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4년경 마한(馬韓) 효왕(孝王) 30년 마한과 진한(辰韓)의 싸움으로 마한은 이곳에 별궁(別宮)을 짓고, 정령치(鄭領峙)와 황령치(黃靈峙)에 성을 쌓아 정 장군과 황 장군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서산대사의 황령기에 전해 온다.
그러기에 이곳 달궁은 이미 마한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마한의 별궁으로 존재해 왔다.
그 후 1600년경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 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조 영조때인 1730년대까지 현 마을 입구로부터 100m지점인 궁(宮)터에 10여호가 살았는데, 영조 7년인 1731년 신해년 대홍수로 산사태가 일어나 이 마을이 매몰되어주 민들이 몰살되었다. 그 때 살아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자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해 임금이 직접 내린 제문으로 제를 올려 비명에 간 원혼을 달랬다.
달궁이란 이름은 이미 아는바와 같이 마한의 별궁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달은 도달할 달(達)로 궁에 도달한다, 통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1940년경에는 115세대의 큰 마을로 번성하였으나 1951년 빨치산토벌작전으로 전세대가 피난을 갔다가 1954년 수복과 함께 다시 입주하였는데 온통 이 일대가 빨치산 세상이되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1936년에 마을까지 임간도로(林間道路) 있었지만, 빨치산을 토벌한 이후 군 당국에서는 군 작전의 필요성에 따라 1970년 달궁에서 정령치를 거쳐 주천면 육모정 까지 군사 작전도로를 개설하였는데, 비로소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마련되었다.
도로가 개통되고 1970년대 버스가 다니기 전까지는 재(峙)를 넘어서 전남 구례군(求禮郡) 산동면(山洞面) 시장을 다녔으므로 전남의 생활권에 속하기도 하였다.
마을의 남쪽으로 지리산 반야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서로는 노고단, 북으로는 만복대 등 일연의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으며, 만복대와 노고단 반야봉으로 전남과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심원계곡(深元溪谷)은 기암과 폭포, 울창한 수목, 계곡의 웅장함 등이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달궁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풍치가 아름다운 쟁기소와 심원마을에 이르는데 지리산 관광 도로의 개통으로 반야봉, 정령치, 육모정, 노고단, 화엄사, 천은사 등으로 연결된다.
매년 경칩과 우수사이에 채취되는 고로쇠 약수를 맛 볼 수 있으며 민박이 가능하다.
○ 마한(馬韓)의 별궁(別宮)터
달궁계곡은 기원초 삼한시대 마한의 별궁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 궁터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궁을 지키기 위해 정령치와 황령치에서 정 장군과 황 장군이 성을 쌓고 지켰다는 전설이 있다.
개선동, 황나들이 등의 주위의 지명이 이러한 전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마한의 별궁으로 추측되는 곳은 마을입구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당시의 궁터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주춧돌과 기와조각, 화살촉이 발굴되었으며, 정령치에는 정장군이 쌓았다는 성터가 남아 있고, 정령치 바위에는 정장군의 초상화라고 불리는 13구의 마애불상이 있다.
○ 정령치
구룡계곡이나 달궁계곡으로 뚫린 지리산 관광도로를 따라 노고단쪽으로 올라가면 해발 1200여 고지의 고개가 바로 정령치이다. 이곳 정령치에서 북쪽으로 고리봉이 있는데 이곳은 행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최적지이며, 고리봉 바로 아래 서쪽으로는 운봉 목장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달궁이 있다.
또 남쪽에는 제 2회 전국체전 동계스키대회가 열렸던 만복대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노고단이 있다. 이곳 정령치는 옛날 달궁에 마한의 별궁이 있을 때 정씨 성을 가진 장군이 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궁터 부근에 13구의 불상을 새겨놓은 마애여래불상군이 있다.
첫댓글 터가 센곳인가봅니다 ().....
하늘사람님은 팔방미인입니다. 달궁과 정령치의 좋은 자료 글로 꼬리말 주셔서...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