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1450)
프라 안젤리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박물관에 가면
도미니코회 수사인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가 그린
<그리스도의 생애> 세 개의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첫 번째 패널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의 9개 장면이 있고,
두 번째 패널에는 라자로의 부활 장면부터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는 장면까지 12개의 수난 장면이 있으며,
세 번째 패널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부터
성모님께서 천상모후의 관을 쓰시는 장면까지 11개의 장면이 있다.
그중 <예루살렘 입성>은 두 번째 패널의 두 번째 장면으로,
마태오복음 21장 1-11절, 마르코복음 11장 1-11절,
루카복음 19장 28-38절, 요한복음 12장 12-19절이 그 배경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 줄 것이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1,1-11)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그분은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
그것은 즈카르야 예언자의 예언대로 그들의 의로운 임금님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 있는 리본에는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쓰여 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서둘러 오신다.”(즈카 9,9)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평화의 임금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다.
성경말씀 대로 암나귀 뒤에는 어린 나귀가 따르고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색 속옷과 푸른색 겉옷을 입고,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편 자세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다.
그분의 제자들은 마치 성지주일에 행렬하는 사람들처럼
손에 올리브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맨 앞에 있는 제자가 베드로와 요한이고,
그 다음 줄에 서 있는 제자가 안드레아와 야고보이며,
제자들의 머리에는 예수님처럼 후광이 있다.
군중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와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있고,
아이와 다른 남자들은 올리브나무가지를 꺾어들고 앞장서고 있다.
그들의 침묵을 깨는 성경구절이 아래에 라틴어로 리본에 쓰여 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태 21,9)
예수님과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쪽에서 성전이 있는 동쪽을 향하는 것이다.
왼쪽과 서쪽은 세속적인 세상이고
해가 뜨는 동쪽과 오른쪽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적인 세상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광야다.
그 광야에는 오직 축복의 올리브나무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성지주일에 올리브나무가지를 들고 입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수난과 죽음이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올리브나무와 꽃잎이 함께 깔려 있다.
그분의 길은 생명과 죽음, 환영과 박해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 안젤리코가 깊은 신심에 뿌리내린 삶에서 우러나온
영성적인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을 맑고 단순하게 그렸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