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로망※ 11~20

소설제목 : 그 여자의 로망 작가명 : 캔디:D E-mail : <a href="http://go.daum.net/bin/go.cgi?relative=1&url=/Mail-bin/login_f.cgi%3Ferror%3Dlogin%26lu%3D/Mail-bin/send_mail.form.cgi%3FTO%3Donlygod90@hanmail.net">onlygod90@hanmail.net</a> 연재장소 : 새싹소설③ 총편수 : 총 35편 완결(프롤포함) 장르 : 로맨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a href="http://cafe.daum.net/youllsosul" target=nlink>http://cafe.daum.net/youllsosul</a>) 팬까페 : <a href="http://cafe.daum.net/candy12345" target=nlink>http://cafe.daum.net/candy12345</a> -11 '쏴아아아아아아아.' 모두가 잠든 새벽부터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은미의 귓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은미는 몹시 아픈 사람처럼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불을 끌어당겨 푹 뒤집어 쓴 은미는 식은 땀까지 줄줄 흘려대며 무엇이 두려운 것처럼 진저리치고만 있다. "하.....아.." 악몽이라도 꾼건지 침대에서 튕겨 일어난 은미. 숨을 돌리더니 핸드폰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엄마, 아빠의 세번째 기일. "...아씨..무슨 비야.." 은미에게 있어 참 아프고 힘든 기억이 많았던 삼년전. 은미의 엄마, 아빠가 함께 이세상을 떠난 그 날. 억센 비가 내렸었는데.. 급속도로 우울하게 된 은미가 조심히 방을 나와 주방으로 향한다.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모른다. 언제나 이 날만은 지극하게도 우울한 은미다. 컵에 얼음을 몇개 담은 은미는 조용히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쇼파위로 발까지 올려 앉은 채 얼음 하나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거센 빗줄기를 보는 은미의 눈은 살짝 젖어있는 듯. 얼음을 두개정도 먹고는 시린 입이 절로 입김을 만들고.. 은미의 손은 본능적으로 담배를 찾는다. .......... .... 째깍. 째깍. 정신을 놓은 채 얼마나 있었던걸까. 이른 아침부터 피어댄 담배가 네개피. 남은 얼음은 녹아 완전히 물로 변했을 쯤. 어렴풋 초인종소리에 은미는 정신을 차렸다. "누구세요?" 대답대신 인터폰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손을 흔드는 언제나 밝아서 가끔은 부러워지는 여울이가 모습을 보였다. "아침부터 왠일이야." "뭐랄까. 걱정되서랄까." 넉살좋은거라면 여울이에게 빠지지않는다. 거기에다가 능청스러운 것까지. 자기집인마냥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마구 들어온다. 이러니 은미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을 수 밖에. "참 눈물나게 고맙네요. 걱정도 해주고." "누나가 우울해하는 날이잖아. 애슐리한테 뜯어낸 정보가 수십개라구." ".......애슐리.." 순간 애슐리가 보고싶어진 은미다. 그래서 더욱 어두워진 은미의 표정. 여울이는 혀를 끌끌 찬다. "담배 안피면 안되는거야?" "응?" 여울이가 연신 담배꽁초를 손으로 가르킨다. 그러면 은미는 자신은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담배피는 여자는 싫어." "치. 실컷 싫어하세요. 누군 피고 싶어서 피나..." 은미의 목소리가 점차 자그마해진다. 왠지모를 어두운 분위기에 둘다 가만히 말이 없었다. 여울이가 어색하게 쇼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은미는 가만히 머리를 긁적였다. "누나, 너무한 거 아냐? 그래도 난 남잔데!!" "뭐가!" "머리는 부시시하고..잠옷차림인데도 갈아입을 생각을 안하고..!" "...뭐 어떠냐!!" "거기다가 눈꼽은 옵션이지? 아..차은미 완전 깬다.." 은미는 눈꼽을 그냥 대충 떼어내고는 괜한 시비를 거는 여울이를 내리깔 듯 본다. "김여울..벼엉신." "뭐?" "온 김에 아침먹고 갈래?" "맛있는 거 있어??" "내 브랙퍼스트는 늘 토스트야." "아아악!!! 한국인은 자고로 아침엔 밥을 먹어야..!!!" 여울이 덕분에 이십오퍼센트 우울모드 다운. 조금은 우울하지 않은 기분으로 은미는 아침을 시작한다. "쩝쩝...오늘 성당갈꺼야?" "글쎄. 요근처 성당을 몰라서.." "....흠...." "..그리고..뭐..내가 천주교냐. 엄마,아빠가 천주교지." "..........." "......뭐..그리고..이젠..뭐..익숙해졌어." ".....익숙해지긴......" "..그냥 마음속으로만 머리로만 생각하고 담고있지, 뭐." "..............." "그걸로도 충분하잖아." 은미의 눈가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떨구어진다. 목이 잠겨버려 끝은 좀 흐렸지만 여울이는 그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은미의 눈물을 조용히 모른 척 해준다. 은미의 토스트는 무척 짭쪼름했다. "하..상쾌한 아침이야. 오후엔 더 상쾌했으면 좋겠다..그치,누나?" "응. 그랬으면 좋겠다." 걱정했던 은미의 미소를 눈물과 함께 봐서 조금 아쉬웠지만 여울이는 한시름 놓은 것 같았다. 간단한 아침을 얻어먹은 여울이는 바로 학교로 향했다. .......... ...... 기분전환을 한답시고 은미는 설거지며 청소며 집을 깨끗이 정리하느라 바빴다. 땀을 흘리고나니 시간은 꽤나 지난 듯. 시원하게 샤워를 끝마치고나면 조금은 산뜻해진 기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벨소리. 핸드폰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미간을 바짝 찌푸리고 만다. "차이는 게 즐겁나 보군." 짜증이 살짝 나기도 하지만 은미는 약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가볍게 붙인다. -12 "여보세요." -...흠흠. "무슨 일이예요." -...아..그니까..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제대로 통화를 하지 않는 진성. 은미는 살짝 웃음이 새어나왔다. 딱 세번만 차보자는 생각이지만.. 네번째가 오지 않는다면..? "말씀하세요." - 나. 왜 안되는거야? "네?" - 그렇잖아. 내가 차일만한 이유가 뭐지? 은미는 어의가 없어 한동안 말을 잃었다. 지나친 자신감.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차일만한 이유도 그닥 있지 않는 건 사실이다. "왕자병씨. 제발 정신 좀 차리시죠." - 아이씨. 쪽팔려.. "끊어요? 나 끊습니다?" - 딱 한번만 더 묻자. 요란하게 차인 거 세번 채우지 뭐. "뭐가요.." - 사귀자. 우리. "............" - 흠흠.. "저한테 뭘 바라세요? 뻔한 대답이니깐 이만 끊을게요." - 뻔한 대답? "기분이 몹시 구린 날이거든요. 끊어요. 대답은 노예요.노." 뚝.. 이로써 세번을 채운건가? 하진성말처럼? 이젠 받아들이고 사귀어버리는 거. 이렇게 차고 또 찼는데 과연 가능할까. 지금까지 쉽게 왔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심정. 은미는 어려운 문제를 안아버렸다. *** 괜한 짓을 한 것만 같아 진성은 왠지 찝찝했다. 더구나 쪽팔리고 억울했다. "아..이놈의 손은 왜 핸드폰을 들어가지고!!" 자신의 손을 노려보며 은미에게 그동안 전화했던 것을 후회한다. 차인 적도 없어서 어색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차이면 차일수록 끝까지 넘어오게 하고 싶은 그런 소유욕이 치미는 것이 사실이었다. 세번 차이고는 이젠 절대 관심끄겠다 마음먹은 진성. 자꾸 생각나는 차은미의 차가운 목소리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여자가 하나냐. 우리나라 적어도 반은 여자니까..' 그런데.. "아씨...내가 왜????" 어두운 밤이 되자, 꿀꿀한 기분을 안고 집을 나와 자주가는 바를 찾기로 했다. 거기에 가면 대화할 사람이라도 있겠지 싶은 진성이다. ........... .......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시네요. 저쪽에 여민씨도 와있어요." "아. 형이요? 고마워요." 카운터에서 살짝 떨어진 쪽에 앉아있는 여민이가 보인다. 여민이라는 사람은 피어싱이 돋보이던 그 남자. 진성이가 절친하게 생각하는 형이다. "형!" "어라? 니가 여긴 왠일이냐?" "그런 형은 혼자 뭐해? 잘됬다. 마침 혼자였는데." "일행있다. 얌마. 화장실갔어. 너도 알걸?" "누군데?" 진성이가 약간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마침 그 때 저기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알지? 김여울이라고. 너 그때 차은미던가? 그 여자 소개시켜준.." "아..!!" "어...! 아..안녕하세요." 테이블 가까이 온 여울이가 진성이를 보곤 어색한 인사를 건냈다. 미세하게 여울이의 얼굴은 굳고 말았다. "안녕하죠. 저..여기 껴도 되나요?" "아...그럼요." 그렇게 여울이와 진성이. 여민이까지. 한 테이블에 앉게 된 세사람. 살짝 조용해진 분위기. "주문했어? 뭐 좀 시키고 볼까?" *** 은미가 손에 작은 십자가하나를 쥐고는 창문 밖 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엄마, 아빠의 기일인만큼 무척 우울한 은미는 하루종일 집 밖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달이 뜬 어두운 밤. 그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지긋이 감고만 있다. "난 무척 강해졌어요... 예전의..차은미가 아니예요.." 달빛에 비춰진 은미의 볼을 타고 따뜻한 눈물줄기가 흐른다.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다 늦은 밤이 되서야 은미는 잠자리에 들었다. *** "제대로 인사할게요. 하진성이라고 해요." "김여울이예요." 서로 인사를 건내고는 알 수 없는 눈빛경쟁이 일어났다. 그러다 여울이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한마디를 툭 뱉어냈다. "..누나랑은 잘되가요?" "....아..차은미씨..?" "그래. 너 잘되가냐?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애쓴건데." 그 말에 피식하고 웃어버리는 진성이는 머리를 긁적이곤 소심하게 입을 연다. "그게..쉽지가 않네." 그 말에 여울이의 표정도 잠시 펴지는 듯. 더욱 귀를 세우고 진성을 바라본다. "차였어요. 보통이 아닌던데요?" "그럼요. 은미는 대단한 사람이예요." "대단한..사람이요?" 진성이가 이해가지 않는 표정으로 되물었고, 술잔만 빤히 들여다보는 여울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아마....당신이..넘볼 수도 없는 그럼 사람일지도 몰라요." -13 분위기는 정말이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진성이의 웃음으로 딱 깨어지기는 했지만 그 여울이의 말은 참 많은 뜻을 가진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요?" "..글쎄요." 진성이의 머리는 이미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표정에서 딱히 다르게 해석하기는 불가능이다. 차은미를 좋아하는 군. 이 정도로 해석이 될 수 밖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욱 넘보고 싶네요." ........... ........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털썩 앉아버리는 진성. 괜히 나갔다는 생각이 스친다. 세번이나 차인 여자한테 더 뭘 바라나 싶었는데.. 김여울이라는 사람때문인지.. 아니면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꾸 골치아픈 생각이 나버린다. 술에 취한 듯 묘한 기분에 취한 듯 그렇게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 '♬♬♪♩♩♪♩♬♪' 침대아랫쪽에서 들리는 핸드폰벨소리. 은미는 벨소리에 어기적어기적 잠에서 깨어났다. 감긴 눈을 겨우 뜨고는 급히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여보세요..." - 은미!!!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어! "아..나 방금 일어났어." - 뭐어어????? 지금이 몇신데 이제 일어나! 여울이의 말에 벽에 붙은 시계로 눈을 돌리는 은미다. 그러면 참 기가막히게도 시계바늘은 정확히 다섯시를 가르키고 있다. 새벽 다섯시? 은미는 고개를 갸울뚱거리다가.. 이내 오후 다섯시라는 것을 알아냈다. "맙소사. 다섯시????" - 게을러!!! 헬스도 안갔다왔겠네? "설마 오후 다섯시..미쳤어.." 다섯시.. 그녀가 어제 밤늦게까지 밤하늘을 보다가 잠든 시각이 그러니까.. 새벽 세시쯤. 그러면..열두시간.. 열세시간..열네시간.. 무려 열네시간이나 잠들어버렸다. "아..진짜 내가 미쳤지." - 에휴. 못말린다. 차은미. 이제 뭐할거야? "글쎄. 씻고 밥 좀 먹고..연습실이나 가봐야지." - 으흠..오늘은 늦게 일어났으니까..내일 시간 어때? "왜?" - 데이트 좀 하자구!!!! 나 외로워!!!!!!! "풉..알았어. 내일 연락할게." - 응!! 꼭 연락해! 내가 먼저 하기전에 왠만하면 해줘! "오냐오냐. 끊어!"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그저 씁쓸한 웃음을 짓는 은미는 어깨를 두어번 주무르고 욕실로 향했다. *** 여덟시를 지나 아홉시가 다되어가는 시각. 그제서야 은미는 연습실로 향했다. 야자하느라 바쁠텐데.. 이상하게도 학교건물의 불이 거의 꺼진 듯 싶었다. 은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연습실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고 점점 문과 가까워질수록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 싶었다. 조심히 잠기지않은 문을 열었고.. 불이 환하게 밝혀진 연습실에는 아이들이 연습에 한창이다. 마침 음악을 끄고 쉬는 타임. 조심히 안으로 발을 들이는 은미. "어..언니!" "안녕하세요!!!!" "너네 야자는??" "오늘 모의고사라 일찍 끝났어요!!!" 아..모의고사. 은미는 그제서야 왜 학교가 어두웠던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고삼인 다울이의 친구는 어찌 공부는 안하고 매일 연습실인지도 참 의문이였다. "언니 연습하러 오신거예요?" "아..오랜만에 연습 좀 해볼까했지." 고개를 돌리면 쇼파 위에 널부러져 자고 있는 다울이가 보인다. 은미는 풉하고 웃어버렸고 다울이는 배를 벅벅 긁기까지 했다. "근데 너하고 다울이 고삼아냐? 공부를.." "공부는 체질에 안맞아요. 다울이는..뭐..머리는 좋은데요. 놀기를 좋아해서.." 그러고보니 연습실 아이들이 저녀석들에게만 언니언니 하며 따랐던 것 같기도 했다. "언니, 찐짜 죄송한데여...한동안은 저희가요. 늦게까지 연습실 써야되요." "그래?..그럼 뭐 난 일찍오면 되니까." "실은요. 이주일 뒤에 학교축제거든요. 그거 연습때문에요." 축제.. 어디든 어떤 일이든 무대라는 건 가슴벅차는 일이다. 은미는 고등학교시절 축제구경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왠지 흥분이 되는 듯한 은미다. "그래. 열심히 연습해. 축제구경와야겠다." "흐흐흐. 아. 언니오신 김에 저희 춤 봐주실래요? 아직 앞부분밖에 못했지만요.." "그럴까?" 은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쇼파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다울이를 쿡쿡 찌르며.. "야.야. 일어나봐. 나도 좀 앉자." "쓰읍..누..누구야..이씨.." 살짝 뜬 눈으로 은미인 것을 본 다울이는 벌떡 쇼파에서 일어섰고 그 틈을 타 은미는 쇼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뭐예요. 아진짜. 자는 사람 깨우고 그래." "이 쇼파 내가 산거야." "아. 드럽고 치사하다." 다울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비트에 익숙한 가사. 동시에 아이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건.." 뚫어지게 응시하던 은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삼십초정도. 몇 동작만 추곤 음악을 끄는 다울이의 친구. "도통 어려워서 여기까지밖에 못했어요." "이 안무.. 어디서 배운거야?" "아..인터넷보고요....아..진짜 이거 축제때 추려고 했는데..어려워..흑." 은미는 계속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계속 앞부분 안무를 맞춰보고 연습하기 시작했고.. 문득 은미는 무슨 생각이 든건지 다울이게 말을 걸었다. "너네 밥은 먹었냐?" "(도리도리)" "흠..가자." "어딜요?" "일단 따라와봐." 다울이만 끌고는 은미는 아이들에게 잠깐 어디갔다 온다는 말만 남기고 연습실을 나왔다. "어디가는데!!" "아 말이 많아. 먹을 거 사러 가잖아." 그제서야 말이 없어진 다울이는 머리만 긁적이며 은미를 따라간다. 분명 다울이는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다. 학교 밖으로 나온 은미. 뭘 살까 생각하다가 지갑에서 돈을 꺼냈고 다울이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저기 가서 치킨두마리만 사와." "치킨??? 아오. 나 닭 열라 좋아하는데." "그럼 어여 사와." 다울이가 저리도 밝은 모습은 처음이였다. 총총 뛰어가는 다울이를 보며 웃다가 은미는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미성년자인 아이들이지만.. 분명히.. "이걸 반기겠지." 맥주와 음료, 그리고 과자들을 잔뜩 산 은미다. 빵빵해진 검은 봉다리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조금 기다리니 저기에서 촐랑촐랑 달리듯 걸어오는 다울이. "그건 뭐예요?" 다울이의 물음에 은미가 봉지 안을 슬쩍 보여주면.. "와우!!!! 아..오랜만에 맥주에 치킨뜯겠네." "오랜만에라.." "님아..생각보다 센스있다!" "어때. 나 멋지냐? 이제 나 맘에 드니?" "뭐. 쫌요." "그건 뭔데! 야!! 이거 좀 들어. 무거워!" "아, 난 약해서 못들어!!" 분명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살짝 쑥스러워진 다울이는 저멀리 먼저 뛰어가버렸고 은미는 무거운 봉다리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 -14 "얘드라아아아아아. 언니오셨다!!!" 잠깐 나갔다왔으면서 요란하게 연습실을 들어서는 다울이. 그 뒤로 천천히 은미가 따라들어갔다. "뭐야?? 우와!!!!!!!!!!!" "오예. 언니 진짜 최고최고!" 누군가 그랬듯이 여고생들은 무섭다는 말이 여기서 드러난다. 검은 봉다리로 몰려드는 아이들. 연습실한켠에 원을 만든 아이들은 신속하게 쉬는 타임이 만들어졌다. "캬. 언니는 술안먹어요?" "내가 술을 잘 못해서." "에이~ 설마!!!!!!!!" 단단히 거짓이라 생각하는 다울이. 그런 다울이를 흘겨보는 은미다. "내가 너냐. 난 맥주세잔이면 취해." "완전 헉이다. 쩝쩝."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에 흐뭇해지는 은미다.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도 언니언니하며 따르는 모습이 마냥 친동생같은 느낌이다. 즐겁게 먹고 노는 중에 갑자기 다울이의 친구는 손을 탁탁 털고는 빤히 은미를 쳐다본다. "언니. 저번에 보니까 춤도 꽤 추시는 것 같구.." "잘 추지도 않았는데..뭐." "혹시 안무같은 거 잘 따세요?" "응??" "아니..뒷부분 안무따기가 너무 힘든데..도와주세요. 네???" 그러더니 그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구석에 있는 컴퓨터쪽으로 가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언니!! 이리 와봐요!" 그 말에 은미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른 아이 두명도 더불어 일어나 컴퓨터쪽으로 모였다. "이게 저희가 축제때 추려는 거 동영상인데요." "응.." "되게 유명한 댄서래요. 멀리서 찍어서 얼굴은 잘 안보이는데..." "일단 재생해봐." 재생을 클릭한다. 첫화면이 뜨자마자 은미는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작년에 우승했던 큰 대회였다. 화면 속 나란히 춤을 추고 있는 은미 그리고 에슐리. 순간 옛날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슐리와 정상을 달리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가슴한켠에 감동이 벅차올랐다. "아...여기서부터 어렵단 말이죠. 특히 요 오른쪽 이름이 차은미...." 여기저기 다른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은미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애써 웃음을 참았고.. "안무따주실 수 있으세요? 언니는 할 수 있을거야."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도움을 요청하는 듯 싶었다. 저쪽에 몇명은 이쪽에서 무슨 이야기하는지 신경쓰지 않고 먹는 중이다. 은미는 묘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거 나잖아." 갑작스런 이상한 대답에 아이들이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럼 은미는 피식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이거 나라구요. 요 오른쪽 차은미가 나라구." ............. ...... 째깍째깍..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눈과 입이 커지고는 갑자기 다같이 탄호성을 지른다. "꺄!!!!!!!말도 안돼!!!!!!" "어..허......믿어지지 않아!!!!!!!" "뭐야? 무슨 일이야?" 저만치 열심히 먹고있던 아이들까지도 전부 집중이 되어버렸다. 다울이도 치킨을 하나 물고 고개를 돌렸다. "이 언니가 차은미래!!!!!!" 다울이는 전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듯.. 하지만 댄스부아이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 어떤 아이는 사례까지 걸려버렸다. "내가 한국에까지 유명인사는 아닌데." 은미는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멋쩍게 웃어버린다. "춤을 좋아하다보니까 이런 동영상 자주 접해요. 근데 언니일 줄은.." 다울이의 친구는 이마에 손까지 얹고 기쁨을 뱉어냈다. "그럼 언니가 가르켜줘요!" "그래요!! 우리 안무 그거 알켜주세요!!네?" "언니가..축제까지만 선생님해주시면 안되요?" 얘들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하나둘씩 은미의 팔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고 당황스럽지만 왠지 벅차는 감동에 호탕하게 웃어버린다. "아..알았어. 알았다구. 그 전에 너네 이름부터 좀 알자." 댄스교사라. 은미는 재미난 일이냥 동참하기로 했고 오히려 아이들보다 신나버린 것 같았다. *** 다음날. 모처럼 헬스장을 찾은 은미다. 그동안 안한 운동때문에 뻐근해진 몸을 풀기 위해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운동을 마친 후 탈의실로 발을 옮기는데 순간 여울이가 떠올랐다. '응!! 꼭 연락해! 내가 먼저 하기전에 왠만하면 해줘!' 늦으면 안되겠다 싶은 은미는 가방속에서 핸드폰을 찾아 들었고 그 순간 타이밍도 기가막히지.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액정엔 여울이의 이름. - 차은미씨! "네에. 김여울씨." - 결국엔 내가 먼저 했군요. "하하. 지금 막 하려던 참이였어." - 거짓말치지마. 잊어먹었지? "아니라니깐?" - 으흠..세시까지 영화관 앞으로 오기다? "응. 알았어.. 씻고 가면 되겠다." - 이따봐요. 우. 뚝. 고개를 내저으며 은미는 전혀 고민없이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 ........... ...... "영화 어땟어?" "뭐, 괜찮았어." "정말이지. 그 여자주인공 내스타일인데. 아우.." "풉" 나른나른한 평범한 로맨스영화를 본 은미와 여울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봐서 은미도 제법 괜찮았다. 여울이는 특히 감명깊게 본 것만 같았다. "요기 들어가자." "응." 뭐라 상의할 것도 없이 왠만하면 아무대나 잘 다니는 여울이와 은미. 여울이를 따라 한 카페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어.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이네." 마침 카페를 나서는 듯한 하진성. 왠지 오랜만이라 그런지 한참 눈이 머물고 마는 은미다. 고개숙여 살짝 인사를 하곤 그냥 그렇게 스쳐가버린다. "나는 레몬에이드. 누나는?" "난 마끼야또." "레몬에이드, 마끼야또 주세요." 주문을 마치곤 여울이가 은미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 은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넘긴다. "아까 그 남자랑은 어떻게 되가?" "뭐가 어떻게 되냐." "뭐...남자 여자 사이의.." "그런 거 없어. 알잖아. 남자 별로 관심없는 거." 여울이의 입꼬리가 살짝 말렸다. 뭔가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한는 사이 주문한 것들이 나왔다. 동시에 한모금씩 마시고는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때 여울이가 먼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좋아하나봐." "응? 뭐?" "나..있잖아... 누나 좋아하는 가봐." -15 "..........너..아직도.." "전에..내가 잊었다고 말했잖아." "너 한국오고 잊었다며.." 실은 여러가지로 불안했던 은미였다. 잊었다고 했지만 매번 여울이 행동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헌데 그 불안했던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듯 들어맞아 버리다니. "한국오고 잊은것만 같았어. 나도 진짜..진짜.." "..............." "근데..근데..! 다시..다시..이렇게 봐버리니까.."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여울이다. 밝지 않고 정말로 무언가 애틋하다는 그런 표정. 눈을 마주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그런 표정. ".....미안.여울아. 난 니가 좋아할만한 여자가 못되." "어째서?..충분해..아니 너무 충분해서 넘쳐." "아니. 난 유치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 "그냥 편하게 보자. 아니면 난 너 오래볼 수 없어." 맘씨 착하고 밝은 여울이에게 은미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아이인데.. 유치한 복수극이나 하고 있는 그런 증오감만 가득한 자신을 좋아하다니. 정말이지..여울이에겐 항상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나중에라도..마음이 변하면.." "아니. 제발 그러지마." 언제나 차갑게 잘라내버리고 마는 은미. 이 순간 누구보다 미안하고 마음이 저린 은미지만 결국은 단호하게 잘라버린다. 여울이의 표정을 이윽고 어두워져버렸고 미간이 몹시 찌푸려졌다. ....... .... 카페 밖에서 서성이는 하진성. 창문으로 보이는 여울이와 은미를 바라본다. 무언가 심각해보이는 대화. 하진성은 괜히 시리게 웃으며 그 곳을 벗어났다. *** "자. 여기까지. 이게 전체안무야." 춤을 한번 쭈욱 추고나니 땀이 나기 시작하는 은미. 그토록 동작도 힘있고 멋진 안무다. "우와!!!!!!실제로 보니 더욱 환..환상이예요!!!!!!!" "언니!!!!!!!!!!이런 실력을 숨기다니.." "진짜 영광이예요!! 이렇게 배우다니!" "스승님!! 제자할래요!!!" 아이들의 엄청난 칭찬에 더욱 부끄러워지는 은미다. 어디서나 지지받고 사랑받는 거 행복에 겨운 느낌이다. 삼년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감정. "내 후배들이니까 신경써주는거야." "후배? 혹시 우리학교 선배님?" "어머나!!!!!왠일이야!!" 비록 눈에 튀는 선배는 아니였어도. 비록 이년도 못다니고 학교를 그만뒀어도. .......... .. "그런데 다울이가 오늘은 안보이네." "당연하죠. 야자안하다가 걸려서 잡혀갔는걸요~" "넌?" "축제준비기간엔 연습해서 빼줘요. 고삼만 빼구.." "아린아. 넌 고삼이란다?" "선생님들도 포기했어요. 저는. 공부보다 춤이 좋아서요." 순간 어두워지는 아린이의 표정. 아무래도 선생님들과의 마찰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아린이에게 힘을 주기위해 은미는 그저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한다. "그래. 하고싶은 걸 하는거지. 넌 충분히 잘할거야." "흐흐흐. 그런 말 들으니까 진짜 훨훨 날아갈 것 같아요!!!오예~" .. "자자. 그럼 이제 한동작씩 배워볼까?" ***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은미. 벌써 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색할 것만 같았던 여울이가 밝은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문자며 전화한 것을 빼면 삼일은 지극히도 따분하면서도 흥미로웠다. 헬스, 이따금씩 쇼핑,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키는 일. 그것뿐이였다. 그러다 문득 하진성이 떠올라버렸다. 그 지겹던 연락도 오지않고 얼굴도 볼 일이 없으니 잊어버릴 뻔한 것도 사실이다. '포기한건가. 내가 나서야되나.' 이제야 하진성의 복수극을 위한 만남은 은미가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은 클럽을 자주 가보자는 것. ........ 연습실. 그간 겨우 며칠이였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은미는 아이들에게 일단 안무는 모두 가르킬 수 있었다. "원.투.쓰리.포. 잠깐.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전체적으로 춤연습을 시작한 아이들이다. 제법 잘해나가는 아이들. 그 중에서도 아린이가 눈에 띄는 것은 당연지사. 아이들이 춤을 추는 동안 은미는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는 벌써 아홉시를 넘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얘들아. 미안한데. 오늘은 너희들끼리 마저 연습해." "무슨 일 있으세요?" "응.. 미안하다. 먼저 가볼게." 아이들은 이어서 계속 연습을 시작했고 은미는 조용히 가방을 챙겨들고 연습실을 나왔다. 교문을 나와 학교 담벼락에 잠시 기댄 은미. 자연스럽게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후....."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담배하나. 머리를 담벼락에 기대곤 깊은 밤냄새를 들이내쉬었다. 그때였다. 살짝 옆쪽 담벼락으로 누군가 넘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루엣으로 보아하니 치마가 여자인 모양. 그쪽을 유심히 쳐다보는 은미다. 이윽고 담벼락을 겨우 넘은 그 여자는 옷을 털어댔다. "엄마야!!!!!!" 은미를 보고 놀랬는지 소리를 꽥 지르는 여자. 익숙하다 싶은 이 커다란 목소리는.. "..다울이?" "누..구야!" 다울이는 조심스레 은미쪽으로 걸어왔고.. 은미는 다울이를 보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언니? 담배펴?" "흠..그나저나 너 어디가." "흠흠..그러는 언니는 뭐하는데요. 담배는 왜 펴?" "야. 너 그냥 반말써라." "뭐요?" "은근히 반말 잘 섞어쓴다?" "참나..연습 끝났어요?" "그냥 말놓으라니까." 은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지저끈다. 다울이는 그런 은미를 빤히 쳐다본다. "원하시면 반말쓸게." "풉.." "참 이상해. 언니는 알수록 이상해." "뭐가?" 다울이가 은미처럼 담벼락에 몸을 기댄다. 그리곤 깊은 밤하늘로 시선을 돌린다.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와." "........슬픔..?" "그래서 처음에 언니가 그렇게 싫었던거야."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냐. 이만 가시죠?" "너 땡땡이 자주 까지? 여울이한테 이른다?" "아오. 치사뿡. 완전 완전 치사해." 담벼락을 함께 걷는 내내 둘은 미소가 가득했다. 점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모르게 닮아가는 그 둘이였다. -16 한국에 온 뒤 두번째 찾아온 클럽. 왠지 느낌에 이곳에서 하진성을 만날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어색하게 몸을 끼어 들어간 그 곳에서 신기하게도 알아보는 몇몇 사람들. 부담되는 눈빛들을 가볍게 받아넘기곤 그저 춤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여분. 하지만 하진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은미는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아.' 손을 닦고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가다듬는다.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보이는 은미. "웃는 거 참 밉상이다." 어색한 은미의 미소 뒤에 오묘한 감정이 뒤섞인 채 숨어 있다. 곧 다시 화장실을 나섰다. 그리곤 사람들이 북적이는 쪽으로 천천히 다시 발을 들인다. 느끼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남자들도 많았고 끈적이는 눈빛을 보내는 남자들 또한 많았다. 참고 또 참고 그 사이를 훑고다니는 은미다. 그 순간 은미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찮게도, 아니 다행히도 하진성. 약간은 구석진 곳에서 혼자 술을 입에 대는 진성. 은미는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갔고 진성이를 못본 척 춤을 추는데 집중을 한다. 진성이는 저 여자가 차은미가 맞는가 싶은 생각에 주춤거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가만히 춤을 추는 은미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좀 더 가까워지려고 다가가는 진성. 그런 진성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은미. 그러다 결국 둘은 밀착된 공간에서 눈이 마주쳐 버린다. 진성은 가만히 은미를 내려다볼 뿐 아무말 하지않았고 은미는 그런 진성을 유혹이라도 하는 듯 춤에 집중한다. '지금 이 여자 뭐하자는 거야.' 애써 당황함을 숨기는 진성. 그저 은미를 잠자코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은미도 잔뜩 긴장한 상태. 꼭 진성과 서로의 매력을 겨루는 것만 같았다. 적적함 속에서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거리. 한참 춤을 추다가 먼저 입을 연 건 하진성이였다. "뭐하자는거야." 조용하게 귓속을 타고드는 목소리. 은미는 살짝 무시아닌 무시를 하고는 그냥 계속 춤을 춘다. 진성이가 눈을 한번 깊숙히 감았다가 뜬다. "날 아주 말려죽일 셈이야? 갑자기 왜이래." "..............." "이랬다 저랬다 아주 맘대로구만." 심기가 불편한 듯 애써 시선을 피하는 진성이다. 은미는 그저 매혹적인 눈빛으로만 바라볼 뿐. 그러다 이쯤됬다 싶었는지 은미는 점점 진성이와 거리를 넓혔다. 둘은 서로 마주본채로 멀어져갔다. 사람들 사이로 은미가 안보이자 진성이는 보기 위해 고개를 세운다. 은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 걸어간다. 그리곤 화장실 쪽 공터로 사람들을 비집고 천천히 발을 옮긴다. '와라. 하진성. 와.' 그때였다. 조금은 사람들과 떨어진 그 곳으로 하진성이 따라온 것은. 계산이 딱 떨어지 듯 은미의 손을 잡아버린 진성. 그 순간 태연해보이는 은미지만 분명히 떨고 있었다. "니가 자초한 일이야." 진성의 말에 기분나쁘지 않은 비웃음을 지어보이는 은미다. 서로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져 버리고 애써 긴장감을 감추려는 은미는 주먹을 꼬옥 쥐고 있다. 그리고 결국엔 닿아버리는 따뜻한 진성의 입술. 은미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 채 그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않았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를 하는 것처럼. ... .. "후.." 꿈을 꾼 것만 같다. 털썩.. 힘이 빠져버린 몸은 침대위로 미끄러져 버린다. 방금 클럽에서의 일이 자꾸만 떠오르는 은미. 그리고 자꾸만 눈에 그려지는 진성이와의 키스. 고개를 크게 저으며 그녀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인다. *** 다음날 헬스장에 다녀온 은미는 바로 진성이의 연락을 받고는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솔직히 너무 튕기다 만나는 격이라 은미는 앞으로의 행동이 계산되지 않았지만 무작정 마주치자는 심정이다. "여기야." 이런걸 데이트라고 해야하나. 하루아침에 남다른 사이로 처음 만나는 순간인데. "주문해뒀어." 옅은 진성이의 미소는 귀여움이 묻어나면서도 멋졌다. 어쩌면 삼년전에 은미가 저 미소때문에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말 좀 해. 어색하잖아?" "네. 미안해요." 제법 부드러운 은미의 미소. 진성이도 새롭게 느껴졌는지 방긋 웃어보인다. 곧 주문한 음식을이 나오고 그렇게 둘만의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여자야." "뭐가요. 내가요?" "그럼 안그래? 몇 일 전만해도 날.." "............." "그말은 됬구. 우리 나이같은데 이제 말놓지 그래." "..........음.." "너무 딱딱하잖아." "응." 바로 말을 놓아버리는 은미. 진성이는 기분좋게 웃으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한켠에 자리잡은 묘한 감정. 도대체 이 여자 마음이 왜 갑자기 변한건지.. 그것은 아직도 의문점으로 남았다. 하지만 진성이는 맘에 드는 여자는 늘 옆에 꼭 두고만다. 특히 유별났던 이 여자가 다르게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는 눈치다. "잘해줄게." 은미는 순간 포크를 든 손이 멈춰버렸다. 속으로 가사롭다고 생각하며 웃어넘겼지만 왠지 모르게 진심인 것만 같아서.. "나도 노력할게." 은미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는 진성. 생각보다 둘은 다정하게 첫식사를 마쳤다. ... ........ "어디로 가는데? 태워다 줄게." "아니야. 걸어서 가면.." "타라면 타." 진성이의 손에 이끌려 은미는 결국 차에 올랐다. 강신고에 가야한다는 말이 왠지 입이 안떨어진다. 결국 차에 올라버린 은미는 조심히 입을 떼었고. "..강신고로 갈거야." "강신고?? 거긴 무슨 일인데?" "얘들한테 춤을 가르키는 중이야." "나 강신고 졸업했는데." 은미는 절로 고개가 떨구어진다.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랄까. "학교는 안다녀?" 그러고보니 서로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이것저것 궁금한게 생겨나는 진성이다. "응. 학교..안다녀." "그럼 댄스교사?" "뭐..그냥.." 은미는 딱히 대답하기가 뭐했다. 그저 잠시 춤을 가르켜주고 있는 것 뿐이고.. 왠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싫었다. "아! 고등학교는 어디나왔어?" ".................." 짧은 침묵이랄까. 은미는 잠시 주춤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에..미국에 있었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에서도 학교따위는 다니지 않았다. 그저 춤하나만으로 살아왔으니까. 나름 잘하던 공부를 포기했던 이유.... 많이 힘들고 지쳐있던 은미에게 힘이 되준 건 춤, 그리고 친구. "미국. 오. 그건 몰랐네." "저기에 세워줘." 강신고 교문이 보이기 시작했고 은미는 대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차를 세우기로 했다. "고마워. 데려다줘서." "고맙단 말도 할 줄 아네." "픽-" 은미가 차에서 내리자 진성이도 함께 내렸다. 그리곤 학교를 한번 휭 둘러본다. "이만 가." "아니. 가는데까지 같이 가자." 무작정 먼저 학교쪽으로 가는 진성이다. 은미는 한숨을 깊게 내쉬곤 진성이의 뒤를 따랐다. "그냥 가지." "학교에 오랜만에 왔는데." 그 순간 진성이의 표정은 정말 순수해보였다. 마치 고등학생이였던 그날처럼. -17 "학교에서 내가 엄청난 인기인이였다구." "..그랬구나." "아..다시 고등학교 다니고 싶다." 은미는 떨리는 눈커풀로 애꿎은 땅만 바라보았고 그렇게 둘은 학교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 순간.. '팡-' 은미는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고 공을 막아낸 진성이가 공을 던져주었다. "위험할 뻔 했어." "..고..마워." 자꾸만 진성이의 모습이 삼년전과 겹쳐보이는 건 왜일까. 개구진 입꼬리와 차가운 눈매가 너무 선명하다. 하지만 곧 눈에서 그 모습을 지워내버린다. "어렵게 얻어낸 애인인데 지켜줘야지." 장난스럽게 뱉은 진성이의 말한마디였지만 은미의 머리 속은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아!그럼 지금 댄스부 연습실 가는거네?" "응. 알아?" "알지. 지하였지?" 서서히 연습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습실 앞에 선 은미는 몸을 돌려 진성과 마주했다. "연락할게." "응. 고마워. 데려다줘서." "뭐 이정도로.." 그 순간 저만치 익숙한 녀석이 걸어오고 있다. 막대사탕을 입에 문 다울이였다. 은미를 알아보곤 반갑게 달려오는데.. 낯선 남자모습에 살짝 멈칫했다. "다울이!" "언니!" 다울이는 은미를 바라보며 웃다가 다시 진성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곤 은미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누구.." "너 또 땡땡이지? 야자시작하겠다." "누구냐니까." "애인이예요." 애인이라는 말은 진성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였다. 그 말에 둘을 번갈아보는 다울이다. 은미는 왠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나갈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울이에게도 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사라지는 진성이다. 은미답지않게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한다. 다울이가 먼저 입을 열었고. "애인 없는 줄 알았어." "아..만난 지 얼마안됬어." "근데..우리 오빠가 언니 좋아한다지 않았나?" "..............." "영 아닌 건 어쩔 수 없는거죠. " 자신의 오빠일이지만 은미에게도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다울이. 누구보다도 어쩌면 은미보다도 쿨한 다울이는 시원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은미는 할 말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전 야자하러 가요." 다울이는 그 말만 하고는 연습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뒤를 돌아 교실로 가는 듯 했다. 멀뚱히 서있던 은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연습실에 들어섰다. *** 다음날. 은미가 진성이와의 약속장소로 가려는 찰나 여울이게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울이의 이름만 봐도 치솟는 미안함. - 헬로. "쿡. 무슨일이야?" 보통때와 변함없는 여울이의 목소리에 한층 편안해진 은미. 통화를 하며 집을 나섰다. - 다울이한테 들었어. ... '다울이한테 들었어' 라는 한마디에 갑자기 순간 몸이 굳어버린 은미다. "..뭘?" -....남자친구. 생겼다면서. "..............." - 그 남자야?.. "그게..어쩌다보니 그렇게 됬어."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미 스스로도 애써 초조함을 감춰보지만 그런 자신 모습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 싫어하는 줄 알았어. "............." - 그 남자.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그게.." - 뭐..어쨋거나 잘해..@$^$&$ "어?어?" 그때였다.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걸 알게 된 은미. 들리지않은 전화는 결국 끊어버렸고, 왠지모를 무거운 마음의 은미는 진성이에게로 가는 중이다. .......... ...... "일찍 왔네?" 그저 엷은 미소를 짓는 은미다. 은미의 미소가 아직은 어색한 진성이지만 그래서 더욱 기분좋은 진성이다. 살짝만 웃어도 정말 이뻐보이는 차은미. "무슨 영화를 볼까...흠..일단 들어가자." "응." 그렇게 대답하곤 은미가 영화관안으로 들어가려하는데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하진성. "안 들어가?" 진성이는 보란듯이 팔로 원을 만들어 팔짱을 껴달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은근히 쑥스러워하면서 말이다. 은미는 피식 웃어보였고 뭐 이쯤이야 생각한 뒤 다시 옆으로 와서는 팔짱을 슬며시 끼었다. 그 순간 은미는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느껴보지 못한 그런 낯설고도 묘한 그런 느낌. "자, 들어갈까?" 처음에 그렇게 사이나쁜 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않은 그저 평범한 커플처럼 둘은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그 둘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쳐다봐. 왜그러지." 은미는 정말 왜 그런지 몰라 물었고 진성이는 그저 피식하고 웃어넘긴다. "우리가 잘 어울리나 봐." ..... .. 정말 시간이라는 게 참 독특하다는 걸까. 뭐든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도 시간이고, 새롭게 만드는 것도 시간이고, 변하게 만드는 것도 시간이라는 거. 하진성과의 연애질. 은미는 복수의 한방법으로 택한 유치한 짓이였지만 진성과 만날때면 나름 충실하려고 했다. 몇 일 정도 만남이 계속되고 제법 데이트 흉내를 낼 줄 알게 된 은미와 진성. 가끔 어깨에 얹어지는 진성의 팔과 이따금씩 허리에 둘러지는 진성이의 팔이 부담된다면 부담되기도 했고 나름 설레인다면 설레인 것도 같았다. 축제가 벌써 삼일이라는 시간만을 남기고 있었고, 그 날도 변함없이 은미는 진성과의 만남 뒤 연습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살짝 지친 듯한 은미다. 발걸음도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졌는데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조금 더 힘을 내어 연습실에 들어섰다. "얘들아! 언니왔...여울이?" "은미, 하이!" -18 "여긴 어쩐 일이야?" "수업 구경왔어~" 여울이는 그저 빙그르 웃으며 연습실 쇼파에 앉아있다. 은미는 살짝 불편한 듯 어기적 쇼파로 다가갔고 태연하게 웃어보이며 얘들을 가르킬 준비를 한다. .......... ................ "이제 앞으로 삼일남았어. 더 열심히 하자!" 아이들은 몹시 설레인다는 표정들이다. 스스로도 만족하는 안무며 음악에 축제가 기대되는 모양이다. 덩달아 기쁜 은미가 얘들을 다 가르치고나니 시간도 벌써 열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여울이.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싶은 은미다. "멋지다. 우리 은미." 여울이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는 은미. 평상시와 같은 여울이의 말투지만 왠지 이름앞에 붙은 '우리'라는 호칭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무슨 일이야?" "그냥. 보고싶어서~" 은미의 뒤를 따라 여울이도 그제서야 연습실을 나선다. 어두워진 밤하늘을 한번 보고는 둘은 교문쪽으로 발을 옮겼다. "남자친구랑은 잘되가?" "그냥..그렇지." 짧게 끊겨버리는 대화속에서 분위기는 몹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자꾸만 찾아오는 정적. "...좋아해?" "응?" "그 남자 좋아하냐구요." 제법 듣기 힘든 여울이의 낮은 목소리. 마땅히 꺼낼 대답이 없는 은미는 잠시 멈칫했고, 말똥말똥 큰 눈으로 바라보는 여울이다. "그 남자요. 클럽에서 알아준대요." ".................." "여자도 잘 꼬시구요. 금방 싫증도 낸대요." "................." "그건.. 니 스타일이 아니잖아." 여울이는 장난을 치고 싶거나 애정을 표현하거나 그리고 화가 날 때면 은미를 누나라고 하지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사귀는 것도 니 스타일은 아닌데." "니가 신경쓸만한 일이 아니야. 여울아." "화나잖아. 내가 모르는 일이라서 화나." 장난스럽게 말하는 여울이의 말투였지만 무척 슬퍼보이는 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 또한 은미는 다 알고 있으니 힘들어버리는 건 여울이뿐이 아니라 은미도 무척 힘들어진다는 것. "좋아해?"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비밀이야?" "...응. 그래. 비밀이라고 생각하자." 어둠이 짙어지는 그날 밤 여울이와 은미는 비밀이라는 단어 아래 더이상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 방금 샤워를 마친 진성이가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왔다. 아까 주고 받던 은미의 마지막 문자를 한번 더 읽어내려가는 진성. 스스로가 참 웃긴지 호탕하게 웃어보인다. '잘 쉬어. 내일 보자.' 그동안 한번도 빼먹지않고 만나서일까. 이젠 제법 은미가 여자친구같다고 느껴진다. 처음엔 솔직히 뭔가 달갑지 않았는데 말이다. 수건을 의자에 걸치곤 침대위로 몸을 옮긴다. 핸드폰을 또 만지작거리며 이번엔 은미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찍지마!' '뭐어때. 가만히 있어봐봐.' '찍지말라니까. 저리치워!' '여기봐야지!' 억지로 진성이가 찍어낸 은미의 사진한장. 얼굴을 가려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성이는 미소가 끊임이 없다. "..이뻐."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은미와 만난지 일주일. 알수록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런 여자다. 자신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핸드폰을 멀리 던져두곤 그는 눈을 감았다. *** "여자 많이 만나봤어?" "뭐?" 은미가 가만히 쥬스를 마시다가 뜬금없이 질문을 내던졌다. 진성이를 당황하게 만드려는건지 괜히 떠보는 것이다. "그동안 여자 많이 만나봤냐구." "..........글쎄..흠." "왕자병인걸 보면 꽤나 만나본 거 같던데." "픽. 꽤 만나봤어. 날 가만히 내버려둬야 말이지." 진성이는 은미의 생각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재밌는 푸념만 늘어놓는다. "다 사랑했어?" "응? 질문이 뭐 그래?" "그냥 궁금하잖아." 너무나도 태연하게 하는 질문에 당황스럽지만 진성이도 태연하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그건 모르겠다. 결국엔 오래 못 갔었으니까." 옅게 웃는 진성이를 보며 은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통 알 수 없는 은미의 표정. -19 연습실. 오늘따라 아이들이 연습을 안하고 다들 모여있다. 은미가 조용히 들어서서 조심히 물었고. "뭣들 해?" "아.언니! 저희 의상 상의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옷고르러.." "옷고르러 다 갈거야? 일곱명이 전부 갈 필요없잖아." "네. 그렇죠. 근데 어떤 스타일로 해야될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흠... 언니가 도와줘볼까?" ............... .. 축제는 이제 이틀 뒤다. 은미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연습을 시키도록 하고는 아린이와 단둘이 옷을 사기 위해 연습실을 나왔다. "언니, 이런 스타일로 쫙.." "음..그러지말구..프리하게 가는거야." 은미는 옷가게 안을 살피더니 이것저것 꺼내보기 시작한다. 그리곤 아린이 몸에 갖다대더니.. "넌 이게 어울려. 비슷하게 맞추기만 하는거지." "오예. 언니 어쩜 센스 굿." 아린이도 맘에 드는지 크게 웃어보였고, 이옷 저옷 골라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격표를 본 아린이가 큰 눈을 뜨곤 은미에게 속삭였다. "언니..학교에서 준 돈은 고작 30만원이예요." "그래?" "근데 이 티셔츠만 오만원짜리면..계산이.." "맘에 드는 걸로 그냥 골라. 언니가 제자들을 위한 선물할테니." 고작 이런걸로 감격이라도 한건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린이는 옷을 전부 계산대로 가져간다. 그런 모습에 은미는 피식하고 웃어보인다. 왠지 아이들에게 보이는 열정이 부러운 은미다. 예전에 차은미에게는 없던 그 무엇. 은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아이들을 통해 이루어보는 것 같았다. 의상들을 여기저기서 구입하고나니 쇼핑백은 꽤나 많아졌고 은미와 아린이는 둘이서 겨우겨우 손에 들고는 연습실로 돌아왔다. "얘들아~~~~" "왔다!왔다!" 얘들 모두 옷이 더 궁금했는지 하나같이 달려들었고 이것저것 꺼내보기 시작했다. "이거랑 이거는 민지꺼. 아니! 그건 연정이꺼야!" 동생들을 일일이 챙겨주는 아린이. 은미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이틀 밖에 안남았네." 아이들보다 더 초조하고 설레이는 은미다. 마냥 열여덟 고등학생처럼 말이다. "언니! 저 잘어울려요?" "응!! 잘어울려." 입어보기도 하고 대보기도 하고 아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정신이 없었다. 은미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음악을 틀었다. "자. 연습해야지?" *** 연습을 끝마치고는 터덜터덜 연습실에서 나오는 은미. 내일은 리허설이라던데 그렇게되면 실제적인 연습시간은 오늘이 마지막이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건지 아이들이 연습시간이 끝난 뒤 은미만을 보내고 자기들끼리 남았다. 은미는 괜히 피곤한 나머지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나왔다. 학교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벗어나서 담벼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 몇개에 의존하는 어두운 골목을 따라 땅만 죽어라고 보며 걷는 은미. 그러다가 누군가의 발이 눈에 들어오면서 걸음을 멈춰서고 말았다. "..하진성?" 그저 말없이 웃어주는 진성이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트레이닝복 차림에다가 슬리퍼까지 끌고 머리는 부시시한 모습. 약간 갖춰지지 않은 차림이 제법 귀엽게 보인다. 꼭 삼년전 하진성 같아 보인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열시다됬는데." "아니, 뭐. 집도 근처고 해서. 그냥 한번 와봤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은근히 쑥스러워 보이는 진성. 은미가 조심히 미소를 지었다. "나 보고싶어서 왔냐?" "뭐? 이 밤에 내가 왜 널보러.." 괜히 당황한 듯 진성이가 말끝을 흐리자 은미는 살짝 웃으며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 옆을 같이 걸어주는 진성. "이렇게 어두운데 혼자 다니면 안무서워?" "뭐가 무서워? 가로등 있잖아." "여자맞아? 거기다가 위험하게 골목으로 다니구." "걱정해주는거야?" "꼭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뭐.. 그런 쪽이지." 점점 은미는 진성이를 손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기분이다. 시간이 갈수록 잘난척이 심한 하진성보다는 한없이 작은 남자친구 하진성처럼 변해만 간다. "너 나 좋아해?" "뭐?" 요즘따라 진성이에게 뜬금없는 질문하는 게 즐거운건지. 아니면 마음이 싱숭생숭 한건지. 은미의 입은 절로 움직이기 바쁘다. "..나...좋아해?" "..당연하지..아 뭐 그런 걸 물어. 낯간지럽게." "....그렇구나. 나 좋아하는구나." 진성이는 싱거운 은미를 보며 피식하고 웃어넘긴다. 은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찾는 모양이다. 진성이의 앞이지만 상관없다는 듯. "넌..?" "응?" 은미가 담배한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고 진성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넌 나 좋아하냐?" 불을 붙이려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불을 붙이는 은미. 진성이는 그런 은미를 보고 미간을 살짝 지푸린다. 질문의 대답을 들으려고 빤히 은미를 바라보면 은미는 피식하고 비웃는다. "노코멘트." 은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성이는 은미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돌렸다. 그리곤 은미의 담배를 빼앗아 들고는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노코멘트?" "응." "차은미답다. 픽-" "이리줘." 진성이는 아직도 어깨에서 손을 놓지않고는 담배만 입에 물고 피워댔다. "달라구. 내꺼야." 살짝 풀린 매력적인 은미의 눈이 진성이의 눈속으로 깊게 들어온다. 그저 진성이는 고개를 저을 뿐. 놀리듯 담배를 뻐끔뻐끔 피어댄다. 담배연기가 은미에게로 갈까 싶어 고개를 살짝 들고 말이다. 녀석의 턱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빨리 줘." 조용한 목소리로 나른나른 이야기를 하는 은미. 진성이는 담배를 돌려줄 듯 한손으로 입에서 담배를 빼낸다. 그리곤 은미의 얼굴을 더욱 빤히 바라본다. "담배말고. 대신 이거." 그리곤 은미의 입술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간다. 담배는 땅바닥에 던져버린 채 은미를 감싸안고 진성이는 진한 담배향을 전해준다. -20 누가 그러더라구요. 일분이라도 그 순간 진심이 되어버리면 결국엔 전부 진심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구요. ..... .. '언니, 리허설은 두시부터예요.' 아린이의 통화를 받은 오전부터 왠지모르게 은미는 흥분상태였다. 가끔씩 입도 바짝 마르고 매일 가던 운동도 가지 않았다. 운동을 갔다가 리허설을 지켜보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리허설 시작 한시간 전. 진성이와 점심을 먹고는 학교를 가려하는데 오늘따라 지독히도 따라붙는 진성. "그냥 가래두? 엄청 끈질겨." "구경 좀 하자. 니 제자들." 금방 친해진 듯한 둘. 결국 끈질긴 진성이는 은미를 따라 학교까지 가고 말았다. 내일 축제때나 구경오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진성이는 리허설까지 보려나보다. "언니!!!!!!!" "리허설 아직 시작안했지?" "네! 다른 동아리 리허설중이예요." 의상은 비밀리여야만 한다며 아이들은 학교체육복을 빼입고 리허설을 하려는 모양이다.. 간간히 동작을 맞춰보는 아이들도 보이고 왠지 초조해보이는 아이들도 보인다. "근데 언니..남자친구?" "..아..응." "멋지시네요?" 아린이가 조용히 귓속말을 한다. 진성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여기저기를 살펴볼 뿐이다. "엔, 올라갈 준비해주세요." 방송반으로 보이는 한 학생이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고 아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며 모두 무대 옆으로 줄을 섰다. "잘해. 자리 잘 맞추고." "네! 리허설이니깐 살살할게요?!" 아이들은 실실대며 천천히 무대에 올라섰다. 일곱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무대를 꽈악 채웠다. 의문인 점 하나. 근데 왜 댄스동아리에 남자는 하나도 없을까. '♬♪♩♪♬♬♩♪♩' 음악이 시작되고 아이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미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들을 살피기 바쁘다. 정말 아이들은 하나같이 즐겁게 춤을 추는 듯. 살살 추는 듯 싶지만 미소만큼은 백만불이다. "오 제법 하네. 제자들이?" 진성이는 은미얼굴 옆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흥미롭게 아이들을 바라본다. 은미는 자랑스럽다는 듯 음악에 맞춰 발로 박자를 맞춘다. 절반정도 추었을 쯔음 음악이 꺼진다. "수고하셨습니다." 리허설은 절반만 한다는 것. 안타깝지만 이 춤은 뒷부분이 정말 멋진데 말이다. "민지는 처음 시작할 때 약간 더 왼쪽으로 갔어야 했어. 알았지?" "네, 언니." 꼼꼼하게 챙겨주는 은미에게서 세심함이 보인다. 진성이는 그저 자신이 흐뭇한지 활짝 웃어보였다. "언니 애인?" "올~~~~~~~" 이제서야 발견들을 한건지 시끄럽게 환호하기 시작했고 뻘쭘한 둘은 머리를 긁적일 뿐이다. "시끄럽고! 마지막이니까 오늘도 연습 열심히 하기다!" "네!!!!!!" *** 여울이는 요즘 두 어깨가 많이 내려앉아 보인다. 그런 여울이를 보고 사는 다울이는 마냥 얄미운 오빠였던 여울이가 한없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새삼 여울이가 은미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 요즘따라 늦잠이 늘고 학교 결석도 심한 여울이. 하품을 길게 하며 우유한잔을 벌컥 들이키고 있었는데 요란한게 핸드폰이 울려댄다. 액정에는 참 반갑지 않은 '발신번호제한'이란 글씨가 뜬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누구신지요?" - 헬로우~? 여울이가 우유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왠지 익숙하고도 구수한 영어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랄까. "누구세요?" "여울이? 맞지?" 계속 영어로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 그러자 여울이는 알았다는 듯 입이 쩌억 벌어진다. "애슐리???" "응!!!!!!!!! 나야. 애슐리!" 오랜만에 독특한 목소리의 주인공 애슐리의 전화다. 여전히 먼저 한국말로 인사할 줄 모르는 그 애슐리였다. "어쩐일이야!!!! 이렇게 오랜만에!" *** 리허설이 끝나고 은미는 잠시 집으로 왔다. 진성이와 그냥 쓸데없이 거리를 거닐다가 집에 와서는 편한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연습실에서 계속 연습하고 있을 아이들이 생각나서 맛있는거라도 사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린이로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여보세.." - 언니!!!!!!!!!!!! 깜짝 놀란 은미가 귀에서 핸드폰을 멀리하고 만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아린이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 큰일났어요!!!!!! "왜? 무슨 일이야?? 목소리 좀 낮춰봐. 아린아." - 빨리 연습실로 와주시면 안되요???? "아! 마침 간식거리 사들고 가려고.." 흐뭇하게 웃으며 은미는 그저 간식을 보고 기뻐할 아이들을 떠올렸지만.. 상황은 그게 아닌 듯 싶었다. - 지금요!!! 양호실로 가는 중인데요!!!!! "..양호실?" - 춤추다가 은영이가 넘어졌는데요!!! 많이 아픈가봐요!!!! "뭐? 어디가?? 기달려. 언니가 갈게." 전화를 뚝 끊어버린 은미는 순간 심장한켠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은미는 바로 집에서 나와 학교로 향했다. '양호실..이라..양호실.' 집과 그리 멀지 않은 학교로 쏜살같이 달려간 은미는 옛기억을 더듬으며 삼년전 학교 양호실을 떠올렸다. '..본관..삼층.' 축제전날이지만 학교안은 공부하는 아이들로 꽉 차있었다. 출연자들만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침 쉬는시간이였는지 삼층으로 올라가는 은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수많은 학생들. 은미는 괜히 뻘쭘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삼층을 향해 서둘렀다. 드디어 양호실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대로구나.' 드르륵. 노크는 당연지사 하지않고 문을 열어버렸다. 양호선생님은 사복을 입은 낯선 은미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떠보인다. "언니!" 아린이가 은미를 먼저 보고는 크게 이름을 외쳤다. 양호선생님이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은영이가 눈에 들어온다. 울었는지 눈물딱지가 선명하게 붙은 은영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쩜 좋아요....언니...내일이 축제잖아요...내일이.." 그렇다. 일곱명 모두 하나같이 그토록 바라던 축제는 내일이다. 울먹이는 은영이를 바라보던 은미가 양호선생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조심히 입을 여는 양호선생님. "접지른 모양이예요. 몇 일은 아마 꼼짝도 못하죠." 둘둘 붕대를 곱게 말으시는 꽤 젊은 양호선생님. 은영이는 그 말에 더욱 더 표정이 구겨져만 갔다. "아직도 많이 아파?" "괜찮아지긴 했는데.. 걷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요." "휴우..그래도 크게 다친게 아니라 다행이다. 은미는 땀을 닦으며 한숨돌렸다. 하지만 이내 걱정이 되는 일이 생긴 듯. "일곱명이서 자리도 맞추고 안무도 맞춰서.. 한명이라도 빠지면.." "뭔가 부족해보이지." 아린이의 말에 자신도 잘 안다는 듯 은미가 말을 덧붙인다. 아까부터 은영이는 안절부절 못한다. 분명히 은영이도 춤을 좋아하고 축제 단 그 하루를 위해 함께 노력했을텐데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으니 제일 속상할 수 밖에. "..언니가..은영이 대신 힘께 무대에 오를 순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