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사슴>의 화자에 다가가기 위해 함께 읽을 몇 편의 시들
사슴
노 천 명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출처 《 사슴: 노천명 전집 1》(1997) 첫 발표 《 산호림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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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盧天命 (1911~1957)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모윤숙과 함께 1930년대에 활동한 여성 시인이다. 《시원) 창간호(1935)에 시<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이후, 첫 시집 <산호림>(1938)을 비롯해 세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수필집을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발표하였고 한국전쟁과 해방기를 지나며 좌익분자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동료 문인들의 석방 운동으로 출옥한 뒤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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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단의 성숙과 함께 찾아온 자의식의 추구
'시의 르네상스' 시대로 불리기도 했던 1930년대는 이전 시기의 미숙성을 극복해 내고 한국 현대시사에서 특기할 만한 질적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개화기 이래로 일본을 거쳐 수용된 서구 문예이론이 초기의 시간적 편차나 유입 당시의 굴절을 극복하며 시단에 정착하였고, 그 결과 다양한 경향의 시 형식이 자리를 잡아갔다. 모더니즘의 이입과 같이 서구 문단의 동향에 발을 맞출 문화적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이처럼 시단에서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찾아서 상당히 폭넓게, 그리고 진지하게 실험을 계속"(김종철, 1978:10)해 갔다.
이러한 흐름은 시대정신의 요구나 계몽의 책임이 부과되었던 전대(前代)와는 달리, 시인들이 스스로를 한 명의 전문 문학인으로서 정립하는 특정한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시인이 자의식을 직접 드러내어 내면을 토로하는 형식인 이른바 '자화상 시'가 출현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서정주, 윤동주 등 당대 활동한 여러 시인들이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였는데, 이들은 '자화상'의 창작을 통해 자신을 관심 있게 살펴보고 깊이 탐색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구축해 갈 시세계를 정립하고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자 하는 고뇌를 시에 담았다(신익호, 2009: 278).
노천명도 그중 한 명으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전문 문학인의 초입 단계에서부터 자기 탐구를 관심사로 삼았다. 노천명의 첫 시집 《산호림》(1938)은 〈자화상〉을 비롯해 〈반려(斑驢)〉, 〈사슴〉 〈귀뚜라미〉 등 '자화상류 시편'이라 불리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거울을 보듯 얼굴 곳곳을 쪼개어 낱낱이 살피다가도 나귀에서 사슴, 귀뚜라미로 시선을 옮겨 가며 자기를 발견해 낸다. 즉, '맵찬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 행위'(김현자, 1997: 306)를 통해 시인은 응시 대상의 이미지들로부터 자기를 형성해 갔던 것이다.
| <사슴>과 자기 탐구의 문제
당시 최재서는 시집 《산호림》에 대하여 절제된 언어 속에 정서를 담아냈다는 호평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이승원, 2000). 앞에서 언급한 자기 탐구와 더불어, 절제된 감정과 그 언어적 표현의 차원은 노천명의 대표작 <사슴>에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노천명의 시적 지향에 관해 이후 김윤식은 모더니즘적 방법론이 아닌 '기질의 내면화로 치닫기'(김윤식, 1999: 182-184)로 보기도 했다. 김윤식의 지적은 이후 연구사에서 시인이 어린 시절 부친의 명에 의해 남장을 했다는 일화나 유달리 자의식이 강하고 찬바람이 돈다는 주위의 평을 근거로 시인의 기질을 규정하고, 이를 시편의 해설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삶의 입체성을 감안할 때, 삶의 단편과 시세계가 오롯이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시세계를 형성하는 근원인 시인의 자의식이 그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앞선 평론들이 <사슴>에 담긴 자기 탐구의 문제에 대해, 개별 시편의 차원만이 아니라 그 시가 담긴 시집《산호림》의 세계, 나아가 시인의 삶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시와 시세계, 시인의 삶을 아울러 볼 때에야 비로소 절제된 언어에 밴 시인의 자의식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 없는 '사슴'에게 투영된 시인의 '얼굴', 즉 '자화상'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사슴이 들여다본 제 그림자,
텅빈 기표로서의 <자화상>
<자화상>은 <산호림>의 가장 앞에 실린 시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화자는 스스로를 시적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 잊어버린 얼굴"이라거나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를 어려워"하는 모습으로 그려 내고,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고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 처럼 대담하지 못하다고 설명한다. 시인이 자신을 묘사한 이 시구들의 면면을 조합해 보면, 그 무엇과도 쉽게 타협할 수 없다고 말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한 존재와 대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화상>의 화자와 <사슴>의 화자는 같게 느껴지는가, 다르게 느껴지는가? 물론 <사슴>의 화자 역시 시인 자신이라는 전제는 여러 평론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 질문은 그 전제를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슴 > 에 등장하는 시인의 자의식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시구를 맞춰가며 그 '누구'가 노천명의 얼굴임을 확인하기보다는, 빈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시선을 조정할 때마다 드러나는 측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다룬,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어떤 사회적 속성도 드러내지 않은 시 <자화상>을 《산호림》 초입에 배치하였다. 이는 시집을 통해 표상되는 자신의 모습을 좌표의 어느 한 곳, 어느 하나의 차원에 고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며, 특히 자신에게 드리워지곤 하는 '여성'이라는 속성에 매여 있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화상>은 무언가를 표시하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텅 빈 기표와 같다. 그러니 누군가 시인을 식민지 시절 여성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떠올린다면 '하나밖에 없었던 여자로서의 최고학부'를 나와 신문사에서 '금방 데려간'(김윤식, 1997) 고고한 모습이, 내성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성정을 떠올린다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친구도 많지 않았던 시인의 생이, <자화상>이라는 비어 있는 기표에 대응되리라.
그렇기에 <자화상> 이후에 나오는 <사슴>을 읽으면서 화자에 겹쳐지는 이미지는 고고함일 수도, 외로움일 수도 있다. 또는 시집의 작명을 도운 동료 시인 김광섭이 선물했다는 '불란서에서도 보기 드문 시화가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의 <눈물의 자화상>(이승원, 2000)을 바탕에 두면, <사슴>의 화자는 그림 속 여인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한국의 마리 로랑생'으로 불리며 '여류'로 표상되는 최상의 경지에 있었던, 즉 '향기로운 관'을 지닌 사슴 한 마리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이미지들로 점철되는 <사슴>의 화자이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를 규정짓는 시원으로서의 <자화상>에서 화자가 여성성에 관한 표지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자화상>에서 시인이 스스로를 타인과 변별하는 지표는 성별이나 식민지 지식인 등 외부에서 부여받은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미"에서 오는, 지금 바로 이것에 만족할 수 없음의 상태를 추구하는 기질이다. 이러한 화자를 알고 나면 <사슴>이 들여다본 '물 속의 제 그림자'는 자기 탐닉에 젖은 나르시시스트에만 머물지 않으며, 그때의 '슬픔' 또한 여성으로 태어난 슬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텅빈 기표로서의 <자화상>과 화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 슬픈 나를 만나는 시간, <고독>
그러나 자기를 들여다본다 해서 언제든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려>에서 "내 마음을 받을 수 없는 / 슬픈 성격"에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데다 "밤이면 우는" 나귀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발견하듯, 대개는 자신과 닮아있는 대상을 통해 자신과 만난다. 이렇듯 다른 대상에 비추어 자기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시인은 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쳐다보고(<사슴>) 자신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탐정의 눈으로 기질을 유추하는(<자화상>) 방식으로 자신을 탐구했올까. 시인에게 그 계기는 울음 끝에 만난 '고독'의 순간이었다.
시 <고독>에서 이야기하는 '고독'은 울고 난 다음 “고요한 사색의 호숫가"에 데려가 "얼굴을 비추어" 주는 "단 하나의 친구"이다. 뼈에 사무치듯 외로운 순간도, 다른 사람과 철저하게 고립된 느낌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소외감도 '고독'의 한 종류이겠으나 번잡할 대로 번잡해져 이지러진 얼굴 뒤로 울음을 폭발시키고 나서야 찾아오는 경지 또한 고독의 여러 모습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독은 실컷 쏟아 낸 울음 뒤에 심사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느끼게 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단독자로서의 나를 대면하는 순간이다. 일상의 감정들에 초연하여 오로지 자신에 몰두하는 고독의 경지란 곧 일상성의 탈피이기에, '먼데 산'을 쳐다보는 '사슴'에서 '일상성에 함몰하지 않은 인간의 한 전형'(오세영, 1998: 215-216)이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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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데를 바라보는 사슴의 삶
그런데 일상성을 벗은 '사슴', 그러니까 시인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혹자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과 민족의식을 외면한 가운데 피어오른 시인의 '고독'과 '향수'를 사춘기 소녀들이 갖는 감상성으로 국한하고, 그러한 현실의식의 피상성으로 인해 친일시에 이르게 되었다고 혹평하기도 한다(신경림, 1981). 과거에 고착된 채 현재를 보내는 시인이 주조해 낸 잊힌 고향은 그가 마주해 있는 현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항상 고립과 상실의 시간(김승구, 2006)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러한 불완전한 현실 인식으로 미래와 연계될 수 없어 단절된 시공간 속에서 무화된 현재를 살아 낸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한 것이거나 당대 현실에 대한 무지 혹은 감상적 반응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근대 교육을 받고 문사(文士)로서 호명되면서도 생의 순간순간마다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또는 여성 문인으로서의 삶의 제약과 한계는 앞서 언급한 고향의 상실과 함께 시인이 자아의 분열을 겪고 모순된 상황으로 방황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김지윤, 2016)이 되었다. 눈앞에 놓인 몇 갈래의 길 중 하나를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끝내 그 모순을 견디며 살아온 시인의 삶에서, 선택의 순간들은 언제나 자신의 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그간 주목해 왔던 <사슴>의 화자가 누구인가의 질문에 더하여 '사슴'이 네 발을 딛고 선 위치가 어디인가, 또 그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더해질 때 우리는 <사슴>의 화자에게 다가갈 하나의 길을 새롭게 마련하게 될 것이다. | 진가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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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1997), <송충이와 나비의 몸짓>, 김윤식 · 김현자 · 김옥순 편, <나비: 노천명전집 2).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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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김현자 · 김옥순 편(1997), <사슴: 노천명전집 1》, 솔.
김종철(1978), 시와 역사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김지윤(2016), 「노천명 시와 번역 속에 나타난 분열과 봉합의 환상: '고향'과 '소녀' 이미지를 중심으로「비평문학』 60, 한국비평문학회, 27-70.
김현자(1997), <식물적 상상력과 절제의 미감>, 김윤식 · 김현자 · 김옥순 편, <사슴: 노천명전집 1). 솔.
신경림편(1981),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은: 노천명 시와 생애, 지문사.
신익호(2009), 「<자화상>에 나타난 자아인식의 시적 형상화」, 「한국언어문학」 68, 한국언어문학회, 277-308.
오세영(1998),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고려대학교출판부.
이승원(2000), 「노천명, 건국대학교출판부.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11. 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