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저(仁底)'는 너무 똑똑했다. 어린 애가 어찌 저리 총명할 수 있을까. 참 기이한 애다. 여주 사람들은 '인저'를 '기동(奇童-기이한 아이)'이라고 불렀다.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잘 지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웬만한 경전은 전부 달달 외울 정도였다. 열 살 정도 된 어린 애가 이런 한시를 지었다는 게 너무 놀랍다.
紙路長行毛學士 종이 길에는 모학사가 줄곧 지나가고
盃心常在鞠先生 술잔 속에는 국선생이 늘 들어 있네
그 나이에 늘 붓(모학사)을 들고 글쓰기를 즐기고 술(국선생)을 즐겨 마셨다니 너무 조숙했던 모양이다.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수차례 떨어진 걸 보면 시험 과목에는 별 관심이 없고 문학에 심취했던 모양이다. 평생 8000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니 어릴 적부터 시재(詩才)가 남달랐을 것이라 짐작할 만하다.
세 번 내리 과거 시험에 떨어졌다가 네 번째 시험에서는 1등으로 합격한다. 재수, 삼수 내리 떨어졌다가 사수 때 수석 합격이라·····. 기이한 아이, 기동(奇童)이 분명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저’는 ‘규보’로 거듭난다. 네 번째 과거 시험 보러 가는 날 꿈을 꾸었는데 하늘의 별(奎星)이 ‘인저’를 쏘며 '너는 장원 급제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장원 급제를 하자 이름을 아예 '규성이 알려주다'는 뜻의 '규보(奎報)'로 바꿨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과거에 겨우 합격하긴 했지만 관직에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발령이 나지 않아 방 안에 틀어박혀 시를 쓰며 지냈다. 그렇게 보낸 십 년 세월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규보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다. 아버지 대에 들어 집안 형편이 좋아졌고 아버지는 아들 이규보를 높은 관직에 앉히려고 어릴 때부터 자식 교육에 공을 들였다. 그 당시 최고의 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시켰고 따로 개인 교습도 시켰다. 어린 시절 성장기를 보면 이규보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부모님의 출세 지향의 노력 덕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그를 출세시키려고 공을 들일수록 그는 반발심이 커졌던 모양이다. 열아홉 살 한창 나이에 중국의 죽림7현을 모방해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모임을 만들었고 늘상 술에 취해 살았다. 술에 잔뜩 취해 시험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술을 의인화하여 ‘국선생전’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으니 그의 술주정을 대충 알만하다. 이런 그의 젊은 시절을 보면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 고려 사회에 대한 청춘들의 저항의식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칠현설’에 문학 하는 친구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세상 한탄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신정권 때에는 벼슬자리보다 몇 배나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규보도 과거에 급제하고 내리 10여 년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리저리 청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참 불우한 시절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불행은 그를 문인(文人)으로 성장시켰다. 많은 문인들과 어울려 지내며 문학을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나누었다. 어울려 지냈던 친구들 중 이인로, 임춘 등 우리 문학사에 유명한 문인들도 껴있었다.
이 시기 고려는 금나라의 침략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 문인들이 모여 술과 노래만 탐할 수는 없었다. 나라 사정이 그러니 자연스럽게 민족정기에 대한 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동명왕편>(1193)은 그런 의식화 과정에서 태어났다. 고려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기를 이어받아 세운 나라로 만주 일대는 우리 조상의 강역이었는데 이제 북방 오랑캐 여진족이 차지하고 반도 고려까지 넘보니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규보가 태어날 무렵 고려는 여진족 아골타가 만주 일대에 세운 금나라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고려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면서 주종관계는 역전되어 고려가 금의 신하국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무신 정권이 들어서고 도처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으니 그야말로 나라 형편이 엉망이었다. 이규보가 경주에서 일어난 신라 부흥운동(김사미 효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토벌군에 자원해서 나간 것도 고조선 고구려 고려로 계승된 민족정기를 살려야 한다는 그의 민족주의 사관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MBC 드라마 [무신] 이규보
철이 든 건지 지조가 꺾인 건지 권력에 아부하면서 비로소 환로(宦路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갈고 닦고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던 문학적 재능은 그가 출세하는 데 큰 밑천이 된다. 당대 최고 권력자 최충헌이 자기 별장에 정자를 지은 것을 기념하여 여러 문인을 초청해서 시 창작 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이규보의 시가 단연 돋보였고 이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그의 나이 마흔(1207년) 때였다. 그때 그가 쓴 글이 <모정기>이다.
정자는 날개가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 누가 지었겠는가,
우리 진강후(최충헌)의 어짐이로다.
잔치를 배푸는데 술이 샘같이 나오고 잔을 받들어 권하니 객은 천명이로다.
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오니 산천이 변한다 해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라.
계양산 삼림욕장공원 이규보 시비
최충헌의 눈에 들어 관직에 나가게 되지만 외직으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쉰둘 때(1219년)에는 계양도호부 부사로 부임한다. 일 년 정도 계양, 지금의 부평 지역 수령으로 일하면서 인천 지역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그의 호 ‘백운거사’는 부평 바로 옆의 ‘백운’이라는 동네 이름으로 남아있다. 만일사 절에서 읊은 <계양 망해지>, 이규보가 살던 거처를 소재로 한 <자오당기> 등 인천을 소재로 한 작품이 수십 점 된다.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
최충헌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이가 집권하면서 이규보는 개경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이후로 수도 개경에서 중앙 관직 생활을 했다. 그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할 무렵 국제 정세는 격변기를 맞이한다. 그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임직한 1219년에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스칸은 서방 원정에 나섰고 고려 조정을 방문했던 몽고 사신이 귀국하면서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고 결국 몽골은 고려를 침략해 들어온다.
몽골이 침입(1231년)하자 조정에서는 강화 천도 문제로 논란이 벌어진다. 이규보는 최씨 무신 정권의 논설가로 강화 천도를 강력 주장하게 되고 천도 이후에 최씨 정권의 실세가 된다. 강도(강화 수도)는 그의 세상이 되었다. 원나라에 보내는 청탁 글이 몽고군 장수 살리타를 감동시켜 철군하게 했다니 이후 고려 조정은 이규보에게 국서에 관한 일을 전담케 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외교적 위업이라 칭송받았지만 그가 쓴 문서의 내용을 보면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
“만약 귀국에서 우리나라를 어루만져 보존하여 만대에 서로 좋게 지내려면, 이 편협한 땅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이와 같은 일을 덜어 주어, 작은 것을 사랑하고 약한 자를 지탱하여 주는 의리를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해 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 송살리타관인서(送撒里打官人書) 중 -
몽골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유린되고 있을 때 이규보는 강도(수도 강화도)에서 최우 정권의 실력자로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하지만 몽골에 의해 강토가 유린당하고 있는 나라의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수차례 사직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줄곧 병마에 시달리다가 일흔넷에 운명하고 강화에 묻힌다.
강화도 길상면 이규보 사당과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