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000년경 다윗이 여부스 족속의 성읍을 빼앗고 그 이름을 다윗 성, 시온 산성, 예루살렘 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요압과 군사들이 수구를 통하여 올라가서 여부스 족속의 성을 빼앗으므로 요압이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었다(삼하5:8; 대상11:4-9).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33년 동안 예루살렘 성에서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삼하5:4-5). 다윗은 30세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40년을 다스렸으며 70세에 죽어서 이곳 다윗성에 장사되었다(왕상2:10-11). 이후에도 솔로몬, 르호보암 등등 많은 왕들이 다윗성에 장사되었다(왕상11:43; 왕상14:31).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AD 150-235년)에 의하면 다윗왕의 묘가 AD 70년까지 존재하였으나 유대인 제2차 대반란 때인 AD 135년경에 파괴되었다고 한다(행2:29).
다윗성은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와 서쪽으로 중앙(Tyropoeon) 골짜기 사이에 위치하며 크기는 약 12에이커 정도 되었고 동쪽의 경사는 약 60° 정도 되었다. 다윗성에 최초로 요새화된 도시가 세워진 것은 중기 청동기 Ⅱ 시대인 BC 2000년경이며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이다.
구약 시대에는 다윗 성을 살렘(Shalem) (창14:17-20), 예루살렘 성(수10:1), 시온 성(삼하5:7) 이라고 불렀다. 다윗성이 최초의 시온 산이 되는 것이며 현재의 시온산은 시온 문 앞쪽에 있는 산을 AD 1세기경부터 불렀다.
다윗성은 시대에 따라 크기와 위치가 바꾸어지게 되며, 솔로몬 때는 북쪽으로 성전 산까지 성이 확대되고(12헥타르) 히스기야 왕 때에는 북서쪽으로 크게 확대된 면적을 가지게 된다(70헥타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벽은 3차 성벽까지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제 1차 성벽은 하스모니안 시대, 제 2차 성벽은 헤롯 대왕 시대, 제 3차 성벽은 헤롯 아그립바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신・구약을 모두 합해서 예루살렘 성의 크기가 가장 컸던 때는 헤롯 아그립바 때이었다.
※ 다윗성에서 발굴된 유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왕의 지역(Area G)
아히엘의 집
이 집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위에 쓰여진 ‘아히엘’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집을 ‘아히엘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집은 전형적인 사방 구조(A four-room house)를 가진 가옥 형태를 가지고 있다. 아히엘의 집에서 동쪽으로 인장 집(The Bullae House)이 발굴되었으며 약 50개가 넘는 점토 인장들이 발굴되었다. 이 인장은 파피루스 양피지 위에 쓰여진 편지나 기록들을 허락 없이 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 인장의 크기는 지름이 1cm정도 되었다. 인장에 또렷하게 새겨진 이름들은 ‘게달야후 벤 파쉬후르’(바스훌의 아들 그다랴 (렘38:1)), ‘게마르야후 벤 샤판’(사반의 아들 그마랴(렘36:10)), ‘예후쿠알 벤 셀렘야후’(셀레먀의 아들 유갈(렘38:1)) 등이 있다.
이 지역에 있는 불탄 방(Burnt room)에서 수많은 화살촉들이 발굴되었으며 이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파괴할 때 맹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약 18m 정도의 높이가 되는 돌계단 건축물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내에서 철기 시대의 건축물 중에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이다. 왕의 지역 내에서 4개의 돌로 만든 화장실의 변기가 발굴되었으며 이 중의 하나는 솔로몬 왕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 기혼 샘(The Gihon Spring)
기혼 샘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샘은 기혼 샘 하나 밖에 없으며 이 기혼 샘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성읍이 존재할 수 있었다. ‘기혼’이라는 뜻은 ‘솟구쳐 나오다(to burst forth)’라는 의미이며 이 샘 하나만으로도 약 2,500명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 제사장 사독이 기혼 샘에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웠다(왕상1:38-39). 이 샘은 성 밖에 위치했으며 물이 맑고 깨끗하다.
3. 히스기야 터널(Hezkiah's Tunnel)
히스기야 터널
성 밖에 위치한 기혼 샘의 물을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서 성 안쪽에 위치한 실로암 연못으로 흘러들어오게 하였다(대하32:30). 이 터널은 히스기야 왕이 만든 것이며 길이가 약 530m, 수심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약 70cm, 소요 시간은 걸어서 30-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터널은 양쪽으로 바위를 뚫기 시작해서 에스(S)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으며 놀랍게도 양쪽 터널의 오차는 30cm 정도밖에 차이가 안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실로암비문
이 터널이 끝나기 6m 전에 고대 히브리어로 쓰여진 비문이 AD 1880년에 발견되었다. 이 비문의 내용은 양쪽 터널의 일꾼들이 서로의 정과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파내어 오다가 서로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기록한 것이다. 이 실로암 비문은 현재 터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터널은 앗시리아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4. 실로암(The Pool of Siloam)
실로암 연못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실로암 못의 크기는 길이 16m, 넓이 5.4m 정도였다. 실로암 못은 기혼 샘에서 흘러들어온 물의 종착지이며 AD 4세기경인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가 건축되었다. 이 교회는 AD 614년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후로 두 번 다시 재건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셨다. 이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경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눈이 떠졌으며 밝은 눈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요9:1-12).
다윗 왕조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곳
이 외에도 다윗성에는 가나안 시대의 터널, 왕들의 무덤과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던 곳, 제 1 성전 시대의 외벽이 있었던 곳(Area J), 시온 성채, 제 2 성전 시대의 망대, 실로암 망대로 추정되는 곳 등이 위치한다. 이 다윗성에서 다윗은 시편을 기록하였으며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예언이 선포되었고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다윗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로써 예루살렘을 정하고 왕궁과 성벽을 건축하였으며 많은 고난과 변화의 역사를 가지고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할 곳으로 삼으신 곳이 시온산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 땅에서도 매우 중요하였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은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더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다. 땅과 하늘에서 복되고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을 위해서 사랑하고 기도할 때 형통함과 축복이 그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