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인유, 다른 예를 끌어다 쓰자
1. 인물의 채용
신경림은 시에서 인유를 통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인유는 ‘참조’의 다른 말이며, 흥미와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하는 시의 중요한 장치이고 내용입니다.⁸³⁾ 신경림의 경우 다양한 인유의 방식을 창작방법으로 사용하나 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 사건을 언급하거나 참조하는 시사적 인유를 통해 정치적 상상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신경림은 초기 시 「농무」에서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신경림, 「농무」 부분)며 이미 역사 속의 인물 채용을 통한 인유의 방법을 구사합니다. 농무의 시적 화자인 ‘우리’를 조선 말기 의적인 ‘임꺽정’과 그의 부하인 ‘서림이’로 특수화하여 답답하고 고달픈 농촌 생활에 대한 울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꺽정의 경우 폭력적 의적활동을 통한 민중현실의 개혁을 시도하다가잡혀서 억울하게 울부짖다 죽고, 꺽정의 모사인 서림은 꺽정을 관군에 밀고한 후 정신분열적인 행동으로 해해댑니다. 산업화로 인하여 소외된 현실을 헤어날 길 없는 농민의 답답함과 고달픔, 그리고 원통함을 꺽정과 서림이라는 인물의 채용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을 채용한 인유의 방법은 다른 시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우리 조상들에 대한
에른스트 오페르트 그의 생각은 옳았다
강 언덕에 모여선 헐벗은
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를 미워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페롱의 동료들을 쇠전에서 찢어죽이고
또 그로 하여 다섯 밤 다섯 낮을
풀을 뜯어먹고 살게 한
그 못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
오페르트여 우리는 안다
2
이 어둠 속에서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라
강요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거짓을 참이라 우겨대는 그들은 누구인가
거리는 온통 어둠으로 덮여 있지만
오페르트여 당신을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라는 저
억지 속에서 페롱의 후예들은
다시 화륜선에 실려 이 땅을 떠나고 있다
누구인가 그들을 내어몰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 신경림, 「추방(追放)」 전문
집단화자인 우리는 “우리 조상들에 대한/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생각이 옳았다고 합니다. 독일의 유태계 상인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통상압력에 이용하려다 실패한 인물이고, 페롱은 1857년부터 조선에서 선교사로 들어와 활동 하다가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실을 프랑스에 소상히 알린 인물입니다. 1연에서는 이미 실존했던 두 인물의 채용을 통하여 ‘못된 사람들’로 암시되는 지배계급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민생에는 아랑곳없이 민중을 헐벗게 하고, 권력 쟁탈을 빌미로 종교를 탄압하는 지배계급인 것입니다. 오페르트를 미워했던 것은 민중들이 아니고 ‘그들’로 암시되는 지배계급이며, “페롱의 동료”인 선교사나 천주교인을 “쇠전에서 찢어죽이고/ 또 그로 하여금 다섯 밤 다섯 낮을/ 풀을 뜯어먹고 살게”하면서 박해한 것은 민중들이 아니고 지배계급이라는 것입니다.
2연에 화자는 지배이데올로기인 “이 어둠 속에서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라”나 “거짓을 참이라 우겨대”라는 통념을 통렬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들’의 빈번한 사용으로 시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또 이 시의 인유는 조선후기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나 독서경험 없이는 의미를 해독해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경림 시에서 뿐만 아니라 인유 방법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툇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 산을 보고 섰다
배론땅은 여기서도 삼십 리라 한다
궂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 따라 후미진 바윗길을 돌라 한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들을 적마다
사기 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재비 참새 떼 몰려 웃고 까불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 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 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신경림, 「다시 南漢江 상류에 와서」 전문
단연 27행의 이 시에서 인유되는 역사적 인물은 박해받던 천주교인인 황사영입니다. 창작자는 과거의 인물인 황사영의 죽음을 알리거나 애도하기 위해 이 시를 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한 인물의 사건을 인유하여 화자를 통해 창작자의 입장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황사영이 피신하던 배론과 삼십 리 떨어진 거리인 남한강 상류에 와 있으며, 황사영의 지난한 피신생활을 생각 하면서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지거나 무서워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긴 황사영의 아내나 친구들처럼 화자 자신의 아내가 당할 고통과 “내 친구”들의 고난 때문입니다.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자는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라고 반복하여 묻습니다. 창작자의 국가 허무주의가 화자에 의해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독자가 황사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정확히 읽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독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김병걸 선생의 회갑연에서
김규동 시인은 말했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다가
경성까지 가는 나에게 잘 가라 악수하고
그는 이원에서 내리는
그날을 보아야겠다고,
관모봉을 끼고 돌아 부령, 고무산,
두만강까지 가는 친구들이 함께
다시 보자고 차창에서 손을 흔드는
그날을 꼭 보아야겠다고.
개마고원에서는
갈대들이 달빛에 흔들리고 있겠지.
키 작은 고산목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름 찾으며
하늬바람에 몸 웅크리고 있겠지.
그날 우리는 함경도집에서
순대로 늦도록 소주를 마셨지만
누구인가, 우리들의 이 애타는 마음을
칼로 토막내어 길거리에 팽개치곤
돌아서서 웃고 있는 자들이.
-신경림, 「함경선」 전문
신경림은 현존하는 인물을 시에 채용하여 시를 창작하기도 합니다. 화자와 사적 친분이 있는 ‘김병걸’과 ‘김규동’이라는 인물을 시에 가져온 것입니다. 문학평론가인 김병걸과 시인인 김규동은 다 같이 분단 이북인 함경도를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창작자는 이들과의 사적 관계를 개인적 인유로 활용하여 분단 현실과 해소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시는 ‘김병걸’의 회갑연에서 ‘김규동’이 말을 하면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등장인물인 ‘김규동’은 1연 6행 “그날을 보아야겠다”와 10행 “그날을 꼭 보아야겠다”는 미래 의지를 통해 분단 극복의지를 내보입니다.
2연에서는 숨어 있는 화자가 “개마고원에서는/ 갈대들이 달빛에 흔들리고 있겠지./ 키 작은 고사목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름 찾으며/ 하늬바람에 몸 웅크리고 있겠지.”라며 분단 이북의 정경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화자를 포함한 김병걸과 김규동은 ‘우리’가 되어 함경도집에서 늦도록 소주를 마십니다.
화자는 분단의 해소를 바라는 “우리들의 이 애타는 마음을” 방해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며 답을 독자에게 말하도록 열어놓습니다.이와 같은 개인적 인유의 방법은 독자가 인유의 원천인 김병걸과 김규동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할 경우 작품의 해독이 어렵다는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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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김준오, 133~144쪽 참조.
2024. 3. 13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