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대륙까지, 만산부유의 시학
-김종회의 디카시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1.
이상옥, 최광임 시인과 더불어 디카시 열풍의 맏형격인 김종회 문학평론가가 최근 2년 사이에 두 권의 디카시집 『어떤 실루엣』(2019), 『눈꽃나무』(2021)를 냈다. 이론가인 그가 직접 칼을 빼 들고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들은 디카시 병법의 실전 현장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론의 수장답게 그의 디카시들은 장쾌하다. 그의 행보는 초야의 골방에서 격전의 대원(大原)으로 뛰쳐나간 장수처럼 넓고 크다. 이 시집들은 골방(서재)에서 시작해 그의 일터인 황순원문학촌, 국내의 아름다운 산하, 소아시아와 터키, 중국 북방, 북미 대륙을 만산부유(萬山浮游)한 이론가의 폭넓은 시적 변신을 보여준다.
시집마다 각 50편, 총 100편의 시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중심에 그의 「두고 온 서재」라는 작품이 있다. 이론은 오랜 독거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든 글은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에서 시작된다. 외로운 골방의 사유가 없이 문학은 탄생하지 않는다. 그 고요한 공간에서 천하의 지도가 그려지고 역사가 기획된다. 그의 「두고 온 서재」는 그런 침묵과 집중, 고독한 궁구(窮究)의 공간을 잘 보여준다.
30년 훈도의 길
그 모습을 두고 왔다
그대 아는가 정물 뒤의 광풍을
-「두고 온 서재」
이 시의 사진은 그가 정년 퇴임하기 전에 사용하던 대학의 연구실로 보이는데, 그는 이 공간에 연구실 대신 '두고 온 서재'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두고 왔으므로 이곳은 지금 중원(中原)에 서 있는 그에게는 과거의 공간이고, 만산부유하기 이전, 초야의 골방이다. 혹은 이곳은 그가 중원에 이르기까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돌아가 수도 없이 자신을 들여다보았을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이 적막한 공간을 '정물'이라 부른다. 사진 속에는 그가 들어가 있지 않다. 그의 부재가 이 공간을 더욱 고요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사진 밖에서 이 공간을 들여다보며 '그대 아는가 정물 뒤의 광풍'이라고 묻는다. 사진과 문자 사이의 이 갑작스러운 화학 반응이 '정물'을 전혀 이질적인 '광풍' 앞에 세운다. 이런 비동시성의 동시성,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강력한 전압이야말로 그의 시의 동력이다.
한낮 사막나라의 열천에서
단단하고 선명한 오로라를 보았다
문득 돌아보았다
내 삶의 광전은 어느 순간인가
-「캘리포니아 오로라」
그는 열기로 끓어오르는 사막의 하늘에서 우연히 마주친 오로라를 '단단하고 선명‘하다고 말한다. 빛을 '선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평범한 진술이지만, 그것을 '단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독특한 묘사이다. 그가 오로라를 단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그것에서 어떤 단호한 결기 같은 것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사실 이질적인 어떤 것들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결단의 순간은 얼마나 '단단한가. '광전'은 서로 다른 극을 가진 전자들이 순간적으로 부딪힐 때 생기는 에너지이다. 그는 자기 ’삶의 광전은 어느 순간인가'라고 묻는다. 사진 정중앙엔 고전압으로 불타오르듯 밝아진 오로라의 심장이 놓여 있다. 시인은 '삶의 광전'의 순간에, 결전의 순간에 가장 빛나는 심장을 갖는다.
2.
그의 디카시들은 이렇게 정물로 세상의 광풍과 맞서 온 주유기(周遊記)이다. 정물은 그의 시적 주체이고 광풍은 그것의 대상이다. 그의 시선은 적막하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요동친다. 그는 미친 바람을 보고, 자신을 적막하게 성찰한다. 이런 성찰은 광풍의 세상을 온몸으로 거쳐온 사람에게만 열린다.
불의 벽력이 스쳐간 자리
어떤 생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내 가슴속엔 이런 불모지가 없을까
-「하와이 용암바다」
"벽력"은 '벼락'의 유의어로 하늘과 대지의 전기가 맞부딪히면서 강력한 전류가 흘러나오는 방전 현상을 말한다. 우연인 것 같지만, 시인은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에 자주 주목한다. 앞에서 살펴본 「캘리포니아 오로라」가 그 충돌의 결과 가장 빛나는 기를 보여주었다면, 이 시는 그런 충돌의 비극적 결과를 보여준다. 사진은 무념무상 흘러가는 구름의 하늘과 '불의 벽력'으로 초토화된 '용암바다'(대지)로 양분되어 있다. 하늘은 고요하고, 대지는 죽음의 '불모지'이다. 이 극단적인 대조의 풍경을 들이밀며 시인은 '내가슴속엔 이런 불모지가 없을까'라고 자문한다.
밝은 햇살 속 맑은 숲
풍광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속에 잠긴 어두운 역사의 기억
-「중국 장춘 관동군사령부」
이 시에서도 시인은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의 풍경을 본다. 일제의 만주 중점기지였던 장춘 관동군사령부는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밝은 태양' '맑은 숲' 속에 평화롭고 아름답게 서 있다. 시인은 사진 바깥에서 '그 속에 잠긴 어두운 역사의 기억'을 읽는다. 사진 속 붉은 벽돌 건물의 한 면은 여전히 제국의 권력과 만행을 자랑하듯 햇빛으로 환히 빛난다. 천하를 주유하며 시인은 이렇게 사람을 읽고, 역사를 읽는다. 가는 곳마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충돌의 전장이 있고, 그런 현장을 만날 때마다 시인은 결기와 자성 속으로 들어간다.
세계가 모순적인 것들의 길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시인의 시선이 그 충돌의 중심에 머무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것들이 계속 부딪히기 때문에 세계는 항상 흐르고 변화하며, 이 끝없는 유동의 상태는 다시 새로운 모순들을 계속 만들어낸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이런 변화의 더께로 무겁다. 시인은 그것의 배후와 시간성을 읽어냄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렇지만, 역사가와 시인의 다른 점이 있다. 역사가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의 해석에 그친다면, 시인은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도래할 미래를 꿈꾼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 욕망이 없는 모든 예술은 이미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쉬지 않고 세포를 증식하며 마침내 한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로 날아갈 알(卵)을 키운다. 예술은 작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조차 이미 유토피아의 둥지를 품고 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성취된 가능성들의 실험실이자 동시에 축제'(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이다.
3색의 로열 블루
하늘 바다 풀장이 모두 동색이다
차마 옷벗고 들어가지 못한다
-「낙원 절경」
앞에서 인용한 작품들이 대립물들의 강렬한 길항을 다루고 있다면, 이 작품에서 그런 모순의 소음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수평으로 배열된 하늘과 바다와 풀장은 아무런 충돌도 소음도 없이 평화롭다. 그것들은 모두 '동색'이어서 그 내부에 아무런 분열도 싸움도 허락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 완벽한 조화를 '로열 블루'라 높여 부른다. 로열 블루는 서구 왕족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관복 색깔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로열'은 계급적 우위가 아니라, 존재적 최우위 상태를 가리킨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이렇게 모든 모순과 갈등이 말끔히 해소된 '낙원 절경'의 상태이다. 그것은 너무 크고 귀해서 시인조차도 '차마 발벗고 들어가지 못한다‘.
부안 내변산 직소보
누가 이 아름다운 산중 호수를
아무 값도 없이 바라보라 했던가
고요한 절경 앞에 더 고요한 마음
-「고요」
앞에서 읽은 「두고 온 서재」에서 시인은 '정물' 같은 고요 뒤의 '광풍'을 읽어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배후에 아무 소음도 없는 '고요' 자체를 보고 있다. '고요한 절경 앞에 더 고요한 마음'은 고요의 동질성이 대상에서 주체로 자연스레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체-대상의 이런 완벽한 스밈 혹은 통합의 상태야말로,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도래할 시인의 유토피아이다. 그것은 마치 분리 불가능한 '나-너(Ich-Thou)',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표현처럼, 모든 사물이 주체-대상이 아니라 주체-주체로 존재하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이다. 주체-대상의 범주가 와해되고 나가 너가 되며, 너가 나가 되는 것은, 앞의 「낙원 절경」에서 하늘, 바다, 풀장이 하나의 '동색'인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완벽한 무위(고요)의 상태이다. 그곳에서 주체와 대상은 동등한 주체로서 그 모든 긴장과 불안을 내려놓고 '아무 값도 없이' 상대를 바라볼 수 있다.
탐스럽기 이만한 꽃이 있을까
풍성한 잔칫집 여유로운 풍광
무심한 행인의 가슴을 채우다
-「와장창 수국」
이 시는 풍성한 수국꽃을 '와장창 수국’이라 명명함으로써, 유토피아의 축제성을 청각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본 수국은 꽃이면서 동시에 풍요와 여유로 가득 찬 축제의 폭죽 같다. 그것은 그 자체 넘쳐흐름의 아름다움'(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이다. 그것은 넘치고 넘쳐 '무심한 행인의 가슴'까지 채운다. 그것은 전유가 아닌 스밈, 길항이 아닌 사랑을 꿈꾼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종회의 디카시들은 사유의 외로운 골방에서 시작하여 산천과 대륙을 주유하며 그가 만난 순간들을 섬광처럼 기록한다. 그는 광풍을 불러일으키는 힘들의 벡터를 읽어내고 그 너머의 고요와 아름다움과 풍요를 꿈꾼다. 그는 마치 여유있는 지략가처럼 서재에서 나와 들판과 강물을 건너 대륙을 떠돈다. 그리고 그 여유는 모두 그가 평생 온몸으로 겪었을 광풍의 경험에서 나온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2025. 1. 2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