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 42, 43, 44 조선미술전람회에 네 번 연속 특선
1954 국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1955 예술원 회원
해방 이후 이순신 동상, 이승만 동상, 민영환 동상 등 다수의 동상 제작
● 권력유착의 극치, 이승만 동상
하늘이 남산을 내실 제는
사사로운 소유가 아니었으니,
백성들 모두 바라볼 제
바위와 바위로 덮였어라.
어찌 이곳 남산에다가
화강암 덩어리를 붙여서,
이 가까운 곳에 세워 놓고
서울을 온통 위압케 하였는가?
구리로 부어 만든
스물세 척 커다란 몸,
큰 비용과 공병의 힘
휘둘러가며 이루었네.
스스로 공명한 당의
대두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개돼지를 충동질하여
높은 덕인 듯 찬양케 했네.
이로부터 바람에 마비된
늙은 여유의 동상,
삼 억이나 되는 나랏돈
헛되이 써 버려 말리었네.
(중략)
이는 곧 구리 몸이요
생살로 된 몸이 아니니,
늙은 도적놈을 찾아내라고
우리들 허정에게 외쳤네.
찾아도 잡지 못하자
분한 마음 더욱 뜨거워,
구리 몸을 끌어내려
마음대로 깨뜨렸네.
(생략)
-리가원 <김창숙의 이승만 동상가를 차운하여>
앞의 시는 1957년 8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여든 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세워졌던 동상이 1960년 4․19혁명 직후 철거되고 독재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깨뜨려져 끌려다니던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승만의 동상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신궁이 있었던 서울 남산 중턱에 당시 돈 3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총 높이 25m에, 상 높이만 7m가 되는 엄청나게 큰 규모로 세워졌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각가 윤효중(창씨명 伊東孝重)으로 그는 당시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수도를 임시로 옮긴 직후 진해에 설치하기로 한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작이 경쟁 끝에 그에게 맡겨졌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상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이순신 동상 제작 또한 전란에 처해 있던 때였던 점과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 때문에 일반에게 동상의 위력을 인식시킨 첫 사례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미술계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51년 유네스코가 개최한 국제예술가회의에 문인 대표 김소운(金素雲)과 건축가 대표 김중업(金重業) 등과 함께 미술가 대표로 이탈리아 로마를 들러서 당시 세계적인 거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 1901~1980)와 파치니(Fazzini, 1913~ ), 에밀리오 그레코(Emilio Greco) 등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감화를 받고 돌아온 뒤 대담한 작품을 선보여 당시의 조각계에 새로운 기운을 조성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48년 홍익대에 미술과가 생기면서부터 관여한 이래로 1954년에는 미술학부장이 되었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의 심사위원과 당시 유일한 미술가 단체였던 대한미술협회의 부위원장으로서 실권을 행사한 결과 일반에 미술대학하면 '홍익대'라고 인식되도록 만들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이러한 무리는 결국 국전을 뻘밭의 게싸움으로 만들어 무기 연기되기도 했으며, 서울대에 재직하거나 나온 사람들로 된 또 다른 미술 단체가 생겨 미술계가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불과 서른 여덟의 나이에 1955년 창설된 예술원의 첫 회원으로 뽑히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실은 일본 동경(東京)미술학교 3년 선배인 김경승(金景承)이 1972년에야 예술원 회원이 됐다는 점에 비추어 이 당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실권을 가졌던 가를 알게 해준다.
윤효중이 이승만 동상을 만들고 난 직후 교수직까지 사임하고 창립한 전통 도자기 생산업체에 대통령 이승만이 시찰 나오도록까지 했으니, 그의 정치력과 더불어 그를 '미술계의 대통령'이라 할 만했을 것이다.
이승만 동상을 제작하고, 이승만을 자신의 사업체로 방문하도록 만든 이래 이승만이 물러날 때까지 그의 앞길이 탄탄대로였을 것은 뻔한 일이다. 예술원 회원 자리에 거듭 뽑혔으며, 수원에 설립한 우장춘(禹長春) 기념비 제작을 맡았으며, 중앙대 설립자이며 이승만의 청혼을 거절해 유명한 임영신(任永信)의 동상을 제작해 주는 등 작가로, 교육자로, 사업가로, 예술 행정가로서 가난과 적막으로 고단한 삶을 꾸려갔던 당시 대다수의 미술가들과 달리 영광과 돈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한창때를 보냈다.
이승만이 무너지고 5․16군부 쿠데타로 일어선 박정희(朴正熙) 치하에서도 그는 이전보다 눈에 띄게 수그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갖가지 동상 제작과 미술 단체 일로 부산했다. 5․16군부 쿠데타로 일어선 군부가 집권도 하기 전인 1961년 육군사관학교의 약진탑 제작을 맡은 것을 비롯, 1963년에는 육사 특별 7기 기념탑(국립묘지)을 맡기도 했다. 1964년에는 천도교 교주였던 최수운(崔水雲) 동상(대구) 제작을 의뢰 받아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에 뽑혀 일본에서 열린 국제전에 대표로 참석했다. 죽기 한 해 전인 1966년에는 제 3대 예술원 회원으로 뽑혀 건재를 과시했고, 한국미술협회의 한국 대표로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러다가 50세인 1967년 10월 일본 동경의 게이오 대학병원에서 죽었다.
● 목조각 <천인침>과 <현명>
8․15해방 이후, 특히 이승만 정권 이래의 윤효중을 보면서 의아한 것은 일제 말기에 그가 벌였던 행각과 비슷한 행각을 벌였던 사람들이 8․15직후에 당했던 조처와 어쩌면 그리도 다른가 하는 점이다.
8․15직후 만들어진 미술가 모임에서 그는 조각가 김경승과 더불어 친일 부역한 혐의로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김기창(金基昶),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球)와 함께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거의 모든 미술가들이 망라되어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라고 하는 이 조직은 이들의 친일 부역 혐의가 너무도 짙은 것이었으므로 해방된 정국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까닭에 취해진 조처였다. 이러한 따돌림이 당시 이들에게는 엄청난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따돌림도 곧 미군정과 여기에 발맞추어간 보수 미술가들이 허약한 세력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유야무야함으로 해서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분단 세력의 우위에 따라 오히려 식민지 치하에서의 위치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위에 새로운 권력을 쌓아 나갔다. 더구나 윤효중은 당시의 최고 권력자 이승만과 배재고보 동문이라는 점을 내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비록 분단 상태이기는 하나 초대 정부의 몇 안 되는 주요한 동상 건립 사업은 윤효중이 거의 독식했다. 식민지에서 벗어났으니만치 건립되는 동상들이 주로 항일적인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부역 미술가의 손으로 그 동상이 만들어지는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먼저 세워졌던 이순신의 동상이 그러했고 죽음으로써 망국 현실에 항의했던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동상이 또한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일제하에서 그가 행했던 활동의 일부분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결코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윤효중이 일본 식민지 아래에서 활동한 시기는 대략 1940년대다. 194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목조과를 졸업한 뒤 5년간 펼쳐졌던 활동상은 아주 뚜렷하였다. 일제하 조각계의 초창기를 거의 주도했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출신들은 1925년 졸업한 김복진(金復鎭)을 시작으로 김두일(金斗一), 문석오(文錫五), 김경승, 윤승욱(尹承旭), 김종영(金鐘瑛)에 이어 윤효중, 조규봉(曺圭奉)을 거쳐 1944년 졸업한 박승구(朴勝龜)가 있었다. 윤효중은 그가 졸업하던 해에 죽은 김복진(배재고보를 나왔으며 모교의 교사여서 윤효중의 스승이기도 하다)을 제외하고는 일제하에서 가장 출세(?)한 조각가에 속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도 특이한 분야인 목조각을 전공했다는 점과 무엇보다 대담하고 활달했던 성격, 그리고 그가 바로 근대 시기인 일제하에서 본격적인 첫 조각가인 김복진의 제자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또 사진으로나마 남아 있는 그의 사실풍 동물 조각을 보면, 그의 솜씨는 발군(拔群)이었다.
배재고보 시절인 1936년 『조선일보』가 개최한 전국학생미전에 조각 <자각상>을 출품하여 특선함으로써 신문에 기사화되는 등 주목을 받았다가 졸업하기 2년 전 서울에서 열린 재동경미술협회전에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동물조각을, 그 이듬해에는 총독부가 주최한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물동이를 인 고유 옷차림의 여성상을 역시 나무로 빚어 출품해 입선되었다(현재 개인소장). 같은 해에는 일본 문부성이 연 '황기(皇紀)' 2600년 봉축 기념전'이라는 관전에 역시 목조각으로 여겨지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됨으로써 실력을 인정받는다.
그가 작으나마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목조각을 전공하였던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소조라고 하는 진흙으로 붙여 만들어가는 조각 방법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초창기의 것이었으므로 낯설었고, 작품 또한 여성 누드가 대부분이었던데다 그 양태가 주로 서 있는 형태로 습작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었던데 반하여 그의 작품은 비록 일본의 전통 목조각을 계승한 방법을 쓴 것이기는 하지만 친숙한 소재와 재료를 써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과가 돋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3, 4년 선배인 김경승의 작업들이 대체로 소조 기법에 의한 여성 누드상이나 소년 입상이었던데 반해, 그는 매우 잘 다듬어 찬탄을 자아내게 할 만한 나무로 된 동물상이나 큼직하게 면을 잡아 나가는 고유 옷차림의 나무로 된 여성상이었다.
졸업하던 해인 1941년 두 번째로 조선미술전람회에 내서 특선된 작품은 전해와 같은 소재와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고유 옷차림의 여성상이었다. 또 이듬해인 1942년에는 이 전람회에서 특선(총독상)을 차지했으며, 1943년에는 <천인침(千人針)>을 내 특선인 청덕궁상을 거머쥐게 된다. 이 작품 또한 나무로 만든 고유 옷차림의 여성상으로 천에다 수를 놓고 있는 중년 부인을 새긴 것으로서 <천인침>이란 제목으로 미루어 전선으로 나간 젊은이가 잘 싸우고 돌아오기를 바라며 여러 사람이 한 땀씩 떠주는 일본 고유의 풍습을 새긴 것이다. 지극히 총후(銃後)'적인 주제라고 하겠다.
1944년 마지막이 된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현명(弦鳴)>이라고 하는 제목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역시 고유 옷차림의 여성 목조각상을 출품하여 특선에 뽑힌다. 이로써 그는 모두 네 번 연속 특선된 특선 작가가 된다. 이 작품은 그 직후 총독이 산 듯 총독 관저에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를 그대로 사용했던 대통령 관저 경무대에 있었다. 그후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미국으로 도피했을 때 해방 후 귀국해 기거했던 이화장으로 옮겼다가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됨으로써 오늘날에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한 그 동안의 평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마지막회 미술전람회에 '특선'으로 뽑히기도 한 작품이면서도, 특히 고유 옷차림을 한 여인상이고, 활시위를 당기는 멋진(?)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그 상세한 내용은 모른 채 찬사와 귀중한 작품으로 취급되는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그 동안의 평가를 소개해 보면 "나무를 솜씨있게 깎아 나가면서 주름의 흐름의 조절, 또는 공간을 향하여 발을 내디디는 활달한 기상과 운동감을 강조했다"거나, "능동적이고도 활발한 풍류 의식을 조형화 해내었다는 점에서 정적인 아카데미즘(관학파)풍 미술의 인습적 제작 태도와는 궤를 달리 한다"는 형식적인 면에서부터, "식민지 말기를 장식한 기념비적인 작품의 하나"로 "전통적인 민속놀이의 한 장면인 활쏘기를 매우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목재에 담은 수작"이라는 평을 넘어서 "일제에 대한 문화적인 저항 정신"과 "민족적인 고유성, 이른바 전통적인 풍속을 재확인케 함으로써, 그러한 말살 정책에 대항하려는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평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극찬으로 일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 작품이 만들어졌던 사정과 입상을 결정하게 된 식민 당국의 의도, 이 작품에서 풍기는 작품 의도를 살펴보면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윤효중이 조선미술전람회에 등장했던 1940년대 초에 전쟁 주제나 '총후(銃後)'적인 주제의 작품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들을 소개하면서 순수 예술적인 면모를 내세워서 '주옥같은'이라거나, '감탄을 연발'케 한다는 정도로 소개해서 뒷받침을 했으나 1942년에 들어서만도 응모작 반입 개시를 알리는 기사에서 벌써 '화면마다 전쟁색'이라고 하여 소개하고, 일제 말기인 중반에 가까울수록 '제재마다 결전 양상' '채관보국(彩管報國)의 전당"이라고 하는 등 드러내 놓고 전시동원 체제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이 시기에는 특히 총독의 관람 사실을 보도하면서 '결전 미술을 완상(玩賞)'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달아서 의도를 노골화시키고 있다.
1940년대 초에도 벌써 심사평에서 "시국하 국민 정신을 반영하여 화제 내용으로 유목적(遊牧的)인 것은 자취를 감추고 자숙 긴장하여 실제적인 것이 많다. 또 군사적인 것과 총후 국민 생활에 관한 것 등 시국에 직접 관계되는 것이 많이 출품되었다"는 등으로 분위기를 잡아 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윤효중의 <현명>이 나온 해의 심사 소감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오히려 '과장된 결전색'을 경계하고 있을 정도다(『매일신보』,1944년 5월 30일자). 그 자신 <현명>에 대한 소감을 밝히면서 "시국의 진전에 따라 조선 여성들이 각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자태와 아울러 조선 의복의 미를 재현하려고 힘써 보았다"고 말해 그의 제작 의도가 명백히 식민 당국과 전시 체제에 부응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기사에 의하면 이 당시 그는 모교인 배재중학과 진명고녀의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사실 외에도 이른바 사상범 전향자 감시 및 교양기관인 대화숙(大和塾) 미술료(美術僚)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는 또 <현명>으로 특선했던 해 3월에 열린 전시하 특수 주제의 공모전인 결전미술전에서 <아버지 영령에 빈다>라는 작품으로 1등상에 해당하는 경성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이러한 경력을 통해 일제 말기에 그가 얼마나 일제의 요구에 적극 부응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그의 고유 옷차림의 여성상 <현명>에 대한 평가는 형식적인 면은 빼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 동상 제작에 뛰어들다
그가 일제 말기에 펼쳤던 이러한 활동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하였을까를 생각해보자.
그는 1917년 경기도 서북쪽에 있는 장단군에서 치과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배재고보를 다닌 정도로 봐서는 알려진 바와 같이 가난한 집안 태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학교에서 김복진을 교사로 맞아 조각에 맛붙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각에 대한 의욕에 불을 지른 사건은 졸업하기 한 해 전 앞서 말했던 학생미술전에서 특선에 뽑힌 일이다. 이 일로 그는 마치 '두 어깨에 천사의 날개가 돋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하니 이 사건이 얼마나 그를 고무했는가 하는 점과 그의 성향이 매우 열정적임을 알 수 있다.
김복진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며 윤효중도 그를 무척 따랐던 듯, 조각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로는 김복진의 작업실과 집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교사였던 김복진은 이른바 근대조각의 선구자이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가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3차 검거 사건으로 7년형을 받고 나온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zia)였다. 그런 김복진이었지만 생각과 예술, 그리고 삶이 일치하지 못하는 사례가 제법 있어서 윤효중이 처음으로 출품한 조선미술전람회에 그는 요화(妖花) 배정자(裵貞子)의 전남편이자 이름난 친일파인 박영철(朴榮喆, 1878~1939, 창씨명 多山)의 흉상을 출품해 무감사(無鑑査: 출품시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치지 않는 일)로 입선하기도 하였다.
이 전람회에 동경미술학교의 3년 선배인 김경승도 전해부터 일본인의 흉상을 출품했고(조선 거주 일본인 조각가는 <애국 이원하 옹>이라고 하는 작품을 냈다), 같은 해에는 벌써 시국 순응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인 낫을 들고 생산의 의욕에 가득 찬 것 같은 <목동>을 내 무감사 특선을 수상했다.
말하자면 스승인 김복진과 선배들이 모두 친일적인 작품 태도를 보였으므로 그도 이런 분위기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명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졸업하고 한 해 뒤에는 일본 문부성의 중학미술교원 자격증도 따냈으며 조선미술전람회는 물론 일본의 관전에서도 입선한 굴지의 실력자인 자신이 막상 식민지 태생임으로 해서 받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보상받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스승 김복진의 부인이며 배화여고 교사였던 허하백(許河伯)이 스승의 사망 직후부터 전국 각지의 순회 강연과 집필, 방송, 좌담회 참석 및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이루자는 단체에 들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매우 활발한 활동으로 그는 남달리 안정된 직장과 대화숙에서 제공받은 작업장을 가지고 연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배 권력에 대한 맹종, 출세 성향은 비슷한 상황에서 또다시 발휘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일정 기간의 침묵을 강요당한 뒤에 재빨리 일선으로 복귀해 대학이 서자 곧바로 적극성을 발휘해 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서고 동상 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이를 '따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동상 제작은 거의 토목 공사 같은 것이어서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므로 '사업가'와 같은 수완도 필요했다. 이런 일에 그는 누구보다 적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승만 동상 제작 이전에도 이순신 상 외에 언더우드 상(연세대학교, 1948), 최송설 당상(김천중학교), 석가여래상(원주 보문사), 세종대왕 상(이상 1949)과 이근철 준장상(1953), 충정공 민영환 상(서울 안국동, 1956)과 한국전쟁 후 전국 각지에 수없이 많이 세워진 충혼각들의 공사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커다란 치부를 해서 대저택을 사들이고 젊은 작가들에게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에 대하여 "엄청난 힘을 과시하는 미사일과 같은 위용으로 미술계를 한때 이끌어 왔다"는 찬사도 있다. 또 우리의 전통을 발굴하고 계승하는 일에도 빠르게 착수하여 어는 정도 활약했으나(그 과정에서 장승을 <십자가>라는 제목을 붙여 국전에 냈다가 신부의 항의를 받아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나마의 긍정적인 면도 이승만의 몰락과 함께 그의 부정적인 요소에 가려 사라져 버렸다.
한국전쟁중에 외국에 나가 보고 배운 것을 재빨리 받아들여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섣부른 외국 모방 행태를 낳게 한 부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말년에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가 "좋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쓸쓸한 일이며 일생을 꿈속에서 그저 떠돌다 산 것 같다"고 한 말은 말년에나마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했던 반성이었을까? 그와 친밀했으나 기질이 전혀 달랐던 미술가 정규(鄭奎)가 한 말은 미술가를 비롯한 예술가, 아니 더 나아가서 올바르게 살려는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미술(예술)을 수용하는 사회적인 양식과 여건이 없는 지역에서 미술가가 살 수 있는 길은 극히 가난하게 단조롭게 살던가 그렇지 않으면 미술을 제 나름으로 세월에 맞는 사업으로 바꾸어 일을 꾸미던가, 꾸며놓은 일을 따라다니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윤효중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고 남도 그렇게 인정하듯이 큰 일을 꾸밀 수 있는 미술가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일종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