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正德) 15년(1520, 중종 15) 경진 정월 을미에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송공(宋公)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시고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장례를 도와주게 하였으며 ‘숙정(肅靖)’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셨다. 3월 을묘에 양주 고을 북쪽 소라산(蘇羅山) 뒤 동남향의 언덕에 묘소를 정하고 가정(嘉靖) 23년(1544, 중종 39)에 공의 후사인 통례원 사예(通禮院司禮) 지한(之翰)이 가승(家乘)1)을 가지고 와서 세창(世昌)에게 명문(銘文)을 청하였다. 오호라! 공이 과거시험관이었을 때에는 문하생으로서 욕되게 하였고, 전형(銓衡)을 잡고 재상의 지위에 오르실 때에는 외람되게 두 번이나 낭료(郞僚)가 되었다. 내 평생에 공경하고 사모하는 이가 공과 같은 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공의 묘도(墓道)를 새기는데 굳이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의 이름은 질()이며 자는 가중(可仲)이다. (…결락…) 숙문(淑文)은 고려 때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송례(松禮)는 원종(元宗)을 도와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다. 이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공명을 드날렸고, 진생(辰生)은 국조(國朝 : 조선)에 벼슬하여 내자 소윤(內資少尹)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소윤(少尹)이 만달(萬達)을 낳았는데, 만달은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이 분이 공손(恭孫)을 낳았다. 공손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훈련 도정(訓練都正)을 지냈으며, 충순 보조공신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받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사직(司直)인 박겸형(朴謙亨)의 딸을 배필로 맞아들였는데, 고려의 진현관(進賢館) 대제학인 대양(大陽)의 증손이다.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 2)에 공을 사직부군(司直府君)의 밀양에 있는 집에서 낳았다. 일찍이 부군이 공을 안고 누각에 올라가다가 실수하여 누각 아래로 공을 떨어뜨렸다. 누각 위에 올라 황급히 살펴보니 공이 기어 나오는데 다행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글을 읽을 줄 알기 시작하면서 학업이 날마다 정진되고 원대한 뜻이 있었으므로 찬성공(贊成公)이 기특히 여기며 “이 아이는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가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임금께서 학궁(學宮 : 성균관)에 납시어 모든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였다. 공은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는데 내구(內)의 말2)을 빌려 타고 오라는 임금의 명이 있어 곧 서둘러서 대궐에 당도했다. 살펴보니 방이 붙어 있었고 처음으로 성균관 학유(學諭)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478, 성종 9)에 외가 쪽의 상(喪)을 당하여서 복(服)을 마치고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가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뽑혔으며 박사에 올랐다. 진현시(進賢試)에 합격한 뒤 관품을 뛰어넘어 부수찬 지제교에 제수되었으며, 갑진년(1484, 성종 15)에는 교리로 승급되고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어서(御書)에 공과 김응기(金應箕) 등 5명의 이름을 쓰시고 정조(政曹)에 명을 내리시어 각각 자급을 올리라고 하시며 “비록 사람 수가 많으나 넘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병오년(1486, 성종 17)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사섬시(司贍寺)와 종부시(宗簿寺)의 첨정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전임되었는데 다시 군자감 부정으로 진급되었다. 신해년(1491, 성종 22)에 세자시강원 보덕에 제수되고 임자년(1492, 성종 23)에 홍문관 응교에 올랐다. 갑인년(1494, 성종 25)에 부제학에 오르고 승정원으로 들어가서 부승지가 되었고 다시 옮겨 좌승지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 3)에 금대(金帶)를 하사받았으며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동지중추부사 (…결락…) 평안도 관찰사 (…결락…) 그러나 어버이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양하니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천추사(千秋使)로 연경(燕京 : 북경)에 다녀왔으며, 그 후에 호조와 이조의 참판으로 전임되었다. 계해년(1503, 연산군 9)에 특명으로 자헌대부로 진급되고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성의를 다하여 송사를 밝게 판결하므로 옥에는 죄수가 없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산릉(山陵) 일을 감독하여 정헌대부로 관계(官階)가 올랐고 의정부로 승진되었다.
을축년(1505, 연산군 11)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고 병인년(1506, 연산군 12)에 예조 판서 겸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다. 9월에 임금께서 반정(反正 : 중종반정)을 하시고 조정에서 논의되는 일체의 문서에 대하여 힐책하셨는데, 공이 응하여 막히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공훈을 기록하여 병충 분의 정국공신의 호를 주시고 숭록대부로 관계를 올려주셨다. 정묘년(1507, 중종 2)에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고, 무진년(1508, 중종 3)에 중국에서 태감(太監) 이진(李珍) 등을 보내어 오니 공이 국경에서 접대하였다. 그 해 겨울에 보국 숭록으로 관계가 오르고 여원부원군 겸 영경연사에 봉해졌다. 기사년(1509, 중종 4)에 체찰사(體察使)로 함경도에 가서 보진(堡鎭)을 살펴 묵은 폐단을 많이 고쳤으므로 지금까지 그 지방의 백성들이 힘을 입고 있다. 8월에 부모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으므로 그 당시 여론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신미년(1511, 중종 6)에 복을 마치고 다시 훈봉(勳封)을 받았으며, 임신년(1512, 중종 7)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관리를 공정히 선발하니 사람들이 아주 흡족해하며 칭송하였다. 임금께서 친히 공의 이름을 비준하여 특명으로 우의정에 제수하고 계유년(1513, 중종 8)에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공은 항상 성만(盛滿 : 부귀·권세 등이 극성함)을 경계했는데, 갑술년(1514, 중종 9)에 사람들의 언쟁이 심하자 간곡히 사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마지못하여 허락하시고 부원군에 봉하셨다.
을해년(1515, 중종 10) 정월에 부르심을 받들어 입궐하였다가 병을 얻어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 임금께서는 어의를 보내어 병을 치료케 하였으나 위중해졌다. 그러나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으면 근신(近臣)을 보내어 자문하셨고 은총을 두텁게 내리셨다. 병이 심해지자 새벽에 일어나 서둘지 않고 침착히 서거하였다.
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커서 가슴 속이 막히지 않고 트여 있었다.신장은 보통사람을 넘지 않으나 바라보면 마치 산악(山岳)같이 중후하였으며, 평소에 해학을 섞어서 말씀하시니 화목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큰일을 당하면 낯빛이 씩씩하고 의기가 엄숙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문사(文辭)를 지을 때는 붓을 잡고 즉시 쓰며, 서사(書史)에 빠짐없이 능통하고 육도삼략(六韜三略)3)의 병서까지 모두 통하였기에, 세상에서 장수의 재질을 논할 적이면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여러 번 시관(試官)을 맡아 인재를 많이 얻었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안색을 살펴 봉양을 잘하였으며 귀하고 중한 위치에 이르렀어도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은혜로써 친척을 위로하며 의리로써 자제를 가르치고 또 성격이 화려함을 즐기지 않아 벼슬에 있을 때는 심히 간결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하는 것에서부터 성종(成宗)의 지우(知遇)4)를 받았는데, 임금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사람을 얻음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송모(宋某)와 같은 사람을 얻을 것인가”라고 하셨다. 임금께서 일찍이 공이 월과(月課)로 지은 글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곧 송모의 충성심에서 나타난 것이다”라 하시고, 큰 집을 마련해 주도록 명하셨다. 공은 풍성한 눈썹과 높은 콧마루로 인해 조금 찌푸리는 듯한 인상이었는데, 임금께서 일찍이 보시고 눈짓을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송모는 무슨 불쾌한 일이 있어서 그렇게 콧대를 찌푸리는가”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공을 중하게 여기시어 농담을 하신 것이다. 만년에 집을 도성 동쪽에 짓고 수석(水石)의 취미를 즐기며 활기차게 생활하였다.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부인은 남원 양씨(南原梁氏)인데 종친부 전첨(典籤)인 원(瑗)의 딸이고 남원군(南原君) 성지(誠之)의 손녀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따스하고 자상하여 평생에 한 번도 교만하거나 게으른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 17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경하여 순종하고 말을 어기거나 거스린 적이 없었다. 복록(福祿)을 누리니 종족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자녀를 가르치는 데에는 예와 법도를 다하였으며 도정공(都正公)을 섬긴 지 거의 40년이 되어도 성실과 효성을 다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모든 아들들에게 “너의 어머니는 어진 사람이다. 내가 어진 벗과 같이 공경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뒤 15년이 되는 갑오년(1534, 중종 29) 12월 을미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 74세였다. 공의 묘소에 합장을 하였는데 묘봉(墓封)은 같으나 묘실(墓室)은 다르다.
공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지한(之翰)은 부사요, 차남 지간(之幹)은 정략장군(定略將軍)이며, 3남 지정(之禎)은 사옹원 참봉이다. 장녀는 덕산 현감(德山縣監)인 이형간(李亨幹)에게, 차녀는 내자시 정(內資寺正)인 신거이(愼居易)에게 시집갔다. 3녀는 지금 의정부 좌의정인 홍언필(洪彦弼)의 부인이다. 부인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섬(暹)으로 지금 경기도 관찰사이며, 딸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인 윤진(尹珍)에게 시집갔다. 지한은 먼저 영의정 남곤(南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인(寅)이라고 하였다. 두어 살이 되었을 때에 공이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골격이 나와 같으니 잘 기르라”고 하였다. 자라서 정순옹주(貞順翁主)를 배필로 삼았고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다. (지한은) 뒤에 형조 정랑인 김현조(金顯祖)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지간은 안동 권씨인 권윤온(權允溫)의 딸에게 장가들고, 지정은 익찬(翊贊) 윤영(尹穎)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우(宇)와 선원 참봉(璿源參奉) 빈(賓), 녕(寧)이다. 덕산 현감 이형간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곤독(崑讀)은 세자익위사 시직이고, 딸은 유학 유(柳) (…결락…) 에게 시집갔다. (…결락…) 1녀를 낳았는데 (…결락…) 에게 시집갔다. 내외 증손은 약간 명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남쪽에 고을이 있는데 여량(礪良)이라고 했다.
위인이 대대로 나니 나라의 상서로운 일이다.
공이 좋은 시대에 부름을 받아 일찍이 사장(詞場)에서 이름을 떨쳤고,
우리 임금이 도와 큰 운(運)이 두 번이나 번성하였다.
손으로 전형(銓衡)을 잡고 몸은 조정에 올라
경계를 쓸고 닦아 넓게 포부를 들어냈으며,
시고 단 것을 솥에서 조절하고 혼잡한 것은 칼날로 잘 요리하였도다.
순임금과 우임금 같이 좋은 만남이었으니,
종정(鐘鼎)5)에 공훈을 새기고 산하(山河)에 맹세한 것을 은밀히 간직하였다.
부인은 아름답고 굳은 절개가 있었으며,
검소한 가운데 어진 덕이 있으셨다.
소라(蘇羅)의 뒤 언덕에 무덤이 있어 당(堂)과 같으며 묘석에 사적(事蹟)을 새기니,
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24년 9월 일에 세우다.
의정부 영의정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숙정공(肅靖公) 부군(府君) 비 음기(陰記)
오호라! 우리 송씨(宋氏)의 뿌리는 깊고 가지는 무성하며, 덕은 두터워 영화가 흘렀도다. 그윽히 정렬공으로부터 아래로 3대가 연이어 상상(上相 : 영의정)이 되었다. (…결락…) 끊이지 않았고, 숙정공 대에 이르러 다시 커졌도다. 무릇 선대로부터 대대로 관력과 향년은 모두 가□(家□)에 실렸으니 가히 □이다. 그 무덤은 혹은 편함을 취하여 도읍 근처에 하고, 혹은 나란히 가향(家鄕)에 정하여 치성하였으니 남북의 다름이 있었다. 소윤 부군 대에 이르러 비로소 여기에 점을 쳐 정하였으니 그 배필 최씨 부인의 옛 업이 오래도록 있어 그 후에 □로 □장(□葬)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제사에 부족함이 없이 수호하게 되었는데, 자손은 점점 번성하나 토지는 한계가 있는 까닭에 선군으로부터는 이미 다른 언덕에 묘소를 정하게 되었다. 무릇 다시 수대가 지나면 장지가 서로 멀어지게 될 터인즉 찾기 어려워지거나 잃어버릴 우려가 있을까 두렵다. 이에 음기(陰記)를 좌측과 같이 하니 나로 하여금 (…결락…)하여 이윽고 찾게 하였는데, 진실로 선군께서 평상시에 가졌던 뜻이었다. 아아! 자손은 부모의 슬하에서 생장하는 것으로 잠시라도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미 장성하여 비록 그 거처함이 다르더라도 이 세태는 진심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풍수의 설에 우리는 어긋난 것이 없는 바이지만 저승과 이승이 다를 것이 없다. 우려되는 것은 자손에게 뜻이 미쳐 골육에게로 다시 돌아갈 때이니 선조의 선영 곁을 취함이 마땅하다. 다만 소목(昭穆)으로 비늘이 차례로 서듯 봉하여야 할 것이다. 대저 사람의 길흉화복은 모두 스스로 정성을 다함에 있는 것이니 어찌 지기(地氣)에서만 비롯된다고 하겠으며 그런즉 상천(上天)의 명(命)과 제(制)가 한 그릇의 흙에 담기겠는가? 일찍이 고려 때의 여러 능을 보니 한 동리에 두지 않아서 왕조가 면면히 5백년이 이어진 것이라 하겠다. 우리 황조(皇朝 : 선조)가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천수(天壽)의 산에 두어서이고 만국의 조정에 있게 된 것이 거의 2백년이니 여기에서 정결치 않음은 밝아졌다. 가문과 나라는 비록 다른 것이나 이치가 어찌 둘이겠는가? 이에 소견을 서술하여 많은 자손들로하여금 깨닫게 하고 대대로 지키도록 하니 남긴 바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정(嘉靖) 43년(1564, 명종 19) 갑자 5월 일 고(孤)□□□ 삼가 쓰다.
10대 할아버지인 첨의 중찬 정렬공(貞烈公) 부군의 묘는 경기 장단부 남쪽 5리 지금은 홍릉산(洪陵山)이라 부르는 대곡산(大谷山) 동향의 언덕에 있다.
9대 할아버지인 시중 낙랑부원군 양의공(良毅公) 부군의 묘는 장단부 남쪽 옛 임진현 토난전 남향 언덕에 있다.
8대 할아버지인 우정승 여양부원군 부군의 묘는 양의공 묘 왼쪽 200보 떨어진 다른 언덕에 있는데, 현재 둘 다 모두 호곶(壺串) 목장 안에 있다.
7대 할아버지인 판사복시사 부군의 묘는 청홍도(淸洪道) 연산현(連山縣) 동쪽 개태(開泰)의 영산리(靈山里)에 있다.
6대 할아버지인 서운관 정 부군의 묘는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북쪽 천애동(天涯洞) 서남향 언덕에 있다.
영주군부인(瀛洲郡夫人) 이씨(李氏)의 묘는 고부군(古阜郡) 남쪽 탄동리(炭洞里) 남향 언덕에 있다.
5대 할아버지인 증 이조 판서 행 내자 소윤 부군의 묘는 경기 양주(楊州) 치소의 북쪽 사천현(沙川縣) 소라산(蘇羅山) 뒤쪽 대봉(大峯)의 서쪽 서북향 언덕에 있다.
증 정부인 최씨의 묘는 부군의 묘 뒤쪽 4보에 있다. 부인의 아버지 판사재감사 수렴(守廉)의 묘는 소라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그 자손들은 모두 묘소 근처에 살고 있다.
고조 할아버지인 증 의정부 좌찬성 행 경원 부사 부군의 묘는 소윤 부군 묘 아래 8보에 있다. 이하 송씨의 여러 묘소들이 근처에 있으나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증 정경부인 홍씨의 묘는 광주(廣州) 치소 남쪽 문현산(門懸山) 추현(秋峴) 길가의 서향 언덕에 있다.
증조 할아버지인 증 의정부 영의정 행 훈련원 도정 부군의 묘는 대봉(大峯)의 서쪽 서북향 언덕에 있다. 오른쪽으로 소윤 부군의 묘와는 250보 떨어져 있다.
증 정경부인 박씨는 무덤 자리는 같으나 봉분은 다르다.
아버지 증 호조 판서 행 첨지중추부사 부군의 묘는 소라산 서남쪽 입석리(立石里) 남향 언덕에 있다. 북쪽으로 숙정공 부군의 묘와는 3리 근방에 떨어져 있다.
어머니 증 정부인 남씨의 무덤 자리는 같으나 봉분은 다르다.
둘째 아버지인 충의위 부군의 묘는 숙정공 부군 묘 남쪽 13보에 있다. 막내 아버지인 사옹원 참봉 부군의 묘는 숙정공 부군 묘 왼쪽 남향 언덕에 있으며, 그 부인 윤씨의 무덤은 자리는 같으나 봉분은 달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