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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짜소동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죠. 신정아씨부터 시작된 학력위조사건부터 속속 밝혀지고 있는 사회 유명인사들의 가짜 학력들. 이중섭, 박수근 위작으로 추정되는 약 2000여 작품이 거의 위작인 것이 틀림없어보인다는 기사. 학원가에서도 가짜 서울대, 연고대 출신 강사들이 판을 친다고하네요. 밖에서 지켜다보는 입장인 전 줄줄이 이어지는 기사들이 흥미롭기만 합니다. 속은 피해자들이 어째 더 창피한 사건이 사기사건이잖아요. 사기라는게 인간의 허영심을 파고드는 범죄라..당한사람도....참 뭐 할말이 없는 일이죠. 아무튼... 그렇습니다. 조명계 교수의 미술품 위작이야기 -헤럴드경제신문 <1>반 고흐 '해바라기'
87년 日경매서 '가짜논란' 떠들썩
15년후 진품문서 발견 해프닝으로
반 고흐 '해바라기' 위작논쟁
미술품과 관련된 범죄로는 '도난'과 '위작 유통', 두 가지가 있다. BBC는 해마다 전세계적으로 만여점의 미술품이 도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FBI는 연간 도난당하는 미술품 규모가 50억달러를 상회한다고 밝힌바 있다. 최근에도 피카소 외손녀의 아파트가 털려 620억원 어치의 초상화 두점이 깜쪽같이 행방을 감췄다.
그렇다면 위작의 유통규모는 어느정도일까. 정확한 액수는 추산이 안 되니 그저 노출된 사건들로 유추해볼 수 밖에 없다. 작가에게는 저작권과는 구별되는 '모럴라이트'가 주어진다. 작가 스스로 본인이 제작했음을 알릴 권리, 작품을 회수할 권리,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 왜곡손상에 대응할 권리 등이 바로 모럴라이트다. 따라서 위작의 제조와 유통은 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훼손인 셈이다.
2년 전 국내 미술계를 크게 흔들어놓았던 '이중섭 위작사건'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국내외 유명 미술품의 위작 제작과 유통에 얽힌 여러 사건들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들 사건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위작 유통에 대처하는 방법, 즉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첫회로 반 고흐의 위작사건부터 알아보자.
지난 1980년대말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위작논란이 있었으니 저 유명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 사건'이다. 일본 야스다해상보험이 1987년 경매에서 3990만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에 매입해 당시로선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던 반 고흐의 '해바라기'(1888년작)는 경매 직후 제랄딘 노만이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 위작 가능성이 제기됐다. 노만의 이의 제기로 엄청난 뉴스거리가 쏟아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반 고흐는 1888~1989년 고갱과 함께 프랑스 아를에 머물며 '해바라기'를 여러 점 그렸다. 그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3점. 노만이 위작이라고 주장한 논쟁의 쟁점은 야스다측이 사들인 '해바라기'가 반 고흐에 의해 그려졌다는 어떠한 문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 노만은 나아가 "이번 그림은 끌로드 에밀에 의해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해바라기를 야스다측에 넘겼던 런던의 국립미술관은 이같은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며 맞섰다. 하지만 작품에 수리된 흔적과 덧칠한 흔적이 나타나면서 그림은 더욱 위작 쪽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기존의 반 고흐 그림보다 캔버스가 약간 큰 사이즈인 것도 의심을 부풀리게 했다. 또 기술적으로 반 고흐 그림이 아닌 느낌이 들고, 관행적인 반 고흐 스타일이 덜 보인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문제의 그림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라는 문서가 2002년 4월 발견되면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해바라기 위작논쟁은 일단락됐다. 뒤늦게나마 테오의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진품 해바라기는 의문부호가 영원히 따라다닐 뻔 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비록 진품으로 판정이 났지만 반 고흐 작품은 위작논쟁의 단골(?) 대상이다. 심지어 한 반 고흐 전문가는 "향후 위작이 200점까지 추가로 신고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동안 세상에 알려진 반 고흐의 그림숫자가 생전에 그린 그림숫자를 훌쩍 넘고 있으니 이같은 주장이 꼭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듯하다.
(중앙대 겸임교수ㆍ전 소더비 서울지사장)
<2>고갱ㆍ샤갈 위조작품 유통 ‘사카이 사건’ 진품 사들여 복제후 함께 매각처분
가짜엔 진본보증서…감쪽같이 속여
고갱,샤갈 작품 위조해 유통시킨 ‘사카이 사건’
미술품 위작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유통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사카이 사건’이 있다. 사카이가 사용한 수법은 중간급의 진품을 매입해 정교하게 복제한 후 잘 속는 고객에게 원작과 위작을 따로 파는 식이다. 단 위작은 아시아인에게 주로 팔았다. 사카이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사카이는 맨하탄에 있는 본인 소유 화랑에 폴 고갱의 작품 하나를 걸어놓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급화랑이 아닌, 중간급 화랑에서 몇십만달러에 거래되는 범작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00년 5월 사건이 터져버렸다. 같은 작품 두개가 크리스티와 소더비 봄 경매책에 동시에 실린 것이다. 양 경매사는 즉각 ‘우리 것이 진본’이라며 조사에 법석을 떨었다.
두 회사 모두 작품을 들고 윌든스타인의 고갱 전문가 실비아 크루사드에게 갔다. 실비아는 두점을 지켜본 후 크리스티 것을 위작으로 판정했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본 고갱의 위작 중 최고”라고 혀를 내둘렀다.
크리스티는 즉시 작품의 위탁자인 동경 모 화랑에 통보했다. 한편 진품은 소더비에서 성공적으로 31만달러에 팔렸다. 진본의 주인이자 매각자는 다름 아닌 엘리 사카이 본인. 그러자 FBI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FBI가 알아낸 더 큰 사실들은 이랬다. 사카이는 작품을 1년 전 매입해 복사본을 제작, 동경에 팔았다. 그리고 진본은 경매에 출품했다. 그런데 동경의 화랑이 가짜 작품을 소장하지 않고 매입 즉시 되팔아 이익을 보려 한 바람에 발각된 것이다.
FBI는 추가로 사카이에 의해 거래된 모든 인상파와 근대작품의 거래를 추적했는데 그동안 샤갈, 르느아르, 모딜리아니, 클레의 위작을 제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진품을 매입해 자신이 고용한 위작전문가로 하여금 똑같이 그리게 한 후 오래된 것으로 보이도록 액자까지 조작해 경매도록과 비교하게 하며 팔았다. 또 보증서까지 여럿 위조했다.
수사 중 밝혀진 과거 행적에서 사카이는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샤갈의 작품 ‘La Nappe Mauve’를 31만2000달러에 매입해 3년 후 동경의 한 컬렉터에게 51만4000달러에 팔았다. 컬렉터는 이를 다시 제3자에게 넘겼다. 이후 몇차례 전매가 거듭됐고, 마지막 구입자가 이를 스위스의 콜러 경매에 매물로 내놓았다. 콜러 경매의 사장은 이를 카탈로그 표지에 올리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진부를 확인했다.
콜러 사장은 “보증서상의 사진과 작품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붓의 방향과 질감이 다르고, 색감도 조금 달라 의심스러웠다”며 “가짜를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보증서를 이용하므로 보증서가 있다고 무조건 믿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고도의 사기꾼들은 위작은 진짜 보증서와 함께 팔고, 진품은 비밀스럽게 시간이 흐른 후 보증서 없이 매각하니 미술품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중앙대 겸임교수ㆍ전 소더비서울 지사장>
첨부 보증서에 깜빡속아 19만弗에 구입
소송끝 가짜 판명… 범인은 이미 줄행랑
르누아르의 '극장특별석' 위작사건.
얼마 전 유명 화가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위작을 절묘하게 만들어낸 조직이 경찰에 일망타진됐다. 중간판매상 복모(49) 씨 일당은 ▷유명 화가 진품을 베끼는 위조책 ▷작품 원본(또는 도록)을 확보하는 공급책 ▷가짜 그림을 판매하는 유통책으로 구분돼 일을 진행했다. 이들은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이중섭, 도상봉, 남관 등의 작품을 위조했는데, '공장식 위조방식'으로 5개월 만에 유명 그림 90점을 베껴냈다.
위조책들은 서울 모 화랑에서 훔쳐온 변시지와 이만익의 그림도 절묘하게 위조했다. 위작을 본 이만익 화백은 "정말 깜쪽 같다. 하지만 난 외국산 물감을 쓰기 때문에 구분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중에는 이들보다 한 수위의 조직도 많아 주의가 요구된다. 외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1985년 미국 미주리 주의 한 화랑은 르누아르의 유화 '극장특별석'을 19만1000달러를 주고 매입했다. 보증서도 있어 안심했지만 혹시나 해서 그림을 감정했더니 파리에 있는 진품을 그대로 모사한 위작으로 밝혀졌다. 진위 추적 과정에서 이 가짜 그림이 스위스의 르누아르 전문가인 프랑수아 돌테에 의해 진품 보증이 거절된 적이 있음도 확인됐다.
결국 대금 반환을 위한 민사소송이 벌어졌고, 재판진은 그림을 스위스와 프랑스로 보내 정밀 감정을 시행했다. 오랜 소송 기일이 흐른 뒤 결국 위작 및 사기 거래로 규명됐지만 매각자는 이미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그러나 가짜는 다시 사기꾼에 손에 들어갔고, 세상이 잠잠해지자 그는 재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엔 매각 대신 화상에게 그림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수법을 썼다. 돈을 빌려준 화상은 스위스의 돌테에게 감정을 의뢰했고 "10년 전 위작 판정을 해준 그림"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 화상 역시 작품을 폐기하지 않고 로스앤젤레스의 예사이아 벵거라는 인물에게 매각을 의뢰하게 된다.
벵거는 이 그림의 지나온 경로를 들었음에도 위조보증서와 그림을 들고 대서양을 횡단해 런던 필립스경매에 내놓게 된다. 경매사는 이 위작을 진짜인 줄 알고 35만달러에 평가해 경매하도록 표지에 실었다. 도록을 본 어느 입찰 희망자가 진위 여부를 재확인할 것을 제안해 뉴욕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 재감정이 시행됐고, 결국 위작 판정이 내려져 경매는 취소됐다. 필립스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이후에도 벵거는 귀가 얇은 구매자를 찾기 위해 위작 판매자들이 흔히 하는 수법인 작품의 흘러온 과거 기록(누가 보유하고 있었는지 등등)을 조작해 유포시키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됐다. 그를 수사했더니 그동안 팔아치운 고가의 위작이 수십점이 넘었다.
이처럼 위작인 줄 뻔히 알면서도 폐기하지 않은 채 유통시키는 범죄는 세계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다. 폐기되지 않은 위작은 끊임없이 수집가를 괴롭힐 것이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설명=
가짜 보증서와 함께 수차례 유통된 르누아르의 '극장특별석'.
<4>뭉크 ‘푸른 드레스’ 2005년 도난작품 하루만에 되찾아
뒤늦게 속은줄 안 도둑들 자진반납
훔친 뭉크 작품, 알고 보니 모작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유화 ‘절규’는 지구상에 4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미술관이 몇 년 전 도난당한 작품을 포함해 2점의 ‘절규’를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2점은 오슬로 국립박물관과 한 개인이 소장 중이다.
그런데 뭉크처럼 작품 도난사건이 끊이지 않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뭉크의 유화 ‘절규’는 오슬로 국립박물관 소장품이 지난 1994년 2월 도난당했다가 3개월 뒤 회수됐다. 또 2004년 여름에는 복면을 한 괴한 3명이 백주 대낮에 뭉크미술관에 침입해 ‘절규’와 ‘마돈나’를 훔쳐갔는데 이들 그림은 아직도 회수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듬해인 2005년 8월에는 노르웨이 남부 한 호텔에서 뭉크의 수채화와 석판화 등 작품 3점이 깜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작품들은 도난당한 지 하루 만에 회수됐다. 당시 경찰 대변인은 뭉크의 ‘푸른 드레스’ 등 3점을 훔친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밝혔으나 자세한 회수 경위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했다.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50㎞ 떨어진 모스 시 인근 레프네스 호텔에서 2005년 8월 식당 영업이 종료된 후 벽에 걸렸던 뭉크의 작품 3점이 사라졌다. 호텔 측은 자신들이 소장 중인 뭉크의 작품 12점 중 석판화 2점과 수채화 1점이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석판화는 뭉크의 자화상과 다른 사람의 초상화였고, 수채화는 ‘푸른 드레스’라는 제목의 1915년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후속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도둑들이 훔쳐간 작품은 모두 위작이었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작이었던 것. 도둑들은 호텔에서 뭉크의 작품을 훔친 후 밝은 불빛 아래서 살펴보니 가짜임을 간파하곤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사실 호텔 주인은 현명했다. 미술관 등에서 뭉크 그림이 자꾸 도난당하자 모작을 만들어 진품 대신 걸어놓았던 것. 진품은 은밀한 곳에 감춰놓았음은 물론이다. 사건 종료 후 호텔 주인이 한 말도 걸작이었다. 그는 “그놈들, 대단한 피에스코였군”이라고 했는데 ‘큰 실수를 저지른 도둑’이란 뜻이다. 도둑들은 작품을 걷어갈 때만 해도 신이 났겠지만 모작임을 확인하곤 보나마나 홧술을 들이켰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도둑들도 작전(?) 개시에 앞서 진품인지 아닌지 잘 따져봐야 하겠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5>르누아르 조각은 조수의 작품? 사망전 6년간 조수가 제작 도맡아
佛법원 저작권 모호한 판결 불씨로
인상파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인기는 언제나 대단하다. 그런데 그의 증손자인 장 에마뉘엘 르누아르가 증조부의 이름을 팔아넘겨 최대의 사기 사건에 휘말린 사건이 2005년 가을 발생했다. 그는 단돈 100만달러에 르누아르의 이름을 무기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 애리조나의 스콧데일 화랑에 넘겼다.
이 증손자는 작품 매매가의 10%를 수수료로 받는 대신 개별 작품마다 보증서를 발행해주기로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발각되지 않았으면 10억달러에 해당하는 ‘Venus Victrix’ 등 르누아르의 브론즈(청동 조각)들이 오리지널 조각으로 둔갑해 미국 내 할인점 체인인 코스트코를 통해 퍼질 뻔했다는 점이다. 다행히 ‘Venus Victrix’ 등의 몰드가 중도에 발견돼 제작이 중지되고 말았다.
르누아르는 전성기까지 그림(유화)을 그렸으나 말년 들어 류머티즘 때문에 브론즈를 제작하게 된다. 1919년 사망하기까지 6년간은 조수 리처드 기노가 제작을 거의 도맡았다. 르누아르 조각으로 명명된 26점 중 2점을 제외한 24점은 사실상 기노가 제작한 것. 기노 사망 후 1973년 프랑스 법정은 기노 유족의 저작권 소유 인정 소송 제기에서 24점 조각의 저작권에 대해 공동 소유의 판결을 내렸다.
법정은 르누아르 유족에게는 에디션 제작권한과 판매권을, 기노의 유족에게는 저작권 관리와 복제품 제작의 권리 및 플라스터 캐스트의 보유권리를 갖게 하는 모호한 판결을 내렸던 것. 문제는 기노의 상속인들과 르누아르의 후손들이 훗날 ‘르누아르 재단’을 설립하고, 르누아르 브론즈를 재생산하는 권리를 사업화하기 위해 화랑과 일을 벌이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공동으로 브론즈를 무수히 찍어댔고, 보증서를 곁들여 팔았다. 진위 여부의 판단 유보 속에 조각들이 마구 팔려나간 것. 이는 브론즈의 진짜ㆍ가짜 문제보다 “누가 르누아르의 브론즈를 만들 수 있는 법적 권리 소지자인가”에 대한 저작권 소유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요즘 미술계에선 르누아르 조각을 ‘르누아르 브론즈’라 부르지 않고 ‘르누아르 기노 브론즈’로 부르고 있다. 2005년 5월 5일 크리스티뉴욕에서는 28만4800달러에 에디션 넘버 EA I/IV인 브론즈<사진>가 팔렸다. 그러나 매각 후 드러난 새로운 사실에 크리스티뉴욕은 경악했다. 똑같은 에디션의 조각이 1993년 기노 측에 의해 일본 도쿄의 미치도 화랑에 28만2300달러에 팔렸던 것. 크리스티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하나는 잘못된 브론즈가 분명한데 크리스티는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채 ‘조사 중’이라는 답변만 거듭하고 있다. 누구는 맞는 물건이라 하고, 누구는 아니라고 한다. 컬렉터로선 무척 헷갈리는 사안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논쟁거리가 있는 작품은 가급적 피하는 게 현재로선 수다."
<6> 마이어트사건
1995년 9월 어느날 아침, 영국의 화가 죤 마이어트의 런던 집 현관벨이 울렸다. 뜰에는 한 형사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도 한 때 화가이자 미술사가였으며 이제는 런던경시청 형사라고 소개했다.
마이어트는 경찰과 함께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경찰은 쟈코메티, 샤갈, 브라크의 그림 수 십점을 발견했다. 수사결과 마이어트는 1986년부터 8년간 초현실주의, 큐비즘, 인상파 그림 200여점을 그렸고, 6주마다 런던의 죤 드루에게 이를 실어날랐다고 자백했다. 공범인 죤 드루는 가짜 기록증명서를 만들어 그림들을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스및 런던 유명화랑에 넘겨 매년 수십만달러씩 벌어들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림 한점에 최소 3만달러 이상을 매겼다.
경찰은 마이어트의 진술을 증거로 녹취했고, 이어 드루의 집도 급습했다. 경찰은 그곳에서 영국 국립미술관인 테이트갤러리와 현대회화연구소의 빛 바랜 서류들과 도록을 찾아냈다. 또 날인위조를 위한 각종도구도 나왔다. 마이어트에 의해 위조그림 200여점이 그려져 드루를 통해 매각됐는데 경찰은 그 중 73점의 소재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영국 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진위를 밝혀내지 못한 채 사기꾼에게 깜쪽같이 놀아난 미술계 현실도 지적됐다. 죤 드루는 6년형을 받았는데 수사를 통해 ‘사기꾼의 전형’임이 드러났다. IQ 165인 그는 17살 때 코킷이란 성을 드루로 개명한 후 15년간 아무런 개인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신을 감췄던 것.
반면에 마이어트는 초창기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 힘을 쏟는 한편으로, 모작을 그리며 생계를 해결했다. 한 친구가 드퓌 위작을 400달러에 구입하자 마이어트는 1983년 한 주간지에 ‘19-20세기 진품 모작을 150파운드에 팝니다’라는 광고를 냈고, 이를 본 드루의 전화를 받으면서 인생행로가 틀어지게 된 것.
드루는 고급 자동차를 몰고와 마이어트에게 자신을 물리학교수라 소개했는데 이를 믿은 마이어트는 마티스의 위작 그림을 건넸다. 드루는 장사가 잘 되자 마이어트가 그린 독일큐비즘 작가의 위작을 크리스티에 3만8000달러에 넘기기도 했다. 그 순간 마이어트는 ‘정당하게 이뤄졌던 모작 비지니스가 범죄로 바뀌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후에 말했다.
마이어트의 위작은 원작과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깜쪽 같았고, 드루는 오래된 화랑의 영수증 등을 첨부해 진품으로 둔갑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부인이 그와 별거에 들어가면서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잡히고 말았다. IQ 165의 머리 좋은 사기꾼임에는 틀림없었만 부인은 잘 다루지 못한 셈. 한편 마이어트의 그림솜씨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가족초상화를 주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2005년 새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미술품 도난및 위작 수사 담당형사인 도날드 리크는 로스엔젤레스 시내의 뉴오타니 호텔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두 한국인이 호텔로 들어오는 것을 형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 든 한국인은 사업가로 보였는데 영어를 전혀 못하는 듯했고, 젊은이는 통역같았다. 젊은 한국인이 들고 있는 큼지막한 가방은 현금가방같았다.
곧이어 리크형사는 그들이 어느 늙은 미국인 의사와 만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의사 빌라스 리카이트 역시 그의 비서와 함께 뉴 오타니호텔에 도착했던 것. 그가 휴대하고 온 그림들은 미국의 대표적 인상파 화가인 메리 카사트의 작품과 드 쿠닝, 한스 호프만, 제스퍼 존스의 작품이었다. 리카이트는 이들 한국인 사업가 일행과 흥정 끝에 메리 카사트의 초상화를 80만달러에 넘기는데 동의하고, 리카이트가 현금보관증을 꺼내는 순간 리크형사가 들이닥쳤다.
현장에서 리카이트는 체포됐고 두 한국인들은 돌아갔다. 두 한국인은 LA경찰국의 한국계 형사들로, 그림을 사려는 동양계 컬렉터로 위장한 것이다.
수사 중 드러난 리카이트의 전력은 이러 했다. 11살 때 인도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루이지아나에 정착해 의대 졸업 후 하바드의대 교수까지 역임했던 리카이트가 꼬리가 잡힌 것은 한 의사동료 때문. 나르델이라는 동료는 리카이트에게 1만2000달러에 모딜리아니의 작품 2점과 브랑쿠지의 스케치 1점을 샀고, 후에 샤갈 그림을 샀는데 이를 하바드대 포그미술관으로 가져가 보여준 결과 위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LA경찰국에 신고한 것. 모두 리카이트의 귀신같은 솜씨로 그려진 가짜 그림들이었던 것.
리카이트는 이외에도 친구인 골딩에게 전화를 걸어 “돈이 급히 필요하다. 그림 몇점을 팔테니 담보로 잡고 융자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골딩 씨는 친구로서 도움이 되고자 메리 카사트의 작품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준 후 베벌리힐스의 화랑으로 작품을 가져갔는데 가짜 그림을 접한 화랑주인이 리크형사에게 신고하면서 그간의 행적이 모두 발각된 것이다.
라스베가스의 유명 카지노 운영자인 스티브 윈 조차도 그로부터 드 쿠닝의 가짜 작품을 3000만달러에 거의 살뻔 했던 사실이 밝혀지는 등 리카이트는 그의 컬렉션(?) 700점을 무려 10억달러에 내놓았다고 한다. LA 경찰국은 리카이트로부터 미술품을 구매한 사람들의 신고를 기다리고 있는데 창피해서인지 별로 들어오는 신고가 없다고 한다.
조명계 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8>소더비 망신시킨 쉬쉬킨 위작
소더비가 망신 당한 쉬쉬킨의 위작
2004년 봄 소더비 뉴욕의 정기경매에서는 러시아의 유명 풍경화가 이반 쉬쉬킨(1832~1898))의 그림이 출품됐다. 그러나 소더비는 이 작품을 경매 직전 취소하는 소동을 벌이고 말았다.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위작 제작자는 2류급 유럽작가 그림에 덧칠을 하고 서명을 위조한 후 러시아 유명작가 쉬쉬킨의 그림으로 둔갑시킨 것. 소더비는 이 가짜 그림을 쉬쉬킨의 것으로 철썩같이 믿고, 경매에 128만달러로 올렸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소더비는 경매책자에 “드문 형태의 매우 중요한 쉬쉬킨의 작품으로 스위스에서 제작한…”이라는 설명까지 달았던 것.
이 그림은 소더비에 출품되기 1년 전 스톡홀름의 부코프스키경매에서 5만6000달러에 팔린바 있다. 부코프스키는 당시 “19세기 네델란드 마리너스 쿠에크쿠에크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주를 달았다. 이 작품은 이후 모스크바로 보내지고, 원작에 있던 행인들과 염소가 깜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이반 쉬쉬킨의 가짜 서명이 추가됐다. 이같은 기법은 위작을 제작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비슷한 분위기의 유사한 그림을 싼 값에 입수한 후, 유명작가 그림에 나오는 유사 형태의 이미지를 살짝 첨가하거나 서명을 삽입하는 지극히 흔한 방식이었는데 소더비가 너무 가볍게 접근한 셈이다.
이 작품은 모스크바의 트레티아코프 갤러리로 옮겨진 후 한 미술관으로부터 ‘쉬쉬킨의 드문 초기작 진품’이라는 확인서까지 받았다. 이 후 모스크바에서 한 개인에게 팔린 후 런던으로 밀수돼 다른 소장가에게 매각되고, 이 컬렉터가 소더비에 출품한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의 경험 많은 딜러와 컬렉터, 심지어는 소더비조차도 속았다는 점이다. 당시 모스크바의 미술사학자인 블라디미르 페트로프는 “서구 미술시장에서 러시아 그림 100여점 이상이 수백달러에서 5만~6만달러에 매매된 후 유명작가 것으로 깜쪽같이 변조돼 10만, 혹은 100만달러 이상에 판매되고 있다”며 주의를 촉구했다. 그러나 소더비는 이를 무시해 중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페트로프는 “위작 제작은 상상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는 반드시 근절돼야 하는 범죄”라고 강조했다. <조명계/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설명=당초 쿠에크쿠에크 원작에는 있던 3군데 둥근 부분이 유명화가 쉬쉬킨 그림으로 변조되면서 깜쪽같이 사라졌다.
터너, 200년 전 작가 벨데 작품 모사
뛰어난 명성덕 원작보다 높은 가격
15-18세기 유럽의 회화를 가리키는 이른바 ‘올드 마스타(Old Master)’ 회화의 약90%는 스승처럼 유명한 화가가 되길 열망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스승의 작품을 모사한 그림들이다.
다시 말해 거의 전부 ‘모작’인 셈이다. 이유는 학습의 목적이기도 했고, 동일한 주제와 스타일의 작품을 원하는 시장의 요구 때문이기도 했다.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 이전에는 스승의 스타일과 테크닉을 흉내내는 게 중요한 학습법의 하나였다. 또 종교적 목적에 의한 수요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같은 학습방법에 따라 영국의 유명한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1775-1851) 역시 200년 전 네델란드 작가 빌렘 반 데 벨데(1611-1693)의 작품을 모사했다. 그러다가 100년이 훨씬 넘게 흘러 두 작가의 그림이 동시에 경매에 오르는 진기한 사례가 발생했다.
원래 선원 출신이었던 빌렘 반 데 벨데는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화가가 된 후 바다와 배를 주로 그렸다. 1672년 영국과 홀랜드간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던 그는 네델란드선주협회의 공식 지정화가가 되기도 했다. 반면 윌리엄 터너는 풍경화와 수채화를 주로 그린 영국의 저명 화가다. 그의 작품은 인상파의 초석이 되기도 했는데 영국의 평론가 러스킨은 터너를 가리켜 “가장 뛰어나게 자연을 묘사한 화가”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터너가 벨데가 죽은 후 그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한 풍경화가 있었다.
하필이면 그 그림이 1976년 런던 크리스티경매에 벨데의 원작과 함께 나란히 오른 것. 경매 결과 벨데의 ‘폭풍을 향하여’는 6만5000파운드에, 터너의 ‘폭풍을 향하여’는 34만파운드에 팔렸다. 모작이 진작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낙찰된 것. 터너의 명성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비록 선배화가의 그림을 고스란히 베꼈긴 해도 더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대접은 오늘날엔 꿈도 꾸기 힘들다. 요즘엔 스승의 그림을 베꼈다간 따가운 지탄만 받을테니 말이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11>소피아미술관 마티스그림 바꿔치기 사건 | |||||||||||||||||||||||||||||||||||||||||||||||||||||||
옷 덜 입혀진 모습등 위작 불구 위조서류만 믿고 수년간 전시
2003년 초 베네주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소피아 임버 현대미술관에는 마티스의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라는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진짜가 아닌 가짜였음이 뒤늦게 확인돼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더구나 위작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게 그림이 바꿔치기 된지 수년이나 지난 뒤라고 해서 파문이 더 컸었다.
‘오달리스크’는 1차대전 발발 직전 마티스가 모로코와 알제리를 여행하면서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문화와 화창한 햇살에 매료돼 1925년경 그린 그림이다. 마티스는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비슷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는데 이국적 풍모의 아랍댄서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원래 소피아 임버 미술관에 걸렸던 마티스의 오리지날 그림은 부분적으로 옷을 벗고, 무릎을 굽힌채 누워 있는 아랍댄서의 모습인데 위작에선 옷이 덜 입혀져 있었다. 소피아 임버 미술관은 이 그림을 1981년 뉴욕의 말보로화랑에서 180만달러를 주고 매입한 후 1997년 스페인 전시 때 잠깐 빌려준 것을 제외하곤 줄곧 미술관에 걸어놓았다. 사안이 커지자 미국 FBI를 비롯, 인터폴, 베네주엘라 경찰, 스페인 경찰, 파리 경찰까지 매달려 수사를 시작했다.
소피아미술관에 걸려 있는 마티스 그림이 위작임을 밝혀낸 이는 미국 마이애미의 컬렉터인 제나로 암브로시노 씨. 베네주엘라 출신의 암브로시노 씨는 “마티스 작품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술관과 교신하던 중 미술관의 마티스 그림이 가짜임을 밝혀낸 것이다. 수사 중 확인된 것은 마이애미에 있는 소더비지사가 소피아 미술관 측에 확인을 위해 보낸 작품매각 승인 서신이 2001년 쫓겨난 전직 미술관 직원 헤르난데즈와 디구에즈에 의해 서명되어진 위조서류였다는 점이다.
그 해 12월 중순 FBI는 마이애미에 살던 베네주엘라 여성 하나가 마이애미에서 원작을 한 때 보관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 여성은 그 후 이를 프랑스로 가져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카라카스의 일간지 엘 문도는 1997년 스페인 전시 때 원작이 바꿔치기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으나 현재 원작의 향방은 오리무중이다.
원작의 밑부분에는 일곱 개의 선이 있는데 위작에는 여섯 개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 할 말이 없는 것은 어떻게 매달 1만5000명이나 거쳐가는 미술관에서 그동안 이를 위작으로 알아본 사람이 하나도 없었느냐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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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님! 위작논란의 글들 읽으니 재미있군요. 위작은 모조리 태워 없애져야할것 같고, 이런 사기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할텐데... 조명계 교수님말씀에 의하면 살인죄?만큼이나 나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