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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긴칼 차고싶어 만주로 갔지..."
첫부분 인용문은 국제신문 기자출신으로 나중에 청와대에 들어가 교육문화비서관을 지낸 김종신씨(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역임)가 비서관 시절 박정희의 일대기를 쓰면서 그에게 만주로 간 까닭을 물은데 대해 박정희가 내뱉은 말이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그의 개인차원을 넘어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가 만주로 가지 않았다면 그는 군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군인이 되지 않았으면 5.16군사쿠데타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도 어쨌든 달라졌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주행을 결행할 당시 만주는 개척의 땅으로 '희망의 땅'이기도 했다. 당시 젊은 엘리트 가운데는 제국대학을 나와 일본 고등문관시험 대신 만주고등고시를 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 고등문관시험보다는 만주 고등고시가 훨씬 더 대우도 좋은데다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가 졸업한 대구사범학교 출신 원로 교사들은 이와 유사한 증언을 필자에게 한 적이 있다. 당시 교사가 부족했던 만주에서는 조선내 교사들에게도 특혜를 주면서 전근을 올 것을 유인했는데 당시 만주에서는 이들에게 '우대교수'인가 명칭으로 대우를 해줬다고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교사로서 만주로 간 것이 아니라 ,큰칼을 차기 위해, 즉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점이 이들과 다르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군인을 동경했으며, 대구사범 시절에도 교련과목은 항상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런 박정희가 찾아간 곳은 광복군 진영이 아니라 일본군의 괴뢰군대인 만주군이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마치고 성적우수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다시 일본 육사에 편입, 57기로 졸업했다.
어린시절 이후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청년기에는 군국주의의 최첨병인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박정희. 그에게 일본이라는 존재는 그의 전부를 지배하는 '이념'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늘 일본시절, 특히 군인으로 있던 시절의 추억을 잊지못해 그때의 '화려했던' 모습 흉내를 내곤 했다. 그런 편린을 보여주는 기사 한 토막.
"...계엄선포 한달 전 쯤인가(1971년 10월 17일 계엄이 선포됨),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임)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구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의 일본식 창씨개명임)로 정일권 대위(정일권 전총리는 박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선배로 해방당시 만주군 헌병대 대위였음)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중앙일보>,1991.12.24)
이밖에도 박정희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사무라이 영화를 입수해 즐겨 보았으며, 청와대에서 일본식 검도도 즐긴 것으로 소문나 있다. 특히 그는 집권중 정책에서도 일본식 제도를 더러 모방, 반영하기도 했다. 반상회는 일본의 '도나리구미'라는 주민감시제도 같은 것을 본딴 것이고, 지금은 없어진 '국민교육헌장'은 명치시대에 칙령으로 제정된 '교육칙어'를 모방
조선일보 기자출신으로 나중에 청와대 공보비서관, 국회의원을 지낸 선우연(작고)씨는 그의 친형인 선우휘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생전에 박 대통령과 술을 마시며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던 광경을 소개한 바 있다.
"두 분이 술을 드시다 대통령께서 왕년의 대구사범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임자, 아직도 (교육)칙어를 욀 줄 아나?'고 물으셨지죠. 경성사범 출신인 내 형님이 '물론이지요'라며 먼저 외기 시작했어요. 교육칙어는 현재의 국민교육헌장보다 훨씬 긴 문장인데, 형님이 한동안 외면 대통령께서 그 뒷 문장을 받아 외고, 또 다시 형님이 받고 해서 두 분이 끝까지 다 낭송 하시더군요. 40년 이상 지난 뒤에도 그걸 외우고 있다니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일제하 초등학교 교사 양성소인 사범학교는 경성(현 서울), 평양, 대구 등 3곳에 있었음)
나라를 빼앗긴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언 강을 건너 찾아간 '피난의 땅' 만주.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땅을 찾은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최정예 앞잡이인 황군(皇軍)이 되어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고자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어코 '긴칼'도 꿰찼다. 어떤 연유에서건 이같은 경력의 소유자가 해방후 처단되기는커녕 오히려 최고권력자가 된 것은 우리민족으로선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은 중단돼야 한다.
ⓒ정운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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