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을 보고 인물을 보라 3
안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물림종 상제가
눈물을뿌리며 명진에게서 떠나갔다.
상제가 팔려간 뒤로 명진은 기운을 잃고
아무것도하지 못했다.
사람을 나귀 한 마리에 팔다니,
명진은그 생각만 나면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도 상제가떠나가면서 한 말이
명진의 머리 속에 남아윙윙거렸다.
혼자 기를 써봐야 세상은 달라지지않는다던
상제의 말이 명진을 깊은 절망에 빠트렸다.
하기야 명진이 특별히 이런 세상을 바꿔야 한다든지,
어떻게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제 같은 사람과 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답답했을 뿐이었다.
상제가 떠난 뒤 명진은
몇 해가 가도록 마음을 잡지못했다.
그리고 잘 하지도 못하던 술을 가까이 했다.
달빛이 밝으면 달빛이 좋아서,
가을비가 내리면 비에젖어서,
살구꽃이 흩날리면 꽃에 취해서.
명진은아버지가 꾸짖는 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늘 술을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명진이 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중풍으로 누운 늙은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되든 안되든
죽기 전에 과거라도 한번 봐주었으면
원이없겠다는 아버지의 청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명진은 스물이 넘어서야
수원에서 열리는 향시를보러갔다.
거리에는 어디나
상제같이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로붐볐다.
명진은 팔달문 부근의 허름한 객주집에 들었다.
명진은 독방을 청하지 않고 봉놋방에 짐을 풀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고 있을 때
장사꾼인 듯 싶은패거리가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이봐, 김 가야. 난 아주 폭삭했는데,
자넨어떤가?"
" 난 운이 좋았다네. 진천에서 지고 온 대추 닷 말을
곱절로 이문을 남겼지. 이것 보게."
김 가라는 장사꾼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보였다.
그는 한차례 빙 돌리면서 전대를 내보이고는
이내 허리춤에 매달았다.
"자넨 왜 폭삭했다는 건가?"
"젠장, 내가 잉어 한 이십여 마리를
이고지고 오지않았겠는가.
제기랄, 수원에는 잉어가 왜 그리 흔해빠졌는지…"
"그걸 몰랐나? 여기서 한양이 멀지 않으니
진상하는잉어를 모두 여기서 기른다네.
그래야 죽지 않은싱싱한 잉어를
대궐까지 갖다바칠 것 아닌가.
그러니이곳에 잉어를 기르는 양어장이 흔할 수밖에.
쯧쯧쯧."
"하이고, 내가 그걸 무슨 재주로 알았것는가.
우리공주에서는 금싸라기보다 더 귀한 것이라서
응당여기도 그러려니 하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서
스무 마리나 샀는데…
여기쯤 오면 더 비싼값을 받을 수 있으려니 했건만…
잉어가 다 죽어가서헐값에라도 팔아야 하는데…
애고 아까워라."
장사꾼들은 국밥을 앞에 놓고 후루룩 마셔대며
손해본 사연, 횡재한 사연을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명진은 장사꾼들이 하는 얘기에 넋을 잃고
귀를기울였다.
여기저기 고을 이름이 튀어나오고,
그때마다 특산물 이름이 나왔다
뭐는 어디가 비싸고,
어디에서는 싸다는 얘기가 거침없이 줄줄 나왔다.
다음날 명진은 저자로 나가 보았다.
엊저녁장사꾼들의 얘기에 흥미가 당긴 때문이었다.
코 앞에닥친 향시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명진은 시장을꼼꼼하게 훑고 다녔다.
그리고 이것저것 가격이며 산지 따위를 물어보았다.
워낙 물건값에 어두워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명진은모든 게 흥미로웠다.
마늘이나 인삼 따위의 값이
용인이나 안성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물산들은 대부분 장사꾼들이
등에 지고 다니는것이었다.
그래서 명진은 달구지를 써서 대규모로옮긴다면
웬만한 논 농사보다 나을 성싶었다.
게다가저자의 물건이라는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전국의 산지와 물산을 파악하고
물량을 잘 조절한다면
얼마든지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진은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크긴 크다는생각을 했다.
용인에 살면서는 흉년이면 흉년인가 보다 해서
덜 먹고 덜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내 고장이 흉년이면
온 세상이 다 흉년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풍년이들 때도 명진네는 그저 날이면 날마다
먹어없애느라고 애를 썼고
그래도 남아 썩을 것 같으면
장사꾼을 불러 헐값에라도 팔거나
빈민 구휼이랍시고
소작 부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장사꾼들의 얘기로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지방에서는어느 작물이 흉작인데
어디에서는 풍작이었다.
고장마다 사정이 영 다른 것이었다.
명진은 그 넓은 세상의 여러 물산을 헤아려보았다.
모자란 건 많은 데서 가져오고,
많은 것은 모자란데로 보낼 수가 있지 않은가.
그 일을 누가 할것인가.
그렇게 큰일을 봇짐장수들에게 맡길 수야없지 않은가.
그때 명진은 처음으로 장사를 해야겠다는 포부를품었다.
과거를 어떻게 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명진은 장사에만 정신을 쏟다가
용인으로 돌아왔다.
명진은 용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용인의특산물과,
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용인에서는 나지않는 것들,
즉 소금이나 생선 같은 것들을 조사하고다녔다.
물론 아버지는 명진이 용인의 선비들과어울려
시나 읊으러 다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일 년 동안은
경기도와 충청도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러고 다니면서 명진은
이들내륙 지방의 소금값이 턱없이 비싸고,
또 한양에서는몇 배나 비싼 값에 팔리는
마늘이나 인삼이 용인에서는 헐값에 팔려
농사짓는 사람들이
겨우 입에풀칠이나 할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때마침 아버지가 오랜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떴다.
혈육으로서 슬프지 않을 리야 없었다.
그렇지만덕분에
명진은 오래도록 생각만 해오던
장사를 시작할수 있었다.
"시작은 그런 뜻으로 했소만
결국은 내 주머니를채운 꼴이 되고 말았소이다."
안 진사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마치면서
씁쓸하게웃었다.
그러나 지함은 안 진사가 결코
자기 주머니만채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건 동네에 들어오면서 본
마을의 상(象)에서 이미 알아차린 일이었다.
"어쩌면 그때 생각보다 더 큰 것을 보신 것이아닌가요?"
지함은 두 손으로 안 진사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침침한 방 안 가득 그윽한 술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안 진사는 껄껄 웃으며 지함의 잔을 받아 들었다.
깊은 뱃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안 진사의 독특한웃음소리는
생긴 모습처럼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힘이있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구려.
더 큰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롭게 깨달은 것은 있소.
상제 그이의말대로였소.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토록 온화하던 눈빛이 어쩌면 이렇게 일순간에
매서워질 수 있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안 진사의눈빛은 가을밤 막 떠오른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좀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었소.
세상을바꾸어 보려는 생각이오.
처음에는 장사를 때려치우고
한양으로 가서 성균관을 들어가든지
대과를 볼까생각도 했지요.
그러나 차츰 장사의 폭을 넓히면서
세상을 바꾸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를 휘어잡는것이란 생각이 듭디다.
이건 아직도 먼 훗날의 가정일테지만
한번 생각해 보시오.
상놈들이 돈을 두둑히 번다면 어찌 되겠소.
상놈들이 양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양반이무서워서가 아니오.
목숨줄이 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양반들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부쳐 먹을 땅을 한뼘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아무도 양반을대접하지 않게 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위에서
세상을 개혁하려 하지만
나는 아래서부터 바꾸기로 한것이지요."
"세상이 바뀌리라 믿으십니까?"
그건 안 진사에게만 묻는 말이 아니라
지함자신에게도 묻는 말이었다.
화담 계곡에서 막막한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지함은 알지 못할 힘에 짓눌렸다.
그리고 인간의
왜소함에 끝없이 좌절하곤 했다.
한 인간의 힘으로
과연 이 복잡한 세상을 바꿀 수있는 것인가?
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개나 소와 다를 바없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간이
이거대한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그것이진정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러는 이 선비는 왜 벼슬을 마다하고
떠돌고있습니까?"
"제 견문이 얕은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벼슬을 마다하는 것은
그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지요."
"나는 믿소.
언젠가 이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것이오.
보시오. 세상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지 않소?
고작해야 육십 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그변화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나,
물이 끊임없이흐르듯 인간 세상도 변하고 있소."
"어떻게 변한단 말씀입니까?"
"보시오. 고려 왕조도 조선 왕조도
마치 자신들이세상을 바꿔온 양 얘기하오
그러나 왕조가 대체
세상의 변화에 무슨 일을 했소?
권력을 잡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을 뿐이오.
왕조는 바뀌어도 백성들이 살아가는 꼴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소."
환청일까.
지함의 귀에 명세의 음성이 낭랑히 들려오고있었다.
"보게나. 왕조는 바뀌었어도
백성들은 똑같이살아가고 있네.
그래서 사관은 왕에게가 아니라
백성앞에 진실을 기록해야 하는 법일세."
지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온화한 얼굴로자신을 바라보는 안 진사와
그윽한 술향기,
어느 틈으론지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불빛뿐이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아렷한 추억이
봄볕 물들은먼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올랐다.
명세, 민이…
가슴을 쥐어뜯던 처절한 고통도이제는 아련해지고
남은 건 막막한 그리움뿐이었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가는가.
남은 사람은 또 남겨진대로 흘러가는가.
봄밤의 정취 탓일까,
가슴이 미어질듯 온갖 상념이
지함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백성들이 살아가는 이치가 뭐겠소?
모든 고통은먹고 사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오
백성들의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첫번째 일이오."
지함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 진사의 열띤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고집 센 안명세나, 안 진사
모두 같은안씨였다.
지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 앞에아른거리는
민이의 고집 센 얼굴을 털어버리기위함이었다.
안진사는 몇 시간째 술을 마시면서도
자세 하나흐트리지 않고 갈수록 열변을 토했다.
지함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새삼스레 여몄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외다.
허나 의심하진않소.
전국 방방곡곡
내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거의 없을 거외다.
발이 부르트도록 천지를뛰어다니면서
물산의 흐름을 살피고 지역마다 다른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있소이다.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발로 직접 뛰면서 생긴 믿음이오.
전국 유람을 하는 중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사람들,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살아가는지 보기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사람들만을 보아서는 안될 것이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입고 살아가는지,
경제가 어떻게흘러가는지를 보시오.
금산에서 인삼이 나고,
한산의모시가 유명하고,
전주에서는 한지가 많이 나오.
이천에서는 좋은 도자기가 많이 나고,
강진에서는백자가 나지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저절로나는 것이 아니라
땅을 보아 나는 것이오.
물산도 이럴진대 사람인들 안 그렇겠소?
그 땅을 보면 인물도볼 수 있을 것이오.
거기에 아마도
이 선비가 찾는답이 있을 거외다."