창순 (역) | 1968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있는 고려시대 봉선홍경사의 창건 기록을 담은 사적비. 석비.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026년(현종 17) 건립. 화강암제로서 이수와 귀부를 모두 갖추어 일반 석비(石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현종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홍경사를 조성하였다는 뜻에서 전액(篆額)을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 사명(賜名)하였다. 갈기(碣記: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절이 있는 곳에 인적이 끊겨 도적이 많았으므로 이러한 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승려를 불러 불법을 전하고자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 7년에 기공하여 6년 여에 걸친 공사로 당전(堂殿) 등 200여 칸을 짓고, 또 절 서쪽에 객관(客館) 80칸을 세워 경연통화원(慶緣通化院)이라 불렀다 한다.
글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최충(崔沖)이 지었으며, 글씨는 백현례(白玄禮)가 썼다. 글씨는 자경 3㎝의 해서로 용필과 짜임새가 엄정하다. 구양순(歐陽詢)의 「황보탄비(皇甫誕碑)」에 가까우며 고려시대 해서로는 제1급이다.
방비원갈(方碑圓碣: 네모난 비석은 ‘비’라하고 둥근 비석은 ‘갈’이라한다)이라 하여 본래 비와 갈은 구분되었으나 이 홍경사갈은 일반적인 비와 다름없다.
현존하는 사적비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용두화(龍頭化)된 귀두(龜頭)는 오른쪽으로 돌려 생동감을 더하고 있으며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장식하였다. 귀갑(龜甲) 중앙에는 앙련과 복련을 새긴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 상단에는 전액이 있으며, 비면 가장자리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두르고 비신 옆면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도식화된 雲龍文을 조각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