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단원(20-24) 새 사람을 입으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둘째 단원의 중심점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않았다”는데 있고,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20절은 “오직 너희는” 하고 시작이 되는데, “오직”이란 유일(唯一)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다가 “오직”이 어떤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지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오직”에 복음의 유일성이 있고,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이에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에베소 성도들이 듣고 배운 것이 무엇인가? 교훈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던 이방인들이 어떻게 해서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2:12,19)이 되는 것이 가능하여졌는가 하는 복음이라는 점에 확고해야만 합니다. 1-3장에서 증언한 복음진리를 듣고 배웠다는 점이 우선한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점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 하는 말씀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받은 것(복음)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합니다. 바울이 받은 것이 무엇인가?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3-4)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를 “너희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도, “들었다, 배웠다, 가르침을 받았다”(20, 21)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어째서 중요하냐 하면, 왜 불신자들처럼 행해서는 아니 되는지, 무엇때문에 그렇게 행해야만 하는지, 실천윤리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왜냐하면—-그러므로”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할 당위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설교에는 크게 두 가지 특성이 나타나는데 먼저 성도들의 심리나, 감정에 호소를 합니다. 그런 후에 결단하고 실천을 촉구하는 적용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의 설교가 듣기에는 은혜스러울지라도 여기에는 교리적인 뼈대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환난과 시련을 당하게 되면 견디어 내지를 못합니다.
사도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4:20-21),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한가 하고, 저들이 듣고 배우고 깨달은 지적인 면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그리스도
이점에서 우리로 관심하게 하는 것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한 사도가, 바로 이어서는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다고 호칭을 바꿔서 부른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는 주님을 증언할 때 특별한 의도에서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 부를뿐 “예수”라 부르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도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증언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는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사도는 마태복음 1: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한, 그 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예수”!!! 종래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빌 2:6-8) “예수”!!!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진리”가 바로 이처럼 역사속에 오셨던 “예수 안에” 있다는 이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는 로마서에도 나타나는데,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고, “예수의 피”라고 말씀하는 의도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는지 너희는 배워서 알고 있지 아니 하느냐? 그 분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지 너희는 들었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죽었던 예수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너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너희는 배우지 아니하였느냐?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가 하나님과 멀리있던 너희를 가까워지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는 점을 너희는 듣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0-21),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이런 뜻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도 분명해졌습니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22, 24)고 권면합니다. 이점에서 “옛 사람”에 대한 교리적인 면과 교훈적인 면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만 혼동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