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독서(上寺讀書)와 사찰의 독서당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독서당 경영은 공인 사찰에 부과된 공적 업무
임금, 집현전 학자들 진관사·장의사로 보내 상사독서 시행
사찰 입지·조건이 독서와 공부에 전념하기 적합했기 때문
유생·관료들과 독서당 사찰 스님들 사이 교류 가능성 시사
오늘날 서울의 도로 가운데 ‘독서당로’라는 곳이 있다.
한남역교차로에서 응봉삼거리에 이르는 4.5km의 길이다. 지명의 유래는 이렇다.
중종 5년(1510)의 어느 날 홍문관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인원이 정업원에 우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용산의 옛 터는 기울고 무너져서 고쳐 지을 수 없습니다.
두모포(豆毛浦)의 월송암(月松庵) 근처에 넓고 평평하여 집을 지을 만한 곳이 있습니다.
나무와 돌을 운반하기도 편리하고 가까우니,
날을 정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아뢰었다.
(‘중종실록’ 10권, 5년 1월19일.)
두모포는 성동구 옥수동에 있던 나루터이다.
중랑천과 한강이 이곳에서 만난다고 하여 두 물이 합쳐진다는 의미의
두물개/두뭇개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두모포다.
건의가 있던 바로 그날 임금은 이를 허락하였고,
이곳에 지어진 건물이 독서당(讀書堂)이라 불렸으므로
그 이름이 오늘에까지 도로명으로 남아 전하는 것이다.
기사에서 말한 사가독서란 휴가를 주어[賜暇] 독서하게 한다는 뜻이다.
조선에서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은 세종 때였다.
세종 8년(1426) 임금은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직무로 인해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낼 것”을 지시하였다.(‘세종실록’ 34권),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는 각자의 집에서 독서하도록 하였으나,
세종 24년(1442)에 신숙주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고,
이후 문종 1년(1451)에는 홍응 등 6명을 장의사(藏義寺)에 보내 글을 읽게 하였다.
(조위, ‘독서당기’ ; 성현, ‘용재총화’. 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에서 재인용.)
자택 대신 사찰에서 독서하게 한 이 관행은 성종 대 이후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는데,
독서하는 이가 각자의 집에 머무를 경우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해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움을 우려한 조처였다.(‘성종실록’ 68권),
세조 2년(1456) 집현전이 폐지되며 사가독서의 제도도 함께 폐지됐지만,
성종 7년(1476) 정5품 이하 하급 관료들을 장의사로 보내어 공부시키며
상사독서의 형태로 부활하였다.(‘성종실록’ 68권, 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용산의 독서당은 성종 24년(1493)에 건립되었다.
임금의 명으로 용산강(龍山江 : 용산에 인접한 한강 일대를 이르던 말)에
독서당을 낙성하고 편액(扁額)과 기(記)를 걸었던 것인데(‘성종실록’ 277권)
사실은 이 독서당도 기존의 사찰에 들어선 것이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9권에 따르면
“예전에 사찰[僧舍] 하나가 남호(南湖 : 용산강의 다른 이름)의 귀후서 뒤편 언덕에 있었는데, …
(그 절의 승려를) 속인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불상은 흥천사로 옮겼다.
그리고 그 집을 홍문관에 주어 순번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고 이름을 독서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연산군 말년에 홍문관이 폐지됨에 따라
독서당 운영도 잠시 중단되었으나(‘연산군일기’ 60권, 11년 11월4일),
중종은 재위 1년(1506)에 글 읽는 선비들[文學之士]을 뽑아
역시 연산군 때 폐지되어 있던 정업원의 건물에 보내어 사가독서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왕 5년(1510) 정업원이 독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여론이 있자
서두에 거론한 대로 두모포에 새로운 독서당을 지은 것이었다.
이후 독서당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계기로
제도의 중단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정조 때 완전히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실록’ 3권, 1년 5월6일.)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가독서는 세종 때 첫 시행 직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상당 기간 상사독서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언급한 바와 같이 사찰의 입지와 조건이 독서와 공부에 전념하기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성종 때 세워진 용산의 독서당과 중종 초 독서당으로 사용된 정업원은
사찰의 기능이 사라진 뒤 그 건물만을 취한 것이었지만,
용산 독서당 이전에 독서지로 선정되었던
진관사와 장의사는 명백히 사찰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었다.
진관사에서는 연산군 10년(1504)까지 왕실의 추선재가 거행되었고,
장의사에도 같은 해까지 승려가 거주하고 있었다(‘연산군일기’ 54권)
실제로 중종 3년(1508)의 한 경연 자리에서 사간원 정언 박수문은
젊은 시절 상사독서 하던 중 선왕선후의 기신재를 보았다고 회고한 바 있으며,
동왕 34년(1539)에는 “환관들이 부모의 기일이나 명절에
산사(山寺)에 올라가 불공을 드리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고 하니,
상사독서하는 유생들이 이를 보고 위에서 시킨 것으로 오해할까 걱정된다”는
임금의 염려가 있기도 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사찰의 기능이 유지된 절에서 상사독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사독서의 관행은 이를 통하여 유생 및 관료들과
독서당 사찰 스님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하였음을 시사한다.
‘용재총화’ 8권에서도 “독서하는 유생들은 모두 절에 올라가서 하였다. …
서로 의뢰하는 유학자와 승려가 적지 않았다[儒釋相賴者亦不少]”고 증언하거니와,
상사독서가 활성화되었던 조선 전기
다수의 문인이 친분을 나눈 스님들에 관한 시문을 남긴 것도 그러한 상황을 방증한다.
다만 독서당으로 지정된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된 곳이었음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진관사와 장의사는 세종 6년(1424) 불교 종단이 선교 양종으로 정리될 당시
각각 선종과 교종에 배속되었던 사찰로서,
진관사는 속전(屬田) 150결과 소속 승려 70명에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을 지정받았고,
장의사 또한 속전 250결에 소속 승려 120명을 지정받았던 터였다.
진관사와 장의사를 포함하여 이 때 국가로부터 지정되었던
전국 36개소의 사찰은 규모에 따라 속전과 소속 승려의 인원을 배정받았는데,
이는 국가로부터 일정 정도의 공적 업무가 부과되었음을 추정케 하며
독서당 기능 또한 그러한 업무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찰에서 독서하는 이들에게는 사옹원으로부터 쌀이 지급되었고,
해당 사찰에서는 그렇게 공급받은 쌀을 재원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문인 관료들의 숙식(宿食)을 뒷바라지하였던 것이다.
사찰에서의 독서당 경영은 조선시대 공인 사찰의 스님들에게 부과된
공적 업무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2022년 8월 24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