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이 한국시장에 진출하면서 선보인 두 가지 SUV중 동생인 로그에 이어 이번엔 형님인 무라노와 만나게 되었다. 둘 다 도심형 크로스오버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 성격은 각기 다른데, 먼저 경험했던 로그에서 젊은 감성의 스포티함이 많이 느껴졌다면 이번 무라노에서는 고급스러움과 안락함이 먼저 다가왔다. 로그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막상 베일을 벗은 닛산의 차량들은 예상보다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었는데, 어지간해선 빈틈을 찾기 힘든 무라노가 과연 어떤 모델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글 / 김정균 (
메가오토 컨텐츠팀 기자)
사진 / 최정일 (
메가오토 컨텐츠팀 기자)
과거 투박하고 높은 차들은 주로 험로를 달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밀림과 사막을 탐험하는 여행가들에게 어울릴법한 터프하고 힘센 차량들이 주를 이뤘는데 랜드로버나 짚 등의 브랜드가 먼저 떠오른다. 이것에 힌트를 얻은 각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저마다 하나 둘씩 도심의 도로에서 타고 다니기 좋은 높은 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며 그런 차들을 일컬어 SUV (Sport Utility Vehicles) 라는 장르가 생긴 후엔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도심형 SUV라는 바이러스는 백신 없이 퍼져나가 거의 모든 브랜드가 그 바이러스를 개발해 자사의 모델 라인업에 추가시키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시 소비자들이 도심형 SUV에 감염되어 열광했기 때문이다. 세단보다 넓고 실용성 높은 실내공간을 갖고 있어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드라이빙에 있어선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부담 없은 편안함, 그러면서 투박하지 않은 멋스러운 디자인까지. 그 모든 것을 한 대의 차에 포함시키기 위해 메이커들은 트럭이나 밴, 세단의 장점들을 각각 뽑아내 SUV를 만들어냈고 SUV자체도 차량의 크기나 성능, 구성 등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파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여파로 국산 브랜드들도 다양한 SUV를 만들어 지금은 도로에서 흔하게 접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건 스포츠카만을 고집하던 포르쉐마저 카이엔 이라는 고성능 SUV를 개발해 큰 성공과 수익을 얻어냈다는 점이다. 그에 앞서서는 일본 브랜드가 개발해 낸 모델이나 과거 기아의 스포티지 등이 도심형 SUV의 시초였고 프리미엄 브랜드로는 BMW가 X5라는 탄탄한 모델을 만들어 붐을 일으켜 바야흐로 춘추전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에 만난 무라노 역시 그런 도심형 SUV라는 장르의 최전선에 서있는 모델로써 앞서 말했듯 세단과 밴 등의 특징이 한데 포함되었다 해서 크로스오버 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라노 하면 얼핏 일본말 같지만 유리공예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섬 이름이란다. 로그는 악동이라는 뜻, 무라노는 이탈리아의 섬. 이름을 차의 성격에 맞게 참 잘도 지어 놨다. 일본에서 2008년 9월에 2세대로 등장한 따끈한 신모델 무라노는 이제 포화상태에 이른 SUV시장에서 어떤 장점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할 것인지, 닛산은 과연 로그와 함께 무라노라는 무기로 한국 시장에서 초반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틀간 탐구해 보았다.
익스테리어 첫인상은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미래 자동차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무라노만의 독특한 앞모습이 풍겨내는 이미지 때문이다. 크롬 재질로 반짝이는 커다란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이 가운데 닛산 엠블럼이 붙어있는 마름모꼴 모양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라인 그대로 양 옆으로 이어져 삼각형의 모서리를 이루는 헤드램프 속엔 네 개의 동그란 램프가 제논라이트 포함 각각의 용도로 들어가 있는 점이 이채롭다.
처음엔 바로 적응되지 않는 앞모습이지만 계속 보고 있으니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서 봤던 우주전함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그의 야무진 앞모습을 떠올려보면 무라노는 반대로 사이버틱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풍겨낸다 할 수 있겠다.
측면의 전체적인 라인은 부드럽고 우아한, 그러면서 볼륨감이 느껴지는 디자인인데 A필러가 길게 누워 경사져 있고 C필러 뒤쪽은 위로 치켜 올라가 있어 앞으로 전진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측면 디자인의 백미는 앞 뒤 휠하우스 위쪽으로 자연스럽게 그려진 곡선 라인과 도어 아래쪽 크롬장식 위의 캐릭터 라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만나 우아한 느낌을 물씬 풍겨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썬루프는 아웃 슬라이딩 방식으로 차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뒷좌석 쪽에도 창이 나있어 시원한 개방감에 대한 배려도 되어있다.
뒷면은 풍성한 볼륨감을 바탕으로 얄쌍한 크기의 LED타입 리어램프가 박혀있고 후면 유리 위쪽은 LED보조제동등이 내장된 리어스포일러 형태로 스포티한 느낌이며 범퍼 하단엔 큼직한 사이즈의 듀얼머플러가 듬직한 성능을 나타내듯 뚫려있다. 테일게이트는 운전석에서 버튼, 차량 밖에선 리모컨으로 조작할 수 있는 전동식으로 삑삑 하는 경고음과 함께 작동되며 도어를 닫을 땐 게이트 하단에 마련되어 있는 버튼을 눌러도 자동으로 닫히게 된다.
인테리어 묵직한 도어를 열고 실내에 들어서면 마치 대형 SUV에 탑승한 것처럼 넓은 실내공간이 반겨주는데 앞, 뒷좌석 모두 편안한 가죽시트와 더불어 넉넉한 공간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마치 대형 세단에 탑승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실내 곳곳에 사용된 가죽과 패널의 재질이 매우 우수해 닛산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인피니티와 별다른 차이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기분 좋게 손에 감기며 크루즈 컨트롤 버튼이 포함된 천연가죽 스티어링 휠 가운데 닛산 엠블럼이 아닌 인피니티 엠블럼이 붙어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실내의 구성인 것이다.
세 개의 원으로 구성된 계기판은 오렌지색 테두리와 화이트색상의 조명이 분위기 있게 어우러져 시인성도 좋고 스포티한 멋도 느낄 수 있으며 계기판 좌우엔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는 버튼과 트립컴퓨터 조작 버튼이 마련되어 있다. 그밖에 인텔리전트 스마트키, 버튼시동장치를 비롯해 센터페시아, 모니터를 통한 조작 버튼 등은 인피니티 모델의 것과 거의 동일한 디자인과 조작성을 갖추고 있어 패밀리 룩의 느낌이다.
센터페시아에 마련된 7인치 터치스크린은 인피니티 모델과 마찬가지로 리어뷰 모니터와 연동되어 후방시야를 비춰주며 그밖에 무라노만의 특이한 장비는 대쉬보드 상단 스피커 내부에서도 송풍구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바람이 흘러나와 차량 전체의 온도를 상쾌하게 조절시켜 주는 것으로 공조장치 부분에 따로 버튼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무라노의 실내 무드 등은 주변의 어둡기에 따라 밝기가 자동으로 조절되는데 닛산 측에선 이런 무라노의 실내 분위기를 호텔 스위트룸과 비교해 움직이는 스위트룸이라 표현한다.
또 하나 편리한 장비는 인피니티 EX에 장착된 것과 같은 전동식 리어시트다. 운전석 왼쪽 하단에 위치한 다양한 버튼 중 리어시트 모양을 누르면 뒷좌석을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어 매우 간편하며 트렁크 안쪽 좌우에 마련된 폴딩 손잡이와 버튼으로도 리어시트를 손가락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장비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무라노에서 손으로 직접 움직여야하는 부분을 찾으라면 본닛과 도어 정도일까. 여기에 적응됐다가 수동방식 일색의 다른 차를 타게 되면 이건 왜 전자동 방식이 아니냐며 투덜거리게 될 것 같다.
파워트레인 & 퍼포먼스 무라노에 탑재된 넉넉한 배기량의 3,498cc V6 DOHC 엔진은 닛산의 자랑이다. 매년 워즈에서 선정하는 세계 10대 엔진에 십수년 넘게 선정된 VQ35 엔진의 최신버전으로 닛산과 인피니티, 르노-닛산 글로벌 모델들에 두루 사용되며 각 모델마다 신형과 구형, 세팅의 방식 등을 달리해 차량에 맞는 성능을 이끌어낸다. 엔진과 맞물린 무단변속기는 로그와 같은 전자제어 방식의 6단 CVT로 완성도 높은 신형이 장착되어 매끄러운 주행과 연비에 도움을 준다.
무라노에서 느껴지는 기본적인 주행 특성은 스포티함이 느껴졌던 로그와 다르게 고급스럽고 우아한 실내외 분위기와 일맥상통하는 듯 대배기량의 넉넉함으로 여유 있게 밀어붙이는 감각이다. 효율성 높은 토크감을 선사해주는 VQ엔진과 무단변속기가 매칭 되어 SUV임을 전혀 느끼기 힘들만큼 마치 고급 대형 세단과 같은 주행을 보여주는데 세단과의 차이점은 높은 시야 한 가지 뿐이라 해도 무방하다.
수동모드로의 전환과 조작은 변속기 레버로만 이루어질 뿐, 스티어링 휠에 패들시프트가 달려 있지 않은 점은 로그와 다른 무라노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260마력, 34kgm의 최대토크를 가진 3.5리터 배기량은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실제 달리기는 무라노가 더 뛰어난 것이 당연. 오른발에 힘을 주면 대배기량의 세단과 같은 감각으로 부드럽게 꾸준히 뻗어나가는 맛이 일품이다. 100km로 정속 주행하면 1,500rpm을 나타내 고회전 지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음대책이 잘 되어 있어 정지 상태나 정속 주행 시엔 고급 SUV를 지향하는 모델답게 매우 정숙해 같은 급인 렉서스의 RX350(일본에선 도요타 헤리어) 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지만 수동모드로 전환 후 악셀페달을 깊게 밟아 밀어붙이면 VQ엔진 특유의 듣기 좋은 낮은 톤의 엔진음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귓가에 스며들어온다. 마치 인피니티 G37쿠페와 같은 음색인데 볼륨을 낮춰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닛산은 부드러운 모델에서도 운전자가 원하면 어느 정도 스포티한 주행감각을 보여준다는 것을 로그에 이어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스펜션의 세팅은 차의 성격을 감안하면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알맞은 정도로 큰 덩치의 높은 차체를 적당히 컨트롤 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물침대 같은 멀미나는 차를 타다 옮겨 타면 심했던 멀미가 조금은 가실 정도의 세팅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움푹 파인 도로나 과속방지턱을 넘어갈 때도 과하지 않은 출렁거림으로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실내외의 꼼꼼한 마무리로 인해 잡소리도 찾아듣기 힘들다.
다만 스포티했던 로그의 하체는 좀 더 단단했고 차체 사이즈도 컴팩트했기 때문에 경쾌한 코너링의 맛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으나 무라노는 진중한 움직임을 보여주기에 출력 대비 하체는 거친 주행 스타일의 오너에겐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봤을 때 이런 언급 자체가 별 의미 없어지는 이유는 주행감성이 너무 세단 같아서 SUV임을 자꾸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냥 달릴 땐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급코너에서 속도 감응형 전동식 스티어링 휠을 빠르게 잡아 돌린 후 높은 차체의 뒤뚱거림을 느끼고서야 '아 SUV였지'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에피소드 한 가지. 녀석을 만난 후 하루, 이틀이 지나고 점점 적응이 되어 갈수록 기자의 신분을 망각한 채 자꾸만 편안한 주행을 원하게 되었는데, 앞이 뻥 뚫린 도로에서도 악셀페달을 깊게 밟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지친 심신을 녀석에게 기대고 조용한 실내에서 보스 사운드 시스템의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차분히 달리면 무라노가 너무 편하게 감싸줬기 때문일까. 그러다보니 문득 무라노를 움직이는 스위트룸이라 표현했던 닛산측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미국 고속도로 안전 협회에서 SUV부분 가장 안전한 차로 선정된 것은 편안한 스위트룸이 튼튼하고 안전하기까지 하다는 증거.
에필로그 마지막에 언급했던 기분 좋은 편안함 때문일까, 나이 들면 이런 SUV하나 입양해 가족들과 편하게 타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젊은 기자로써는 그런 편안함을 욕심내기엔 이른 나이인지라 내년에 들어올 닛산의 알티마, 큐브, 370Z, 괴물 GT-R 등 또 다른 녀석들과의 만남을 기약하며 더욱 피터지게 일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듬직한 무라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동생 로그의 시승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형님인 무라노까지 경험하고 나니, 닛산이 정식 브랜드 출범과 함께 선보인 두 가지 모델에서도 그들의 경쟁력은 충분히 와 닿았다. 훨씬 비싸고 좋다는 차들을 경험해본 기자로써도 가격적인 측면을 감안해 머리를 회전시켜보면 닛산의 경쟁력이 한국 수입차 시장에서 먼저 성공한 다른 브랜드에 비해 전혀 뒤질 것 없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만 가격 대비 차의 성격과 성능, 구성에서 앞서더라도 치밀한 마케팅과 극진한 고객 관리 없이는 이 난리도 아닌 불경기 속에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닛산 코리아 측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건 그렇고, 아마도 이 추운 겨울을 다 보내기 전에 또다시 한번쯤은 무라노의 우아하고 편안했던 느낌이 그리워 질 것 같은 예감이다. 인피니티 못지않은 퀄리티로 빈틈을 보이지 않는 무라노와 도로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네 주인은 편안하게 잘 모시고 있냐며 녀석의 사이버틱한 앞모습과 눈인사라도 나누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